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속 미끄러지는 흑염룡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등 뒤에서 날아오는 피사체를 회피했다.
- 슈욱!
위험해라.
고개를 슬쩍 돌리니 늑대 얼굴을 한 마왕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평소 아스모데우스한테 맺힌게 많았는지, 아니면 흑염룡에게 된통 당했는지. 표정 한 번 살벌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다른 마왕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 안 좋게 흘러갔다.
[설화 '불화의 염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계 서열 63위, 안드라스가 꺼낸 장검에 설화의 격이 깃들었다. 검은 곧 염화에 휩싸이더니, 혓바닥을 낼림거리는 불뱀으로 돌변했다.
나는 황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바지가 반쯤 벗겨진 흑염룡을 방패 삼아 몸을 수그렸다.
- 콰아앙!
마왕의 설화가 직격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흑염룡의 화신체에서 탄 냄새가 났다. 맥박을 확인하니 아직 숨은 붙어 있어 다행이었다.
- 쉬익!
[하아, 쉴 틈을 안주는 군요.]
두 번째 공격은 신기하게도 옆에서 마중을 나왔다. 푸른 기운이 깃든 단검이 내 목을 겨냥하고 긴 호선을 그리며 쇄도했다.
나는 자세를 낮춰 간신히 꼬치구이가 되는 꼴을 면했다. 단검이 내 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합공이 수포로 돌아가자 더 많은 마왕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내가 태세를 정비할 틈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우우웅.
또 다시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설화가 운용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순식간에 '그들'로 변모했다. 그것은 오로지 나 아스모데우스를 죽이기 위한 이야기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암석을 등지고 멈췄다. 추격자들도 잇따라 정지했다.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감히 다구리를 치다니. 마왕으로서의 긍지는 개나 줘버린 모양이군요.]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원래 너클부터 들이댈 년이 긍지를 논해? 아무래도 약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킥킥. 게다가 라파엘한테 털려 설화도 못 쓰는 꼴이라니!]
[드디어 한을 푸는구나. 이 미친년.]
대충 상황을 파악하니 마왕 승급전에서 아스모데우스한테 털린 중하위권 마왕들이 나를 족치러 강림한 모양이다.
원수가 이렇게 많다니. 너는 도대체 어떤 마왕생을 살아온 거냐, 아스모데우스?!
나는 다시 도주를 준비하려다 허공에서 나를 무심히 바라보는 '헤아릴 수 없는 엄격'과 눈이 마주쳤다.
까마귀 얼굴에 개의 이빨을 가진 그는 72마왕 중 서열 7위인 괴물. 그가 작정하고 나선다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내가 도망치는 것을 방관했다.
[그쪽도 같은 생각인가요, 헤아릴 수 없는 엄격?]
그가 기가 찬듯 콧김을 뿜으며 답했다.
[아랫것들의 개싸움엔 관심 없다. 나는 네가 들쳐맨 용한테 볼일이 있다.]
아, 이쪽은 용가리 손님이구나. 나는 기절한 흑염룡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흘겨봤다.
[그럼 나중에 오시면 안 될까요? 지금은 좀 바쁜데.]
[내가 뮛하러.]
- 츠츠츳!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격을 발휘하자 일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내 주변에 산개한 마왕들이 웃음기를 잃고 뻗뻗하게 굳었다. 같은 설화급이지만 격차가 꽤 심한 모양이었다.
- 츠츠츳!
이에 질세라, 나 역시 격을 끌어올렸다. 이 몸에 빙의한 순간부터 설화나 격에 대한 지식을 본능적으로 터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는 것과 활용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격까지는 어찌저찌 흉내 낼 수 있었다.
파지직.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접전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잠시 후,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부리가 크게 벌어졌다. 그것이 미소임을 깨닫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격이라. . . 재밌군. 어째서 도망친거지? 저 떨거지들은 네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내가 1시간 전에 아스모데우스에게 빙의한 일반인이라서 그렇다. 라고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아무리 저라도 당신을 상대하면서 다른 마왕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랍니다.]
[호오? 나 혼자라면, 자신 있다는 말인가?]
아니야. 그거 아니야.
사람 머리가 아니라서 그런가 엄격은 내 말을 곡해해 들었다. 한층 강렬해진 스파크로 보건대 이대로 라면 계급장 떼고 붙을 기세다.
하여, 해명을 하려던 찰나, 뜻밖의 간접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를 발동합니다.]
[현재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느끼는 감정은 호의입니다.]
전용 스킬이라고? 제 4의 벽 같은 건가?
아니 그것보다 호의라니.
. . . 설마 얘도 아스모데우스 같은 부류인가? 심지가 굵을수록 꺾고 싶어 하는 변태 새끼?
나는 전독시에서 묘사된 그를 떠올렸다.
수두룩 빽빽한 페이지에서 그가 차지하는 분량은 얼마 없었지만, 나는 기어코 몇 가지 대목을 추려낼 수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미식협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오로성.
미식협의 본거지.
그곳의 주인이 바로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었다.
우연찮게도 나는 그가 흑염룡을 쫓는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개인의 특이취향에 대해선 정보부족으로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민 끝에 신중히 입술을 달싹였다.
[싸우는 거 좋죠. 하지만 그건 너무 심심한 자극이예요. 솔직히 이 성마대전 시나리오도 슬슬 질리지 않습니까?]
[. . . 그건 그렇다.]
[무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저희에게도 시각은 소중한 법입니다. 무미한 설화에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는 하등없죠.]
[맞는 말이군.]
엄격이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새로운 자극은 어디서 찾지?]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흐음. 능청이 심하시군요. 이미 알고 계신걸로 아는데.]
[. . . 도통 모르겠군.]
[미식.]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눈이 크게 띄였다. 정답이었다.
저 미친놈은 심연의 흑염룡을, 정확히는 그 설화를 맛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식 성좌먹방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이 까마귀 새끼가 원흉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도 알겠습니다. 설화급 성좌를 맛 볼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요.]
엄격이 나를 독촉했다.
[그걸 알면 어서 내놓아라. 여기서 흑염룡을 양도하면 너의 편에 서지.]
눈치를 보던 마왕들이 경악했다.
[엄격! 훼방 놓지 마시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 따윈 듣지 않는다.]
내분이 일어난 사이, 나는 엄격의 제안을 곰곰히 생각했다.
마계 서열 8위의 협력. 솔직히 귀가 솔깃했다. 그의 도움이 있다면 지금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한가지 사실이 걸렸다.
'현재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느끼는 감정은 호의 입니다.'
명백한 도발(실은 도발이 아니었지만)에도 그는 되려 내게 흥미를 가졌다. 상대가 아스모데우스에 버금가는 또라이라면 오히려 상식과 반대되는 행동이 정답아닐까?
약간의 말미 끝에 나는 내 추론을 믿기로 결정했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엄격을 나무랐다.
[이렇게까지 하시니 오히려 보기 추하군요.]
[뭐라?]
엄격이 짐짓 노한듯 눈썹을 찌푸렸다. 속으면 안된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타협'은 '엄격'이 아닙니다. 흑염룡을 원하시면 직접 가져가시든가요. 물론 쓰러진 흑염룡을 맛보는 것도 엄격이라 칭할 수 없어요. 그것은 미식도 아니죠.]
[미식이 아니라고?]
되묻는 마왕에게 나는 담담히 고했다.
[품격이 없으니까요.]
나는 김독자가 999회차 김남운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네 정의에는 품격이 없었지.'
죄와 벌에 무관하게 생명을 앗아간 그를 향한 일갈.
꺼림칙하지만 나는 미식도 이와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이야기를 맛보려는 자는 이야기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대가 없는 미식은 도둑질이나 다름없죠.]
삶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품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흑염룡을 포기할 수 없었다. 원작의 전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도.
이 멸망한 세계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것은 아마 내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였으니까.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화신체를 잃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진심만은 알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주사위가 던져졌고, 나는 침착하게 상대의 답변을 기다렸다.
1초가 1년 같은 침묵.
침묵은 마왕의 엄격하지 않은 웃음소리와 함께 깨졌다.
[하하하하!!]
.
.
.
저 웃음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하던 찰나 '헤아릴 수 없는 엄격', 진명 '아몬'이 부리를 벌렸다.
[. . . 미식에 대한 심도깊은 대화를 나눈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군. 좋다. 흑염룡은 포기하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미식가 앞에서 미식을 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아몬은 강한만큼 오만했다.
도망가면서 언뜻 엿본 그의 설화는 세상 모든 것을 자신만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 발언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 . . 상상도 하기 싫다.
수 천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담긴 악마의 설화가 나를 집어삼켰을 것이다. 저 배부른 미소를 보건대 일단 잘 넘어간 모양이다만.
그래도 방심은 일렀다.
마왕의 본질은 악마. 예로부터 악마는 속임수를 들겨썼다. 규칙과 정의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 그들의 특기고.
아니나 다를까. 엄격이 짓궂게 웃으며 나를 손가락질 했다.
[단, 조건이 있다. 내 앞에서 미식을 논할 자격을 보여라. 만약 허언에 불과했다면 나는 네 설화를 먹겠다. 그때까지는 방관하도록 하지.]
흑염룡 대신 내 목이 식탁에 올라갔다. 젠장할. 나는 쓰게 웃으며 너클을 단단히 여맸다. 살다 살다 마왕한테 이야기를 대접할 줄이야.
[곤란하네요. 요리엔 영 소질이 없는데 말이죠.]
[맛은 상관없다. 날것도 좋고 탄것도 좋아. 신메뉴를 대접하면 합격시켜 주지.]
족히 수천 년은 살아왔을 마왕조차 처음 보는 이야기라. 여간 까다로운 주문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왕들을 직시했다. 선두에 선 안드레스가 부러진 검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았다. 때깔이 심상치 않은 게 성유물에 준하는 아이템으로 보였다.
나는 설화를 끄지 않은 채, 그를 향해 돌진했다. 무턱대고 달려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가 다급하게 진언을 날렸다.
[어서 막아!]
나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길을 가로막는 마왕들에게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한 놈만 죽일겁니다. 화신체를 부수고, 설화를 잘게 조각내서, 시나리오의 지평선에 던져버릴 거에요.]
격을 담은 경고에 마왕들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이는 신뢰나 우정 같은 선의로 뭉친 자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수작이었다.
김독자 컴퍼니 였다면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앞을 가로막았겠지.
나는 그들의 조악한 이기심이 만들어 낸 빈틈으로 신체를 욱여넣었다. 뱀지옥의 군주가 가루독을 뿌려 훼방을 놓았지만, 이미 늦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나는 안드레스의 턱밑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이런 - ]
경악한 마왕이 이제 막 피어오른 화염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나는 너클로 검을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틀어지고, 꽉 움켜쥔 반댓손 주먹이 그의 못생긴 안면에 적중했다.
퍼억!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드레스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너클에 사랑을 담아 휘둘렀다. 이래 봬도 정욕의 마신이다.
퍽! 퍽! 빠악!
딱 3번.
분풀이로는 적당한 횟수다.
쓰러진 안드레스를 뒤로 하고 나는 지금까지 도망쳐 온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뺐다.
거머리 같은 마왕들은 내 꽁무니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바짝 약이 오른 몇몇 마왕들은 개연성 스파크를 일으키며 진체를 소환했다. 보수적인 이들의 성격상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날개를 펼친 마왕들이 하늘로 부상했다. 그리고 사방팔방에서 설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소나기처럼, 거세게 퍼부었다.
나는 그것들을 산성비로 취급했다. 활자들이 공장 매연을 머금은 먹구름처럼 거무잡잡한 까닭이었다. 오죽하면 맞았을 때 탈모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빠질 머리조차 없는 새대가리 '아몬'을 부러워하며 나는 급커브를 돌았다.
- 쿠웅!
종이 한장 차이로 빗겨나간 운석이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종말론의 무대는 설화의 중심에 진입할수록 용암과 화산쇄설류를 토해냈다.
발에 밟히는 시체. 멸망의 업화가 삼키다 만 활자 조각들이 점점 많아졌다.
소수의 마왕들은 내 목적지를 알아챘는지 난색을 표하며 추격은 중단했다. 물론 그 숫자는 기껏 해야 한 둘에 불과했으니 마왕들의 멍청함이 짐작갔다.
- 콰앙!
풍경이 빠르게 바뀐다.
나는 시나리오의 격전 지대. 선과 악의 경계로 돌입했다.
슬슬 천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가 되었다.
제자리에 멈춰 선 나는 육성으로 나를 도와줄 성좌를 불렀다.
"라파엘!!!"
성좌의 진명에는 성좌의 주목을 끄는 힘이 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마왕들이 경악했다. 마치 "네가 갈 때까지 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음. 좋은 반응이군.
열띤 성원에 뿌듯해하며 나는 별자리가 가득한 하늘을 우러러봤다. 핏빛으로 물든 지평선 너머에서 찬란한 휘광을 두른 대천사의 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기척이 사라지더니, 머지않은 곳에서 하얀 깃털이 휘날렸다.
[불화의 군주가 시나리오를 이탈합니다.]
[뱀지옥의 군주가 시나리오를 이탈합니다. ]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가 시나리오를 이탈합니다.]
그 찬란한 섬광에 눈이 멀지 않도록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흰 천에 갑주를 두른 금발의 미청년이 헤일로를 툭툭 두드리며 불편한 심기를 표하고 있었다.
[님 또 ■지고 싶으심?]
- 츠츠츳!
어마어마한 격이 나를 짓누를 무렵, 나는 전독시에서 그리고 다른 설화에서 라파엘과 아스모데우스의 관계를 떠올렸다.
원전 설화에서도 그녀는 라파엘한테 패배하여 이집트 사막에 유폐되었으며, 전독시에서는 패배설화까지 생겼다.
즉, 라파엘 존재 자체가 아스모데우스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부르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족치기 위해서 말이다. 평소에도 아스모데우스랑 미친듯이 싸웠겠지. 그녀 성격상 오히려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이 고스로리 마왕의 신체를 차지한 자아는 불과 몇시간 전만 하더라도 침대에서 뒹굴며 웹소설을 보던 일개 독자였다.
결투 따위 당연히 성립 불가. 애초에 적대시 할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설화도 끄고 격도 흐트렸다. 화신체가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마왕들과 술레잡기 통에 잡다한 상처를 떠안은 화신체가 부서지고, 근원 설화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지경에 이르었지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저 기다렸다.
[. . . 뭐 하자는 거임?]
마침내 라파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기세를 누그러뜨렸을 때, 나는 입에 고인 핏물을 뱉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싸우자고 온 게 아니예요.]
[. . . 님 아스모데우스 맞음?]
[보다시피요. 아무튼 제안 할게 있어요. 라파엘.]
라파엘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답했다.
[수식언으로 부르삼.]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 . . 그럼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저와 친구가 되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