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성녀였던 소녀에게 (2)

 

 

 

 

 

“저, 도련님?”

 

“왜 불러.”


“벌써 며칠째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뭘 좀 드시는 게…….”


“괜찮아 유모. 난 괜찮아.”


알버트가 자신의 영지로 루실리카를 데려오고 2주가 지났다.

 

하지만 루실리카는 죽은 듯 잠들어 단 한 번도 깨어나질 못했다.

 

만약 그대로 죽는다면? 다신 일어날 수 없다면? 알버트는 초조함에 밤잠을 설치고

 

밥을 못 먹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몸무게가 부쩍 줄어 눈에 띄게 말라보였다.

 

“아참. 홀트라는 분이 오셨는데……내쫓을까요?”

“홀트? 아……생각해보니 돈을 안 줬군.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누더기나 다름없는 로브를 걸친 홀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딱 봤을 때……쥐가 떠올랐다. 시궁창을 기어 다니며 눈치를 보는 쥐.

 

“헤헤, 도련님. 절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하다마다. 어떻게 거기서 잘 빠져나왔군.”


“도망치는 건 제가 두 번째로 잘 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 돈은……?”

 

“걱정하지 마라. 덕분에 루실리카 님을 구출했으니 덤도 얹어주지.”


그 말에 홀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는 내심 돈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역시 도련님! 통이 아주 크시군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하나 더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


홀트가 손을 싹싹 비비며 들고 온 가방에서 약과 수술도구를 꺼냈다.

 

“이렇게 보여도 제가 그,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요.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성녀님의 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아직 살아계신다면 말이죠.”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알버트 가문에도 주치의인 보리스가 있었으나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일을 시키기엔 영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다. 대신 허튼 짓을 하면…….”

“제가 클라우스 가문의 영지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십니까?”


“그건 그렇군.”


두 사람이 루실리카가 있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그곳은 작고 아담했고, 그냥 봤을 땐 농노들이나 살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초라했다.

 

“성에 안 계시고 여기 계십니까?”

“사용인들이 루실리카 님을 보면 안 되니까. 부탁하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같이 와서 보셔도 됩니다만…….”

“난 괜찮다.”


홀트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알버트는 오두막 근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그의 기분도 몰라주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헬리오르 님, 어째서 당신의 사도께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그녀는 먼 옛날에 침묵한 태양신, 헬리오르의 계시를 받고 성녀가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고작 13살이 될 무렵의 일이었다. 수도원에서 평범하게 살던

 

고아가, 다른 신도 아닌 주신 헬리오르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 미천한 자가 이렇게 간절히 바라옵니다. 부디, 루실리카 님을 보살펴 주십시오.”

 

그는 기도를 올렸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것이 도저히 어찌할 도리 없는 시련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홀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상태를 좀 봐뒀습니다. 저, 도련님. 제가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부 사실대로 말해다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겁니다요.”

 

홀트가 실실 웃는 걸 멈추고 말했다.

 

“그냥……말해라.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우선 성녀님의 발목과 손목의 힘줄을 끊고선 화상을 입혔습니다.

 

저래서야 마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고……평생 걷거나 무언가를 쥘 수 없을 겁니다.”

 

“계속해.”


“왼쪽 눈은 아예 소실되어 복구할 수 없습니다. 의안을 끼우는 게 최선입죠. 또 뼈가

 

부러졌다가 제멋대로 붙어서……굉장히 아플 겁니다. 제 기능도 못 할 테고요.”

 

알버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들어야했다, 알아야만 했다.

 

“체중은 비정상적으로 가볍고, 피부나 모발의 상태를 보아하니 영양실조를 겪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걸로 보입니다. 꾸준한 영양 섭취를 하면 나아지겠지만 후유증이

 

남을 겁니다. 이빨도 꽤 많이 빠졌고, 상처는……제가 확인한 것만 41개의 크고 작은

 

자상과 화상, 타박상을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직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요.”

 

“그걸로 끝이냐?”


“아뇨. 제일 중요한 게 있습니다.”


홀트가 헛기침을 했다. 이걸 정말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놈들이……약을 쓴 것 같습니다.”


“무슨 약?”


“진통제로 쓰는 약인데, 이걸 마구잡이로 쓰면 반대로 고통을 주거나 중독을 일으켜

 

각종 합병증을 일으킵니다. 이건……지금으로선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도련님, 제가

 

정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성녀님은 길어봤자 1, 2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알버트가 무언가 말하려다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도련님!”


“괜찮다. 내버려 둬…….”


“하지만-”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너무 꽉 쥐어 피가 난 것이었다.

 

이럴 순 없다.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싸운 그녀가 이런 꼴을 당할 순 없다.

 

차라리 나였으면. 차라리 내가 당했다면. 알버트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렸다.

 

“홀트, 방금 그 사실은 절대로 발설하지 마라.”


“성녀님 본인은-”

“절대 말하지 마. 부탁이다, 세상엔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이잖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홀트를 지나쳐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루실…….”


그녀는 아직 20살이 채 되지 않았다.

 

평생 수도원에서 기도하거나 전장에서 싸웠다. 그 이외의 인생은 알지 못하고 그것만이

 

그녀의 의무고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이런 참담한 꼴이 되어버렸다.

 

알버트가 말없이 루실리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알……?”


“루실리카 님.”


그 때, 그녀가 눈을 떴다. 

 

“여기가……어디……아니, 지금……얼마나 지난 거죠……?”


“지금은 쉬셔야 합니다.”


“대답해줘요.”


“습격 이후로 1년하고 24일이 지났습니다.”


그의 대답에 루실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알, 저를 구해주신 게 당신인가요?”


“저와 홀트라는 마법사, 그리고 에디우스 노블러드 님이 도우셨습니다.”


“에디우스……그 이름은 들어봤어요. 여왕님의 아드님이시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생아였다. 그래서 성도 이어받지 못하고 서자들의 성인 노블러드를 썼다.

 

아들이지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게 어떤 기분일지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감사 인사를 드려야…….”


그녀가 일어서려 했으나 풀썩 쓰러졌다. 

 

“이미 떠나셨습니다. 나중에 돌아오시면 제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손이……발도……움직이질 않아…….”


그녀가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가락이 조금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이래서야 전장엔 나갈 수 없겠군요.”

“지금은 휴전 상태입니다. 그리고 정전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벌써 6년이나 지났다. 그 동안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적국 베른하이크도 그 탓에 침략을 멈추고 어떻게든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했다. 그 수 중 하나가 바로 루실리카였다.

 

“알, 당신 손이……!”


“…….”


루실리카가 겨우 손을 들어 그의 왼손을 만졌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손……그것은 의수였다.

 

“습격 때 잘려나갔습니다.”

 

“아아……!”


“괜찮습니다. 이것도 익숙해지니 나쁘지 않더군요.”


“신이시여,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실리카는 알버트를 걱정했다.

 

그녀 자신은 사실상 팔다리가 잘렸는데도, 알의 손이 잘린 게 더 마음 아팠던 것이다.

 

“저도 이젠 검을 쥘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활은 겨우 쏠 수 있습니다만.”

 

“…….”


“괜찮습니다. 저야 어차피 검술 실력이 동네 아이들 수준이었잖습니까.”


그가 일부러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루실리카도 조금 웃어주었다.

 

“아! 모두들 제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겠죠. 다들 어디 있나요?”

 

“…….”


“알?”


“……절 제외한 단원들은……모두 죽었습니다.”


루실리카가 멈췄다. 그리고 텅 빈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그, 그럴 리……아니에요, 그럴 리 없잖아요. 분명 누군가는 도망쳤을 텐데…….”


“죄송합니다.”


“존……클로즈……스미슨……엘비……전부……?”


“전사했습니다. 시체는 회수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녀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럴 리 없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만해요. 그럴 리 없어요, 알. 그럴 리가……!”

 

“단원 모두 루실리카 님의 무사를 바랬습니다. 그러니-”

“그럴 리 없다고요!!”


그 순간, 루실리카가 발작을 일으켰다.

 

“커……커어어억……! 허억, 허어어억……!?”


“루실! 정신 차리십시오, 루실리카!”


그녀가 거품을 물고 몸을 마구 떨었다. 

 

“홀트! 홀트, 당장 들어와라! 홀트!!”


“하이고 맙소사!”


홀트가 오두막 안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가방을 열었다.

 

“일단 나가주십쇼!”

“하지만-”

“나가라고요!”


알버트는 쫓겨나듯 오두막을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 흐아아아,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루실리카 님!”


“싫어, 아파!! 아파, 아파, 아아아아아아! 아파, 아극, 으그그극……!?”

 

도저히 사람이 낼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오두막 안에서 끝없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이시여, 왜 그녀입니까. 왜 하필이면 그녀란 말입니까. 대체 왜……!”

 

당신의 신도가 이리 고통 받고 있는데, 왜 당신께선 또 침묵하셨단 말입니까?

 

이게 당신이 그대의 사도를 대하는 방식이란 말입니까?

 

“대체 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또 다시 침묵했다.

 

 

 

 

 

 

 

 

 

 

*****

 

 

 

 

 

 

 

 

 

“다 끝났습니다, 도련님. 성녀님은 아기처럼 주무시고 계십니다.”


“……고맙다, 홀트.”


“별 거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솔직히 좀 힘들었습니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알버트는 방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소엔 입에 대지도 않건만, 이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녀님의 몸은 지금 약물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진통제, 이 마약을 맞지 않으면 또 발작이 올 겁니다요.”

 

홀트가 가방에서 푸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이게 대체 뭐야?”

“청란이라고 불리는 꽃에서 추출한 즙입니다. 효과는 최고지만 중독성이 심해

 

한 번 중독되면 평생 달고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니면 발작으로 죽거나.”

 

“왜 그걸 루실리카 님께-”


“추측입니다만, 저들은 만에 하나 성녀가 풀려나더라도 사람 구실을 못하게

 

만들려고 한 것 같습니다. 팔다리를 못 쓰게 만들고, 약에 중독되어 비참하게 살도록…….”

 

이 찢어죽일 악마 새끼들.

 

그가 이빨을 갈았다. 그러나 분노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둘째는?”

 

“성녀님은 현재 심신 모두 불안정합니다. 이번처럼 또 발작이 일어나면 다음엔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니, 절대로 심적으로 부담을 줘선 안 됩니다요.”

 

“알겠다. 진심으로 고맙다, 홀트.”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제가 주치의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물론 저 같은 떠돌이

 

마법사를 신뢰하기엔 조금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그리 해주면 좋겠군. 돈은 매달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홀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로선 편하게 영지에서 돈을 받아먹으며 일하는 게

 

편했고, 이렇게 클라우스 가문에 빚을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어쩌실 겁니까?”


“…….”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밤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마치 화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검푸른 하늘, 하얀 별, 그리고 푸르스름한 달.

 

언젠가 그녀와 함께 전장에서 보았던 달이 저리 생겼던가.

 

“루실리카 님은, 아니 루실은……평생 수도원과 전장에서 살았다.”


“…….”


“고아로 태어나 수도원에 버려져, 13살이 될 때까지 기도하며 살다가 계시를 받고

 

전장에 나왔지. 그리고 몇 년을 싸웠다. 몇 번이나 고난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을 몇 번이나 했고, 몇 배나 많은 군사와 싸울 때도 그들은

 

이겨냈다. 패배할 때도 있고 물러설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엔 결국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한 순간도 평범한 소녀로 살진 못했다.”


엄격한 수도원에선 웃고 떠드는 일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전장에선, 그곳에선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루실리카는 단 하루도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

 

“그녀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마지막만큼은 평범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겠다. 루실이 품었던 소원을, 내가 이뤄주겠어.”

 

그가 주먹을 하늘로 향해 뻗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

 

 

 

 

 

 

 

 

 

 

 

 

 

 

 

주인공 알버트의 나이는 30대 중반. 기사로서 전투력은 간신히 합격점을 넘는 수준.

대신 사무 작업이나 작전 세우는데 능숙해서 참모로 활약함.

 

2. 루실리카의 나이는 19~20살 정도. 계시를 받아 기적의 힘을 쓸 수 있고, 예전엔

혼자서 포위를 돌파할 정도로 강했음. 황금 사자단의 기사대장보다 강한 수준.

 

3. 그리고 유해물이라고 소개하긴 했는데...사실 내가 지금껏 쓴 것 중에 가장 순애스러울수도 있음.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첫 편부터 평가가 조진 거 같다. 쉬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