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작은 점인 줄 알았다.
아니면 블랙홀이거나.
새까만 구멍이 점점 몸집을 불려갔을 때, 나는 이상을 감지했다.
"구멍이 아니군요."
- 파스스 . . .
자세히 보니 푸른 스파크도 보였다. 성좌가 현현할 때의 현상. 익숙한 기운에 몸서리 친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혼잣말했다.
"흑염룡?"
['심연의 흑염룡'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중얼거립니다.]
누군가 들은 시점에서 그것은 혼잣말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정말 올 줄은 몰랐다. 구해 줄 때는 막 대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는 원작에서 4인의 애청자 중 하나이자 본편의 주역이다.
즉 나름 거물이라는 소리.
이끄는 성운 '흑운'도 절대악 성좌들이 득실득실하고. 흑염룡 본인도 설화급 최상위의 격을 자랑한다. 그런 성좌가 함께 밥이나 먹자는 부탁에 어울려 준다니 . . .
성좌란 도대체 얼마나 한가한 것일까. 어쩌면 그 한가함이 성좌들을 이야기에 미치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 퍼엉!
익숙한 폭발음. 뒤이어 흑염룡의 거체가 찌그러졌다.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신형은 중력의 끌림을 받아 미사일처럼 낙하했다. 그나저나 손에 든 저것은 설마 도시락 통인가? 무슨 12첩 반상을 싸 들고 왔어?
- 콰앙!
그리고 착지. 먼지바람이 걷히자 슈퍼 히어로 랜딩 자세를 취한 소년이 씨익 웃으며 외쳤다.
"크큭, 내가 생각해도 멋진 착륙이군."
나한테 말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화자찬이었다. 정말 어지러운 성격이다. 그래도 와준 게 어디냐.나는 고마움을 담긴 박수를 칠려다가 문득 소리가 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허전한 왼쪽 팔뚝. 그것은 라파엘과의 사투를 무마한 대가였다.
성좌나 마왕이 오래사는 종족이지만, 시간을 당겨 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회복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여 나는 박수를 치는 대신 입을 놀렸다.
"와 역시, 심연의 흑염룡.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훗."
흑염룡이 뿌듯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쉽다 쉬워. 헌데 기뻐하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연어처럼 기억을 거슬러 오르니, 그 끝에 내 반려견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복부 지방이 실하다.' 줄여서 복실이.
지금은 하늘나라로 간 하얀 포메리안은 견주 말은 죽어도 안 듣는 녀석이었다.
소파를 물어뜯고 입질도 심하고.
요컨대, 아주 제멋대로였다.
마치 흑염룡처럼.
아는 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날듯 말 듯, 희미한 추억의 잔상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 아주 약간은 선명해졌다.
텅텅 빈 반지하 부터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환한 휴대폰.
하얀 화면에 새겨진 활자. 내 상념을 깨뜨린 것은 그 활자가 조형한 등장인물의 목소리였다.
"너 . . . 팔은 왜 그러냐."
표정을 싹 굳힌 흑염룡을 보며 나는 담담히 말했다.
"싸우다 날려 먹었죠."
"누구랑?"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라고 들어 보셨나요?"
흑염룡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명백한 짜증이었다.
나는 그가 왜 짜증을 부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칫. 약해 빠져서는!"
"저한테 업혀서 도망간 용이 할 말은 아니죠."
움찔한 흑염룡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건 네가 멋대로 한 거잖아! 그리고 내가 그렇게 된 건 마왕 놈들이 치사하게 뒤통수를 - "
"니편 내 편 가리면서 깽판을 치셨어야죠. 그거 다 업보라고요. 업보."
일갈한 나는 흑염룡이 내려놓은 황금빛 보자기를 손짓 했다.
"그나저나 저거는 도시락인가요?"
흑염룡이 고개를 돌려 보자기를 흘겨보곤 답했다.
"그래. 부하가 만들어줬다."
동시에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동녘의 수호자'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정황상 저 '동녘의 수호자'란 성좌가 도시락을 만든 모양이었다. 흑염룡은 밤하늘을 향해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투덜거렸다.
"의심 많기는."
"성좌 '동녘의 수호자'가 마왕들은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답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흑염룡이 하늘에 손을 휘젓자 나를 관찰하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동녘의 수호자' 외에도 다른 흑운 소속 성좌들이 나를 가늠해 본 낌새였다.
설마 내가 흑염룡을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일 텐데 말이다.
"메뉴는 뭔가요?"
"나도 몰라. 아직 안 열어 봤어."
나는 쪼르르 다가가 흑염룡 옆에 털썩 앉았다. 잠시 몸을 움츠린 흑염룡이 섬세한 손길로 푸른색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가 풀림과 동시에, 고기 특유의 향기가 밀려왔다.
". . . 맛있겠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기름기 좔좔 넘치는 구이 말고도 진미가 차고 넘치는 까닭이었다. 전설 속 만한전석이 떠오른다고 할까.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본 음식 중에 비주얼 만큼은 으뜸이었다.
내 열렬한 반응에 흑염룡이 실실 쪼갰다.
"너희 집에는 이런 거 없냐?"
글쎄다. 질문에 답하기 애매했다.
전생의 집이라면 돈이 아까워서 먹지도 못했다. 기껏 해야 동창회나 열렸을 때 얻어먹었지.
게다가 아스모데우스에 빙의하고 나서는 딱히 집이라는 개념자체가 유실되어 버렸다. 물론 그녀가 '32번째 마계'의 주인이긴 하다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집이라 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고로 내 대답은 질문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집이 없는데요?"
" . . . "
흑염룡이 집어 든 고기반석을 툭 떨어뜨렸다. 아깝게 시리. 내 시선이 바닥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흑염룡이 헛기침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 . . . 그럼 내 성운으로 오든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이 크게 띄였다.
"진심인가요?"
"어 . . ."
모자를 푹 눌러 쓴 흑염룡의 답변에 도리어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아스모데우스는 마왕이었다. 마왕이란 스스로 좌를 저버리고 타락한 족속들. 좌에 오른 성좌들은 그런 마왕들을 증오하고 배격했다.
제아무리 같은 절대악이라 할지라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흑염룡이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씨익 웃었다.
"감히, 이 몸한테?"
흑염룡의 그림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둠에 담긴 격은 그가 왜 흑운의 수장인지를 각인시켰다.
"하긴. 그랬으면 진작에 흑운의 머리가 바뀌었겠군요."
"걔내들은 나 못 이겨."
오만한 선고를 내린 흑룡이 핑크빛이 도는 스테이크를 꿀꺽 삼켰다. 나도 오른손으로 양고기로 추정되는 구이를 한입 배어물었다.
달콤한 소스. 부드러운 식감. 혀에 닿아 살살 녹는 듯 고기는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남자의 이야기가 미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 . . 극한까지 검을 수련하여 천하제일에 다다른 남자는 어느 날 산꼭대기에 올라 삶의 덧없음을 깨달았으니. 스스로 허무감에 사로잡혀 손에 든 검을 목에 찔러넣었다.]
나는 '천하제일 바보'의 결말을 마저 삼키며 흑염룡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요."
뜻을 함께하는 별들의 모임은 성좌 개개인의 자유를 거세한다는 단점이 있다.
당장 본작의 흑염룡만 하더라도 김독자가 이계의 신격과 싸울 때, '흑운'이란 거대 성운에 매여 직접 나서지 못했다.
물론 나 역시 에덴과 존재 맹세를 맺은 바 있지만, 그 이상 제약이 늘어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가 . . . 뭐 그럼 어쩔 수 없군."
흑염룡이 고개를 획 돌렸다.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이 꺼림칙했으나 음식을 집어먹는 내 손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뱃속에 거지라도 든 마냥 정신없이 먹다 보니 손가락이 기름 범벅이 되었다. 젓가락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주변에서 나무젓가락을 찾다가 문득 그것을 대신할 물건을 떠올렸다.
"핏빛 손아귀"
손등을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손을 감쌌다. 나는 성흔을 장갑 삼아 남은 음식을 집어 먹었다. 피 묻은 손아귀로 이미 죽은 생명을 움켜쥐는 것이 살짝 고인 모독처럼 보였다. 그래도 맛있게 먹어 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주지 않을까?
설화의 주인들이 들으면 무덤에서 뒷목 잡고 일어날 생각을 하며, 이번엔 만두를 한입에 삼켰다. 일련의 과정을 흘겨본 흑염룡이 황당하다는 식으로 물었다.
"그거 . . . 그 용도가 맞냐?"
"쓰는 마왕 마음이죠."
대표적으로 칼이 그렇다. 요리사가 잡으면 칼은 채소를 자르지만,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피를 보고야 마는 것처럼. 핏빛 손아귀도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 비인의 손에선 유사 젓가락으로 둔갑한다.
명예와 위신을 중시하는 성좌들은 상상도 못 할 쓰임이지만. 그딴 겉치레 따위 내게 있을 쏘냐.
"너 같은 마왕은 처음이군."
"그런가요?"
"돌무더기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야."
주위를 둘러보니 부서진 암석 덩어리가 널려 있었다. 확실히 보기에 썩 좋은 경광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웅장한 장소를 골라라."
"어디서 먹는지 보다 누구랑 먹는지가 중요하죠. 그리고 여기도 꽤 운치 있지 않나요?"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보라색 단발이 목 뒤를 애타게 간지럽혔다. 무엇이 그토록 서글프기에 바람은 이 고달픈 세상을 종일 배회하는 것일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 . . 크큭."
그때 흑염룡이 갑자기 웃었다.
"별들이 저문 지평선에서 드는 승리의 축배라. 그렇게 생각하니 또 괜찮군."
"절대악이 졌는데 뭔 축배는 축배입니까."
"시끄러. 내가 왼손의 봉인만 풀었어도 - "
"말로는 누가 못하나요."
중 2병 발언이 이어지기 전, 중간에 끊어 버렸다. 드래곤 폼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흑염룡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궁시렁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중2병인데 순수하다니. 그 끔찍한 아이러니에 나는 기겁하면서 마지막 남은 만두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흑염룡의 주둥이가 더 튀어나왔다.
아 . . . 너도 이거 먹고 싶었구나.
이미 입속으로 직행한 것으로 도로 뱉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기분이 뭐했다. 이 분위기를 어쩔까.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 . . 나저나 의외네요. 솔직히 도시락까지 준비해 올 줄은 몰랐는데."
뭔가 뜨끔한 표정을 지은 흑염룡이 작게 구시렁거렸다.
"메뉴가 설화 팩이라고 하니까 기겁하면서 챙겨 주더라. 필요 없는데."
"누가요?"
"쟤."
흑염룡이 하얀 손가락으로 그가 낙하한 방향을 가리켰다. 잠시 후, 흑염룡이 한마디 덧붙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간접 메시지가 잇따라 울렸다.
['동녘의 수호자'가 귀를 후비적 거리며 딴청을 부립니다.]
['용이 되지 못한 자'가 꼬리를 휘적거리며 자기는 아니라고 외칩니다.]
['불을 삼킨 도마뱀'이 혓바닥으로 '동녘의 수호자'를 가리키며 저 새끼가 시켰다고 시치미를 뗍니다.]
['동녘의 수호자'가 기겁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셋. 어쩐지 순순히 물러가나 싶더니, 몰래 훔쳐보고 있던 모양이다.
"동녘의 수호자. 그대가 요리한 것인가요?"
['동녘의 수호자'가 그렇다고 답합니다.]
"후훗. 고맙군요. 맛있게 먹었어요."
['동녘의 수호자'가 예상 못 한 상황에 의아해합니다.]
['불을 삼킨 도마뱀'이 저 새끼 또 꼬리 친다고 '심연의 흑염룡'에게 고자질 합니다.]
['용이 되지 못한 자' 꼬리 밖에 없는 신세에 눈물을 삼킵니다.]
"전부 입 다물어."
흑염룡의 살벌한 언사에 '동녘의 수호자'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동녘의 수호자'가 자식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고 자조합니다.]
"내가 너보다 나이 많거든."
['동녘의 수호자'가 그 말이 아니라고 한탄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티키타카에 입술이 은은한 호선을 그렸다. 말은 거칠어도 서로를 향한 친근함이 두드러졌다. 츤데레 성향은 흑운 종특인가?
"사이 좋네요."
"이게?"
['동녘의 수호자'가 팔이 아니라 눈이 다친 거 아니냐고 물어 봅니다.]
봐봐. 지금도 같은 반응이잖아.
거울에 비친 듯 똑같은 반응에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본래 웃음에 헤픈 이는 아니지만, 저들의 관계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흐흐."
'그것은 바보 처럼 웃었다 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