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문을 나서니 상쾌한 아침의 바람이 불어온다. 8시경의 아침치고는 제법 밝다. 기온으로 보아 봄이 아니면 가을로 보인다. 

병원 밖을 나오자마자 언덕의 아랫쪽으로 향했다. 얼마 못 가서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지갑에 있는 신용카드로 버스를 타거나 근처의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를 가둔 녀석의 신분이 명확해질 때까지는 내가 병원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낫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 대도시에서 아주 벗어날 이유는 없다. 결국 그 녀석을 만나 뭔가에 대해 담판을 지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버스 정류장에 멈춘 아무 버스나 올라탔다. 승차할 때 신용카드를 이용하면 나의 위치정보는 노출될 것이지만 어차피 병원 근처의 위치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고 내가 버스에서 하차할 때 신용카드를 이용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버스는 시내 중심부로 향했다. 40분 정도 타고나서 공원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내 휴대폰을 충전할 필요가 있고 조금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으므로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참치김밥과 김치김밥 하나씩 주세요. 혹시 휴대폰 충전 됩니까?" 
"급속 충전으로 해드릴께요."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 아주머니께 즉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손에 든 나의 입원 화일을 쭉 훑어보았다. 내 입원을 의뢰한 사람의 이름 김준수와 그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고, 나의 병명은 나무나도 당연하겠지만 "조현병"으로 되어 있었다. 아직 내가 미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뽑았다. 비교적 준수한 외모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성의 이름은 정신병원의 병실 철문에 적힌 그대로 이상원이었고 1990년생이었다. 

나를 감금한 자는 분명 나의 조현병을 문제 삼아 경찰이나 통신회사를 동원해 나의 위치를 추적할 것이다. 내가 휴대폰의 기존 번호를 그대로 쓴다면 나를 감금시킨 자가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고 설사 번호를 새것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와 통화한 이후에는 어차피 위치추적은 피할 길이 없다. 휴대폰의 유심칩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나를 감금한 자와의 대면을 마냥 피하는 것도 바람직할까?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직접 그와 통화를 해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겠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나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얻기로 결심했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이 직접 김밥을 내왔다. 음식냄새는 나의 감각에 활기를 불어넣어줬다. 혈액 주사가 아닌 방식으로는 상당히 오랜만에 영양을 섭취하는 듯하다. 김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위에 큰 부담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나한테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식당을 나오자마자 휴대폰에 전원을 넣었다. 잠시 후 신호음이 울려 기기의 부팅이 완료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휴대폰 화면에 표시된 오늘은 2019년 10월 26일 금요일이고,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휴대폰은 잠금되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나는 나름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또 1990년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30세쯤 된 셈이다. 

가장 최근의 부재 중 전화를 확인하니, 역시 아까 입원 화일에서 확인하였던 나를 감금했던 자의 전화번호가 화면의 맨 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바로 9시 5분이었다. 그 자는 정신병원 관계자를 철저하게 구워삶아논 것이 틀림없다. 병원 사람들은 출근하자마자 나의 탈출 소식을 강제 입원 의뢰인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의 지나다님이 조금 뜸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입원 화일을 다시 확인했다. 가장 최근 나에게 전화한 자는 김준수가 맞다. 부재 중 전화에 전화번호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내가 이 자와 친하다거나 적어도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의 강제 입원은 불법적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막상 나를 감금한 자, 김준수와 통화하려고 하니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나와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은 자와 가장 먼저 통화하는 것이 옳을까?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자와 통화를 해서 나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라도 확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폰의 부재 중 전화 목록을 쭉 훑어보았지만 딱히 나와 친한 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소록도 뒤져보았지만 역시 딱히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이름은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아니 나는 친구와 적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를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