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깨비가 성명문을 낭독했다.
[여기 계신 모든 좌들께서 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셨을 겁니다. 이번 성마대전은 본래 선악의 명확한 승패를 가리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단조로운 음색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가호를 받아 좌중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죠. 묵시룡이 부재한 지금, 오로지 선악을 위한 무대가 열렸음에도 말입니다.]
안경테를 치겨세운 메타트론이 넉살 좋게 웃으며 대도깨비의 추궁에 대한 변명을 늘여놓았다.
[하하. 선은 총력을 다 했습니다.]
나는 아가레스의 눈치를 봤다.
선은 할당량을 채웠다. 다만, 악이 미달이었을 뿐.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궐련을 문 아가레스가 턱을 괸 채 메타트론을 쏘아봤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군. 악도 진심이었다.]
[누가 뭐랬나요?]
메타트론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허공에서 강렬한 적의가 부딪혔다. 보는 내가 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
선과 악의 최고 담화자의 충돌에 참가좌들이 격을 끌어 올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의 목에 창칼을 겨눈 신화 속 존재들. 오랜 앙숙인 만큼 은원도 깊었기에 화담의 분위기는 금세 씹창나버렸다.
아가레스가 씨익 웃었다.
[뻔뻔함은 악의 미덕이지. 메타트론. 너는 선보다 악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군.]
메타트론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콰쾅! 지면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미카엘이 뛰쳐나갔다. 막 나가는 대천사에 도깨비가 혀를 내둘렀다.
[이것 참 . . . ]
파지직!
미카엘의 주먹은 아가레스를 막아선 내 너클에 닿기 직전 정지했다. 정확히는 푸른 그물에 막혀 반탄되었다. 그나저나 천사 주제에 기습을 날리다니.
[저쪽이 더 마왕 같은데요.]
[실제로 마왕이다.]
무심코 튀어나온 진심에 아가레스가 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흥미롭군요.]
[본신의 힘을 꺼내면 나에 버금갈 정도다. 다만 통제 불가여서 문제지.]
[그거 함부로 밝혀도 되는 건가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악마 학살자가 아가레스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러다 눈 터지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가레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차피 대도깨비가 있는 이상 그는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미카엘을 튕겨 낸 푸른 그물도 대도깨비의 작품이었다. 도깨비 왕을 대행하는 도깨비의 '수좌'들은 존재 자체가 성좌의 억제기나 다름없었다.
성격 더러운 성좌들이 관리국 만큼은 적대하지 않는 이유도 대도깨비 때문이니. 제아무리 전장에서 날고 기는 미카엘이라 할지라도 회담장에서 살인, 아니 살좌를 저지르는 것은 무리인 셈이다.
광견병 걸린 사냥개처럼 분노한 대천사가 대도깨비의 이름을 짓씹듯 불렀다.
[하롱. 이러긴가?]
하롱이라 불린 대도깨비는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뿔을 매만졌다. 안테나처럼 뻗친 그것에 성좌들의 분란을 막기 위한 개연성이 켜켜이 쌓여갔다.
도깨비가 단언했다.
[이 자리는 시나리오의 결론을 정하기 위한 화합의 장입니다. 패악은 불허합니다.]
[흥! 화합은 얼어 죽을.]
[그럼 협상으로 생각하십쇼. 아무튼, 자리로 돌아가시죠. 아니면 강제로 집행 하겠습니다.]
대도깨비가 손가락을 딱 튀겼다.
쿠구구 . . .
소용돌이 치는 게이트 너머로 꺼림칙한 격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정체를 직감했다.
[집행부 도깨비.]
한때 성좌였던, 지금은 추락해 이야기의 부속품이 돼 버린 존재들. 은빛 광채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치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이에 혀를 찬 미카엘은 자리로 돌아갔다. 아예 도발하기로 작정한 듯, 아가레스가 말을 덧붙였다.
[강약약강. 최소한 선은 아니군, 타락한 천사들의 왕.]
잠시 멈칫한 미카엘은 그대로 메타트론의 옆에 착석했다. 대도깨비가 아가레스를 나무랐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 괜한 도발은 삼가하세요.]
[알았다.]
침착함을 되찾은 메타트론이 화답했다.
[강약약강은 그쪽도 다를 바 없군요.]
[그야 난 악이니까. 버겁함은 내 오랜 친우지.]
보다 못한 대도깨비가 다시 손가락을 튕겨 이목을 집중시켰다. 위이잉. 천장에서 내려온 영사기가 성마대전의 순간을 재생했다.
화면 속에서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의 격전이 벌어졌다. 우리엘은 마왕들과 일대 다수로 싸웠다. 라파엘은 물고기로 '헤야릴 수 없는 엄격'의 싸대기를 갈겼다.
아, 저기 내 모습도 보인다.
'혹시 쫄았나요?'
'뇌에 든 게 아무것도 없군요. 당신 대가리는 장식입니까?'
'정정당당은 내다 버렸군요. 당신은 마왕의 품위가 없어요. '
'아공간 코트라. 이제 파밍도 한결 수월해지겠군요.'
'하핫! 어딜 찌르시는 건가요?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나는 아스모데우스다.'
. . . 정확히는 내 무수한 인성질의 향연이 보였다.
이곳저곳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다수의 마왕이 당신에게 적대심을 느낍니다.]
빈대같은 놈들. 하여간 속 좁은 것은 알아줘야 한다.
아니 솔직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원작에 비하면 나는 순한 맛이라고.
[벽을 넘은 자가 '동부 지옥의 지배자'를 바라봅니다.]
[현재 '동부 지옥의 지배자'가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 입니다.]
멋대로 발동된 스킬. 나는 아가레스를 흘겨봤다. 담뱃재가 후두둑 떨어지는 입술이 아주 살짝 호선을 그렸다.
즐겁냐? 난 죽을 맛인데.
대도깨비는 나를 무슨 미친년처럼 보듯 화면을 멀리 치워 버렸다.
[. . . 비록 약간의 변수는 있었지만, 선악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겁니다.]
반투명한 지도가 영상들의 배경에 투영되었다.
알록달록한 지도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여 마치 태극기처럼 보였다.
붉은색은 마왕들이 승리한 곳.
파란색은 에덴이 승리한 곳.
미친 듯이 상승하던 수치는 두 세력을 끝내 양분해 버렸다. 어느 마왕의 허망한 진언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말도 안 돼. 50 대 50 이라니.]
그러게다.
내가 그렇게 도와 줬는데 50대 50?
장난해? 메타트론 일 안 해?!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성운 '에덴'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나는 분노하는 설화를 다독이며 선악의 수장의 반응을 살폈다. 먼저 입을 연 자는 서기관이었다.
[이건 뭐 고민할 것도 없군요. 2차전을 벌입시다. 더 크고 성대하게.]
미친 새끼.
내가 봤을 땐 쟤도 아스모데우스 같은 놈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종말과 미식에 미친 종자라면, 서기관은 절대선에 눈깔이 훼까닥 돌아버린 정신병자였다. 오죽하면 같은 편 성좌들조차 질린 눈으로 서기관을 바라보겠나.
[어. . . 서기관?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우리엘이 메타트론을 타일렀다.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지만.
[우리엘. 설마 지금 악과 타협하자는 겁니까?]
[아니 내 말은, 우리 쪽 피해도 심하니까 뒤로 미루는 게 어떠냐는 거지.]
아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옳은 말을 했군.]
[■쳐, 이 마왕 ■끼야. 너한테 한 말 아니야.]
[. . . ]
저 정도면 이중인격이 아닐까?
[뭘 꼴아봐?]
잠시 침묵한 아가레스가 메타트론을 향해 말했다.
[원래 대천사는 입이 험한가?]
[이건 . . . 하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메타트론이었다. 욕쟁이 천사들. 심하면 하얀 마왕이라 불리는 막무가내 성좌들을 제어하기 위해 품위 유지용 필터링까지 걸어 놨건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대천사들의 입담은 필터링이 있으나 마나 한결 같았다.'
아마 그런 생각이지 않을까?
[벽을 넘은 자가 긍정합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서기관은 결국 변론을 포기했다.
[저희 잘못이군요. 요피엘? 우리엘이 진정될 때까지 지켜봐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우리엘의 뒷덜미를 잡고 퇴장했다.
[나 억울해 요피엘!]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일련의 콩트를 보며 마왕들이 킬킬댔다. 예제공을 비롯해 천사들한테 된통 당한 마왕들은 "내가 저딴 성좌한테 당했다니" 하는 눈빛으로 경멸했다.
이 모든 경광을 일등석에서 관람한 라파엘이 마른세수를 했다. 메타트론이 말을 돌렸다.
[크음. 그러고 보니 당신의 의견을 묻지 않았군요. 아가레스.]
아가레스가 특유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더 이상의 전쟁은 반대다. 무가치, 무의미한 연장전이야. 그리고 너도 나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지. 불완전한 무대에서 가장 오래된 선악을 논할 작정 인가?]
선과 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숨 막히는 담화가 오갈 것을 직감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과 믿음입니다.]
[믿음을 논할 시기는 지났지. 메시아는 죽었다.]
[신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계십니다.]
[신은 없어. 잔혹한 이야기만이 있을 뿐이다.]
아가레스는 피우던 궐련을 집어 던졌다. 잔재만 남은 그것은 바닥과 충돌하자 산산조각이 났다.
[너와 만나면 항상 이런 식이군.]
[그러니까 선과 악이죠.]
[아니다. 나는 그저 네가 늘여놓는 헛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 반발심이 바로 선악의 충돌입니다. 그대가 악인 걸 부정하지 마세요, 마계 동부의 지배자.]
[나는 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부정할 수 없지. 너처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에 묶여 있으니까.]
문답은 메타트론에 의해 종결되었다. 아마 더 이상 이야기했다간 자신들이 소유한 '벽'이 거론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한 발 물러선 듯 보였다.
[좋습니다. 이번엔 당신의 의견을 수리하죠.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뭐지?]
[이번 성마대전의 승패.]
메타트론의 시선이 대도깨비로 향했다.
'하롱은 드디어 본 궤도에 올라선 회담을 내심 반가워 하며 메타트론의 언사에 긍정했다.'
[맞습니다. 우연하게도 이번 성마대전은 50대 50의 승률로 끝났죠. 본래 국지전은 홀수 개로 열리므로 이런 일은 없어야 했지만, '누구' 덕분에 일이 틀어졌습니다.]
음, 그 '누구'가 사건의 원흉이군. 근데 왜 도깨비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일까?
도깨비가 자료 화면을 제시했다.
새빨간 종말의 하늘.
그 하늘보다 더 짙은 혈액.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고스로리 차림의 . . . 음?
[. . . 왜 제가 보이는 거죠?]
도깨비가 사건의 전말을 밝혔다.
[3명의 마왕과 '물병 자리에 핀 백합'이 있던 전장입니다. 본래 마왕 쪽이 승기를 잡았지만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바위의 마신'을 살해하며 구도가 달라졌죠. 결국 성마대전이 중단될 때까지 명확한 승패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
회의에 참석한 모든 성좌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에덴 측은 뭔가 장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고위 마왕들은 희대의 패륜아를 보는 눈초리였다.
뭔가 바뀌지 않았니, 너희들?
아무튼 막대한 격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숨 좀 쉬자 이것들아! 어쩔 수 없이 나도 격을 끌어올렸다. 일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진 격이 주변 마왕들을 압박했다.
일촉즉발의 대치는 대도깨비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콰르릉!
개연성의 폭발.
이야기꾼의 분노.
벼락같은 스파크가 선악을 가리지 않고 직격했다. 약간 따끔한 정도지만 "나 빡쳤다"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도깨비 앞에서, 더 이상 나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살다 보니 도깨비가 고마울 때가 다 있네.
[힘자랑은 나중에 하시죠. 일단 이 국지전의 선악을 가리는 게 우선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창이 나타났다.
<서브 시나리오 - 선악의 이중주>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국지전의 선악을 결정하시오
제한 시간 : ??
보상 : ??
실패 시 : ??
그리고 메타트론과 아가레스가 동시에 말했다.
[당연히 선 입니다.]
[당연히 악 이다.]
그 끔찍한 불협화음에 나는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파국이었다.
.
.
.
아가레스가 품속에서 궐련 3개비를 꺼냈다. 각각 근력, 민첩, 마력에 버프를 제공하는 성흔이었다.
- 타닥.
궐련에 불을 붙이자 아가레스의 눈에 붉은빛이 돌았다. 이에 메타트론이 흐뭇하게 웃었다. 메시아의 은총이 깃든 성유물이 그의 손에서 반짝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2차전 밖에 답이 없는 것 같군요.]
[시끄럽다. . . 하지만 같은 생각이군.]
옥좌에서 일어난 아가레스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대도깨비에게 질문했다.
[선악을 정하는 방법은 따로 정해진 게 없나?]
서브 시나리오 창에는 두루뭉실한 클리어 조건만 있을 뿐. 미션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불명확했다.
대도깨비가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작은 눈이 얄밉게 휘었다.
[방금 정하신 것 아닙니까?]
[. . .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군.]
[성마대전 만큼이나 '평화'라는 단어가 안 어울리는 시나리오가 있을까요? 다만, 정해진 공간에서 진행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이번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개연성 그물에 저지당한 이후, 내내 꿍해있던 미카엘이 도깨비의 본심에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참가좌들이 하나둘씩 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쿠구구. . .
경직된 공기. 육중한 중압감.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나 상황을 관전했다.
긴 탁상을 실선으로, 회담장을 큰 사각형으로 가정한다면 2차전의 무대는 고작 2칸 짜리 원고지였다.
[설화, '마왕 학살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고대의 모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10번째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
그리고 이번 시나리오의 종착점은 고작 원고지 두칸에 담기에는 스케일이 컸다.
성마대전에 이름 값에 못 미치는 협소한 무대.
'이를 알아차린 도깨비가 움직였다.'
-타악.
지팡이가 닿은 곳에 생긴 검은 구멍.
작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無低坑)은 공기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풍경이 요동쳤다.
간혹 무저갱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었으나 바람 소리에 삼켜져 닿지 못했다.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 회담장은 이내 구멍이 사라지자 거대한 돔구장으로 변신했다. 높이가 웬만한 산에 버금가는 상식 밖의 규모였다.
도깨비가 만족스러운 듯 넥타이를 힘껏 여맸다.
[무대가 갖춰졌군요.]
아가레스가 허리춤에 달린 칼집에서 마검을 뽑았다.
[절반. 딱 절반이다, 메타트론. 그 이상 전투 불능이 되면 패배한 것으로 간주하지.]
나는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결투에 열광하는 아가레스의 모습을 되세겼다. 비록 악에 고정된 처지에 회의감을 느끼지만, 그의 본질은 마왕이었다.
싸움을 피하는 작자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기면 반겼지.
[설화 '가장 오래된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서열 1위 바알이 승천한 이래로 줄곳 마계 먹이사슬 최정상에서 군림해온 지옥의 군주. 그에 대항하여 찬란한 광휘를 짊어진 대천사가 움직였다.
[설화,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다.
<서브 시나리오 - 선악의 이중주>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끝까지 생존하여 국지전의 선악을 결정하시오. 전투 불능에 빠지거나 회담장을 벗어나면 참가좌 목록에서 제외합니다.
제한 시간 : ??
보상 : 소속된 진영의 승리
실패 시 : 소속된 진영의 패배
개전의 신호였다.
*
- 끄아아아!
- 죽어!!
- 너나 죽어!
몇 분전까지 멀쩡하던 회담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 카카칵!
전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종말의 하늘을 업은 메타트론과 아가레스가 격전을 벌이고.
- 화르르!
우리엘은 지옥 염화를 칼에 두른 채 상위권 마왕 넷과 분전했다.
- 콰쾅!
미카엘은 헤아릴 수 없는 엄격, 역천의 사냥꾼, 별과 논리학의 군주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도 전장을 휘저었다.
[순위가 낮은 마왕부터 공략해!]
설화급 밑, 혹은 위인급 성좌들은 붉은 코스모스 지휘관의 리더십으로 마치 학익진을 연상케 하는 진영을 꾸렸다.
마왕들은 각종 아이템과 설화를 총동원하여 전선을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인외 마경의 소굴에서 나 역시 쉴 틈이 없었다.
정확히는 에덴과 맺은 존재 맹세 때문이었다.
*
1. 을(아스모데우스)는 갑(에덴) 소속 성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3. 갑은 을의 생존권을 보장한다.
그러니까 내 영혼과 육신이 사맛디 아니하게 되어 명계에서 페르세포네와 티타임을 가지지 않는 한.
나는 에덴의 살아 있는 샌드백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 . .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어라!!"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마왕 한명을 척살한 천사장이 기습을 감행했다. 대놓고 "죽어라!" 라고 외친 시점부터 기습이라고 보기도 애매했지만.
- 쉬익!
덩치와 달리 몸놀림이 재빨랐다. 순간 [바람의 길]이라도 익혔나 의심될 정도였다. 복부를 파고든 찌르기는 대단히 신속했다.
나는 오른발을 대각선 뒤쪽으로 옮겨 상대방에게 측면을 보였다. 상체가 완전히 틀어진 탓에 성창은 허공을 찔렀다.
직선적인 찌르기가 지나가면 이제 상대방의 틈이 보일 차례. 내가 헛찌는 창을 쳐부수려고 하자 천사가 다급히 설화를 운용했다.
[설화 '창술의 달인'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야 이게 천사냐? 전사지.
찌르기가 순식간에 휘두르기로 전향된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창대가 유도탄처럼 달려든다. 변화무쌍한 흐름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발에 힘을 빼고 너클로 충격을 상쇄했다.
- 카카칵!
불꽃이 튀기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신체가 뒤로 밀려난다. 거리가 멀어진 상황. 천사가 창을 투척하기 전에 나는 한 발 앞서 성흔을 전개했다.
['핏빛 손아귀'를 발동합니다.]
성좌의 근간이 되는 설화.
그 설화를 재현하는 특성.
화신에게 부여하면 '성흔'으로 분류되는 그것은 설화 자체를 담습한 경우가 대다수라 일반적으로 스킬보다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울컥!
피보라를 일으키며 내 손에서 피어난 붉은 꽃잎은 이내 파리지옥으로 돌변하여 천사의 날개와 사지를 속박했다. 천사는 벌레처럼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오해하지 마라. 그냥 탈출을 포기한 것뿐이니.
천사가 수치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크흑! 이제 날 어떻게 할 거냐?!]
[음 . . . 이렇게?]
무릎을 조금 끌어올리고, 팔을 뒤로 뺀 뒤, 허리를 비틀면서, 전력으로 . . . !
[자, 잠깐! 내발로 나갈 테니!]
나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천사를 잡은 불투명한 손이 투석기처럼 천사를 발사했다.
- 슈욱!
[끄아아아!]
비명을 길게 늘어뜨리며 천사가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시간이 흘러도 개연성 후폭풍의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성공이네요.]
지난 6개월 동안의 테스트 결과, '위해'의 범주는 화신체에 손상이 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단지 강한 악력으로 꼼짝달싹도 못하게 속박한 후 무대 밖으로 내던지면 시나리오 룰에 따라 천사를 제거할 수 있었다.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착한 마왕은 죽은 마왕!]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 머리 천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눈이 맛이 간게 머리를 다친 모양이다.
- 쉬익!
허나 그녀가 쏜 화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공기를 가른 화살이 머리카락을 관통했다. 내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성흔을 발휘했다.
쩌저적.
전래 동화 속 마녀의 손톱처럼 길게 뻗친 클로.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러 하얀 날개를 움켜잡았다. 당황한 소녀가 마구잡이로 화살을 난사할 즈음, 나 또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까꿍?]
[히익!]
내 얼굴을 보고 식겁했는지 활대를 쥔 손이 느슨해졌다. 이게 웬 떡이야.
활대 끄트머리를 잡아 비트니 병장기가 무력하게 끌려 나왔다. 그대로 아공간 코트에 수납했다.
[선물 고마워요.]
[어 . . . 어?!]
어깨를 툭 밀치자 천사가 저항 없이 밀려났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와 코트를 번갈아 봤다.
- 콰직!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화살이 그녀의 뒤통수를 관통했다.
[ . . . ]
적의 무기를 뺐어 쓴 '불화의 조성자'가 천사의 시체를 탈취했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이내 뻘줌한 듯 변명했다.
[그 . . . 장난감을 뺐어서 미안하군.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
나는 말없이 그가 하는 짓거리를 구경했다. 무슨 아이템으로 외관을 바꾼 그는 적진 한복판에서 제가 죽인 천사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소리쳤다.
[눈먼 화살에 아군이 당했다! 활을 잡은 천사는 활을 내려 놓아라! 마왕 척결보다 동료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멈칫한 천사 2명이 이름 모를 설화에 목이 달아났다.
나는 그들이 떨어뜨린 활을 낚아채 한 개는 아공간 코트에 넣고 남은 한 개는 불화의 조성자한테 던졌다.
인두겁을 벗어 던진 그가 두 손으로 활을 받았다.
[이건?]
[그쪽 몫.]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불화의 조성자를 놔두고 지면에 착지했다. 고개를 들자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 푸른 스파크가 오고 갔다.
잔존 병력은 초기의 3분의 2가량.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승기는 절대선 쪽으로 기운지 오래였다.
천사와 마왕이 대거 탈락하자 우리엘이 지옥염화를 퍼부을 공간이 생겨났고, 미카엘이 하위권 마왕을 각개격파하는 쪽으로 노선을 틀면서 마왕의 수가 급감한 탓이다.
그래도 나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어김없이 짓쳐드는 성창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째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 타앙!
육중한 타격음. 그에 비례하는 충격량에 나는 몇 발자국 물러섰다. 동등한 격임에도 상성 차이 때문에 밀린다는 게 서러웠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를 유린한 금발의 천사가 설화를 운용했다.
[설화 '토빗기의 천사'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오시합니다.]
토빗기는 가톨릭의 정경으로 아스모데우스와 라파엘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설화에서 라파엘은 물고기 쓸개를 넣은 향로로 아스모데우스를 몰아내 이집트 사막에 유폐시켰다.
그 와중에 승리설화까지 쓰는 라파엘의 철두철미함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저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사이 아니었나요?]
[ . . . 어딜 봐서.]
그 뒤로 공방이 빠르게 오고 갔다.
주로 내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형세.
아까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무력화시킬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그걸 사용할 때인가?
['적응력 Lv.10'을 발동합니다.]
['격투술 Lv.10'을 발동합니다.]
한 번에 스킬을 퍼붓자 라파엘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이때를 틈타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를 간파합니다.]
'눈앞의 마왕을 상대하는 라파엘의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은 것은 그때였다.'
.
.
.
6개월 동안 전장을 구르면서 알게 된 점은 내가 뒤바뀐 현실에 너무 잘 적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응력 Lv.10]의 효과 덕이라 생각했지만.
- 푸슉!
서열 67위 마왕의 복부에 망설임 없이 칼침을 놓는 시점에서 내 안의 무언가가 변질 되었음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곧 진실로 이어졌다.
[몰입도가 상승합니다.]
그래. 바로 저거다.
저 메시지가 뜨면 내게 남은 일말의 죄악감조차 씻겨져 사라졌다.
‘제 4의 벽'처럼 나와 등장인물을 분리하는 느낌은 아니고. 오히려 현실감을 극도로 활성화시켜 내가 정말 ‘아스모데우스’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게 왜 ‘벽을 넘은 자’와 관련 있을까?
[‘벽을 넘은 자’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당신을 조롱합니다.]
전용 스킬이 저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 ‘제 4의 벽’의 표절 같은 놈은 알고 보니 자아까지 있었다.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생각을 불쾌해 합니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벽을 넘은 자’의 기능은 한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서열 25위 마왕에게 목이 뜯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은 능력. 나는 그것을 ‘담넘기’라 이름 붙였다.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작명 센스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 . . 조금 촌스러운 호칭이지만 그 효과는 강력했다.
스타 스트림에서 이야기는 곧 삶이자 가치관이고 마음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보호 받는다.
내 전용 스킬은 그 단단한 벽을 넘어 이야기를 고쳐 쓸 수 있는 힘이었다.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나온 문구를 떠올렸다.
-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타인이다.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 그리고 오직 나만이 타인을 넘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부름에 답합니다.]
- 스르르. . .
물속에 잠긴 듯한 부유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대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의 움직임이 수족관을 관통하는 총알처럼 서서히 느려지다가 이내 정지했다. 장내가 침묵에 젖었다.
시곗바늘이 멈춘 세계에서 라파엘의 외관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뼈와 살이 사라지고 검은 활자만이 남았다. 어떤 것은 선명하고 어떤 것은 흐릿했다.
복잡한 인과 관계로 엮인 한 남자의 역사는 그의 키만 한 책장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최근에 집필된 책을 꺼내 읽었다.
‘토빗기에서 이어진 악연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아스모데우스가 갑자기 머리가 꽃밭이 된 채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인 마왕은 선악의 대립을 부정하며 자유의지를 표방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서기관이 그녀를 감시하라고 하여 붙어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 . . 마왕을 유인하는 과정에서 마왕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진체와 동조율이 높은 화신체 곳곳에 금이 갔다. 솔직히 그녀가 죽든 말든 별 관심은 없었지만 에덴이 그녀의 생존을 약속했으므로 나는 마왕이 화신체를 수복할 수 있게 설화 팩을 건넸다.’
라파엘의 회고록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남보다 못한 사이라서 그는 거의 던지다시피 설화팩을 내게 넘겼다.
‘. . . 그러자 마왕이 고맙다고 답했다. 메시아의 은총을 받은 나는 그것이 정말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감사임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아는 그녀는 혀에 가시라도 돋은 인간처럼 비아냥거림을 일삼았는데 . . . 정말 그녀는 내가 아는 아스모데우스인가?’
날카로운 촉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었다.
최대한 아스모데우스의 말투를 똑같이 따라 했는데, 이 눈치 빠른 천사의 의심을 피하는 데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라파엘의 이야기를 한 글자씩 꼼꼼히 읽어 나갔다.
‘마왕의 감사는 끊이지 않았다. 비아냥거림이 쏟아져 나와야 할 입에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따위의 단어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 출처가 악의가 아니라서 내 의문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래서 물었다. 너는 왜 고마워하는가. 마왕이 답했다. 도와준 이한테 고마워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 아니냐고. 상식적인 답변에 대답이 궁해졌다.’
다행히도 내 정체가 들통 나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이에 안도하며 나는 일기장에 적힌 그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 님 왜 자꾸 고마워하삼?
- . . . 고마우니까 고맙다고 하겠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못마땅함에서 우러나온 질책인 줄 알았는데 이런 본심이 숨어 있을 줄이야.
‘내가 아는 당연함은 선과 악은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진리였다. 마왕이란 족속들은 빈말로도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야기는 탐욕과 애욕, 파괴에 물들어 누군가를 파멸로 몰고 갔으니. 에덴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반면 역변한 마왕은 세상에는 선악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며 무조건적인 배척은 당연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 . . 그녀와 나의 당연함의 기준이 달랐다.’
문단이 바뀌었다.
‘나는 그 간극을 지우고 싶었다. 동시에 호기심이 샘솟았다. 물론 뱀의 속삭임에 넘어간 태초의 인간처럼 금기를 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단지 내가 믿는 선을 더 공고히 하고자 하는 단계였을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대화가 오고 간 이유도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 . .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각진 글씨체가 아주 살짝 둥글어졌다.
‘물론 선이 악을 척살해야 한다는 신념에 변화는 없어 나는 지금 마왕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마왕은 직접적인 공격에는 제한이 걸렸으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 존재 자체로 거슬리는 변수였으니까.'
'다만,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정해진 이야기에 휘둘리지 말고 믿는 길로 나아가라니 . . .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그 대화를 떠올리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 . . 잡념을 . . . 위해 창을 . . . ’
문단의 마지막에는 적히다 만 문장이 있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놓인 여백. 눈을 가늘게 뜨자 차츰 선명해지는 단어 사이의 이음쇄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잡념을 접어두고 내가 믿는 선을 위해 창을 휘둘렀다.’
나는 벽을 넘은 자에게 요청했다.
“고쳐 쓴다.”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 여백이 입을 벌렸다.
- 콰직!
그리고 흐릿한 글자들을 집어삼켰다. 미완성된 문장을 나는 앞에서 읽은 이야기와 연결되도록 수리했다.
‘하여 나는 내게 잡념을 불어넣은 그녀의 본심을 묻기 위해 창을 거두었다.’
[원고가 수정됩니다.]
- 츠츠츳!
막대한 개연성 스파크와 함께 내가 적은 문장이 그의 삶으로 녹아들었다.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을 찌푸린 라파엘이 창을 거두는 순간.
- 퍼엉!
왼쪽 팔꿈치 아래가 소멸했다.
타인과 개인의 구분을 넘어 전능해진 대가였다.
[‘벽을 넘은 자’가 입맛을 다십니다.]
전용 스킬을 설화급 성좌한테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얼마 만큼의 개연성이 필요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왼쪽 팔의 절반에 해당하는 설화를 손실했다.
[. . .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군요.]
고통은 없지만 설화 자체에 손실이 생기니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허전한 팔꿈치를 주무르며 라파엘을 관찰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기사 자신은 건들지도 않았는데 상대는 팔 한쪽이 날아갔으니. 큰 무리는 아니다.
[님 잠깐만 - ]
라파엘이 막 충격에서 헤어나왔을 때.
[그럼 나중을 기약하죠, 라파엘.]
나는 36계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에 날개를 펼쳐 경기장 밖으로 이탈한 나를 라파엘은 닭 쫓던 개의 심정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선이 이기든 악이 이기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
이번 성마 대전은 에덴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아가레스가 분전했지만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내가 슬금슬금 기어나왔을 때, 살짝 빡친 아가레스가 나를 추궁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팔꿈치 아래로 텅 빈 왼팔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심을 무마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한 메타트론은 한낮의 밀회로 내 공로를 치하했다. 거기에 성유물 몇 개와 코인을 덤으로 얹어 주었는데 이미 파밍한 것이 대부분이라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라파엘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언젠가 만나겠지.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은 내 왼팔을 보며 혀를 찼다. 정작 그 역시 다리 병신이 된 터라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성마대전은 막을 내렸다. 지친 성좌들과 마왕들이 시나리오를 이탈했다.
- 짜악!
대도깨비가 박수를 치자 광오한 무대가 순식간에 흙으로 돌아갔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 돌아가십니까?]
[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요.]
대도깨비는 어깨를 으쓱이곤 포탈을 넘어 사라졌다.
나를 제외한 배우들이 전부 퇴장했다.
텅 빈 무대.
나는 그곳에 홀로 남아 땅 밑으로 꺼지는 태양을 바라봤다.
스러진 별의 파편들이 지상에서 반짝였다.
화려한 수체화에는 소리가 부재했다. 나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나는 뒤로 벌러덩 누워 팔배개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자꾸 미끄러졌는데 이는 내 왼팔이 절반밖에 남지 않은 탓이었다.
“. . . 이거나 먼저 해결해야겠네요.”
나는 코트에서 설화팩을 꺼내 앙 깨물었다. 무미무취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위로 직행했다. 당장의 재생은 무리여도 설화를 수복하는 데 도움은 될 터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자니 문득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전생에는 그래도 함께 밥 먹을 친구가 있었는데 여기는 . . . 아! 한 명 있긴 하다.
나는 핫라인에 저장된 연락처를 열었다. 그리고 '중2병'으로 저장된 연락처를 클릭한 다음, 타자를 입력했다.
- 혹시 시간되나요?
몇 초 후 답장이 왔다.
- 뭐야?
- 심심하면 밥이나 같이 먹을래요?
- . . . 어딘데.
- 성마대전 무대요.
- 메뉴는?
- 설화팩이요.
그리고 답변이 돌아오지 않아 나는 시스템 창을 내렸다. 읽씹이었다. 조금 괘씸하긴 했지만 딱히 강요하고 싶진 않아서 나는 원래 계획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 . . 그리고 조금 있다가 12첩 반상을 등에 짊어진 채 낙하하는 소년을 보고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