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접시를 싹싹 비운,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였다.
"잘 먹었어요."
['동녘의 수호자'가 어깨를 으쓱입니다.]
['동녘의 수호자'가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우쭐거립니다.]
흑운의 성좌답게 허세가 가득했다.
그래도 도시락이 정말 맛있던 것은 사실이라 딱히 반발심은 들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끄덕이곤 흑염룡이 건넨 넵킨으로 입술을 마저 닦았다.
- 화르륵!
쓸모를 다한 넵킨은 흑염룡이 피운 모닥불에 던져 바스러졌다. 안드레스의 설화 처럼 혓바닥을 날름 거리는 불꽃.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감정이 차분해졌다.
나는 잠시 불멍을 때리며 앞으로 할 일을 정리했다.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일단 내 최종목표는 살아서 에필로그를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김독자 컴퍼니와 합류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빙의한 인물이 아스모데우스라는 점인데, 상 또라이로 악명 높은 마왕은 2회차에서 유중혁을 살해한 장본인이었다.
['벽을 넘은 자'가 시작부터 꼬였다고 비웃습니다.]
아니지. 정확히는 시작하기 '전'부터 꼬인 셈이다.
회귀자는 이전 회차에서 아스모데우스를 척살 대상으로 점찍었으며, 언젠가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죽어라."를 시전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나는 잡념을 다스리기 위해 모닥불을 눈에 담았다.
불씨가 컴퓨터 자판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 탁. 타닥.
막연한 미래를 비웃듯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검은 불꽃은 현재를 장작삼아 타오르고,
지나간 과거의 잿더미가 바닥에 차츰 쌓여 갔다.
스타스트림에서는 저것도 하나의 이야기겠지.
- 탁.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 불길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다시 장작을 밀어 넣자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허공에 용의 형상을 투영한 연기는 하늘로 상승할 수록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소용돌이로 돌변했다. 눈을 가늘게 뜨니 그것은 마치 쉼표처럼 보였다.
흑염룡이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보냐?"
"그냥 . . . 새삼스러워서요. 불꽃이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나 싶어서요."
"그야 내 설화니까."
흑염룡이 팔을 휘두르자 말 그대로 불꽃이 어두워졌다. 광원이 만든 그림자가 도리어 광원을 먹어치웠다. 밤하늘과의 경계가 희미해진 까닭에 나는 아지랑이를 통해 불꽃의 형상을 유추했다.
"찌그러진 원이네요."
". . ."
"아닌가요?"
['불을 삼킨 도마뱀'이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립니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흑염룡이 손을 거두었다.
검은 화염이 순식간에 소매로 빨려 들어갔다.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 지 오래.
어두컴컴한 밤하늘에서 별들이 함부로 반짝였다.
외로움은 충분히 가셨는지라 이별을 꾀하는 내 움직임에는 미련이 없었다.
"어울려줘서 고마웠어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보며 흑염룡이 눈을 홉떴다. 중2병 용가리는 또 뭐가 불만인 것인가?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었다.
"가게?"
"가야죠."
"집 없다며."
아, 그거.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아직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머무를 곳은 있으니까요."
흑염룡이 끙 소리를 내며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할 말이 남았나? 잠자코 기다렸다.
['용이 되지 못한 자'가 응원합니다.]
"그 . . . 다음번에도 만날 거냐?"
자신이 한 말이 쑥스러운 듯 흑염룡이 시선을 피했다. 새로 사귄 친구는 츤데레인 모양이다. 나도 저 마음 알지. 전생에서 동료직원과 밥한끼 먹자고 하는 게 그렇게 힘들더라.
"얼마든지요."
뭔가 뿌듯해하는 흑염룡을 뒤로 하고 눈꺼풀을 살포시 내렸다. 그러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별이 잠든 밤. 그 위로 몸을 던졌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약한 개연성 스파크가 튀었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나는 붉은 옥좌에 앉아 있었다.
'32번째 마계가 주인을 맞이했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엄격'한테 미식협 초대장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일이었다.
.
.
.
[마왕님. 실례지만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문 밖에서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이름은 그리고리. 지난 1년 동안 나를 수발든 악마성의 집사장이었다. 검은 정장에 흰 와이셔츠를 빼입은 그가 나를 깨우는 것으로 내 하루는 시작되었다.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리고리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가 손에 든 종이를 건넸다.
[마왕님께 온 초대장입니다.]
초대장 끄트머리에는 반가운 수식언이 적혀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 . . ]
그러고 보니 성마대전이 끝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전쟁으로 입은 부상을 회복하기엔 충분한 시간. 미식에 미친 마왕이 병상에서 일어나서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 오로성으로 와라.
미식협이 열렸다.
[그리고리.]
[네 마왕님.]
집사장이 번개처럼 허리를 숙였다.
조건반사적인 움직임.
그것은 지난 1년에 걸친 인성교육의 성과였다.
- 누구 자식인지 아주 잘 컸어.
쓸때 없는 주접을 떠올리며 입밖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나갈 체비를 하세요.]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요.]
[오로성.]
[준비하겠습니다.]
종이를 받아 든 그리고리가 절도 있는 자세로 퇴장했다. 나는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연회에 입고 나갈 복장을 선정했다.
[상품 '드레스' 검색.]
[검색결과가 41건 있습니다.]
* 파티용 드레스 - 제고 2
* 차이나 드레스 - 제고 1
* 단색 드레스 - 제고 1
.
.
.
많기도 해라. 이미지를 둘러보고는 가장 무난한 드레스를 선택했다.
무난한 단색 드레스. 검은색은 내 취향이었다.
어깨가 파인 디자인이라 살짝 허전한 감이 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남은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4,000,462코인]
아직 충분하지만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를 생각하니 부족하게 느껴졌다. 혹은 견물생심이라고. 물욕이 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 끼익.
상태창을 닫고 성밖으로 나서자 선글라스를 낀 그리고리가 스포츠카를 끌고 나왔다. 나는 옆자리에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단단히 고정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칭찬 고마워요.]
우리는 서로에게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기어를 조작한 그리고리가 운전대를 움켜잡으며 씨익 웃었다.
[오늘도 안전 운전 하겠습니다.]
퍽이나 그러겠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좌석에 등을 기댔다.
[마음대로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량이 로켓처럼 쏘아졌다. 운전에 한이 담겼달까나? 그동안 유교 교육 받느라 힘들었을 것을 생각해 당분간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 슈웅!
. . . 근데 이건 너무 빠르지 않니?
없던 멀미가 생길 정도로 차가 덜컹거렸다. 그 와중에 곡선 코스를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 주행실력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포탈을 통과한 차량은 평야를 가로지른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풍경이 빠르게 변화했다. 푸른 나무가 호수로 변하고, 호수에 비친 별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아직 멀었나요?]
[거의 다 왔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도로의 종착지가 지평선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차량은 오로성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차량 통행이 안 되는군요.]
그리고리가 가리킨 표지판에는 성주의 엄포가 적혀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통행금지다.
많이 본 문장인데 . . .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연회가 끝나면 연락 주십쇼.]
[그러죠.]
입장이 빠른 만큼 퇴장도 신속했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스포츠카를 배웅하고 스팀펑크 느낌이 물신나는 입구로 진입했다.
- 까악! 까악!
지붕에 앉은 까마귀가 두 번 울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요. 헤아릴 수 없는 엄격.]
[고작 1년밖에 안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니까요.]
허리를 살짝 돌려 엄격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특유의 중후한 분위기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그만큼 미식협을 기다려왔다는 뜻이고요.]
[입발린 소리지만, 듣기에 나쁘진 않군.]
엄격은 배부른 미소와 함께 자신의 성채를 훑어 봤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첨탑이 눈에 확 들어왔다.
[7번째 마계에 있는 내 본 거지에 비하면 다소 협소한 장소지만. 연회를 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은근슬쩍 땅 자랑하기라.
땅 없는 누구는 서러워서 살겠나.
32번째 마계를 가진 주제에 배부른 소리겠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이었다.
나는 엄격의 에스코트를 받아 건물 로비로 진입했다.
[미식협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괴식도 여기선 미식이란 소리다.]
[그럼 성좌를 먹어도 되겠군요.]
엄격이 중앙 로비로 향하는 통로에서 우뚝 섰다.
[연회 망칠 일 있나?]
[농담이예요.]
[네가 말하니 농담같지 않군.]
콧방귀를 뀐 엄격이 문을 벌컥 열자 1층 로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급 뷔페처럼 설화를 대접한 접시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허나 기대했던 것처럼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다.
엄격이 내 의문에 답했다.
[1층은 주로 위인급 성좌들 머무는 곳이다. 개연성의 눈치를 보는 허접한 족속들이지.]
- 티잉.
엄격의 진언을 들은 한 성좌가 빈정이 상했는지 포크를 내려놓았다. 엄격은 일체의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직진했다. 내가 다 무안했다.
[말을 참 예쁘게 하는군요.]
[호오. 난생 처음듣는 칭찬이군.]
그야 칭찬이 아니니까.
엄격이 나를 보며 부리를 달싹였다. 신장 차이 때문에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네 녀석은 가끔 보면 인간처럼 말할 때가 있어.]
살짝 뜨끔했지만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모욕적인 언사네요. 혹은 재미없는 농담이거나.]
[나는 내가 느낀대로 말했을 뿐이다.]
제딴에 그냥 해 본 말이었는지 이야기는 금세 다른 주제로 흘러 갔다.
[팔은 다 나았나 보군.]
나는 멀쩡해진 왼팔을 돌리며 답했다.
[그쪽도 걸음이 꽤 자연스러워졌군요.]
[쯧. 빌어먹을 천사년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완쾌하고도 남았다.]
빌어먹을 천사년은 우리엘을 가리켰다.
[상대를 보면서 덤벼야죠.]
[그년이 나한테 덤벼들었다.]
부러운 자식 . . . 은 아니지. 마왕 처지에서는 그만한 공포 영화가 따로 없으니까.
지옥염화를 두른 대천사는 악마들의 천적.
그 흑염룡도 밀리는 마당에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홀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해봤다.
[그대로 신부로 삼지 그랬어요.]
[. . . 차라리 뒤지는 게 낫지.]
격렬한 거부 반응에 나는 헤프게 웃었다. 엄격은 마냥 기뻐하는 나를 바라보더니 문득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는 그 한숨의 출처가 궁금했다.
[요새 주변에 미친년들이 많이 꼬인다.]
명백히 "너도 그중에 한 명이다."가 생략된 문장.
기가 찰 노릇이었다.
원작에 비하면 나는 순한 맛이라고.
물론 미래니 김독자니 운운해봤자 필터링과 개연성 후폭풍 콤보가 나를 작살낼 것이므로, 함부로 입을 놀릴 수도 없었다.
해명할 길 없는 억울함에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을 쏘아봤다.
[꼽나? 그럼 승격전을 벌여라.]
[ . . . ]
끝내 쿠사리만 먹었다.
서열로 찍어누르는 졸렬한 마왕 새끼 같으니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 성마대전 때 에덴에게 바칠 제물을 점찍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 그는 미카엘과 행복한 술레잡기를 하는 것으로 오늘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순위가 많이 올랐더군. 15위라. 길고 긴 스타스트림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건이야.]
검은 말을 타고 스타스트림을 부유하는 15위 마왕, 엘레고스. 그는 약해진 나를 비웃으며 접대를 요구했다. 이에 나는 내가 가진 설화를 총동원하여 방심한 마왕한테 판정승을 거두었다.
막판에 아스모데우스의 설화에게 잡아먹힐 뻔했지만, '벽을 넘은 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순위가 너무 높아져서 부담스럽다.
원작이 시작하기 전까진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순위를 낮출 수는 없는걸까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엄격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승격전에서 지면 된다. 대신 패배 설화가 생기겠지.]
[리스크 없는 방법으로 추천해주시죠?]
[그딴 건 없다.]
[아쉽군요.]
나와 엄격은 타이밍 좋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우리는 3층으로 향했다. 나는 수정 거울을 보며 드레스 주름을 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실감되나? 1층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확실히 . . . 격이 다르군요.]
[최소한 설화급 이상이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실내의 서늘한 공기가 확 들어왔다. 엄격이 작게 속삭였다.
[미식협에 온 것을 환영하지.]
동시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느낍니다.]
나는 성좌들의 시선을 레드카펫으로 삼아 한 걸음 내딛었다.
떨리는 첫 데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