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두운 창고 안에서, 홀로 주변을 비추는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방금 전 오후 1시 30분경, 모두은행 네오서울 강남점에 빌런들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그 수는 현재 불명이나, 그들을 이끄는 건 네임드 빌런인 아나볼릭이라는 제보가 있습니다. 현재 경찰은 히어로를.......]


"드디어 시작이군. 슬슬 시작해야지?"


일반적이지 않은 탄창 길이를 가진 마취총과 더블 배럴 샷건을 양손에 들고는 물었다.


"노예야, 마취탄은 확실하지?"


내 1호 노예가 말했다.


"절 대상으로 테스트 해보셨잖습니까. 확실합니다."


"특수탄은? 이번 계획 핵심이잖아."


"문제 없을겁니다."


"실제로 테스트를 못해보기는 했지만, 뭐, 확실하지 않은 게 더 재밌지 않겠어?"


1호 노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런 겁니까...."


"내가 죽으면 너만 좋을텐데? 어쨌든 무전이나 연결해봐."


로브 안에 산탄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준비를 끝낸 뒤, 해킹해둔 경찰과 히어로의 무전을 엿듣기 시작했다.


[.....은행 점거 중인 인원 전부 확인완료. 아나볼릭을 제외한 모두는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음. 카테고리 1등급 빌런 열 네명과 카테고리 4등급 한 명. 가까이 있는 히어로 두 명 이상 지원바람.......]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보니 1시 33분이었다.


"2분 뒤에 출발한다."


노예가 당황한 듯 내게 물었다.


"잠깐만요, 그 상태로 말입니까? 가면같은 거라도 쓰시지 않는 건가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네 생각보다 나한텐 비밀이 많거든."


아, 벌써부터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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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랙터님, 안쪽 상황은 어떠합니까.]


상체와 하체 모두 광택이 나는 소재의 슈트를 입은 여성히어로,  랭킹 4위 플랙트가 대답했다.


"아나볼릭의 부하들이 인질들을 잡고 있어요."


[빌런이 원하는 게 정말로.. 아까 말하신 그것입니까?]


은행 안이 울리도록 역겨운 목소리로 크게 소리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저랑 싸우고 싶다네요. 안그러면 1분이 지날 때마다 한 명씩 죽인다고 하는데, 제가 이곳에 왔다는 건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현재 플랙터는 심하게 그림자로 덮여있는 위쪽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아리아드네님이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감정이 억눌린 목소리로 플랙터가 말했다.


"벌써... 셋이 죽었습니다. 기다릴 순 없어요."


[하지만!]


이미 플랙터는 결투장이라는 듯 넓게 비워놓은 공간을 향해 아래로 뛰어 내려간 뒤였다.


"플랙터! 아직도 오지 않은........ 아, 이제야 납셨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평범하지 않은, 핏줄이 여럿 돋아나 있고 비정상적으로 근육이 발달한 혐오스런 얼굴의 아나볼릭이 플랙터를 보고는 양팔을 벌리며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널 기다리는 데에만 셋이 죽었다고. 그리고 이제는 넷이지."


그 말과 동시에 아나볼릭의 부하가 데리고 있던 인질 한 명의 목이, 한 바퀴를 돌며 '우드득' 꺾여버렸다.


"내가 왔는데 왜 또 죽인거야!"


슬픔을 집어삼키는 분노에 찬 목소리에 심드렁하단 어조로 아나볼릭이 답했다.


"아직도 순수하군. 그냥 내 맘이다. 죽이는 데에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다면, 즐겁거든! 너희 히어로들의 반응이 말이야!"


불타는 눈동자로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고 손톱이 파고들듯 주먹을 쥐는 플랙터에게 아나볼릭이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원하는대로 우리는 싸워야 해! 안그러면 인질을 모두 죽인다. 그리고 네가 진다면 인질을 모두 죽인다! 잘 알겠지? 필사적으로 덤벼야 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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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여기가 허술하군."


현장을 포위하고 은행 밖에서 인질을 잡은 빌런들과 대치중인 경찰은 모든 구멍으 다 막지 못했다.


"이제 입장 해 볼까."


유유히 무너진 콘크리트 벽 틈새로 은행 안에 들어서니, 역시 붕괴된 시간이 얼마지나지 않아서 공중의 공기가 탁했다.


마치 옅은 안개가 낀 것같은 건물 안을 해쳐 나가던 중, 내가 들어온 벽 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하던 빌런과 마주쳤다.


"넌 뭐야? 히어로냐?"


양 주먹에 스파크가 일어나는 모습을 본 내가 말했다.


"니가 알 건 없고, 내가 만나야 할 대상이 있어서 말인데, 좀 비켜줄래?"


코웃음을 친 상대가 나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이 일렉트릭펀치님이나 먼저 쓰러뜨려 보시던가!"


퓻 퓻


왼손에 들려있던 마취총으로 상대의 양 다리를 쏘았다.


무력히 털썩하고 엎어진 상대에게 말했다.


"이름은 길게 지으면 별로야. 그리고 이 마취총은 좀 달라서, 기절시키는 용도가 아니라 해당 부위를 마비 상태로 만드는 거라 눈이 감길 걱정은 안해도 돼."


그 이름 긴 놈의 앞까지 걸어가 머리에 샷건의 총구를 갖다 대고 미소지으며 물었다.


"자, 그럼 계속 해볼래? 두 손은 멀쩡하잖아. 아까처럼 달려들어."


하지만 놈은 두려움에 찬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손의 전기도 사그라들어 갔으며,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조금씩 덜덜 떨고 있었다.


"내, 내, 내가 져, 졌으니 지나가. 응? 서, 설마 죽이지는 않,않겠지?"


무표정이 얼굴에 몰려온 내가 혀를 한 번 차고는 말했다.


"..기대도 않했다만, 실망이군. 시간만 낭비했어. 아까 보여주던 기세는 어디간거야? 뭐, 상관없어. 네놈같은 녀석이 첫 번째가 될 일은 없으니까."


샷건을 거둬들이고는, 놈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떠오른 게 있어 말했다.


"아, 만약에 내가 널 떠난 뒤를 노리는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짓을 한다면 머리에만 수십발을 쏴서 사유조차 못하는 병신으로 만들어 줄테니까."


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기에 상대는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나랑 무슨상관인가.





























그렇게 이어서 두 명의 쩌리 빌런들을 만났고,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자, 네가 네 번째야. 눈깔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 아니라면, 네 앞에서 다른 둘이 쓰러지는 걸 봤을테지. 그럼, 비킬래? 아니면......"


"비키겠습니다!"


잽싸게 도망치려 내 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녀석의 허벅지 뒷쪽에 각각 두발을 쏴주었다.


"한심한 선택이군. 다 쓰레기야."


나는  눈 앞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이제서야 입장할 수 있겠군."


한 쪽 문을 발로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뻥' 차며 나의 등장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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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투쾅, 팡, 콰칵


허공을 가르며 내는 공기의 파열음, 두 물체가 부딛히며 내는 인간을 초월한 타격음, 플랙터와 아나볼릭의 싸움에 넓은 공간을 꽉 채우며 퍼져나가는 소리들이었다.


"그래! 그래! 이거라고! 정말 즐겁지 않나!"


오른 팔로 주먹을 가드한 플랙터가 말했다.


"전혀, 너같은 빌런들이나 그런거라고!"


이윽고 유연하게 몸을 돌려 자연스럽게 발차기로 동작을 연결시켰고, 아나볼릭의 얼굴에 발이 적중했다 .


막아낸 주먹에 실린 민큼의 힘이 그대로 발끝을 향해 방출되었다.


"크크큭, 아프군! 역시 나의 공격이라는 건가!"


하지만 플랙터는 빠르고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증폭까지 해서 되돌려 주면 쓰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인질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함부로 그럴 수가 없어. 내가 싸움에 임하는 한 인질은 건드리지 않고 있으니 이대로 버텨서 다른 분을 기다려야하나... 하지만 이 상태론 내 육체도... 이런!'


잠시 집중을 못한 것인지, 오른쪽 허리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인지하지 못했다.


"큽!"


절반 가량의 충격이 반사되어 아나볼릭의 주먹은 반동으로 밀려났지만, 플랙터또한 마찬가지였다.


"집중 해야지? 어디에 정신이 팔린거야?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군. 네 능력도 제한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 이거원,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한 번 공격을 성공했다고 좋아하기는."


우드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푼 아나볼릭이 경멸스런 표정을을 지으며 말했다.


"자존심 세울 필요는 없어. 그리고 웬만하면 난 너를 죽이지는 않을거야. 빌런치고는 착하지?"


"....뭐?"


"나는 무턱대고 죽이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특히 여자는 다른 용도의 도구로 사용하지. 너로도 그렇게 할거다."


플랙터는 단전부터 역겨움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히어로고 감정조절 훈련을 한다고는 해도, 완벽한 통제는 극소수만이 가능한 것이니까.


"그래, 그런 표정! 그런 표정이 좋다고!"


다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아나볼릭에 육체가 자신에게 도달했을때, 곧바로 충격을 되돌려주며 멀리로 튕겨내 주었다.


그리고 또 돌진해 와, 아나볼릭의 왼 주먹을 받아치기 직전, 둘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것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외형을 지닌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젖혀졌던 것이다.


하지만 왼쪽 문은 빠른 속도로 한계까지 열려, 벽에 부딛히게 되었고, 그 반동으로 거의 닫힌 상태로 돌아갔다.


"흠, 이건 예상 못했는데..... 등장부터 꼬일 줄이야."


조금 열린 틈 사이로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지원이 도착하지는 않았을텐데, 비밀친구라도 있는 건가, 플랙터?"


이윽고 한 쪽 어깨로 문을 밀며, 모자 달린 검은 로브에 검은 운동화를 신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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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싸우고 있던 건가? 하필 이 은행이었던 이유가 저 히어로를 끌어내려는 의도였던 건 알았는데, 정말 즐기고 있었던 것 같군.'


나는 예상했던 상황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점심이야."


퓻, 퓻, 퓻


이어서 왼편에서 인질을 잡고 있던 빌런 셋의 다리에 마취총을 발사해 넘어뜨렸다.


신기한 동물을 보듯 나를 응시하던 아나볼릭은 그런 내 행동이 끝나나 말했다.


"허, 그 문으로 들어온 거라면, 그곳을 지키던 내 부하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온건가?"


"움직이지만 못하게 해두고 왔어."


"죽이지 않았다고?"


"지금 한 것처럼 마비시킨거지.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럴 가치도 없는 놈들이었고. 당신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굳이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지."


나는 아나볼릭과 태연하게 대화를 나눴다.


"...혹시 벌써 다른 히어로가 지원을 온 건가요?"


[그럴리가요. 아리아드네님은 지금 도착이 지체된 상황입니다만...]


"설마 빌런....."


그때 아나볼릭이 건물이 진동할 것만 같은 크기로 웃었다.


"크하하하하!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런데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분명 저기 보이는 히어로와 싸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까지 와서 기다릴 생각이 없다.


"미안한데 그건 안될 것 같네. 난 당신을 만나러 온 거라서."


그러자 무언가 깨달았다는 어조와 함께 아까보다는 조금 격해진 숨소리와 낮게 깔린 톤으로 말했다.


"이곳까지 멀쩡하게 올 정도면 동업 제안은 기꺼히 받아주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방해하지 말고 있어.대화는 이따가 더 하자고."


난 마취총의 총구를 아나볼릭에게 들어올리고 말했다.


"역시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가. 당신이 내 목적이라고, 아나볼릭."


그러자 자신의 유흥이 방해당한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네놈, 히어로냐? 그래, 내가 목적이라고? 처음 보는 신입 녀석 주제에 날 잡으려고? 어이가 없군!"


그와 싸우던 히어로 또한 당혹스런 감정과 아까보다는 상황이 낫다고 판단한 표정으로 나지막히 말했다.


"...빌런이 아니었던 건가. 그런데, 설마 요즘 시대에 미등록 히어로라고?"


아나볼릭은 자신이 매우 화가났다는 걸 표현하는 몸짓을 하며 내 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기 시작했다.


"너 따위 잡스러운 히어로가 이몸의 시간은 방해해! 일단 너부터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온 몸의 근육과 핏줄이 울긋불긋 박동하며, 만약 강력한 합금을 쥐었다면 순식간에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는 아나볼릭이 보였다.


'아,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하핳,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아나볼릭을 포함한 모두가 멈칫한 잠깐동안, 오직 나만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하! 하! 하아! 아, 나도 널 죽이러 왔거든! 역시 오면서 만난 것들하고는 다르다니깐!"


은행 안 전체와 그 상황을 무전으로 듣던 모두가 싸늘함을 느꼈다.


난 고개를 한 번 젖히며 크개 심호흡을 하고는 외쳤다.


"그래, 마음이 통했군. 자, 그럼 즐겁게 서로를 죽여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