마법사의 실험체 (9)

 

 

 

 

“네 소원을 들어주마.”


“……느닷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말 그대로,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단 거야.”


어느 날의 아침, 헤인킬은 자고 일어난 릴리트에게 말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사회통념상 문제가 되지 않을 소원만 된다.”

“꽤 제한이 많네요. 그러면……데이트라도 하실래요?”


“산책 말이냐?”

“데이트 말이에요. 그 여자랑 했잖아요.”


나도 별로 하고 싶진 않았어. 헤인킬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후딱 준비해라.”


“네에.”


릴리트는 세수를 하면서도 대체 느닷없이 그가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말했는지 궁금했다.

 

또 무슨 책에서 나온 글귀라도 읽고 감명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오두막을 나와 마을로 향했다.

 

“갑자기 제 소원을 왜 들어주겠다고 한 거예요?”


“별 거 아니다. 그냥 심심했거든.”


“흐음……너무 의심하진 않을게요. 어쨌든 데이트니까요!”


“산책이라니까.”


그 날은 평소보다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녔고, 마을 곳곳에 깃발이 걸려있었다.

 

“어라,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아- 생각해보니 이 시기엔 풍어제를 했군. 근데 넌 여기 살면서도 몰랐어?”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시면서…….”


그것도 그렇군. 헤인킬은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후회했다.

 

“오늘은 기분이다, 뭔가 사고 싶은 게 있어?”


“사고 싶은 거라…….”


릴리트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손에 와프루를 들고 왔다.

 

“자, 여기요!”


“와프루? 이건 왜?”


“그냥 받으세요. 자, 딸기 크림맛.”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사준 적이 있었나? 헤인킬이 와프루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참 애들이나 좋아할 맛이었다.

 

“맛있죠?”


“우유가 덜 신선한 것인가, 약간 비린 맛이 나는군. 아니면 다른 걸 섞었나?”


“그냥 맛있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요?”

“하, 이 헤인킬 님이 그리 쉽게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나?”


하여간……릴리트가 그에게 팔짱을 꼈다.

 

“뭐냐 이건.”


“팔짱이요.”


“그러니까 이걸 왜 하냐고.”

“선생님은 제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게 하는 거예요.”


별 시답잖은 짓을……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굳이 떨쳐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축제 구경을 했다.

 

어부들이 각자 잡아온 물고기를 구경시켜줬는데, 그 중 가장 크고 귀한 물고기를

 

잡은 사람은 그 해의 주인공으로서 온갖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침 광장에 모여 사람들이 물고기 자랑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와, 물고기가 엄청 크네요!”


“크긴 큰데 맛은 어떨지……응? 동전 주머니는 왜 꺼내?”


“사려고요! 저도 경매해보고 싶었어요!”


별 걸 다 한다. 릴리트가 경매장으로 달려가, 어느새 커다란 물고기를 받아왔다.

 

“짠!”


“……그래서 그걸 들고 데이트를 할 셈이냐?”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아참, 이 아이의 이름은 루크마이어에요!”


먹을 거 아니었어? 그나저나 꼭 무슨 농사를 좋아하는 기사 같은 이름이었다.

 

“이제 뭘 하고 싶어?”


“음……잘 모르겠어요. 일단 조금 더 다녀볼까요?”


릴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두 사람은 그 기세로 술집까지 갔다. 풍어제를 하고 있어서인가 평소보다 떠들썩하고

 

사람이 많았다. 벌써 술에 취해 바닥에 뻗어있는 어부들도 보였다.

 

“술이라……알코올과 물로 만든 음료 따위를 왜 마시는지 모르겠군.”


“전 마셔보고 싶어요! 마셔도 돼요?”

 

“취하진 마라. 너랑 너의 생선을 업고 집에 가긴 싫으니.”


“만세!”


릴리트가 자리를 잡고선, 종업원에게 이 가게에 있는 술을 종류별로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그 부탁대로 온갖 종류의 술을 들고 와 테이블에 놓았다.

 

“이걸 다 마시려고?”


“다 마실 거예요! 헤헤, 이건 무슨 맛이려나…….”


릴리트가 술잔을 들이켰다. 동시에 바닥에 대고 구역질을 했다.

 

“웩, 으에에엑……! 이, 이게 무슨 맛이야!”


“어유주로군. 생선 기름과 술을 섞은 거다만, 너한텐 좀 비리겠지.”


“사람들은 왜 이런 걸 돈 주고 마시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그 때, 헤인킬은 주위의 시선을 느꼈다.

 

마을 주민들이 릴리트와 헤인킬을 훔쳐보고 있었다. 

 

“형씨, 꽤 좋은 여자랑 술을 마시네?”


술에 취한 어부가 다가와 말했다. 헤인킬은 혀를 찼다.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지?”


“아니……그냥 궁금해서 말이야. 우리 마을에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있었나?”


“있었지. 마을을 떠돌아다니던 그 서큐버스를 기억하지 못하나?”


“그거? 잠깐, 그 괴물이 얘라고……?”


어부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너희가 그렇게 못 살게 굴던 놈이 이렇게 자랐지. 나 원, 한 마디 해줘라.”

“……됐어요. 이제 옛날 일이에요.”


“고작해야 몇 달밖에 안 지났는데 뭘. 엿 먹어라, 병신들아!”


헤인킬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욕을 퍼부었지만, 술에 취한 어부들은 듣지 못했다.

 

“어……으음.”

 

말을 걸었던 어부는 자리로 돌아갔다. 

 

“변하셨네요, 선생님.”

“응? 뭐가.”


“옛날보다 밝아지신 것 같아서요. 다행이네요.”

“난 변하지 않아. 변한 건 세상이다, 내가 아니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한참 뒤, 두 사람은 테이블에 있던 술을 모조리 마시고선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또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귀중한 하루를 낭비해버렸군.”


“즐겼으니 낭비한 게 아니에요. 잠깐 쉬었다 가죠.”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노을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노을은 붉으면서도 약간은 푸르렀다. 참으로 묘한 색이었다.


“릴리트, 네 소원은 뭐지?”


“제 소원이요? 음……그냥 이대로 쭉 지내는 거요.”


“소박하구나, 너도.”


“그럼 영원히 선생님 곁에 있는 걸로 할게요.”


바보 같긴. 헤인킬이 벤치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다만, 질문해도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약속할게요.”


“만약 내가 없어지면, 너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약속 취소해도 돼요?”

“안 돼, 멍청아.”


릴리트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빌어먹게 불행했어요. 정말 빌어먹게 말이죠.”

“알아.”


“세상 모든 불행을 다 짊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죠.”


이빨이 뽑히고, 눈을 잃고, 매일 개처럼 얻어맞으며 살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사람들한테 화도 안 나요. 오히려 지금까지 불행했던 건

 

전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불행했기에, 지금의 행복을

 

더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거라고요. 저는……정말, 정말 행복해요.”

 

“그러냐.”


헤인킬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선생님이 없어지면, 저도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과장이 심한데.”

“사실이에요. 선생님이 없는 삶에 의미 따윈 없으니까.”

 

릴리트가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제 소원은 이미 이뤄졌어요. 소원 그 이상의 것을 받아버렸죠. 그러니……언젠가

 

제가 선생님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으며 좋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노을이 진다. 그리고 곧, 밤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손을 잡고 있었다.

 

다신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

 

 

 

 

 

 

 

 

 

풍어제 전날.

 

부엉이 우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헤인킬은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하늘에서 크로로가 내려왔다.

 

“왔나.”


“왔지! 뭐부터 듣고 싶어?”


“아무거나 상관없다.”


“세상 소식부터 들려줄까? 어떤 검사가 혼자서 1,000명을 베어버렸대. 그것도 한 시간 만에.”

 

“말세로군. 그런 짓을 한 이유가 뭔데?”


“나도 몰라. 무슨 마검이라는 걸 쓰는데 엄청 강한 모양이야.”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때론 상식을 넘어선 괴물들도 나타났다.

 

그러니 천 명을 베어버린 검사가 나타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슨 주사위를 들고 다니는 노인 소문도 들었는데…….”


“응? 무슨 주사위의 예언자라고 하는 늙은이 말이냐?”


“알고 있네?”

“얼마 전에 만났다. 흐음, 그냥 미치광이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온갖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 이상한 말을 하고 사라진다고 들었어. 대체 누굴까?”


“주사위를 굴리는 멍청이지.”

 

오늘은 별로 중요한 소식이 없는 모양이다. 그가 일어서자, 크로로가 말했다.

 

“대주교 한스가 여기 온다고 했어.”


“……! 성모 교단의 한스 말이냐?”


“맞아, 그 사람.”


헤인킬의 표정이 한 순간에 굳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 땐 이야기가 다르다.

 

“언제?”


“몇 주 뒤에 여기 상륙할 거라고 들었어. 어쩔 거야?”


“뭘 어쩔 방법이 있나.”


신성 성모 교단의 대주교, 한스 빌리버스 4세.

 

세상엔 상식을 초월한 괴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남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설마 날 노리고 오는 건가? 그런 거물이?”


“거기까진 나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내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겠지.”


도망쳐봤자 시간을 끄는 게 한계다. 

 

그런 괴물이 쫓아오기 시작하면 멀리 도망치기란 힘들었다. 

 

게다가 그 성모 교단의 정보력과 재력은 어지간한 국가와 맞먹었다.

 

“우선 나타니엘의 치료를 얼른 끝내야겠군. 그 뒤엔……젠장.”


“불멸 인자는 어쩌고?”


“거의 완성됐어. 다만 실험에선 아직 불완전했다.”


불멸 인자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구성이었다.

 

마력과 육체의 재생을 영구히 유지해야 하거늘 그 과정에서 생긴 손실을 메꾸질 못해

 

도중에 재생이 끝났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이것저것 시험해봤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게 뭔지, 그로선 도통 알 수 없었다.

 

“조만간 완성할 수 있겠지만……시간이 부족하군.”


“다 버리고 도망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 상대는 그 대주교다. 어디로 도망치든 지옥 끝까지 쫓아오겠지.”


노리는 건 아마도 불멸 인자. 하지만 그게 없어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헤인킬을 붙잡으면 그만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불멸 인자를 써봤자, 죽지 않는 실험체로 전락할 뿐.

 

“그래……그럼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크로로.”


“거래는 끝난 거야?”

“죽은 자와 거래할 순 없을 테니 말이지. 대신, 부탁이 있다. 의뢰라고 해둘까?”


그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냈다.

 

“400파온이다. 받아.”


“이건 왜?”


“때가 되면 신호를 주마. 당분간은 이 근방에서 대기해.”


“그러니까 왜?”


“릴리트를 부탁하겠단 뜻이야.”


크로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건 유언이다.

 

“먹여 살리란 말까진 안 해. 이젠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을 거다.”


“설마 댁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뭘, 나도 나이를 먹어서 변한 모양이지. 그 땐 릴리트를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가라.

 

그 뒤엔……그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크로로가 말없이 주머니를 낚아채 가방에 넣었다.

 

“그 아이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아무것도. 그래도 하나 말을 남기자면…….”


그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달은 보이지 않았다.

 

“멋대로 살면 된다고 전해줘.”

 

 

 

 

 

 

 

 

 

 

 


 

대략 12편 내외에서 결말을 볼 수 있을 듯

해피엔딩이 아닌 것에 변명하자면 처음부터 내 구상에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계획이

없었다. 이미 복선부터 떡밥까지 다 뿌려놔서 틀기엔 너무 늦었다 이거임

그래도 엔딩을 내주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휴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