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치셈?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삼.]


예상했던 반응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관계를 이제 와서 회복하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은 나라도 정신 나간 소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라파엘이라고 오죽하겠는가. 나는 곱게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감상하며 우리가 마땅히 친구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설파했다. 


[지금까지 과거를 청산하자는 게 아니예요. 그러기엔 저희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으니까.]


[감정이고 자시고 나는 선이고 님은 악임. 선과 악은 양립할지언정 타협할 수 없다.]


라파엘의 진지한 말투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힘껏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은 직접 설화를 운용하는 것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나는 아스모데우스처럼 여유롭게 웃으려 노력했다. 


[몰입도가 높아집니다.]


[후후. 이상하네요. 그럼 '하늘의 서기장'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의 핫라인을 설명할 수가 없는걸요?]


라파엘은 잠시 멈칫했다. 

에덴의 서기장과 마계의 2인자의 밀담.

확실히 그것은 타협의 일종이었다.


[ . . . 어른들의 사정임. 님하곤 관련 없음.]


[저도 나름 수천 년은 살았는데.]


[메타트론은 너보다 오래 삼.]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


에덴의 유일한 신화급 성좌를 거론하면서 라파엘은 성창을 바로 세웠다. 추정컨대 지난 성마대전에서 아스모데우스를 패퇴시킨 성유물로 보였다. 


[아무튼 할 말은 그게 끝임?]


이대로 질질 끌다간 성창이 날아올 듯해, 나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거절이라니. 아쉽네요. 저랑 친구가 되면 친구비도 드릴려고 했는데.]


창을 높이 세운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 흥미를 보인다.


[친구비?]


[대국적으로 보자고요. 당신 말마따라 당신은 절대선 소속 성좌 입니다. 그럼 현재 당신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라파엘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문답 무용으로 성창을 던졌다. 


저 성질머리 하고는! 나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슈우욱. 간발의 차로 빗겨 간 하얀 별동별은 지면에 부딪치기 직전에 정지한 뒤 부메랑처럼 본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라파엘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님 대가리.]


[. . . 정확히는 마왕의 목이죠.]


표현을 정정하고 나는 말 많은 악당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와 친구가 되어 주면 에덴 측에 다른 마왕들을 유인해드리죠.]


라파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님한테 좋은걸 아님? 님 저번에도 마왕 승급전에 혈안이 돼서 깽판 치고 다녔잖슴.]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그 미친 짓이 에덴한테도 이득이 되었죠.]


에덴의 대천사는 앵간한 중하위권 마왕은 압살하는 실력을 보유했다.


설화부터가 극상성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권선징악.


그 기나긴 역사에 힘입어 대천사들은 마계를 유린했다. 게다가 각자도생인 마계와 달리 그들은 성운 에덴으로부터 각종 지원까지 받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 접시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마왕들은 힘을 모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협공.


그것은 50그램 짜리 무게추에 10그램 짜리 무게추 5개를 얹어 대응한 격이었다. 


놀랍게도, 임시방편에 불과한 전술이 꽤 효과를 봤다. 작중 우리엘이 마왕들에게 포위되어 적잖게 고생할 정도니. 인해전술이 이렇게 무섭다.


아무튼, 전선이 고착된 현 상황에서 에덴 측에서도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왕 쪽에서도 겉도는 아스모데우스의 협조는 에덴 측에서도 나쁘지 않을 제안일터. 


게다가 김독자 컴퍼니가 없는 현재 시점에서 메타트론이 바라는 것은 선악의 무궁함이 아니라 절대선의 승리.


그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대천사가 부하직원들에게 이번 전쟁의 중요성을 넌저시 흘렸을 거라고. 나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라파엘이 섣부른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 것도 가설의 신빙성을 높였다. 


강한데다 미쳐서,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년이 알아서 기겠다는데, 굳이 선제공격을 날려 개연성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겠지.


사유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질 무렵, 한차례 머리를 쓸어 넘긴 라파엘이 다시 대화에 참여했다. 나는 범람하는 사고의 연쇄를 잠시 진압하고 천사의 진언을 경청했다. 


[그래도 안됨. 님은 믿음이 안 감.]


. . . 이러면 정말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모션을 취했다.


[존재 맹세를 맺죠.]


[진심임?]


존재 맹세.


상호 동의 하에 존재 맹세를 거행하면, 성좌들은 자신이 내건 조약을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리스 신들이 뭐만 하면 "스틱스강에 맹세하지"라고 지껄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당연히 이는 서로에게 큰 부담. 즉, 족쇄로 작용한다. 조금 더 비약하면 나는 앞으로 에덴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라파엘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머리맡에 약한 스파크가 일었다. 


나는 그가 마침내 성창을 거두고 나서야 마음을 한결 놓을 수 있었다. 


[. . . 서기관이 허락함.]


영 못마땅한지 목소리가 침울했지만, 허락은 허락이었다. 


[다행이네요.]


나는 문득 나와 척진 성좌가 우리엘이 아닌 라파엘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독자한테 무한한 애정을 주는 천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닥치고 뒤져!"를 시전하며 돌진했겠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라파엘이 손가락을 튀기자 허공에 계약서가 떠올랐다.


내역은 아래와 같았다.


+

1. 을(아스모데우스)은 갑(에덴)소속 성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2. 을은 갑이 지목한 마왕을 유인해야 한다.

3. 대신 갑은 을의 생존권을 보장한다. 

4. 본 계약은 성마대전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유효하다. 


상당히 악질적이었다.


특히 '성마대전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라는 유효기간이 거슬렸다.


원작의 내용을 아는 독자로서, 이번 시나리오가 김독자 컴퍼니가 참여하기 전까지 결말을 맺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존권 보장 . . . 


조금 비틀린 관점에서 살피면, 유인 과정에서 입는 부상에 에덴은 일제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숨만 간당간당 붙어 있어도 부려 먹겠다는 뜻이고. 


시꺼먼 속내가 훤히 보였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기에 나는 에덴의 조건을 수락했다.


일단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만족할 만한 신메뉴를 선보여야 했으니 . . . 


[계약이 체결됩니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원인 모를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라파엘을 흘깃 쳐다 봤다.


용건이 끝난 대 천사는 날개를 펼쳐 하늘로 부상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오시하더니 주변 천사들을 이끌고, 막대한 개연성 스파크가 폭발하는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화, '마계의 배신자'가 탄생했습니다.]


[아 . . . ]


밀려드는 고양감에 나는 탄식했다.


전독시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일궈낸 설화.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이야기였다.


비록 제목 센스가 좀 구리지만.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 츠츠츳!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훑었다. 


설화 명칭을 수정했다고? 무슨 컴퓨터 파일 이름도 아니고. 


연달아 닥친 변고에 정신이 없어 무심코 넘어갔지만, 내 전용 스킬은 정말 희안했다. 이따 상태창이라도 확인해 봐야지.


[으음 . . .]


등 뒤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흑염룡을 내려놓았다. 


[정신이 드나요?]


흑염룡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겼다. 이렇게 보니 나도 흑염용도, 먼지를 뒤집어써 꽤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혹시 머리가 다쳤는지 의심이 돼 밤하늘보다 어두운 머리카락을 들쳐볼 찰나, 흑염룡이 경기를 일으키며 내 손등을 쳤다. 


[왁!]


[윽!]


막대한 충격량에 눈물이 찔금 나왔다. 장난 안 치고 정말 팔이 뜯기는 고통이었다.


정신을 차린 흑염룡은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어 . . . 그 . . . 아까 너도 이 몸을 때렸으니까 이걸로 퉁친다!]


그래,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맘같아선 "이 싸가지 밥말아 먹은 새끼가. 생명의 은인한테 그게 할 소리냐!"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흑염룡의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받아들였다.


[에휴. 빨리 성운으로 돌아가기나 하세요.]


흑염룡은 성운 '흑운'의 우두머리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금 성운은 난리가 났을 거다.


[아, 맞다!]


. . . 얘 진짜 생각 없이 사는구나. 


그렇게 순조롭게 해어지려고 하는데 시나리오를 이탈하려는 흑염룡이 갑자기 내 소매를 붙잡았다.


[크흠! 너에겐 신세를 졌군. 그런 의미에서 이 몸의 수발을 들 기회를 주지.]


선물로 벌칙을 주는 게 맞나? 


나는 가볍게 거절했다.


[오늘은 바빠서요. 나중에 고민해 보죠.]


내 거절에 움찔한 흑염룡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핫라인이라도 . . . ]


어째 묘하게 저자세다? 


나는 자기가 말하고도 안절부절 못해 "오해하지 말라." "그냥 호기심이 생겼을 뿐" 을 시전하는 흑염룡을 물그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얘 친구 없구나.


문득 동질감이 든 나머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흑염룡과 핫라인을 개설했다.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에서 용이 아니라 강아지가 연상되었다.


묘하게 뿌듯했다. 


그래, 원래 아싸끼리 돕고 사는 거니까. 


나는 손을 흔들어 새로 사귄 친구를 배웅했다. 용이 자리를 뜨자 일대가 침묵에 잦아들었다.


낯익은, 음울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나름 볼 만한 이야기였다.]


[그런가요?]


라파엘의 등장에도 시나리오를 이탈하지 않은 아몬이 계곡의 그림자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혹시 '미식협'이라고 들어 봤나. 너 같은 별종들이 득실득실한 연회인데. 관심 있다면 초대해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죠.]


[좋아.]


그 단말마를 남긴 아몬은 검은 날개를 펼친 후, 라파엘이 떠난 방향으로 사라졌다. 오늘 라파엘이 고생 좀 하겠네.


아무튼, 이로써 일대가 텅 비었다.


배우들이 퇴장한 무대에서 나는 홀로 남아 여운을 삭혔다.


잠깐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지나친 만큼 곱씹을 거리도 많았다. 시간이 압축된 느낌이랄까. 몰려오는 피로감에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빛이 사라진 자리를 활자가 대신했다. 


 '어쩌면 내게 결말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작가와 주인공, 독자가 만들어 낼 별들의 몰락 속에서 피어날 비극의 서장.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몰입도가 고조됩니다.]


나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이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는 희망보다 암울한 미래가 먼저 떠오르고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일련의 동작에 불과한 행위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것은 삶의 무게였다. 


'그래도 살아가야지.'


모두에게 1인분씩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는 스스로가 주인공인 유일무이한 설화였다. 


그 기회를 내 발로 차버리겠다는 것은 . . . 아스모데우스 식 표현으로 별미를 땅바닥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정했다.'


하여, 나는 살아갈 것이다. 


먹고, 자고, 놀고, 싸우고, 죽이고, 탐하고, 관망하고, 개입하고, 쌓고, 적어가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채로.


그것은 내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덧 별자리가 한 발자국 식 움직여 있었다. 촉촉한 눈동자에 비친 빛의 잔상을 헤아리며 나는 작게 속삭였다.

[상태창]

+

인물 : 아스모데우스
수식언 : 격노와 정욕의 마신 
특성 : ■■■ ■■ ■■(신화), 타락(전설)
전용스킬 : [벽을 넘은 자 Lv.??], [매혹 Lv.10], [적응력 Lv.10], [광전사 Lv.10]

필터링된 특성과 전용 스킬을 빼면 '격노와 정욕의 마신'에 걸맞은 능력치였다.

[필터링은 대강 알겠지만 . . . '벽을 넘은 자'는 잘 모르겠군요.]

벽이란 단어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김독자의 '제 4의 벽'이었다. 자신의 신을 지키겠다는 의념만이 남아 끝내 말더듬이가 되어 버린 가엾은 도깨비왕.

그것은 현실과 무대를 구분짓는 경계이자 동시에 '최후의 벽'의 파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최후의 벽을 넘은 건가? 

. . . 아니다. 만약 내 영혼이 정말로 최후의 벽을 넘었다면 현 세계선의 도깨비 왕과 벽 뒤에 숨은 '가장 오래된 꿈'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김독자가 말했죠. 운명은 비유로 점칠되어 있다고.]

본작의 설정과 매듭짓기를 포기한 나는 벽이 가진 속성에 주목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직적인 이미지로 대변되는 구조물은 문학적으로 단절과 고립, 경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였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졌다. 뭐, 대충 그런 의미일려나?]

더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나중에 차차 알아보기로 했다.

- 띠링.

슬슬 바빠질 것 같으니.

[마계 서열 15위를 43번 게이트로 유인하세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아주 뼛속까지 우려 먹을 작정이구나.

나는 한탄하며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올이 나간 스타킹에서 따다닥 정전기가 튀었다.

거추장스러워 나는 스타킹을 벗어 골짜기 밑으로 내던졌다. 지금 보니 구두도 다 찢어졌네. 나는 순식간에 맨발이 되었다.

평소 외출을 삼가하는지 아니면 원체 피부가 좋은 건지. 뽀사시한 속살이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흙먼지 가득한 지면에 내딛곤 마왕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서기관은 서열의 고저를 막론하고 타겟을 지정했다.

나보다 약한 놈은 내가 처리하면 되지만, 상위권 마왕들은 힘에 부쳤다. 

고로 나는 서열 30위 이내에 위치한 후보군을 추려 에덴이 지정한 장소로 유인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세 가지라면, 그들을 유인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하극상을 벌이는 것이다.

[서열전을 신청하죠.]

[이 몸이 그럴 이유가 있나?]

[혹시, 쫄?]

[ . . . ]

순위가 30위를 넘은 마왕들은 자기 강함에 자부심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 성질만 살살 긁으면 알아서 쫓아왔다. 그리고 국지전에서 대천사를 만나 탈탈 털렸다.

아마 "아스모데우스 정도는 내가 잡을 수 있지" 라는 생각 아니었을까.

물론 예외도 있었다.

사슴 뿔 마왕 '애욕의 사기꾼'은 아무리 도발해도 무시로 일관했다. 이럴 땐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저와 함께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를 죽이러 가지 않을래요?]

[. . . 좋다. 이번만이다.]

공공의 적. 에덴을 팔아먹는 것이다.

거절하면? 자신이 겁쟁이임을 밝히는 꼴 밖에 더 되겠는가.

아가레스한테 꼰질러 버린다고 협박하면 그들은 마지못해 동행했다. 신화급 성좌에 버금가는 마왕과의 개인 면담은 그리 달갑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게이트를 통과한 그들은 국지전을 시작하자마자 성스러운 격에 짓눌려 부서졌다.

나는 이 짓을 수어 차례 반복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특히 독고다이로 다니는 마왕들을 주로 포섭했다.

혼자 다니는 마왕들은 대체로 서열 상위권에 속한 강자들이라 서기장의 요구와도 부합했고. 상대가 강한 만큼 나도 죽어라 굴렀지만 . . . 어쨌든 숨은 붙어 있다.

[뭔 생각하심?]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에 빙의한지도 벌써 6개월.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거기엔 라파엘과의 관계도 포함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만날 때마다 투닥거리고 싸우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나는 라파엘이 건넨 설화팩을 아공간 코트에 쟁여 넣으며 말했다. 참고로 이 코트는 죽은 마왕의 시체에서 파밍한 아이템인데 물품 보관에 아주 편리했다.

[이 시나리오가 언제 끝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언제 끝남?]

[저야 모르죠.]

그걸 알면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이겠지. 나는 뒷말을 삼키고 시-커맨더의 가죽으로 제작한 물통을 입에 갔다 댔다.

절벽에 걸터앉은 라파엘이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수통을 잃어 버렸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파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주셈.]

[제가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요.]

[앵간한 독은 안 통함. 그리고 님, 어차피 맹세 때문에 독 못 타잖슴.]

별수 없이 나는 내가 마시던 물통을 건넸다. 그러자 라파엘이 질색했다.

[딴 걸로 주삼. 아스모데우스 묻었음.]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내가 벌레도 아니고 . . .

[제가 뭐 어때서요.]

라파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했는지 순순히 물통을 받았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은하수가 가득한 스타스트림의 정경을 감상했다. 악의와 혼란이 소용돌이 치는 시나리오와 달리 그것은 빌어먹게도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별이 너무 많아서 떨어질 것 같네요.]

[푸읍!]

라파엘은 다르게 애해한 것 같지만. 기침 소리와 함께 헤일로가 들썩였다.

"■쳤음?"

오 육성은 처음 들어 보는데. 이미지에 어울리는 고결한 미성이었다.

"그런 말 잘못하면 ■됨."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너만 ■되는 게 아니라 나도 ■돼서 그럼."

하기야. 전독시에서 별은 성좌를 의미하니. 방금 내가 한 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근데 어차피 김독자가 다 떨어뜨릴 건데 미리 해도 괜찮지 않을까?

[소수의 성좌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음. 안 되겠다. 그래도 귀찮은 날파리가 달라붙는 것은 더 이상 사양이다.

"주의하죠."

"그러셈."

라파엘이 입가를 훔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는 손에 잡힌 돌멩이를 툭툭 던지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였다.

"라파엘은, 이번 시나리오에 만족하나요?"

"그건 님이 상관할 바 아님."

"솔직히 저는 이 시나리오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 . . 뭐?"

나는 다시 목을 축였다. 분명 내용물은 술이 아님에도 내 목소리는 우수에 차 있었다. 언듯 불어온 바람에서 비극의 냄새가 맡아졌다. 그것은 피냄새였다.

"저희가 사는 세상은 이분법적이지 않으니까요."

단수가 모여 복수가 된다.
복수는 흩어져 단수가 된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각자의 삶이 모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삶은 곧 이야기다.

순환.

맺고 끊음이 불분명한 흐름에서 우리는 시작과 끝을 정의할 수 있을까?

하루는 언제부터 아침이고, 언제부터 저녁인가. 몇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가.

. . . 답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우리는 세상의 편린만 보고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절대 선 소속 성좌들은 단 한 번도 남의 것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까?"

라파엘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왜냐하면 그는 조금 전 내 물통을 뺐었기 때문이다. 은근슬쩍 꼽주는데 성공했다. 나는 뿌듯해하며 혈향에 취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마왕입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에덴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절대악 소속이죠. 그럼 저는 선인가요, 악인가요?"

라파엘이 불경한 것을 쳐다보듯 나를 꾸짖었다.

"현혹하지 마셈. 맹세는 님이 살겠다고 먼저 제안한 거잖슴. 님은 누가 뭐래도 악임."

안 통하네. 나는 침음을 삼키며 눈동자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땅이 하늘을 가렸다. 지평선 아래 펼쳐진 희곡의 무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비록 이곳저곳에서 배우들의 열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유난히 큰 크레이터를 검지와 엄지를 오자로 만 동그라미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았다. 그러자 구멍이 각진 네모로 변신했다.

어디서 봤나 했는데 그것은 엽전이었다. 문득 예전에 읽은 역사책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동그라미에는 하늘을, 네모에는 평평한 대지를 담았다.'

저자가 말하길, 엽전은 천지를 담은 기물이란다. 그 말을 처음 읽었을 땐, 무슨 쇳덩어리에 별의별 의미를 부여하나 싶었지만.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다.

나는 네모난 원을 손가락에 굴리며 사색에 잠겼다. 어쩌면 결말을 바꾸고자 하는 내 마음도 이기적인 의미 부여에 지나지 않을려나? 나는 이 의문을 선악의 편가름에 대입했다. 

그러자 재밌는 결과값이 반환되었다. 

"저한테는 '하늘의 서기관'이 악이예요"

"갑자기 뭔 개소리임?"

"라파엘. 당신도 악이랍니다."

모욕적인 언사에 라파엘이 성창을 집어 내 목에 겨누었다.

"취소하셈. 아니면 베겠음."

"존재 맹세를 했는데도요?"

"죽이지만 않으면 됨."

파스스. 진심으로 격노했는지 라파엘이 휘두른 창이 내 목에 얇은 자상을 남겼다. 살벌한 격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미 익숙해져서, 보잘것없는 통증이었다.

"후후, 장난이예요, 장난. 근데 이거 뭔가 억울하네요. 당신은 저를 악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당신을 선으로 생각해야 하나요? 선을 강요하는 게 에덴의 방식인가요?"

". . ."

"애당초 라파엘. 그대가 스스로에게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제 말 따위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겠죠."

나는 "아 장난이라고." 와 "왜 너 혼자서 열폭함?"을 동시에 시전했다.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은 라파엘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장난으로 라도 에덴을 모욕하지 마셈. 우리의 선은 우리가 판단함. 그리고 미카엘이 들으면 님은 죽는 것보다 못한 신세가 될 거임."

미친 악마 학살자는 사양이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은 그런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도 이번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긴 함. 시나리오가 너무 늘어져 참여도나 주목도가 점차 추락하고 있음. 문제는, 이대로 흐지부지 된다면 죽은 아군의 희생이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임. 그것은 내가 용납 못함."

말투는 급식체여도 대천사다운 마음가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가 죽는 미래를 바꾸고 싶어졌다.

영령이 되어서까지 '가장 오래된 선'으로 거듭난 우리엘을 돕는 너의 모습을, 나는 '동정'하고 만 것일까. 아니면 네 이야기에 '동경'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고작 점 하나의 차이. 그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마치 투명한 벽처럼. 

['벽을 넘은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내 진심이 벽을 넘어 도달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 . . 그럼 당신이 믿는 길로 나아가요. 정해진 이야기에 휘둘리지 말고."

'가장 오래된 선'과 '가장 오래된 악'에 종속된 두 동태 눈깔들과 달리, 너에겐 기회가 있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그가 자신만의 선을, 의미를 찾아 행하기를 기원했다.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그러겠음."

"좋아요."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며칠 뒤, 대도깨비의 중재 하에 시나리오의 존폐를 염두에 둔 회담이 개최되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참가좌나 시청좌가 많이 빠져, 기존 시나리오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개연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진 모양이다.

선 진영과 악 진영의 영토 중앙. 우리나라로 치면 DMZ지대에 해당하는 곳에서 회담은 진행되었다.

참고로 전쟁이 끝났을 때 내 순위는 원작보다 높은 21위였다. 진명 '모락스', 어째서인가 바위를 날릴 것 같은 마왕을 기습하여 탈취했다.

고로, 내게는 과분한 순위지만. 오로지 강자존인 마계에서는 기습도 실력으로 치는 탓에 내 순위는 21위로 굳어졌다.

하여, 상위권 마왕이 돼버린 나는 어쩔 수 없이 회담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적당이 좀 하지. 원작에 나오는 아이템에 눈이 팔려 너무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얻은 것도 많았지만. 원수 진 놈들도 많아졌다.

[오랜만이군, 격노와 정욕의 마신.]

그래도 얘랑은 되도록 악연으로 엮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나는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요.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한 번도 안 마주쳤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소식은 들었다. 아주 거하게 날뛰었더군.]

나는 아가레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후후. 혹시 도를 지나쳤을까요?]

아가레스는 새로운 궐련을 한 개비 물더니 말없이 불을 붙였다. 그가 탄식에 가까운 숨을 내뱉자 연기가 자욱히 피어올랐다.

[상관없다. 어차피 얌전히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다행히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실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아가레스는 메타트론과 달리 선악에 종속된 자기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로 마왕 승급전으로 전력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별로 게의치 않아 할 터. 그래도 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아가레스의 뒤에 따라 붙었다. 아가레스는 그런 나를 본체만체 하며 광야 한복판에 설치된 임시 회의실의 문을 열어 제꼈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입장합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입장합니다.]

문이 사라지고, 천사와 마왕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는 살벌한 기 싸움이 한창이었다.

[개■끼들이, 혀를 ■아 눈에 ■아도 시원찮을 - ]

[이 미친 천사 새끼가!]

[천사 ■끼? 오냐, 오늘 끝을 보자!]

그 소란의 한복판에 도깨비가 있었다. 고풍스러운 지팡이와 시꺼먼 정장을 차려입은 이형의 존재. 머리에 돋아난 일곱 개의 뿔은 그가 대도께비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따분한 듯 눈살을 찌푸리던 대도깨비는 아가레스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씨익 웃었다. 

[정숙하시죠, 성좌 그리고 마왕 여러분들.]

마치 내빈을 소개하는 듯한 문장. 거기에 담긴 끝모를 개연성이 소란을 잠재웠다.

아가레스는 코웃음을 치며 악 진영의 옥좌에 착석했다. 나는 그의 옆에 섰다. 메타트론을 비롯한 에덴의 수뇌부가 이쪽을 바라봤다. 익숙한 면면들이지만 차마 아는 채는 할 수 없어 나는 시선을 피했다.

도깨비가 말했다.

[그럼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