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카리나와 연애를 시작한 날의 저녁, 아이들을 이끌고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중 장관님과 마주쳤다. 귓가에 갑자기 바람을 불면서 인사를 한 그녀는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당황한 기색을 밝히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며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데, 또 또 그 특유의 이상한 행동을 하려나보다.


"아우, 간지러…"


"지휘관님, 혹시 같이 식사해도 될까요?"


"예?"


"받은 걸로 알게요. 자, 어서."


"아뇨아뇨아뇨…! 갑자기 이러시면 어떡해요?!"


"상관으로써 부하가 얼마나 대단한지 좀 더 알아볼 기회, 라고 하면 될까요?"


"저, 장관님… 지금 장관님의 생각은 이해가 되는데, 그걸 꼭 지금 해야 합니까…"


"한국인의 정신, 빨리빨리."


"하…."


"귀여운 꼬마 아가씨들, 언니가 아빠랑 잠시 얘기 좀 하려는데 괜찮죠?"


"우우! 또 우리 아빠 데려가려고!!"


"맞아! 이 언니 싫어!"


"아까도 어떤 언니가 아빠 데려갔단 말이에요!!"


아이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곧 그녀의 손이 내 손과 깍지를 끼며 잡아당겼고, 눈을 떴을 땐 뒤쪽에서 아이들이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카리나는 진도를 제대로 뺄 생각인건지 내 방으로 모든 짐을 옮기러 갔기에 곁에 없다. 그러니 어엿한 연인을 둔 남자로써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떼어낸 후 침착한 어조로 따졌다.


"읏?!"


"장관님, 이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네?"


"우선 말씀드리는데 장관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호의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고 감사하며 살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많이 곤란합니다."


"아, 아니, 그…"


"거기에 전 약혼한 연인과 아이들까지 있는데, 그 아이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시면 어떡합니까?"


"...잠깐만요, 지휘관님.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하, 아니, 크흠. 그러니까, 전 아이들과 약혼한 연인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하다, 이런 얘깁니다."


"약, 혼…? 흐, 후후후."


"...장관님?"


내가 강경하게 나서는 걸 처음 본 장관님은 많이 당황한 듯 하다가, 약혼이라는 한 마디에 안색이 확 바뀌며 쓸쓸한 얼굴로 혼자서 실실 웃어댔다.


그러다가 특유의 사무적인 미소를 띄우며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더니 머리를 숙이면서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했다. 


"기분이 꽤 상하셨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없이 나갔네요."


"예, 아, 아닙니다…"


"후후, 아니긴요. 안 된다고 하셨으니 순순히 단념해야죠. 아, 그러면 다음주는 시간 되세요?"


"다음주요…? 아, 네 그땐 될 거 같아요."


"다행이다, 그럼 다음주 이 시간에 주차장으로 나오세요.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넵."


"네, 그럼 다시 한 번 폐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하고, 그때 뵙겠습니다, 지휘관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우리 꼬마 친구들도요."


"우으… 저 언니 약간 무서워…"


"귀신같아…"


"어허! 죄송합니다…! 요 녀석들이 아직 어려서…"


"후후, 그럴만 하죠. 그리고, 전 지휘관님께서 사과하시는 모습은 그리 보고 싶지 않답니다."


"예?"


내가 사과하는 게 보고 싶지 않다고? 갑자기?


장관님의 뜬금없는 대답에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저 멀리로 사라졌다. 참 이상한 양반이야. 종잡을 수가 없어.


또한 무언가 기시감이 든다고 해야되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 말에 머리가 좀 복잡했지만, 빠르게 잊고 아이들과 맛난 저녁을 즐겼다.


그후 소화를 위해 산책 좀 하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돌아간 내 방은 예상대로 카리나가 먼저 도착해 짐을 풀어둔 상태였다.


"아, 오셨어요 지휘관님…?"


"저… 카린?"


"네…"


"그, 옷이…?"


"아, 이건… 아으으으… 저번에 보던 소설에서, 남자친구한테 보여주면 효과만점이라고 해서…"


"맨날 그런 잡지와 책만 보던 이유가 이런거였구나…?"


"무, 무슨 소리에요?! …트으으…을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야시시한 복장과 홍조를 띄운 수줍은 표정이었던 게 좀 이질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둘 다 뭐 어떻게 해야할 줄 몰라서 침대에 함께 앉아 꼼지락대기만 하다가, 결국은 또 카리나가 일을 냈다. 남자로서 참 한심할 따름이다.


"안 되겠어요! 제가 먼저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지을게요…!"


"으아엑?!"


"당장 벗어요. 저도 사실상 다 벗었는데 남자가 되선 이정도 리드도 못하냐구요!"


"잠깐, 우리 연애 시작한지 겨우 12시간 지ㄴ"


"에잇♡"


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갈 수도 없는 게 함께 지낸지 10년이 되어가서 알건 다 아는 사이라 전혀 먹힐리가 없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키스를 하며 입을 막은 그녀에게 몸을 맡기면서 푹 빠지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꼭 껴안으며 따뜻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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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간 후, 아침이 밝자 또 키스를 하며 날 깨운 카리나는 내 와이셔츠만 입고 약간의 눈물자국과 땀자국이 여실하게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한밤에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면서 웃다가, 다른 이들의 기상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꿈틀꿈틀 일어난 침대는 침대보에 묻은 희미한 빨간 흔적을 중심으로 사방이 난장판이었다. 부끄러워서 혼날 지경이다.


"이거 빨리 빨아야겠는데… 청소부들이 보면 난리나겠어…"


"뭐 어때요? 흐아아… 그나저나 지휘관님의 셔츠으… 완전 따뜻하고 포근해요…"


"어제 안 아팠어?"


"당연히 아팠죠… 처음인 것도 처음이지만  지휘관님이 이런 면으로도 대단하단 소문을 심심찮게 들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은 꿈도 몰랐어요…"


"뭔 그런 소문, 크흠, 나도 나 스스로가 그럴 줄은 몰랐지. 네가 끝나자마자 거의 기절하듯이 자길래 엄청 놀랐다니까…"


"히히, 그래도 아주아주 좋았어요. 드디어 처음을 지휘관님과 함께 하다니… 아, 그럼 이 셔츠는 지휘관님이 입혀주신 거네요?"


"응. 옷 하나 안 걸치고 자면 추울까봐 그거라도 입혀줬어."


"지휘관니이임~ 완전 로맨틱하잖아요오…"


얼굴을 감싸쥐며 부끄러워 하는 카리나를 보고 뭔가 뿌듯함을 느낀다.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행복을 주는 것에 기뻤다.


아직 식사시간은 좀 남았기에, 밤의 후폭풍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조금 절뚝이던 그녀의 몸을 부축하며 같이 욕조에 들어가 식었던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와중에 부드러운 등과 엉덩이가 상반신에 닿자 또 반응이 올 뻔 했지만, 끝까지 쥐어짜낸 인내심으로 최대한 참았는데


"저… 지휘관님…"


"으응?"


"우리 아직 시간 많죠…?"


"...아마도…?"


"그러면…"


-쏴아아…


"?!"


"조금만, 히히히~ 아주, 아주 조금만 더 해요…♡"


제 허리를 감싸고 있던 내 손을 풀어 가슴 위에 올려두는 그녀의 신호에 결국 이성을 잃었다.


당연히 조금이라는 말은 안 지켜지는 경우가 태반이고, 이것 때문에 아침은 늦어서 못먹고, 아이들은 아빠가 안 나오니 굶어서 삐지고, 훈련과 강의도 연달아 늦어져서 교관과 조교들에게 한소리 듣고, 이부자리를 본 청소부들의 한숨에 쩔쩔매는 총체적 난국이 벌어졌다.


그래도, 794 시절에 비하면 불과 1주밖에 안 된 지금이 왠지 모르게 엄청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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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또 지나면서 훈련소 2주차가 되던 날, 저녁에 보자고 했던 장관님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방에서 카리나와 함께 로맨스 영화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서 여주가 남주의 품에 폭 안기고, 그대로 바닥에 그를 밀어서 눕힌 후 더욱 세게 대시하자 카리나는 놀란 눈빛을 여실히 드러냈다.


"와… 엄청 당돌하네요…"


"글쎄, 너보단 덜한 거 같은데?"


"엥? 그런가요?"


"어제도 나 돌아오자마자 했잖니."


"그, 그건… 이유가 있는 게 제가 지휘관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무려 8시간! 여! 덟! 시! 간! 씩이나 기다렸다구요!"


"어젠 애들 개조 검사하느라 일정이 늦어졌단 말이야…"


"그래도! 하다못해 말은 해주셨어야죠!"


"으, 알겠어… 그리고 카린, 솔직히 우리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첫날 이후로 하루에 최소 세브읍!!"


"으엣?!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팝콘이나 먹어욧!"


"으갸아악! 내가 잘못해쑤부웁!"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영화에 걸맞는 연인 간의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창문 밖에서 하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창문으로 달려갔는데 천만다행으로 누군가의 공격은 아니었고, 주차장 위에서 수십대의 차가 힙합곡의 리듬에 맞춰 도넛을 그리거나 점프를 하면서 훈련소 식구들의 눈과 귀를 재밌게 하고 있었다.


이걸 본 나의 생각은 아주 당연히


"야 재밌겠다."


"네?"


"카린, 잠깐만 갔다올게!"


"또 어디 가시려고요?! 당장 거기 서세요!!"


"흐핫! 촤아! 꽤 늦을 것 같으니까 어제처럼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으으으으! 천만에! 오늘은 절대 안 재울거에요!!"


카리나의 손을 쉽게 피해주고, 곧 날아오는 약간 살 떨리는 경고를 애써 무시하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남자들의 장난감, 그리고 그걸 가지고 노는 걸 참는다고? 돌아버린거냐.


주차장에서 술병을 들고 파티를 즐기던 군인들은 내가 등장하자마자 경례를 하며 환영해줬다.


-충성! 무슨 일이십니까 지휘관님!


"나야말로 무슨 일이래? 나 빼고 이런 재밌는 유흥을 즐기다니."


"하하, 무슨 일인진 몰라도 갑자기 자유시간을 받아서 단체로 놀고 있습니다!"


"와우… 훈련소에서 이래도 되는 거 맞아? 내가 헛것을 보나…"


"저희도 믿기지 않는데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기, 지휘관님을 위해 시원하게 하나 준비해뒀습니다! 원샷 하시죠!"


이게 미국인가? 한국이었으면 바로 단체 집합에 쪼인트를 수백대 까여도 할 말 없는 수준의 놀자판이 생생하게 열리고 있다.


눈이 조금씩 내리는 이 주차장에서 춥지도 않은건지 있으나 마나 한 천막만 대충 쳐놓고 이리 노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그래도 재밌어 보여서 놀러온거긴 한데, 이게 맞나 싶어 멍하니 방금 전의 훈련병이 준 맥주를 한모금씩 들이키던 중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충! 성!


"안녕하세요, 지휘관님."


"에, 장관님도 계셨어요?"


곧 거구의 장성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벌어지면서 나한테 한 것보다 더 절도있는 경례를 하더니, 그사이에서 회색의 정장을 빼입은 장관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정네들의 파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온지라 당황하면서도 어차피 저녁에 여기서 만나야 했었는데 일찍 만나서 오히려 좋기도 하고, 뭐 그렇다.


"예. 아, 여러분들, 다시 맘껏 노세요. 모처럼의 휴식인데 저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장관님!"


"장관님 덕에 살 맛이 납니다!"


"장관님 아래선 죽을 때까지 복무할 수 있습니다!"


-장관님! 장관님!


"이야… 충성심이 대단한데요?"


이제 이등병 패치를 단 햇병아리들이 가히 여신급으로 찬양하는 그녀에게 뭔가 의심이 간다. 설마?


"제 직속명령으로 휴식을 줬거든요. 어차피 기상악화로 이곳에서 처리하는 모든 업무가 취소되었기에 가능한 거랍니다."


"아…"


역시나지. 이러면 누가 됐든 간에 머리 박으면서 충성하거든. 한국에서도 최소 참모총장은 되는 양반이 사찰와서 이런 명령 내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프리패스일거다.


어쨌든 옆에 있던 맥주를 컵에 따라 한잔 마신 장관님은 바로 옆에서 추운 날에 웃통까지 까며 즐기는 남정네들은 보이지도 않는듯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자동차라, 남자들의 아주 좋은 장난감이자 애인이자 자식이죠."


"그렇죠, 저도 아래에 독일 태생의 두 아들들을 데리고 있거든요."


"3대 아니었나요?"


"아, 그건 진작 팔아치웠어요. 좋은 기억도 없는데요 뭐."


아이, 아픈 상처에 소금을 팍팍 치시네.


UMP40과 블뤼허가 선물하였고, 길들이기도 전에 카라비너와 비스마르크의 마이바흐 군단에 처참한 꼴을 당했던 벤츠 쿠페가 떠오른다.


794에서 도망칠 때 차를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싹 다 두고 왔는데, 거기 있던 병력들이 철수하면서 녀석도 바이에른 출신의 형과 함께 덤으로 딸려왔다.


수송기에서 내려지는 것을 봤을 때 심란한 마음이 들었고, 끝내 난 이 차를 탈 자격도, 생각도, 가지고 있을 이유까지 모든 게 없다고 결론짓고 바로 중고차 매장에 짭잘하게 팔아넘겼다. 한때 셋째 취급 받았고 성능도 가장 좋은 녀석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쉬운 감정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유지비도 셋 중에 제일 비쌌을 뿐더러, 아이들을 위해 최대한 돈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느새 맥주 한병을 끝낸 장관님이 취한 기색 없이 부하들의 난장판을 재밌게 구경하면서 얘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랬군요. 하긴, 입 싹 씻고 타기에도 좀 부담스럽고 하죠."


"네. 그리고 3대씩이나 끌고 다니는 것도 낭비잖아요."


"아이들 돌보기도 벅차실텐데, 탈 수 있는 사람이 4명밖에 안 되기도 하고요."


"캬, 맞죠맞죠! 또 나이도 30줄인데 저런 차 타고 나돌다니기엔 너무 늙었어요…"


-부아아아아앙!


-오오오오!!


마침 타이밍 좋게 활주로 끝단에서 즉흥적인 드래그 레이스가 펼쳐지면서 더욱 흥분한 남정네들이 소리를 지르며 판을 키워 가자, 장관님은 무언가 생각난 듯 모두를 정숙시켰다.


소리라곤 차들의 배기음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그녀는 가슴의 주머니에서 자신의 차키를 꺼내들었다.


"여러분, 재밌으신가요?" 


-예에에에!


"여러분들이 재밌다고 하시니, 공군장관으로서 매우 뿌듯하고 기쁩니다. 그래서, 여기에 재미를 추가하고자 저도 여러분의 게임에 참가해볼까 합니다."


-우와아아아아!!


"상대는 제가 지목할게요. 하나, 둘, 셋."


"....?????"


군인들의 함성에서 장관님이 가리킨 인물은, 다름아닌 나였다.


졸지에 음주 상태로 공군장관과 활주로 상에서 드래그 레이스를 펼치는 미친 일탈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허락된 쾌락이라지만 쪼인트는 커녕 오함마로 머릴 맞아도 할 말이 없는데 이건…


"아니 장관님?!"


"거기에,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네요?"


-';@*+*",÷&+*#%×"#&×,@("*÷*×(!(!!!!!


"에으에????"


"지휘관님의 차가 마침 여깄거든요. 흠, 제 차도 사이좋게 옆에 주차되어 있으니, 바로 준비합시다."


-Yes Sir!!


그녀의 쐐기에 광란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로 극도로 미쳐돌아가게 된 주차장. 


하필 의도적으로 눈에 잘 띄는 곳에 내 차와 그녀의 차를 같이 주차해둔 덕에 도망가기도 그렇게 됐다. 누구 소행인지는 말하기도 귀찮다.


아무튼 안락함을 위시하는 나의 그랜드 투어러와 직빨에 모든 걸 때려박은 그녀의 아메리칸 슈퍼카가 붙으면,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심지어 이미지에 전혀 걸맞지 않는 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연습으로 나란히 활주로를 한바퀴 돌면서 운전까지 잘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었다.


"어쩌지… 튈까? 그러면 남자 포기하라는 소리 들을텐데…"


"레디!"


-어이! 어이! 어이! 어이!


"아, 망했다…"


"3!"


"2!"


"1!"


-삐이익!


결국 거의 반 포기한 마음으로 활주로에 섰고, 출발 신호가 울리자 8기통 심장을 가진 두마리 철마가 살벌한 포효와 함께 눈보라를 뚫고 달렸다.


…라고 말만 저래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대충 3km 내외의 활주로를 누가 빨리 돌파하냐로 승부가 갈리는 이 경주는 


-에!!! 에…? 에…


-우우우~ 


-재미없다~!


"에휴… 미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의 기대 및 우렁찬 겉모습에 비해 내가 한참 뒤지면서 패배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야유 속에서 허무하게 차에서 내리자 장관님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내 팔을 감싸안았다.


"후후후, 제가 이겼네요?"


"너무 불공평한 경주에요… 제 차로 이걸 어떻게 이깁니까…"


"하지만, 이미 승부는 나버렸는걸요?"


"으윽…"


상관이라서 대들 수도 없는데, 차라리 정중하게 거절했어야 했다고 자책하며 과거의 나를 욕할 뿐이다.


그리고 요즘따라 스킨십 빈도가 더욱 늘어나서 장관님을 대할 때 불편해 죽을 것 같다.


분명히 그때 약혼한 연인이 있다고 말했고 거기에 사과도 했으면서 금새 잊어버린건지 참. 오늘은 그렇다 쳐도 다른 날들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흐흐흥~"


"아이고…"


-덜컥!


"자, 타세요."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날 물흐르듯 자신의 차로 끌고가 조수석에 태운 뒤 엑셀을 밟으며 훈련소를 빠져나왔다.


차가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당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뻔뻔한 전개였다.


"어디 가시게요?"


"최근에 봐둔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혹시 모르니 우선 벨트부터 매세요."


"하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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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


"도착했어요."


"예엡…"


여기가 아우토반인 것 마냥 시속 200km 언저리에서 달린 덕에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차에서 내려야 했다.


난 분명히 놀러왔을 뿐인데, 뭔가 잘못된 방식으로 그녀와 식사를 하게 된 것에 이해를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카리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지질 않는다.


식당에 들어가고 30여분 후 나온 스테이크를 꾸역꾸역 먹는 모습에 장관님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건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지휘관님,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그냥, 입맛이 없네요…"


"그래요…?"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들리는 거라곤 깨작거리는 식기 소리뿐, 그마저도 시간이 흐를수록 빈도가 줄어들었다.


뭔가 말을 꺼내고 싶어도, 괜히 상황이 악화될까봐 속으로 삭혔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고, 장관님께서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내려놓은 뒤 한숨을 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휘관님."


"네?"


"...저, 그으…"


"...솔직히… 저 싫으시죠?"


"...자, 잠깐만요, 장관님?"


"계속 귀찮게 하고, 이상한 모습만 보이고… 지금도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이렇게 외부 식당으로 데려와서 서로 불편하고, 뭐 그러잖아요."


그게 무거운 분위기에 더욱 물을 끼얹는 뜬금없는 자책으로 이어지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뭘 잘못 먹은건가 왜 이런대…


장관님에 대해 악감정은 전혀 없다. 내게 진실을 알려주고 구해준 구세주에게 어떻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저 요즘 나한테 하는 행동이 마아아않이 불편할 뿐 올리비아라는 사람 자체에게는 늘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하여튼 정신이 번쩍 드는 그녀의 자책에 식기를 잠시 내려두고 얼굴을 마주했다.


생각 외로 상당히 침울한 그녀의 모습에 자세를 공손하게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도움이 될 위로를 전했다.


"전혀 아닙니다. 장관님은 제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다름없어요. 절 그 지옥으로부터 구해주신 게 누군데 어떻게 싫어하겠어요."


"...고마워요, 지휘관님. 그래도 앞에서 나쁜 소린 안 해주셔서."


"아, 아뇨! 정말입니다, 진심이에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못하고 하기도 싫은 게 뒷담입니다."


"후후, 지휘관님은 매력이 아주 많은 분이세요. 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고, 저 또한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으니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진 거죠."


"저 같은 게 무슨 매력이 있다고 참…"


"봐봐요."


"저 엄청 나쁘고 못난 인간이에요. 당장 제 자식도 제대로 못기르는 아빠인걸요…"


"글쎄요, 제 기억에 따르면 전혀 아닐텐데요?"


위로의 말을 전하는데도 여전히 그녀의 기분은 많이 다운된 듯 하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해봐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으니, 그냥 좀 넘어가면 되지 애새끼처럼 투덜대냐며 스스로를 욕하던 중, 그녀가 품속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꽤 소중한 물건인 듯 가슴에 잠시 품었다가 두손으로 식탁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제가 어렸을 때의 소중한 추억들을 담아놓은 앨범이에요. 이걸 한번씩 돌려보면 이 세상 어느 것도 뚫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든답니다. 한 번 보시겠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당연히 괜찮죠. 맘껏 보세요."


"어… 어? 잠깐, 뭣…"


조심스럽게 사진첩을 받아들어 표지를 넘기자,  내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첫장은 부끄러워 하는 여자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김치를 하는 아주 낯익은 얼굴의 남자아이가 찍힌 사진이 있었고, 그 남자아이는 잊을 수가 없는 9살 시절의 나였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부끄러워 하는 여자아이는 어여쁜 외모를 드러내면서 커갔고, 나 역시 그에 맞춰서 덩치가 커지면서 여자아이의 곁에 딱 붙어있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사진첩을 다시 덮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자 그녀는 세상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가에서 눈물이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아, 아니… 이걸 어떻게…?"


"그러면… 그러면, 이건 뭔지 아시겠어요…?"


"...!!!"


보란듯이 또 품에서 조그만 돌고래 인형과 여러번 접힌 탓에 바스라져 가는 편지지를 꺼낸 그녀.


돌고래 모양의 인형과 편지는 사진첩의 여자아이 단 한명에게만 남겨준 것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돌고래 인형의 꼬리에 달려있는 이름표에 써져있는 세 글자, 김얀순이었다.


순간 794에서 탈출하던 날의 기억이 뇌리에서 아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후후, 저도 어렸을 때 소중한 오빠가 아주 귀여운 고래 인형을 선물해주었어요. 지금도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있죠."


"오, 그래요? 오빠분과 우애가 엄청 좋으신가 봅니다."


"절 엄청 아껴주었어요. 그러나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헤어졌다가 최근에서야 드디어 재회했고, 이게 꿈인가 진짜인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기뻤답니다."


"앗…. 죄, 죄송합니다.."


"후훗, 괜찮습니다."


그 오빠는, 자신을 아껴주었으나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헤어졌다가 최근에서야 재회한 소중한 오빠는 다름아닌 나였다. 그래, 우린 우애가 좋았지. 오빠분과 우애가 아주 좋았다고. 얀순인 대놓고 앞에서 저딴 소릴 지껄이던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얼굴을 아예 감싸쥐고 끅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공군장관 올리비아 킴이 아닌, 21년 전에 만난 내 여동생 김얀순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얀, 순이…?"


"으흡… 아윽… 흐으으…."


"말도… 안, 돼…"


"오빠아… 얀붕 오빠아… 흐극… 더이ㅅ, 으흑, 못하겠다고오오… 이딴 가면놀이 싫어어…"


"가뜩이나 분위, 기도 망쳐서느은… 그거 풀어낸답시고 이렇게에… 허무하게 얘, 흐끅! 기해버리고… 나, 정말 바보같, 흐읍, 지…?"


내가 고아원을 떠나기 몇 주 전에 찾아와서 그랬던 것처럼, 얀순이는 날 부르며 서럽게 울었다.


얀순이에게 야반도주라는 배신감을 안겼던 난,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오빠를 잊지 않은 그녀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나… 나 엄청, 끅, 노력, 했어… 오빠와의 야, 약속, 아극… 지키려고…"


"오빠, 말대로 좋은… 누나이자 언니가 되었고… 훌륭한 사람도 되었는데에… 왜… 흐으윽…"


"정작 오빠는, 나랑 한 약소옥… 왜, 왜, 기억 못해…? 말 좀 해봐… 으흐읍…"


"...야, 얀순아…"


"미안하다고, 하면 가만 안 둘거야… 그딴 위선 떨, 지 말고, 그냥 제발,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어…"


"......"


10년 전, 이젠 다 바스러진 편지에 적었던 대로 얀순인 멋진 사람이 되어 날 만나려고 했지만, 나란 놈은 한심하게 얀순이와의 약속을 모두 지키지 못했다.


"...미안해… 너한테 짐이란 짐은 다 쌓아놓고 도망가서… 심지어 그것마저도 모두 잊고 살아서… 미안해…"


지금도 약속을 어기는 스스로가 너무 역겨웠다. 


10년 동안 마음고생은 다 시켜놓고, 이딴 말을 씨부리면서 용서를 구하는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얀순이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너무 두렵고 겁났다.


"흐극, 흑, 오빠아… 흐아아아앙…!"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아무 말 없이, 도망간 것도, 다시 만나자고 해놓고 잊고 산 것도…"


하지만 착해빠진 내 동생 얀순이는 그런 오빠의 곁에 다가와서, 어렸을 때처럼 품에 폭 안겼다. 그땐 내가 가서 안아줬는데, 완전히 역전됐다.


이 가녀린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화나 편지 한통 없는 날 기다리며 홀로 살아왔을 얀순이가 안타까워, 꼭 껴안아 하염없이 미안하단 말만 찾았고, 결국 다른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간 후에야 그동안의 이야기를 재개할 수 있었다.


"얀순아, 좀 진정됐어…?"


"......"


(끄덕끄덕)


"...그럼 오빠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응…"


"왜, 지금까지 신분을 숨기면서 활동했던거야…?"


"...오빠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잠깐, 뭐라고?"


"서,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했다고…!"


"...아…"


엥, 이런 사소한 이유로 정체를 숨겨왔다고?


음… 뭔가 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눈치없는 짓을 하는 건 얀순이가 지금 이자리에서 날 쳐죽여도 무죄이다.


죄인답게 입을 꾹 다물고, 등과 머리를 토닥토닥 두들기고 쓰다듬어주면서 아직 울음기가 좀 끼어있던 얀순이를 쭉 달래줬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오빠… 사실 나, 저번주에 오빠가 그 여자랑 키스하는 거 봤다아…?"


"......?"


"그리고 난… 마침 그날 오빠한테 내 정체를 밝히고 고백하려고, 했어… 꽃다발과 반지까지 사서… 차에다 그걸 두고, 오빠를 부르러 가려는데… 식당 뒤에서…"


"자, 잠깐만, 얀순아…"


"나도… 오빠와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


"그런 오빠는… 날 새까맣게 잊었다니…"


10년 간 잊고 있었던 치명적인 송곳니를 다시 꺼내든 얀순이에게 겁을 먹었으니 말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얀순이는 착할 땐 참 착했지만 때론 얘가 사람인가 여우인가 싶을 정도로 지능적인 아이이기도 했다.


내 앞에선 소심하고 여리게 행동하던 녀석이 친구들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게 군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저번주에 카리나와의 약혼 얘기가 나오자 안색이 확 바뀌면서 그 모습을 보란듯이 꺼낸 바가 있다.


여튼 그것 때문에 혹여나 탈이 생길까 싶어서 최대한 여지를 안 주다가 야반도주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건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방법을 다 잊었을 뿐더러 약속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더해져 약점을 파고드는 얀순이에게 조금씩 옥죄어져 갔다.


"난… 아직도 오빠가 좋아…"


"오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짓을 하든, 죽을 때까지 오빠를 사랑할거야…"


"오빠도 그렇지…?"


"...응, 나도 우리 얀순이 사랑하지…"


"흐흥, 기뻐… 그 사랑이 무엇이든 간에, 우린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네…"


"그러면, 그 여자와 나 중 누굴 더 사랑해…?"


"윽…!"


"응? 빨리, 말해줘 오빠…"


"......"


"흐, 내가 어려운 질문을 했나보네…"


"...아냐…"


"뭐가 아닌데…?"


"넌, 내가 누구보다 아끼는… 도, 동생이고…"


"동생, 나는 동생이니… 오빠로서 사랑하고…"


"......."


"그 여자는, 약혼한 연인이니 남자로서 사랑하고?"


"혈연도 없고, 심지어 성씨마저 본관이 다른데, 난 여전히… 오빠의 여동생이구나…"


"설마, 우리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같은 혈통의 피가 흐른다고, 말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허점을 찾고 있는 게 분명해…


여동생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얀순이의 욕망은 적나라하게 드러나 나한테 비수로 꽂혔다.


그렇게 얀순이는 내 죄책감을 채울대로 채우다가 돌연 픽 쓰러져 피날레를 완벽하게 치뤘고, 난 그런 그녀에게 점점 종속되어가며 패닉에 빠졌다.


"읏…"


"얀순아?!"


"...오…빠아… 나,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


"아, 아, 알겠어! 얼른 집에 가자…! 차키 줘, 오빠가 운전할테니까…"


허벅지 위에 쓰러진 얀순이를 바로 업어 차로 달려갔다.


와중에 계산을 하려고 힘겹게 카드를 꺼내 웨이터에게 건네 주려고 했으나, 이미 얀순이가 손을 써둔 모양인지


"장관님께서 많이 슬퍼하시더군요. 계산은 이미 처리해뒀으니 어서 가서 위로해주십시오, 지휘관님."


"아, 예…!"


아주 태연하고 사무적인 자세로 문까지 열어주며 모든 직원의 배웅을 받았다.


눈발을 뚫고 도착한 차의 매우 좁은 문 사이로 얀순이를 어떻게 잘 태우고 운전석으로 가 룸미러를 조작하는데, 좌석 뒤쪽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시든 꽃다발이 비춰졌다.


순간 가슴이 미어지며 깊게 탄식했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하고 싶어도, 두 여인 사이에 끼어버린 지금 상황에선 그저 이렇게 한숨과 탄식 뿐이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여자관계는 카리나로 끝을 맺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배은망덕하게 잊고 살았던 얀순이가 갑자기 떠오르면서 또다시 줄타기를 하게 됐다.


"오… 빠… 오빠…"


"어, 얀순아 왜? 오빠 여깄어!"


"헤헤, 그냥… 오빠를 다시 김얀순이라는 신분으로 솔직하게 대, 하는 게… 꿈인가 진짜인가 싶어서…"


"아, 그리고 이거, 우리 커플반지, 하려고 산거거든…?"


그걸 눈치챈 듯 얀순이는 앞의 글로브박스에서 두개의 조그만 상자를 꺼내고 기어 위에 올려져있던 내 오른손을 잡아챘다.


"많은 건 안 바랄게… 내가 그 여자를 이길 수 없고, 설령 꺾는다고 한들 오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후 아무말 없이 반지를 꺼내 하나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 다른 하나는 나의 오른손 약지에 끼웠고 서로 약지를 붙여서 독수리가 비상하는 듯한 날개모양을 만들어냈다.


"어때, 멋지지?"


"어, 아주 멋있네…"


"이걸 둘 다 왼손에 끼웠어야 완벽하게 나왔을텐데, 왼손…"


"........"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가 사랑, 결혼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말수를 줄이면서 곤란한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10년만에 가까스로 떠올린 방법이기도 한 이게 얀순이의 상대법 중 제일 간단한 것이었고, 동시에 제일 잘 먹혔다.


그러자 얀순이는 허무하고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내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 와이셔츠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알겠어. 당분간은, 이거와 관련된 얘긴 안 할게…"


"......."


"미안하지만 조금만 잘게 오빠. 도착하면 깨워줘…"


"...응."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의자를 뒤로 눕혀 잠에 든 얀순이의 얼굴은 여러 체액으로 번진 화장품 자국이 곳곳에 묻어났다.


그 자국을 조심히 닦아주면서 얀순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차를 타고 훈련소로 돌아갔다.


아까의 그 파티는 진작에 끝난 듯 고요하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추운 날씨 + 깊이 잠든 얀순이를 깨우긴 좀 그래서 코트를 벗어 덮어준 뒤에 업어들고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업는 동안 깊게 잠이 든 듯 새근새근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얀순이가 푹 쉬길 바라면서도, 하마터면 얀순이의 달콤한 유혹에 그대로 빠져들어가 그토록 경계했던 일이 벌어질 뻔한 것에 십년감수하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에는 아까의 소동으로 화가 잔뜩 난 카리나가 분노 서린 얼굴로 내 옷깃을 붙잡으며 추궁했다.


"지휘관님."


"헉…"


"우리, 할말이 꽤 많죠?"


"자, 잠깐! 카린! 내 말 들어봐!"


"싫다면요?"


"제발…! 딱 한 번만 들어봐! 너한테도 중요한 얘기여서 그래…!"


"흐음… 일단 앉아요."



.



.



.



.



.



.



.



.




"오, 장관님이 지휘관님의 친한 동생이었다니…"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얘가 왜 여기 있고 그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간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천만다행으로 온힘을 다해 설명한 자초지종을 들은 카리나의 노기는 어느정도 줄어들었고, 대신 나와 얀순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많이 놀라는 듯했다.


허나 내가 가장 중요한 문제를 얘기해주자,


"제일 문제인 게… 얘가 날 오빠로 안 보고, 남자로 봐… 하아…"


"뭐라고요…? 아니, 하, 그래서 지휘관님에게 좀 집착하는 느낌이 있었군요…!"


"그러게… 어쩐지, 장관급이나 되는 인물이 아무 이유 없이 나한테 밀착할 리가 없지."


"저한테 적개심을 보인 것도…"


"....."


"하아, 어떻게, 지휘관님 곁은 꼭 이런 일만 벌어지는 거예요?!"


"그나마 다행인 게 당분간은 사적인 얘기는 안 꺼낸다고 하니까…"


"사적인 얘기를 안한다면서 이렇게 대놓고 반지를 넣어두고 가요?! 정말…!"


"미안해…"


"됐어요! 지휘관님은 잘못 없어요. 으으으으! 뭐, 선전포고라고 생각하죠!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요…!"


다시 그 분노가 얀순이를 향해 살아나면서 얀순이에 대한 경계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내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서 아까 경고했던 밤샘은 그냥 넘어갔지만, 이때부터 카리나의 스킨십과 애정 갈구도 이전보다 확실하게 세졌다.


함께 다닐 땐 늘 팔짱을 끼는 것도 모자라 팔에 얼굴을 부비댔고, 자신도 현모양처가 되겠다니 뭐니 하면서 가사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밤에는… 꼭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깍지끼면서, 또 난 가만히 있으라 하고 자신이 열심히 움직이면서 사랑을 나눴다.


이게 하루이틀이면 몰라 매일 이러니 죽어날 노릇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카리나의 체력이 그리 좋진 않아서 내가 탈진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편 얀순이가 준 반지는 차마 손가락에 끼우고 다니진 못했다. 


하지만


"어, 얀…"


"좋은 아침이에요, 지휘관님."


"아… 크흠, 네, 장관님도요."


"어머, 목걸이 하셨네요. 연인분께서 만들어주셨나봐요?"


"아 이거는…"


"...반지를 목걸이로 묶어서 매셨구나… 마침 제가 끼운 것과 똑같이 생겼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툭.


"?"


"딱 맞아서 다행이네, 그치, 얀순아."


"왜, 나랑 있을 땐 그렇게 하고 다니려고?"


"이게 내 최선인 것 같아서…"


"...괜찮아. 난 오빠가 그걸 어떻게 끼고 다니던 상관 안 해. 단지, 적어도 몸에 꼭 지니고 다니기만 했으면 좋겠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준건데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지."


"후훗, 그래. 오빠가 그런다면 나도 그럴거야."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서 매고 다니다가, 얀순이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왼손 약지에 끼워서 다니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 같이 만든 또다른 규칙, 공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휘하 지휘관과 공군장관으로 대하다가 내가 먼저 운을 떼면 오빠동생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이러다보니 나와 얀순이의 관계는 어느덧 어렸을 때처럼 화목하고 거리낌없이 대화하는 수준으로 돌아왔다.


"안녕 얘들아~"


-고모오오~!!


"하나같이 아빠 닮은 귀염둥이들~ 고모가 아빠 몰래 맛있는 거 사왔으니까 어서 먹자!"


"엥? 그걸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말해?"


"이제서야 알았으니까 몰래 맞지. 자, 이건 오빠꺼."


덩달아서 아이들이 얀순이를 부르는 호칭 역시 무서운 언니에서 고모가 되었다.


나보다 훌륭한 언니누나가 되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해낸건지 아이들과의 친화력이 나를 따위로 만들 정도였다.


첫대면 당시에 내 바짓가랑이를 거의 찢어질 정도로 빈틈없이 붙잡으며 뒤로 숨었던 아이들이 이제는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고모가 온 걸 알고 재빠르게 튀어나가 환영한다.


"어디… 아…"


"왜? 맛있어 보여서 감탄하는거야? 당연하지만 바꿔달라는 말은 하지마. 오빠만을 위해서 주문제작으로 사온 거니까."


물론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욕망은 사그라들긴 커녕 더이상 숨길 이유가 없으니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얀순이가 준 하트 모양의 빵엔 


YB♡YS

And… Son? or Daughter? Also… Name?

Answer: _____


이런 살벌한 글귀가 써져 있었고, 사색이 된 내 곁을 지나치면서 귓가에 소곤거렸다.


"얘들아, 천천히 먹으렴. 고모가 우유도 가져다줄게."


"아… 미치겠네 진짜…"


"오빠, 내가 얘기를 안 한다고 했지, 마음을 숨긴다고 한 적은 없어."


"그 여자를 이길 수 없다면, 이길 때까지 부딪히면 되는거야.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도 있잖아."


"어차피 오빠는 언젠간 날 인정하게 되어 있어… 아마 한달 후일려나? 그러니, 그리 큰 힘 들일 필요는 없을거야, 오. 빠.♡"


"야, 김얀…"


"자, 우리 어린이들, 우유 먹어야 키 크는 거 잘 알지? 이런 탄산은 안 돼."


"정말?! 고모… 나 환타 마시면 안 돼…?"


"지금처럼 하루에 한 컵만 마시면 괜찮아. 대신 그 이상 마시면 입 안에 세균이… 와악!"


-꺄아아악!!


-으아앙… 아빠우으…


-고모 무서워…


"후후, 어때? 카. 리. 나 씨는 이런 거 못하려나?"


"...하아…"


땅과 바다를 아우르던 794의 소녀들로부터 도망쳤더니 그곳엔 하늘을 쥐락펴락하는 거물이 된 무서운 여동생 얀순이가 입을 벌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날 잡으려고 육해공에서 뻗쳐오는 수많은 손길, 내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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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빨리 빼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