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햇볕이 드는 한 강변에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유리를 세공하듯 섬세한 손길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소년의 앞에는 한 소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소년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그림 그리기를 끝내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수줍게 소녀에게 그림을 전해주었다.

"라일라, 너를 위한 그림이야."

"우와 너 정말 잘 그린다!"

소녀는 감탄하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물감으로 그리진 못했지만 내가 커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꼭 다시 그려줄게."

소년은 쑥스럽다는 듯 소녀의 눈을 피했다.

아직 그림을 잘 모르는 소녀에게도 그림 속에 있는 소녀의 아름다움과 미성숙한 매력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음... 그럼 답례를 해야겠네."

소녀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품에 꼭 안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쪽하고 볼에 키스를 했다.

"첫 키스를 해줬으니까 나중에 나랑 결혼하는 거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고 소년은 터질 것 같은 마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흔들었다. 


ㅡㅡㅡ 덜커덩, 덜커덩

길이 험한지 마차가 덜컹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흔들림에 소년은 잠에서 깼다.

어릴 적 사탕처럼 달콤했던 꿈은 이내 녹아 사라졌다.

소년은 지금 공작 가로 팔려 가는 중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유진, 그는 데인 가문에 입양된 자식이었다.

과거 어머니와 함께 작은 마을에서 살았지만 어머니를 잃은 뒤 자신이 남작 가문에 입양되었고 자신이 남작의 사생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혼외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집안의 자식과 부인에게 무시와 학대를 받고 살았다.

남작도 그저 책임감에 데려왔을 뿐 딱히 잘해주지도 학대를 막아주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편지가 도착했다.

"...시중을 들게 할 자식을 보내라고? 이런 미친년이..!"

남작은 분노하며 편지를 구겼다.

"하찮은 계집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몇 년 전 공작 가문인 리엔 가의 인원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일로 공작부터 공작 부인, 그의 자식들까지 전부 사망했고 마지막 남은 후계자인 한 여자가 살아남아 가문을 이어 받았다.

여성이 가문을 이어받는 것은 유래 없던 일이지만 평소 리엔 가문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왕이 이를 허락했고 그 조건으로 왕가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리엔 가문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인 클로에는 작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듯 분쟁 중이던 최전방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에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선대 공작이 죽은 틈을 타 리엔 가문에 충성을 바치던 하위 가문들이 작당을 했지만 제대로 실행하기 전 발각되어 몇몇 가문은 멸문을 당했고 나머지는 새로이 충성을 바치도록 요구되었다  

유진의 가문은 운 좋게도 멸문 당하지는 않았고 충성의 증표로 수많은 재물과 함께 볼모로 자식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최후의 저항으로 자신의 혼외자를 보내 유진이 대신 가게 된 것이다. 


"하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런 한탄을 해보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인생은 어머니가 죽은 이래로 계속 불행했으니까.

그저 어른들이 술을 마시며 추위를 이겨내듯 추억에 젖어 인생의 겨울을 나는 것 밖에는 유진에게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가 꼭 다 자라면 이따위 가문 나가주겠어.'

유진은 항상 어른이 되는 것을 꿈꿔왔다.

어른이 되어 가문을 나가 돈을 열심히 벌어 소녀를 찾을 생각이었으나 완전히 꼬여버렸다.

아직 17세인 유진에게 세상은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과 같았다.

가문을 나간다 해도 집도 돈도 없는 그에게 미래는 밝지 않았다.

"그림은 잘 그린다고 했으니까..."

그런 의미없는 생각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마차는 목적지인 리엔 가의 성에 도착했다. 


그 곳은 자신이 봐왔던 어떤 장소보다도 거대했다.

과거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남작 가에 입양되었을 때 보았던 광경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웅장하면서 압도적인 자태에 유진은 그만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십시오 도련님."

마부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불더니 잘 정비된 도로 양옆으로 나있는 벚꽃 나무에서 우수수 꽃잎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면에서 한 여성이 걸어나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리엔 가의 공작 클로에라고 합니다."

휘날리는 꽃보다도 아름다우며 위엄있는 그녀의 모습에 유진은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아...네, 넵! 저는 유진입니다!"

당황하며 여성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당황한 나머지 유진은 일주일 간의 속성 단기로 외운 예법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파랗게 질린 유진을 보며 여성은 가볍게 웃었다.

"후훗, 저를 따라오시죠 유진."

클로에는 유진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내부에서는 축하연이 열렸다.

화려한 공연과 수많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에 유진은 혼을 빼앗겼다.

그리고 축하연이 끝나고 클로에는 목욕을 끝낸 유진을 데리고 이동했다.

"저.. 공작님 어디 가시는 거죠?"

"클로에라고 부르세요."

"그..클로에 지금 어디 가시는 건가요?"

"곧 도착하면 알게 될겁니다."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는 듯한 클로에의 말에 유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방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 거기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침대는 성인 남성이 6명이 같이 잘 수 있을 정도로 컸고 데인 가문의 가주의 침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화려했다.

"벌써 주무시는 건가요?"

"아뇨, 혹시 유진은 여기까지 왔는데도 모르십니까? 남녀 사이의 일을?"

자신은 그저 볼모로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충격적인 말이었다.

"공작님, 저는 볼모로 보내진 거 아닌가요?"

"음? 저랑 혼인을 위해 여기 오신 겁니다 유진"

"..."

"신랑과 신부가 초야를 치루는 것은 당연한 거죠"

"하지만 저희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요?"

"식은 곧 올릴 겁니다. 순서를 조금 바꾼 것 뿐입니다."

그러더니 클로에는 유진을 침대로 데려갔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유진은 이야기를 꺼냈다.

"고...공작님 저는 어릴 때 결혼을 약조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공작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자 클로에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훗... 클로에라고 부르라니까."

그리고는 유진의 턱을 당기고 가까이서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재밌네요 유진, 그럼 저랑 내기하시겠습니까?"

"내기요?"

유진은 얼떨떨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 맞지 않는 유치하고 의미도 없는 어릴 적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수라 생각 했지만 클로에의 대답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 유진과 제가 내기를 해서 유진이 이기면 유진을 풀어주고 그 첫사랑과 함께하게 해주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긴다면 그 즉시 결혼식을 올릴 것이고 유진은 영원히 제 것이 될 것입니다."

"무슨 내기죠?"

"간단합니다. 유진이 1년간 제게서 버텨 1년 후에도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승리입니다. 단, 그 때까지 당신의 몸은 제가 마음대로 사용하겠습니다."

"그.. 그런..!"

1년간 그녀의 노리개가 되라는 말이었다.

당황한 유진의 눈을 감미롭다는 듯 혀를 다신 클로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어, 내기를 받아들이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니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이상했다. 

"어차피 저를 취하실 거면 클로에에게 손해 아닌가요? 제가 1년 뒤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렇다 어차피 유진은 클로에의 소유물

반항하거나 저항할 수도 없는 그에게 건 내기는 클로에의 무조건적인 손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유진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말해드릴까요?"

"네?"

"저는 빼앗는 것 가장 잘합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와인을 땄다.

"제 소문은 들으셨죠? 제가 공작 작위를 찬탈 했다고"

공작 가의 후계자가 전부 사망하고 그녀만 남았을 때 그녀가 공작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모두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어 소문으로 그쳤고 그녀는 정상적으로 공작 자리에 올랐었다.

"그리고 저는 목숨을 빼앗는 것도 특기죠."

그녀는 전장의 악몽

그녀가 가는 전장은 피와 시체만 남는다고 알려졌으며 적군도 아군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와인을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는 그에게 속삭였다.

"아직 순진하게 첫사랑 타령 하는 순수한 도련님의 사랑을 빼앗는 건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녀의 입술을 따라 와인 한 방울이 타고 내려와 그녀의 와이셔츠에 똑 떨어졌다.

언제 단추를 풀었는지 그녀의 와이셔츠 틈새로 새하얀 가슴이 보였다.

와이셔츠로는 가릴 수 없는 풍만한 가슴에 눈이 간 유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유진의 새빨개진 얼굴을 만족스럽게 보던 클로에는 이내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크..클로ㅇ... 으읍!"

무언가 말하려던 유진의 말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클로에는 입을 맞췄다.

유진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하였고 고개를 빼려고 했으나

그녀의 손은 그의 뒤통수를 잡았고 혀로 유진의 혀를 휘감아 절대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다.

그 광경은 어렸을 때 봤던 뱀의 교미와도 같았다. 

산소 한 모금마저 빨아들이겠다는 듯한 그녀의 키스는 폭력적이었고 또한 황홀했다.

평생 처음 느껴본 감각에 그는 정신을 놓을 뻔 했다.

그리고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입을 떼었고 둘 사이에는 끈적한 타액이 꿀처럼 이어졌다.

"하아, 하아"

유진은 처음 느껴본 황홀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허덕였다.

클로에는 정신차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직 밤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클로에는 마치 짐승과도 같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덤벼들었다. 그녀는 체액 한 방울마저 빨아들이겠다는 듯 입을 맞추고 허리를 흔들었다.

벌서 몇 번째일까

그녀의 체력은 끝이 나지를 않았다.

유진이 쭉 생각하고 있던 여자는 이렇지 않았다.

어릴 적 어머니의 따스함과 포근함, 첫사랑의 달콤함과 아련함

그의 첫 경험은 이런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각과는 정 반대였다.

짐승과도 같은 난폭함, 끝이 보이지 않는 체력,혀의 끈적거림

그녀가 탐하는 모든 것이 낯설고 격렬한 쾌락으로 다가왔다.

몇 시간 뒤 그는 마침내 정신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행위는 끝이 났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 클로에는 웃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유진."

이제 겨우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 유진은 낮에는 공부와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을 배웠고 밤에는 클로에와의 내기에 어울렸다.

그녀의 청순한 얼굴과 정반대의 천박한 행위

그녀와의 밤을 다시 생각한 유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대로면 정말로 내기에서 지고 말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아도 클로에 생각을 하니 몸이 뜨거워졌고 얼굴이 붉어졌다. 


클로에의 옆에서 업무를 배울 때에도 그녀는 유진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허벅지를 만지거나 일부로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 그의 시선을 즐겼고 유진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닿게 하는 등의 장난을 쳤다.

그는 왜 클로에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클로에에게 유진은 언제 봐도 자신을 달아오르게 했다.

유진만 자신의 매력을 몰랐다.  그 순진하고 촉촉한 눈망울이 쾌락에 빠지는 것을 클로에는 가장 좋아했다. 자신이 허리를 흔들때마다 그의 얼굴이 남자로써의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자신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함을 즐겼다. 유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그녀를 성욕에 미친 발정기의 짐승으로 만들 줄은 그녀 자신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가 테크닉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약과도 같이 자신을 달아오르게 했다.

클로에는 이미 자신이 그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미 그에게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줘버렸으니까 자신도 그의 마음을 빼앗아야 마땅하겠지

정말로 그녀는 빼앗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탐욕스럽기까지 했다. 


몇 달이 지났다.

유진의 교육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 유진은 외출에 나가기로 했다.

클로에는 바빠보여 최소한의 시종을 거느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며칠 간 비가 왔었지.'

장마가 그친 하늘은 맑게 개였고 정원의 꽃들은 물을 머금어 햇빛에 반짝거리는 보석 같았다. 


오랜만에 그의 취미인 그림 그리기를 하기로 했다.

정원은 클로에의 화려한 모습 답지 않게 화려한 꽃들이 넘치는 것이 아닌 수수하면서도 고고한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유진은 왜 인지 그녀의 취향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련했다. 하지만 이내 떨쳐냈다. 

그녀처럼 화려한 사람이 자신처럼 초라한 취향을 가질 리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꽃밭을 그렸다. 맑은 하늘을 그렸다. 그리고 나니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그녀와의 추억을 그리고자 했다.

왜 인지 정원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비록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최대한 열심히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 만은 그릴 수 없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눈을 그린다면 그녀가 도망쳐버릴까 무서웠다.

어릴 적 추억이었던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면 무슨 말을 할 지 두려웠다.

그래서 눈을 그리기 포기했다.

"에휴"

"무슨 일입니까?"

한숨을 쉬던 유진에 뒤에 언제 다가왔는지 클로에가 와서 말을 걸었다.

"아! 그냥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림을 보더니 클로에는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저 말고 다른 여자를 말입니까?"

그러면서 클로에는 그림을 뺏었다.

"이건 압수입니다"

"푸훗, 클로에도 그려드릴까요?"

삐진 듯 불을 부풀리며 말하는 그녀가 귀여웠는지 유진은 클로에에게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다.

"그..여기 그냥 앉아있으면 됩니까?"

익숙하지 않은 일인지 어색하게 말하며 앉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ㅡㅡ새액새액 


한참을 그렸을까?

숨소리에 클로에를 보자 그녀는 피곤했는지 곤히 자고 있었다.

유진은 싱긋 웃고는 마저 그림을 그렸다. 


날이 지고 나서야 그림은 완성이 되었다.

"정말 주시는 겁니까?"

"네 선물이에요!" 


클로에는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그림은 소중하게 안았다

그림이 커다란 가슴을 눌러, 나오는 것을 보고 유진은 볼이 빨개지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도 모른 채 정말로 기뻐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처음 받은 선물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그림을 평생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행위는 예전처럼 거칠고 난폭하지 않았다.

마치 연인처럼, 부부처럼 부드럽지만 끈적한 그런 달콤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어느 때처럼 일찍 일어난 그녀는 유진의 얼굴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웅... 라일라"

또 라일라 이야기구나

아직 유진은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자

"클로에..."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드디어..."

기뻤다. 몇 달이었을까 그의 꿈에도 지금의 내가 나온 것은

과거의 자신을 이겼다는 것에 기뻤다.

그녀는 라일라였을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라일라는 유진처럼 공작의 사생아였다.

공작에게 입양된 이후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녀는 사생아면서 가장 어렸고 가장 약했다.

언니와 오빠들의 괴롭힘, 양부모의 배척

그것에 견디기 어려워 어느 날 몰래 밖에 나갔다.

그리고 유진을 만났다.

그는 밝았고 어두웠던 라일라를 빛으로 비춰주었다.

그래서 그를 잡기로 했다.

'그는 성실하니까 결혼하자고 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킬 거야.' 


하지만 유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는 어두워졌다.

예전의 자신과도 같아졌다.

그를 구원하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라졌다.

남작가에 입양갔다고 했다.

안 돼, 그는 내 꺼야 


그를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해야 했다.

라일라는 공작가로 돌아와 칼을 갈았다.

자신은 이대로 가면 공작가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를 만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는 밤낮으로 노력했다.

낮에는 검술을 배웠다. 아무도 그녀를 상대하지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눈대중으로 따라 했다.

밤에는 공부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목표, 아니 욕망이 그녀에게는 존재했다.

마침내 그녀가 16살이 되던 해, 계획을 실행했고 모든 가족을 잃고 공작 가를 홀로 운영해야 할 처지가 된 비운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녀는 공작 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역을 공모하는 이들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를 사전에 발각해 대가를 치르게 했다.

왕과의 계약에 의해 전쟁에 나서야 하긴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여성의 몸으로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진을 찾았다.

마침 자신의 하위 가문에 있어 그를 데려오는 것은 쉬웠다.

과거의 자신으로 소개해도 됐지만 그를 놀리고 싶었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밀어낼 수 있었을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이름을 속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유진을 풀어주고 그 첫사랑과 함께하게 해주겠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기지 못하는 내기는 시작도 안 하니까. 


"유진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너는 내꺼야"

그리고 곤히 자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키스해 줬으니 우리 결혼하는 거야"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과거 순수했던 시절처럼. 


클로에의 집무실 벽에는 그림이 세 점이 걸려있다.

한 그림은 낡고 변색되었고 나머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세 점의 그림 모두 소중하게 액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 그림 모두 같은 사람을 그린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남역갤 대회용으로 낸 건데 여기다가도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