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이야기 시리즈>

벽람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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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1

학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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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마스

1화

센카와 치히로



제 아침은 좀 빠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빨라졌어요


사실은 아직 조금 더 잘 수 있었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 자명종이 울리내요


시계를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쭉 펴면서 하품을 합니다


자, 오늘도 파이팅


저는 지금부터 만날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





자주 다니던 길을 따라

불이 켜지지 않은 사무실 문을 앞에 두고

손거울로 저의 얼굴을 관찰합니다


화장이 이상하잖아

머리는 가지런한가

몸가짐은 괜찮은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오래 걸릴지언정 지루하지 않고, 즐겁습니다


몇 번의 확인 끝에,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한 사무실에 혼자 서 있는 

그가 저만을 위한 인사를 해주네요


이때가 저의 즐거움이자, 저의 행복


그리고 저만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옆 데스크에 앉아 상황을 지켜봅니다

또 질리지 않은 지,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거 힘들면, 담당 아이돌을 바꾸면 될 텐데


...라고 할까, 바꾸어 줬음 하네요



그의 담당 아이돌...... 아냐 씨의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속이 불온해지는 저였습니다


아, 빨리 바꿔줬음 좋겠는데




"아침부터 힘들진 않으시나요?"


"아뇨, 괜찮아요"



쓴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은

분명 예전에 비하면, 건강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운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법


제가 옆에서 잘 지켜봐야 겠어요



"그렇다면 잘됐네요...... 이것 드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에너지 음료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자, 천천히 마셔주었다


이런 에너지 음료에 의존할 바에

공부 같은거 하지 말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주면 안심일텐데



"치히로 씨는 오늘도 빠르네요"


"저보다 일찍 오시면서, 빈정거리는 소리로 밖에 안들리는걸요"


"빈정거리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거에요"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그와의 실없는 잡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선, 아냐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내요

하지만 오늘의 즐거움은 또 있습니다



"약속 기억나시죠?"


"아 술 약속 말이죠? 기대할게요"


"네, 아 가게는 저번에 마셨던 곳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약속했던 술 마시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와의 휴식

후훗, 오늘이 기다려지내요



"아, 맞다

오늘 일정말인데요"


그의 공부를 방해하면서, 나의 일에 열중하게 만든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나와 얘기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지금은 이것을 즐기면서

어떻게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머릿속에 채우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나였다





*
 




일이 시작된 지 벌써 몇 시간

옆자리에 있던 프로듀서가 떠나니 몹시 지루해졌다


그래도 일은 일


외로움을 느끼며, 일을 소화해내고 있으면, 사무실이 열렸다



"돌아왔어"


"어서 오세요, 사장님"



우리의 상사인, 사장님이 영업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헐렁한 양복을 입은 채

소파에 앉으면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사장님


저는 그런 사장님께 시원한 보리차를 내놓자

'눈치가 빠르네'라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아, 오랜만에 영업을 하니까 피곤해"


"요즘 그도 아냐 씨만 전담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제 새로운 사람을 고용해야 할 것 같아"


"그런가요?"


그와 아냐 씨의 이름을 써서 그런지, 사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보리차를 한 입 모금더니, 심각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그래서, 요전 이야기인데

그와 아냐 양이 친해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야?"


"네"


거짓이길 기대했는지

사장님은 슬픈 눈빛으로 보리차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유감이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서 그의 담당 아이돌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아냐 양은 아직 데뷔하지 않았잖아

그와 같은 우수한 인물의 도움이 필요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스캔들이 나버리면..."


"그래, 생각해 두기로 하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문득 주위의 모습을 둘러보았습니다


새로운 벽지에 둘러싸인 방에 놓여진 것은

모두 최근 구입한 신품의 물건들이였습니다



"새롭게 사무실을 꾸몄음에도, 문제가 많네"


"글쎄요"


"그도 실력은 괜찮은데..."


"이전 직장에서도 다양한 아이돌을 프로듀싱 하셨잖아요"


".....정말이지, 그는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거야?"


"뭐, 그게 프로듀서의 좋은 면 아닐까요?"



좋은 면이자, 좋지 않기도 한 면


남들이 그를 좋아하는 탓에, 나는 항상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금도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불안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지금은 지금대로 일단락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알았어, 그 건에 대해서는 생각해 두지"


몇 초 동안 심사숙고하고 나온 대답은, 제가 원하는 것이였습니다




"잘 됐네요, 이제 근심거리가 또 사라진거 같아요"


저는 기쁜 나머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말았습니다



"얘기를 바꿔서, 그녀들을 만나고 왔어"


"그녀들.........?"


누구 말하는 거지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프로듀서 밖에 없었기에, 딱히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에 맡았던 아이돌 유닛들 말이야"


"......아, 무슨 말을 들었나요?"


"아주 형편없었어"


사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보리차를 가볍게 입에 머금었다


나는 빈 컵에 새 보리차를 끓이면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하고,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직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

또 도둑 소리를 듣고 말았지"


"그건......"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네요

아무래도, 그들의 원한은 아무래도 없어질 것 같지 않을 것 같아요



"그가 와준 것은 그의 의지인데... 난처한 일이야"


"그녀들 맘대로 생각하는 거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치히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 그리고 싫은 이야기만 해서 미안해

이번에 좋은 건수를 물어왔어"


"정말요!?'


사장님과 업무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아이돌들에게 어떻게 할당할 지 메모해 갔습니다


프로듀서님도 열심히 하고 계시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겠죠?






*
 




일을 마치고 컴퓨터를 떠나 몸을 가볍게 폈다


자, 즐거운 시간


휴대폰으로 방금 온 문자를 보면

아무래도 그는 아냐 씨를 보내고 오느라

늦을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알겠어요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고

문자를 보내고, 준비를 갖춰야 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저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을 말하면 곤란한 표정을 지어 줄까요?


이거 참 기대되네요


즐거움을 앞에 두고 고조되는 기분을 억누르지 못했는지

콧노래가 아주 그냥 절로 나오네요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걸어가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약속 장소는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는, 작은 선술집


가게 앞에서

콧노래를 계속하면서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자

그의 문자가 와있었습니다


거의 다 왔다고, 보냈내요


이것은 즐거움이 거의 왔다는 말로도 들렸습니다


억누를 수 없는 미소를 느끼면서, 콧노래를 이어나가다가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었네요"



달려와서 그런지

땀을 조금 흘리면서 저에게 고개를 숙여주는

성실한 프로듀서 씨가 와주었습니다


천천히 와주어도 괜찮을텐데


손수건을 꺼내, 그의 땀을 닦아 나갔어요


"여자를 기다리게 하시다니"


"허허, 죄송합니다"


왠지 곤란한 얼굴의 프로듀서도 나쁘지 않은 걸?


저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벌이에요"


"벌이라니...."


"몸가짐은 단정해야 하는 거에요"


천천히 부드러운 얼굴을 닦고 가니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내쉬는 듯한 얼굴이 되어있었습니다


아, 그렇게 난처한 얼굴은 하지 말아주세요

흐음... 근데 그런 얼굴도 저는 너무 좋은 걸

사랑스러운 얼굴을 닦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럼, 갈까요?"


얼굴을 붉이는 것을 감추도록, 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잡은 채, 가게 안으로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실없는 잡담


대화중 중간중간 아이돌 얘기를 하셨지만

업무 이야기를 하는 걸로 치고, 용서해드리기로 하죠


하지만, 아냐 씨의 이야기는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

아냐 씨의 이야길 하지 않는 거 있죠


지난번 일을 신경쓰고 있는 건가?


아니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걸까


저로서는 그녀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어요

그는 아이돌에게 거릴껏없이 대하기 때문에

분명 아냐 씨에게도 뭔가를 품고 있을 거에요


연애는 아니겠지만, 정확히 뭔지...

확인해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원 분으로부터,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시계를 보니, 곧 바늘이 12시 정각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만 끝낼까요?"


프로듀서 씨는 취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만 끝내자니, 여기서 끝내면 아쉽죠


"프로듀서 씨, 저 아직 많이 못 마셨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후훗, 가끔은 집에서 술을 마시는거 어때요?"


"집에서 마시다뇨......"


"저도 프로듀서 씨도 내일은 쉬는 날인데, 괜찮잖아요"


"......정말 제멋대로라니까요"


그는 포기했는지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뭐, 가끔은 괜찮지만"


"프로듀서 씨는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 상냥함이 너무 좋아요

저는 술집에서 일어나 그의 곁을 따라갔습니다


많이 취했는지, 발걸음이 불안하네요

그래서 저는 그의 팔을 껴안았습니다



"치...치히로 씨!?"


"가끔은...... 좋잖아요"


".....그렇게 취했으면, 그냥 돌아가시죠"


"프로듀서 씨 집에서 쉬면 되잖아요"


".......정말로, 치히로 씨는 이길 수가 없네요"


"프로듀서 씨도 다르지 않잖아요"




행복해

그와 이렇게 달라붙을 수 있다니

정신이 이 행복을 못 견디고 폭발해버릴 것 같아

그의 심장소리는 매우 거친 소리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걸까


둘이서 사이좋게 가게 안을 나와, 도로를 걸어갔습니다


뜨거운 몸에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저의 뜨거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어요


그도 저와 같은 심정인지

제 얼굴을 보지 않고, 똑바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저에게 무관심한 것도 재미없으니

가볍게 얘기나 나눠볼까요?




"프로듀서 씨 집에 가는 거 오랜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프로듀서 씨 집에 간 지, 얼마나 됐지?

최근에는 전혀 가지 않았고...... 그래


"프로듀서 씨, 이사를 도와드린 게 마지막이였나요?"


"아, 그러보니 그렇네요"


"그렇다는 것은, 한 일년?"


"예전엔 많이 오셨었죠"


"그런가요?"


그렇구나.... 1년간은 아무일도 없었어

갑자기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최근 1년간 남에게 프로듀서를 뺏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내가 그의 집에 가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항상 술 먹을 때마다, 그의 집에 들이닥쳤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했네


왜 그랬지?


그래... 생각났어



그를 좋아하게 되고, 조금 지나서...

그 개년들이 프로듀서한테 다가와서 그래...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프로듀서 원체 체력이 건장한 편인지,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했다


대체 왜 프로듀서와 나의 사이를 방해하는 걸까?

아냐 씨...... 이젠 정말로 곤란한 걸



"...치히로 씨"


"무슨 일 있어요?"



머릿속에 가득했던 고민이 한 마디에 날아갔다


"저, 팔이 아픈데요"


"후훗, 취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


그는 쑥스러운지 내게 시선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거 너무 쓸쓸하네요, 프로듀서 씨



"프로듀서 씨, 지금 행복하세요?"


아무 생각없이 입에서 나와버린 말


아니,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하지만 답을 알고 있었기에, 안 물어봤을 뿐이였다



"...행복해요"


"이직해서 예전 아이돌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그런가요?"


전 걸음을 멈췄어요

이유는 간단

옆에 있던 그가 멈췄으니까요


그는 후회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괴로운 얼굴이였죠

하지만...... 그런 얼굴도 나쁘지 않네요



"......치히로 씨는 왜 저를 사무실로 초대하셨나요?"


"후훗, 전에도 말했잖아요"


울 것 같은 눈동자에 비치는 내 얼굴

프로듀서 씨, 당신을 돕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당신의 눈동자에 계속 비치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





그의 걸음을 재촉하고 나서

괴로운 이야기를 피하고, 잡담을 해 나갔습니다


잡담을 나누며, 저는 머릿속으로 그와의 추억을 떠올렸어요




그를 만난 곳은 직장

새 프로듀서로 들어온 그를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어요

대형 프로덕션이였던 곳이였기에

프로듀서가 들어오는 것은 드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조금씩 친해져 갔습니다


처음엔 시시한 잡담밖에 하지 않았지만

점차 독립해서 아이돌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조금 쓸쓸했지만, 기쁘기도 했지요

이때부터 둘이서 마실 기회가 생겨났으니까요


매일매일을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아이돌 프로듀싱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고

아이돌들이 그에게 과도한 스킨십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날에도, 프로듀서 씨에게 술을 권하자

갑자기 울먹거리는 얼굴을 보고

그의 집까지 데려가는 동안

그를 지켜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술도 자주 마시고

일 얘기도 같이 하고

그리고 항상 집에서 우는, 그를 달래고...

사랑스러운 동생 같았던 그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 날이 길게 계속되면서

지금의 사장에게 스카웃 되고...

동시에 이 남자도 같이 데려왔다


프로듀서 씨는 내가 없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





걸어서 수십 분

우리는 큰 아파트에 도착했다


"조금 지저분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치고는 방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청소한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안내된 테이블에 앉아, 맞은 편에 앉으면서

그와 함께 물을 마셨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네요"


"그런가요?"


거실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 외엔 두지 않았다


소파, TV, 탁자, 컴퓨터...

생활에 필요 없는 것 정도밖에 없는 방구석에 있는

한 상자가 굉장히 신경쓰였다


"뭐에요? 저 상자는"


둘 곳이 마땅치 않았는지

방구석에 박혀있는 작은 상자에 눈이 가버렸다


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전 사무실 때, 아이돌들에 관한 것을..."


"허, 그래요?"


그런거 버리면 될 텐데

대놓고 말하고 싶지만 참자

추억의 물건이라고 남겨뒀겠지

흠...


"그럼 한 번 볼까요?"


"......예!?"


"뭐 어때요?"


나는 상자를 테이블로 옮겼다


열려고 하기 직전에

그의 얼굴을 보면,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아이같은 모습이 너무나 좋아




"추억이라면서요"


"....예?"


"추억은 나누고 즐기는 거라잖아요

그러니 친근한 저와 같이 봅시다"



납득이 가지 않는 것 같은 그를 무시하고 상자를 열었다

방해되는 것들은 없애 버려야지


골판지의 내용물은 여러 책이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프로듀서 씨가 맡아온 아이돌들의

취미에 맞춘 책이였다


프로듀서 씨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의 취미를 아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응?


그렇지만, 곧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집었다


바로 아로마에 관한 책


뭔가 납득할 것 같았다


다음 책은 색소폰


그 외에는 교본이 아닌 소설들의 종류


유명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연애에 관한 것이였다


이제야 알겠군...




"그...그녀들과의 추억의 물건으로"


"......그렇군요"


이 책에 관련된 사람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전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프로듀싱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버립시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이것은 그를 위해서야

그의 마음속을 훼방놓는 것은 다 버리는 게 제일이야



"하지만, 선물도 있어요"


"선물 받은 것도 있겠지만

이런 물건 가지고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에요"


"......그런가요"



거주창스러워

필요 없어, 이런거


"프로듀서 씨는 착해서 그냥 놔두었다지만

이런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은 버리는게 제일이에요

당신이 버릴 수 없다면, 제가 버리고 오겠어요

이런게 있어봤자,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건 없어요

프로듀서 씨는 이제 그녀들과 상관없으니까요"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강한 어조였다


하지만 억제할 수 없다

그는 너무나도 무른 존재니까 말이다

그만큼 내가 엄하게 대해야지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니까,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아냐 씨도 프로듀서 씨를 만만하게 대하는 걸요

그것은 그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프로듀서 씨도 그녀들을 생각해서 결단을 하셨어야죠"


프로듀서 씨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이 상자를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 얼굴은 전혀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였으니까



"프로듀서 씨?"


조용히 물어봐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몇 분간 계속되었고

그제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고, 버릴지 말지, 결정하겠어요"


그는 일어서서 테이블 가장자리에 붙어

천천히 상자의 측면을 쓰다듬었다


안좋은 추억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어


"그런가요? 그럼 버릴 때 부르세요, 도와드릴게요

이거 말고도 또 있죠?

그것도 버리겠어요"


"다른 아이돌과의 관계가..."


"이젠 상관없잖아요?

전부 버려 주세요, 러시어어 책도요"


"러시아어도!? 하지만 아냐는 제가 담당하는 아이돌인데요?"


"아뇨, 이젠 아니에요"


이건 말할 생각 없었는데, 순간적으로 말해버렸다


금세 파랗게 질리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설마 아냐를......?"


"네, 담당을 바꾸겠습니다"


"왜요!? 잘 되고 있잖아요?"


"잘 되니깐

프로듀서 씨 말고 다른 사람이 맡아도 문제없겠죠?"


"아냐는 제가 버팀목이 되주고 있어요

갑자기 변하게 된다면, 그녀도 온 힘을 다하지 못할거에요"


"마음의 버팀목이 되는 사람은 중요하긴 하죠

하지만 그녀는 프로듀서를 연인처럼 보고 있어요"


"그건 쓸쓸하니까......

그녀도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거에요"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스캔들 기사가 떠버릴 건데

프로듀서 씨, 책임지실 수 있나요?"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나는 그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상냥하게 말이다


"프로듀서 씨도 이제 슬슬 연인을 만들어보는게 어떨까요?

그러면 아이돌들과의 거리감을 의식할 수 있잖아요?"


"......누군가를 사귀라는 겁니까?"


"누군가가 아니에요"


나는 눈앞의 몸집이 크기만 한 아이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매우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 놀란 얼굴마저도 사랑스러워


그와 키스하기를 얼마나 바랬을까


사실은 그가 먼저 다가와주고, 먼저 해주기를 바랬지만 말이다


정확한 미래를 만들려면

이상을 버리고라도, 그를 붙잡아야 한다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말이야



키스를 하고 몇 초

그는 천천히 얼굴을 떼었다


아쉬웠던 탓인지, 나는 그의 입가에 시선이 고정되 있었다


"누군가가 아니라, 저를 말하는 거에요"


대화를 다시 시작하자, 그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괜찮아, 예상했던 반응이야



"......그건"


"이건 고백이에요"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할 틈을 주면 안된다

억지로 밀어붙이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기에


"후훗,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부탁해요"


그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고, 방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나누며


"프로듀서 씨, 직장에서 봐요"


그것만을 전하고는 문을 천천히 닫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몸은 다시 차가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뜨겁다


자, 프로듀서 씨는 언제 응해주실까?

천천히 시선을 들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밤하늘은 나를 비추고 있었다


큰 별들은 마치 아이돌들 같군

크게 빛나고, 예쁜 저 별들...


프로듀서 씨는 별보다 가까운 사람이 더 잘 어울려요

프로듀서 씨는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것이 행복할 거에요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제가 전부 지켜드릴게요

싫은 것부터 괴로운 일까지

모두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사랑하는 프로듀서 씨







*





후일담이라고 할까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이야기


아냐에게 프로듀서가 바뀔까하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아냐는 지금 전력으로 일을 했으면 좋으니까


거기다, 사장님에겐 그런 얘기도 못들었고...

하지만, 치히로 씨가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치히로 씨....


나는 치히로 씨의 고백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메일로 답장은 언제나 기다릴게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아냐를 무대로 떠나보낸 채, 시간이 비어 있었다

뭔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자판기에서 차를 사고 있을 때였다

아냐 것도 사서, 꺼내는 순간



"프로듀서 잖아, 오랜만이야"


늠름하고 믿음직스럽고 귀에 익은... 아니, 익숙한 목소리

지금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도대체 왜...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부탁인데 이젠 용서해줘



나는 후회의 바다에 빠지면서

천천히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