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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라고!!"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은신처를 울렸다.


머리채가 붙들려 있는 리브 앨런은 자랑하던 천칭을 옆에 떨군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그녀는 자신이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두를 지키려고 천칭을 들었으나,


허망하게도 깃털처럼 가벼웠던 천칭은 더이상 들 수 없었다.


그 결과, 지금 그녀는 자신을 지키려 용감하게 적을 막아선 에리어스의 참혹한 결말을 목도하고 있었다.


습격자는 쓰러진 에리어스의 머리를 연신 짓밟았다.


애초에 몸이 약했던 에리어스는 첫번째 발구르기로 쓰러진 이후 부터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밟힐 때마다 약한 신음 만을 흘릴 뿐이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제발 그만해!"


리브 앨런은 자신의 무력함에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지금 눈 앞에서 어리고 여린 여자아이를 짓밟는 그는 조디악나이츠 레드시프트의 단장으로서 사자자리의 선택을 받은 고결한 기사였다.


비록 적에 대한 입장에서는 강경한 고집이 있었지만, 약자를 괴롭힐만한 성품을 가진 악인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미동도 없이, 에리어스를 땅에 꽂아넣을 듯이 짓밟고 있을 뿐이었다.


"그거 아쉽게 됐네, 리브. '레온하르트'가 왜 저렇게 됐는지 알려줄까?"


리브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남성은 친근한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너희들의 단장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라투스!"


평소 어떠한 악의도 없이 상대를 대하는 리브 앨런이 확실한 악의를 품고 분노했다.


지금 리브 앨런의 옆에 꿇어앉아 그녀를 희롱하는 남자는 레드시프트의 참모이자 게자리의 기사, 라투스였다.


"그 표정이 정말 아름답네. 이 표정을 상상하니 정말 참을 수가 없더라. 리브,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네게 전해도 될까?"


라투스는 리브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으면서도 능글맞게 리브 앨런에게 추파를 던졌다.



리브 앨런의 길고 건강한 검은 머리칼을 손으로 훑고는 그 냄새를 맡는 라투스의 행동에 리브 앨런은 소름이 돋았다.


"음, 이 향기를 맡고나니 왠지 대답을 해주고 싶어졌어. 뭐, 지금 내가 대답을 한다해도 네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


"레온하르트, 그만해라."


라투스가 명령하자, 레온하르트는 에리어스를 짓밟는 것을 멈췄다.


직후, 그는 리브 앨런의 머리칼을 다시 움켜쥐고는 레온하르트의 얼굴 방향을 향해 들어올렸다.


고통에 찡그리면서도 그의 얼굴을 본 리브 앨런은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제서야 리브 앨런은 상황이 파악됐다. 사자자리의 기사, 레온하르트는 죽어서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은 알아챘나 보네? 저 꼴을 봐. 정말 웃기지 않아?"


라고 말한 후, 라투스는 박장대소 했다. 정말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바닥을 구르며 저것보라는 듯 낄낄댔다.


리브 앨런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상황을 인지했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생각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구원기사단'이라는 놈들이 그러더라고."


"자기들을 도와주면 어느 누구한테도 나를 깔 볼 수 없게 해주겠다고. 이거 뭐, 내가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응, 너라면 거절했겠어?"


라투스와는 지금까지 몇번이고 면식이 있었다. 하지만, 리브 앨런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순박한 인상을 가진 상냥한 기사였다.


"라투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순간 능글맞게 웃고 있던 라투스의 미간에 크게 주름이 잡히고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가 리브 앨런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잡아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왔다. 분노에 찬 씩씩거리는 숨이 리브 앨런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닥쳐!"


"리브, 너는 아무것도 몰라. '레드시프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그런 놈들이 감히 나를 그런 취급을 하다니."


라투스는 이윽고 손톱까지 깨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는 그 '구원기사단'이라는 녀석들의 말만 믿고 레드시프트 전부를 팔아넘긴거야?"


리브 앨런이 묻자, 라투스는 반색하며 흥분한듯 말을 내뱉었다.


"아아, 정말 간단했어. 그 멍청한 놈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하던 곧이 곧대로 믿는다니까? 그렇게 유인해서 한 놈씩 놈들에게 바쳤지. 표정들이 정말 가관이었지, '라투스, 너를 믿었는데.' 이러고 말이야. 누가 마치 처음부터 같은 급이라고 생각한 것 마냥 말이지."


그는 다시 낄낄대다가 이어서 말했다.


"레온하르트 단장, 항상 센척 강한척 난척해서 거슬렸던 그놈도 이젠 내 언데드 시종이야. 대단하지 않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 퍼뜩 생각난듯 라투스는 눈을 굴렸다.


"아, 제미니아 그년이 빠졌구나. 너희들의 견습단원과 함께 떠나서 아쉽게 됐어. 항상 노리고 있었는데……."


아쉬운듯 뇌까리는 라투스는 시선을 리브 앨런에게 고정했다. 탐욕스런 눈빛이 그녀를 위 아래로 훑는 것 같아 리브 앨런은 질색했다.


"뭐, 그년은 너를 얻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같은 거였으니까. 어때? 그때 매정하게 나를 거절한 대가로 바닥을 기는 느낌은?"


리브 앨런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봤다. 마치 허리가 잘린 듯이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때 그녀는 한동안 심하게 낙담했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힘이 되어 준 양한솔과 에리어스에게 힘을 얻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나에게는 소중한 동생들이 있거든."


이 상황에서도 리브 앨런은 레온하르트 쪽을 주시했다. 라투스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그는 더이상 에리어스를 공격하고 있지 않았다.


'틈을 봐서 어떻게라도…….'


"그래? 그렇다면 그 다리를 돌려 줄 필요는 없겠네."


라투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다시 레온하르트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엎드려서 쓰러져 있는 리브 앨런의 허리춤에 걸터 앉았다.


"레온하르트, 이제 재미없다. 너무 오래 놀았어. 슬슬 정리하고 철수하자."


"잠깐만, 라투스! 기다려!"


리브 앨런이 몸을 뒤틀며 움직이려고 했지만, 라투스가 짓누르는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는 에리어스의 머리 위로 레온하르트가 크게 발을 들어 올렸다. 이미 에리어스는 회복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에 그가 공격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리브 앨런은 에리어스에게 손을 뻗고, 라투스를 떼어내려 몸부림 쳤지만, 의미없는 저항이 될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에리어스를 향해 아무런 미동도 없이 크게 발을 굴렀다.


크게 흙먼지가 일어나며 바닥에 금이 가면서 무너졌고, 그를 지켜 본 리브 앨런은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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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나이츠의 균형을 담당하는 천칭자리의 기사가 그런 추태를 보여도 되는 겁니까, 리브경. 설교가 필요하겠군요."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눈물을 흘리던 리브 앨런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가 무너뜨린 바닥을 보자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다시 화색이 돈 리브 앨런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 고생하셨습니다. 리브경, 에리어스경. 이제부터는 전갈자리의 피오네 로웰이 상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엔, 에리어스를 구해낸 부단장─피오네 로웰─의 모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