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1부: 여우비는 소리없이 내린다

========================




......몇 주 전.




[소체 수복 100%. 마인드맵을 동기화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동기화 성공. 검사 완료. 수복이 완료되었습니다.]


 IOP제 수복 장비에서 들리는 차가운 안내 음성이 푸슉 하고 캡슐이 열리는 소리에 묻혔다.


 수복이 끝나고 다시 작동을 시작한 전술인형 DSR-50이 눈을 떴다. 불과 수 시간 전까지 전장에서 한바탕 구른 모습으로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깔끔한 외형이었으나 캡슐이 열리자마자 흘러나오는 화약 냄새는 아직도 그녀가 매캐한 포연에 둘러싸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질 줄 몰랐다.


"어라… 나 죽었던가?"


"운 좋게도 아니에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DSR-50이 고개를 돌린다. 지휘관 제복을 입고 있는, 그러나 그의 옆에 서 있는 부관 전술인형보다도 키가 작은 남자아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인드맵 손상 직전인 걸 간신히 후송했습니다. DSR-50, 제가 분명히 화기 사용을 불허했을 텐데요."


 한창 사춘기일 나이밖에 안 되어보이는 외모에 비해 말투가 다부졌다.


"참, 지휘관도 내 성격 알면서. 그렇게 흥미를 돋구는 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나 빼고 아무도 안 다쳤으면 그걸로 됐잖아?"


"다치고 안 다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가 분명히 OP(관측 초소) 설치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잖아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면 믿어줄 거야?"


"이미 전송된 영상까지 다 봐서 어렵겠네요."


"치, 재미없게~"


 DSR-50이 아직도 장난기 어린 얼굴로 뾰루퉁한 표정을 했다. 너무 차가워 녹을 줄 모르는 지휘관의 표정이 썩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DSR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탓에 아군 전체 진격이 늦춰졌어요. 미안하지만 장난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알았어, 내가 미안해~ 정말, 지휘관 나이에 안 맞게 깐깐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


 순간 지휘관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히며 입술이 움직일 듯 씰룩였다. 그러나 DSR-50에게 더 말려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내뱉으려던 말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매뉴얼대로였다면 지시 위반에 무단 행동으로 정식 징계감이에요. 지금은 말로 끝나지만, 다음에는 아닐 겁니다."


"정말 괜찮겠어~? 다른 의미로 벌을 줘도 괜찮은데."


"...몸 괜찮아지면 숙소로 돌아가 쉬어요."


 DSR-50의 마지막 농담을 알아듣질 못했는지 아니면 알아듣고도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지휘관은 수복실의 불을 꺼두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수복실을 떠난 지휘관이 리엔필드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천장 센서등에 연이어 불이 들어왔다.




"징계를 안 내리시다니 의외로군요."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리엔필드. 사상자가 DSR 한명으로 안 끝났다면 깨어나자마자 징계했을 거예요."


"작은 사건으로 끝났더라도 명령 위반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칭찬이나 격려를 많이 안 하신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정당한 벌을 깎아주는 것으로 격려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죠."


 지휘관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부관 리엔필드는 지휘관에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형 중 하나였다.

 '군사적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라고는 하나 이제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불과한 아이였다.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천재적인 지휘 능력 하나만으로 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부족한 점을 알고 있던 지휘관은 부관의 조언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전술인형들을 대하는 방법은 결국 전술인형에게서 듣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상벌을 아낄 생각은 없어요. 인형들이 자신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그렇죠. 결국 인형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게 중요합니다. 상벌은 주는데 대화를 잘 하지 않게 되면 인형들의 마음도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게 되니까요. 다가오기가 힘들어지죠."


"저도 알아요. 인형들이 절 무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거. 하지만 친해지는 건 제 전문이 아니에요."


"그건 괜찮습니다, 지휘관."


"..괜찮다니요?"


"억지로 인형들과 친해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휘관이 불편하시다면 지금 이대로 있으셔도 괜찮아요. 잘한 것을 아낌없이 칭찬해 주고, 벌에 엄격하고 일관된 규율을 적용하는 건 인형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신뢰를 주기 위해서죠. 상관은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부하들에게 정을 주는 것보다도 믿음을 줘야 합니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책임질 수 있겠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위험한 곳에 보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을요."


"...이해하기 어렵네요."


"정을 주는 것과 믿음을 주는 것, 아마 그 둘을 구분하기가 어려우실 수도 있겠죠. '그저 친해지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그렇게만 이해하셔도 될 겁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계셨던 거라면요."





 그날 저녁.


 인형 숙소 건물에 위치한 지휘부 인형 휴게실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온 전술인형들의 목소리로 왁자했다.

 처음에는 사무실에서 남는 탁자 몇 개와 간식 상자들을 쌓아놓아 큰 창고나 탕비실과 다름없었던 휴게실은 스프링필드의 손에 의해 카페로 개조된 이후로 지금처럼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대가 되면 인형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중에서도 카페 카운터 바로 옆에 넓다란 원형 탁자는 부관 리엔필드와 지휘부 각 제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7명의 인형들이 매주 주말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지정석이다. 다만 오늘은 다른 인형이 있었다. 긴 시간 수복을 마치고 오늘 홀로 퇴원한 DSR-50이었다.


"....그러고서 내려다보는데 표정이 말야, 정말… 나이 얘기 진짜 싫어하는구나, 싶더라고?"


 라는 말로 DSR-50이 오늘 수복실에서 보았던 지휘관의 차가운 표정을 설명했다. 리더 인형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지휘관의 그런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히 나이 얘기를 꺼낸 네가 잘못이지.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사람이 없는데 컴플렉스 아닌 게 이상한 거 아냐?"


 가만히 듣고 있던 인형들 중에서 6제대 리더 AA-12가 딴지를 걸었고 거기에 2제대 리더 Mk48이 끼어들었다.


"DSR이 일부러 그랬을 지도 모르지. 저렇게 안 사나워 보이는 외모에서 튀어나오는 매도는 오히려 포상이라구~? 후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 어린 나이에 저렇게 얼어붙은 모습이 나올 수가 있나 모르겠어. 어찌 보면 신기하지 않아?"


"그래서 지휘관 별명이 '얼음공주'잖아. 생긴 건 공주님처럼 여리여리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건 완전 얼음장 같다고."


"'얼음공주'? 그런 별명도 있었나?"


 그 별명을 처음 듣는지 부관 리엔필드가 AA-12에게 물어왔고 5제대 리더 스프링필드가 그녀 몫의 음료수를 탁자에 놓아주며 대신 대답했다.



"어머, 리엔필드 씨는 모르세요? 지휘관 연수 시절에 다른 동료 지휘관 분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하더라고요."


"글쎄, 지휘관이 그런 얘기는 잘 안 해주던데. 이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오히려 지휘관과 함께 일하시는 시간이 많으니 모르실 만도 해요. 지휘관은 그 별명으로 불리는 걸 제일 싫어하시니까요."


"아, 이유는 알 것 같군. 여자아이한테나 붙는 별명을 남자인 지휘관에게 붙였으니 말야."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메이드인 저도 알고 있는 걸 전속 부관인 리엔필드가 모르고 계셨다니 조금 놀랍네요. 지휘관에 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으실 줄 알았습니다만."


 하며 3제대 리더 G36이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처음 부관직을 맡은 뒤로 리엔필드는 지금까지 그 자리를 내려놓은 적이 없는데다 출근부터 퇴근 때까지 거의 항상 지휘관과 함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러나 리엔필드는 고개를 저었다.


"지휘관은 워낙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니까. 지금처럼 전해듣는 게 아니라면 나도 딱히 더 잘 아는 건 아니야."


"그래? 난 지휘관이 적어도 리엔필드하고는 좀 터놓고 얘기할 줄 알았는데. 솔직히 예전에 둘이 사귄다는 소문 돌았을 때 나 그거 진짜로 믿었었다니까."


"이, 이미 다 지나간 소문을 왜 또 갑자기…!"


 AA-12의 말에 리엔필드가 순간 당황했다.


"그 정도로 친하게 보인다는 뜻이지, 내 말은."


"그런.. 의미로 친하지는 않아. 지휘관이 부관직에 날 배정한 것도 그저 지속적으로 조언해줄 인형이 필요해서일 뿐이고."


 리엔필드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 잠깐 사이의 변화를 읽어낸 스프링필드가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았다.


"후훗, 지휘관 쪽 사정은 그렇겠지만, 그 반대쪽은 어떨까요~?"


"무, 무슨 뜻이야 그건..!"


"리엔필드 씨는 또다른 이유가 있어서 부관 자리를 맡으신 듯한데, 아닌가요?"


 이번에는 리엔필드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눈빛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그저.. 지금의 지휘관이 성장하려면 내 경험과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서 계속 부관을 맡는 것뿐이지, 다른 이유는…."


"이거, 아무래도 소문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요?"


 탁자에 앉은 인형들이 리엔필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놀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이 공감되는,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부러움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애초에 부관이나 팀 리더처럼 책임은 책임대로 지면서도 일할 때 저 차가운 지휘관을 더 마주쳐야 하는 직위는 지휘관에게 관심이 있는 인형이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자리다. 각자 사정은 달라도 지휘관의 그 얼음을 녹이고 싶어하는 것은 리더 인형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켠에 가지고 있는 소망이었다.


 인형들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다. 다른 지휘부에서 인형들과 지휘관들이 일과가 끝나고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가를 함께하며 친밀감을 쌓는 모습은 외부 파견을 나갔다 돌아오는 인형들의 입에서 반드시 한마디씩 나오는 이야기들이었고, 반대로 다른 지휘부 인원이 파견을 올 때마다 리더 인형들은 몇몇 파견 인형들의 넷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아름다운 은빛 고리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리더 인형들은 지휘관이 저 예쁜 서약 반지를 자신의 약지에 끼워주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것은 인형들의 상상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리고 어쩌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를 꿈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리더 인형 모두가 지휘관과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고 있다는 뜻임은 분명했다. 리엔필드를 보는 인형들의 부러움은 아마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근데,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더 슬픈 거 아닌가?"


 헌데 인형들 가운데 홀로 웃지 않고 있던 4제대 리더 벡터가 분위기를 깼다.


"둘 다 아무 감정이 없었으면 그냥 풍문으로 끝난 게 전부일 텐데, 이쪽에서 혼자 그런 감정이 있는 거라면 그건 리엔필드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게다가 저 지휘관이 그 마음을 알아줄 리도 없고."


"당사자 앞에서 너무 비관적이시네요."


 G36이 지나가는 말로 핀잔을 줬지만 그런 말에 주눅들지 않는 벡터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거야. 그 '얼음공주' 성격이 어디 가지 않는 이상 큰 기대는 접는 게 좋다고."


"그런 기대 없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전부 풍문일 뿐이다."


 하고 다시금 소문을 부정하며 이야기를 끝맺으려는 리엔필드였지만 인형들은 그러고 싶지 않은 듯했다.


"에이, 솔직히 리엔필드도 그런 생각 하고 있잖아? 없으면 거짓말이지."


"이미 얼굴로 다 말해놓고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 없는걸~? 후훗."


"그 얘기 그만 좀--"


 결국 이야기를 강제로 끝낸 것은 리엔필드의 통신 모듈에서 울리는 알림음이었다.


 AA-12와 DSR-50의 장난스러운 말에 다시 따져들려던 그녀가 자신의 통신 모듈을 켜며 입을 다물었다.

 짧은 문자 메시지였다.



[리엔필드, 지휘관입니다. 잠깐 지휘실로 와 주시겠어요?]



"........."


"왜 그러시죠, 리엔필드?"


"....지휘관 호출이다. 가봐야겠어."




"타이밍 한번 절묘하군요."


 1제대 리더 9A-91의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요? 거의 9시 다 돼가는데."


 스프링필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업무 중에는 깐깐해도 일과 이후에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게 지휘관의 스타일이었다.


"늦은 시간에 부르는 거 보면 아마 작전 관련된 거겠지. 다들 주말이라고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들어가. 지휘관도 늦게 퇴근하시는 모양이니까."




"늦게 퇴근하셔도 여기 오실 일은 없으시겠지만요."


 하고 7제대 리더 K2가 토를 달았고 옆에서 DSR-50이 리엔필드를 또 놀리려는 듯 장난기 어린 말투로,


"아무튼, 우리 '얼음공주'님 잘 좀 녹여 달라구~?"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늦은 시간 지휘부 본부 건물은 초록색 비상구 불빛만 반짝일 뿐 들려오는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야간 업무가 있지 않는 이상 이 시간에 이 건물을 거닐고 있을 인형은 없다. 저녁 시간인 동시에 일과 끝을 알리는 오후 5시 종이 울리면 지휘관은 그대로 당직 인형을 제외한 모든 인형들에게 퇴근을 지시했다. 지휘관이 그 정도로 휴식에 관대한 것은 어쩌면 평소 인형들을 차갑게 대하는 것에 대해 지휘관 나름대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리엔필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부른 것일까?


 숙소 건물과 본부 건물 사이의 아스팔트 길을 가로지르며 리엔필드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일과 중이든 아니든, 그녀는 지휘관에게 빈틈없는 부관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흰색 제복을 다듬은 뒤 마지막으로 붉은빛 코트의 단추까지 잠갔을 때 그녀는 지휘실 건물에 도착해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의 한가운데 지휘관이 불러낸 지휘실에는 홀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속 부관 리엔필드는 이미 지휘실의 위치 정도는 눈 감고도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지휘실은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리엔필드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대신 말로 자신을 알린 그녀 앞에 보이는 것은 드론 카메라 영상으로 꽉 채워진 모니터들과 그 아래에서 태블릿을 들고 무언가에 골몰한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지휘관은 숙소에서 바로 달려왔는지 반바지에 잠옷 차림이다.


 그것을 본 리엔필드의 두 눈이 확 뜨였다.


"아, 오셨나요?"


 지휘관이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블릿을 옆에 낀 채 리엔필드 앞으로 직접 걸어왔다.

 리엔필드는 아직도 서있는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다.


"다음 주 작전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오늘 오후에 정찰 드론을 좀 보내 놨었는데, 방금 전에 거기서 반응이 왔습니다. 이거 보세요."


 지휘관이 리엔필드에게 내민 태블릿 화면이 드론의 감시 영상을 띄웠다. 숲길을 따라 이동 중인 철혈공조 병력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리엔필드는 태블릿에는 잠깐 시선을 보냈을 뿐 영상에도 지휘관의 말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휘관이 설명을 계속했다.


"좌표를 보면 아시겠지만 방향을 봤을 때 지난번 우리가 공격한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곳을 축선으로 하고 있어요. 야간에 수풀을 따라 몰래 기동하는 걸 보면 여기를 주공(主攻)으로 설정한 게 분명합니다."


"........"


"저기, 리엔필드?"


".......아, 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잠깐.. 작전계획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오늘 계획 짜 놓고 다시 불러서 미안해요. 하지만 정찰 정보를 보면 적의 기동이 우리가 예상한 방향과 너무 달라요. 계획을 완전히 수정해야 해서 급하게 리엔필드를 부른 겁니다."


 지휘관이 이어서 리엔필드를 자리에 앉히고 모니터에 펼쳐진 드론 영상들을 가리키며 그가 분석한 적의 의도를 짧게 말해주었지만 리엔필드는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짧게 "네." 나 "그렇습니까." 같은 말만 잠깐 내뱉을 뿐 시선이 다른 곳에 가는 것을 그녀도 막을 수가 없었다.


 리엔필드가 정신을 차린 건 지휘관이 말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


"왜 그러시죠?"


"제 말을 안 듣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지휘관. 그게--"


"아뇨, 괜찮습니다."


 지휘관이 손을 펴보였다. 리엔필드가 평소처럼 집중하는 눈빛이 아님을 그도 알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그녀를 지휘실로 호출한 건 지휘관 자신이었다.


"제가 너무 서두른 것 같네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팀 리더 회의를 소집해서 하기로 하죠. 드론 정찰도 다 끝나지 않았고."


 날이 어두웠다. 지휘관이 모니터를 끄자 영상과 함께 새어나오던 전파 잡음들을 대신해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지휘실을 채웠다.


"리더들에게 내일 아침 9시에 회의 있다고 좀 알려주시고,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쉬세요.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지휘관."


 아직도 굳은 표정을 한 리엔필드가 경례를 하고 문을 나섰다.


 지휘실 문이 닫히고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복도가 다시 그녀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녀는 복도 거울에 비쳐오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지휘실에서 멀어질수록 그녀의 발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본부 건물을 나와 숙소로 향할 때 이미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호흡이 가빠졌다. 전술인형이 겨우 이 정도 거리를 달린다고 해서 숨이 찰 리가 없건만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리엔필드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숙소 문이 닫히자마자 리엔필드는 제복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급하게 책상 서랍을 뒤졌다. 바쁘게 손을 뒤적거린 끝에 프린터 연결용 케이블이 그녀의 손에 잡혔다.


"빨리… 빨리…."


 혼잣말을 하는 리엔필드가 프린터 전원을 켜고 케이블을 연결했다.

 너무 당황한 탓에 시각 모듈의 녹화 기능을 켜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그녀가 본 것이 작업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어서 사진을 인쇄해야 했다.


 다행히도 프린터는 그녀가 본 것들을 깔끔하게 인쇄해냈다. 서너 장의 사진이 드르륵거리는 프린터 소리와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잠옷을 입은 지휘관의 사진들이다.



"하아아아아…."


 그 맨 위에 놓인 사진, 지휘관이 태블릿을 옆에 낀 채 자신을 향해 총총총 걸어오는 장면을 흔들림 없이 정확히 잡아낸 사진을 집으며 리엔필드가 황홀한 표정을 했다.


 처음으로 보는 지휘관의 잠옷 차림이었다. 지휘관이 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잠에 들기 직전에 일어난 듯 조금은 풀려 있는 머리카락, 절도있는 제복과 달리 헐렁하고 귀여운 잠옷, 거기에 갭이 느껴지는 세상 진지한 표정까지… 너무나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귀여워.. 정말 귀여워… 너무 귀여워요 지휘관…!"


 하고 리엔필드가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를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건 지휘관만은 아닐 것이다. 처음으로 자기 앞에서 보여준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녀도 평소의 절제된 자세를 잃고 지휘관 앞에서 정신을 못 차렸으니까.

 언제나 빈틈없는 자신을 보여주겠답시고 제복을 애써 다듬던 모습은 어디가고 지휘관 앞에 멀뚱히 서서는 그런 형편없는 꼴을 보이다니, 어쩌면 이 일로 지휘관의 눈 밖에 나게 될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지휘관…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리엔필드가 두꺼운 사진첩을 꺼냈다. 겉표지를 열자 안에는 지휘관이 찍힌 사진들로 하나같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 수많은 사진들과 함께, 그녀가 잠옷 차림의 지휘관이 담긴 사진들을 조심스레 사진첩에 담았다.


'당신이 이렇게 풀어진 모습, 쉽게 안 보여주니까….'


지휘관 사진이 담긴 사진첩이 마치 지휘관이기라도 한 것처럼, 리엔필드가 그것을 가슴에 꼭 안으며 행복한 표정을 했다.










어떻게 해야 페이스를 줄이고 전개 속도를 높여서 더 빠른 꼴림을 줄 수 있을까 대가리를 굴렸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결론을 얻었음.

빠르게 내올 수 없으니 천천히 음미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