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날씨 : 폭우

컨디션 : 두통 약간. 외 이상 무


형이 며칠 전부터 침울해한다는 것은 어제 말한 바가 있다. 어제 쓴 대로 형의 상태는 보고 있기 괴로웠다. 원인은 뭐, 여러가지 있을 것이다. 곧 다가오는 '그' 시험 스트레스도 있겠고 교우관계일수도 있고. 나로서는 그 원인까진 잘 모르겠다.


좌우간 오늘은 영 걱정이 돼서 점심시간에도 형을 보러 가보았다. 형의 반은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학생 사용금지였으므로, 나는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두통이 살짝 있던 관계로 천천히 말이다.


형네 반까지 가는 길, 4층과 5층의 중간 계단에서 아는 여자애를 만났다. 서로 이성으로 대하거나 그런 관계는 아니고, 흔히들 말하는 '여사친' 정도 포지션에 해당되는 애였다.


걔는 자기 친구랑 같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용은 대충 너무 떨린다느니 자기인 걸 밝혔어야 했다느니 그래도 준 게 어디냐느니 하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이 빼빼로데이였기 때문에 빼빼로를 주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왜 그 있잖은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빼빼로를 주고 고백한다는 어느 기념일의 캐치프레이즈. 나야 뭐 의리빼빼로인가 뭣인가로 주고 받지만 개중엔 진심을 담아서 건네는 경우도 있겠지. 아마 그런 종류겠거니 했다.


누구 얘기인가 궁금했지만 아침부터 있던 두통이 거슬려서 그냥 지나갔다.


여하간 5층에 올라간 나는 먼저 형을 찾았다. 이미 몇번 들낙거려서 얼굴이 팔린 나를 보고 형의 친구들은 형이 옥상에 갔다하였다.


옥상... 머리가 아팠다.


옥상이란 말에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옥상은 원래가 위험하다며 출입을 금하던 곳이었다. 소문으로는 거기서 떨어진 선배들도 많이 있다했다.


부모님이 형을 크게 꾸짖은 게 생각났다. 모의고사 성적을 보고 화낸 것이었다. 자고 있던 나까지 깨게 될 정도로 그 날 밤 형은 크게 혼났다. 형의 성적은 높디높았지만, 형이 노리는 곳은 더더욱 높았다. 형의 성적으로는 발끝도 못 따라갈 만큼 높았다. 형이 눈에 띄게 침울해진 건 그 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이 언젠가 말했다. 지망을 바꿔야 하나 라고. 누군가의 등을 밀어준다는 개념이 제대로 없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런 개념을 갖추게 된 것은 오늘에 이르러서이다. 멍청하게도 나는 오늘까지 그런 것이 미숙했다. ...아니, 아직도 미숙한 것도 같다.


이런저런 재수없는 생각을 하며 옥상에 다다랐다. 잠겨있을 터인 문이 열려있었다. 문 앞에 선 상태로 잠깐동안 두려움에 주춤했다가 살짝 문고리를 돌렸다.


문고리는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열어재낀 문 너머로는 비가 들이쳤다. 비는 아침부터 내렸는데, 가벼운 여우비 수준이었던 아침과 달리 이제는 해가 보이지 않았다. 햇빛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에 세상이 지워져 나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데 빗방울이 몸에 떨어지니 죽을 맛이었다.


옥상 문 뒤에서, 나는 형을 자그마하게 불렀다. 크게 부를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작아서야 형한테 들리지 않겠구나 싶어서 다시 한번 불렀다. 이번에는 크게 불렀다.


천둥이 쳤다. 중세의 어느 나라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고 나면 종을 크게 울려서 알리는 전통이 있었다고 들었다. 천둥소리에 나는 잠시 그 종소리를 연상했다. 무서웠다. 혹시나 형이 지금 대답이 없는 것은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남자가 날 보고 웃었다. 고1이나 되어서 별 이상한 생각을 다한다고 웃었다. 옥상에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온 거라 했다.


그는 형이었다.


한참을 웃더니 형이 편지 하나를 건넸다. 고백용 러브레터였는데, 대충 응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작성자 이름은 어째선지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필적이 남성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성이 적은 것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편지를 내보이면서 형이 빼빼로를 꺼냈다. 점심 먹고 왔더니 편지랑 같이 책상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인생 처음으로 여자한테 받은 거라면서 좋아했다. 나한테도 나눠주어서 우리는 옥상 문뒤에서 같이 빼빼로를 물었다.


형은 정말로 기뻐했다.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했다. 형이 단순한 건지, 아니면 우울하던 차에 받아서 기뻐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형은 기뻐했다. 편지를 몇번씩 보기도 했다.


형의 우울감은 그것으로 날라간 것 같았다. 이런 것으로 날아간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형이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딱 한명만 자길 봐주는 사람이 있어도 삶을 사는 기분이 달라진다고.


그 말을 듣고 나의 행적을 돌아보았다.


빼빼로를 먹으며 잠잠해진 머리가 다시금 아파왔다.


나는 가족이면서 형이 괴로워할 때 무엇을 해주었던가. 무엇을 해주기는 했던가.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형이 괴로워하면 뭐라도 해주어야겠다.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잘 끝나는 듯하였다.


방과 후였다.


방과 후에 가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우연히 들어버렸다.


방금 전에 마주쳤던 그 여자애가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줘버렸다고. 하필 동명이인이 많아서 다른 반의 사람한테 줬다고.


옆에 있던 그녀의 친구가 화를 냈다. 그러니까 당사자가 맞는 지 제대로 체크를 하라 했잖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과연 고백용으로 주는 빼빼로에 자기 이름도 안 쓸 멍청이가 얼마나 있을까. 과연 쟤가 빼빼로를 준 시간과 형이 받은 시간이 둘다 점심시간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째서 쟤는 3학년밖에 없는 5층에서 내려온 것일까. 그리고 왜 아까 형이 받은 그 편지의 필체가 어딘가 익숙하게 보인 걸까.


머리가 아팠다.


가방을 싸고 형과 함께 돌아가는 길에 형이 떠들었다. 나 좀 인기 있는 듯 이라던가. 아니면 얘는 어디 사는 누구일까 라던가. 힘이 되는 말이 많이 써져 있어서 너무 고마운 편지였다 라던가.


나는 그걸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조용한 걸 본 형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도 아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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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