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끔씩.


상식이 멸망하는 시대를 맞곤 한다.




가령, 수가 세 배는 되는 적군을 맞아서 강을 등지고 싸워 이긴다든지.

가령, 단 한 척의 배가 삼백 척의 적선 앞에 당당히 맞서 승전보를 울린다든지.

가령, 한 줌의 영토만 남았던 나라가 백 년도 안 되어 세계를 호령하는 강소국이 되었다든지.


가령, 고작 5km의 전선을 위해 수십 만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는다든지.

가령, 어느 사령관의 이해 못 할 욕심 때문에 수백 만의 젊은이가 중기관총 앞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다든지.

가령, 어느 수뇌부의 이해 못 할 생각 때문에 사람을 병기와 산 채로 산화시킨다든지.


가령, 구국의 영웅들은 내버려둔 채 만화 캐릭터의 인권을 먼저 챙기는 나라가 있다든지.

가령, 세계 2위의 군사 강국이 전혀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던 이웃나라를 침공해서는, 뜬금 죽을 있는 대로 쑨다든지.

가령, 한 국가의 총리가 대낮 길거리 한복판에서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범인에게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든지.





개인과 국가, 규모와 중대사를 막론하고.


세상은 가끔 상식이 개처럼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 물어본다면.


그 당사자들조차 쉬이 대답하지 못할 그런 일들을.


그것을 현실이랍시고 우리 앞에 떡하니 내놓는 게 세상이었다.



그런 게 세상이니까.


그래. 그런 세상이니까.









"오, 시발."



내가 지금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는 저 광경도.





"..? 시발이 무슨 뜻이더냐, 서방."


"...아. 그냥 감탄사야. 나쁜 말이니까 신경쓰지 마."


"나쁜 말인데도 마구 뱉는 걸 보니 서방은 나쁜 남자로고. 아내 된 자로써 여는 슬플 따름이라."


"조용히 해."



내 옆에서 같지도 않은 우는 시늉을 하는, 


내가 여태 본 그 어떤 누구보다도 아름답지만


내가 여태 본 그 어떤 누구보다도 이해하지 못할 


머리에 용의 뿔이 난, 이상한 말투의 키 작은 절세 미인도.






전부 세상이 내게 내놓은 현실이라는 거다.



"...시발."


"시발!"


"...그런 말 하지마."


"하지만 서방이 자꾸 먼저 꺼내지 않느냐! 기어이 입에 붙고 마는 것을 여더러 어찌 하란 것이냐!"


"에이, 진짜."



"아앗! 이런 건 하지 말래도! 반칙이다, 반칙!"



불만을 표하는 그녀의 머리를 누르듯 헝클었다.


닿지 않는 두 팔을 휘적이며 빼액거리다가도 조금 지나면 얌전히 고로롱거린다.


애 취급 하는 것 같으니 하지 말라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이렇게 기분 좋아하면 나도 자꾸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숲 속 커다란 나무 밑동.


그 곳에 앉은 나의 무릎 위에 앉아 몸을 기대며 고로롱대는 


깊어지는 생각에 손길이 멈추자 제 머리에 난 뿔로 내 뺨을 쿡쿡 밀어올리는


이 키 작고 심술궂은 말괄량이 소녀는 '용녀' 아란.


'서해용왕'의 고명딸이라는 귀한 몸이자, 난데없이 이 세계에 떨어진 내가 일주일 전 맞이한 아내이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나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가르랑거리는 아란의 무게를 느끼면서


나는 좀 전 바라보던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지의 제왕에서나 볼 법한 웅장한 성벽과 나부끼는 깃발들.


그 성문으로 나다니는 수많은 행렬들.




아무리 봐도, 내가 원래 살던 '지구'에서 보던 광경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전부터 온갖 별 꼴 다 봤지만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새삼 다시금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스륵-.



나른해진 탓에 몸에 힘이 빠졌는지 아란이 살짝 미끄러지는 듯 했다.


자세를 고쳐잡으며 그녀가 고꾸라지지 않도록 좀 더 단단히 고정시켰다.



아란이 위로 고개를 젖혀 나를 바라보곤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내었다.

 


"흐응...."


"왜."


"아무리 혼인을 맺은 사이라지만 소녀의 배에 함부로 손을 올리다니...."


"어휴... 너는 머리에 그런 생각밖에 없냐?"


"그런 말 치고는 서방도 눈이 엄한 데 가 있지 않느냐."



아란이 코웃음치며 굉장히 열받는 표정을 짓는데도, 한 치의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하는 짓은 영락없는 애새끼인데 발육은 또 수상할 정도로 굉장해서는.


그런 각도로 앉아있으면 남자는 거부할 수 없는 '계곡의 장관'이 펼쳐지니까 어쩔 수 없었을 뿐이란 말이야.



하지만 기고만장해진 아란의 콧대와 갈수록 가관인 그녀의 표정을 남편 된 이로써 가만 두고 볼 수가 없기에,


나는 대 아란 결전병기를 꺼내들고야 만다.




"뭐라는 거야, 이 꼬맹이가."


"아앗! 또 그 꼬맹이 취급!"



아란이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며 조그만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그만해, 아파."


"아프라고 하는 것이다! 당장 취소해!"


"꼬맹이."


"이이이!"





.

.

.

"저기... 이제 슬슬 진심으로 아프니까 그만둬주세요."


"씨이....씨이....."



그제야 주먹질을 멈추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거리는 아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있다.


꼬맹이란 말이 그렇게 싫었나.




아란이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서방 미워! 갈 거야!"


"...어디로 가려고."


"몰라!"


"...숲이 꽤 깊어서 호랑이들 나올텐데."


"...읏..!"





아까 지나온 숲길 어귀에서 멈춰선 아란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세계의 호랑이들은 용과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 아란 같은 어린 용이 홀로 호랑이를 마주쳤다간 좋은 꼴은 못 볼 것이었다.



들어가기에는 호랑이가 무섭고, 그렇다고 돌아오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지.


저런 것만 봐도 하는 짓은 정말 영락없는 애새끼인데 말이야.


사실 밉상도 아니고, 오히려 귀여워보일 때가 있다.


예뻐서 그런가.






"미안해, 아란."


"...."


"미안하다니깐."


"...."



어쩔 수 없구만.


피식 피식 흘러나오는 잔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간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움찔거리는 게 눈에 보이지만 모른 체 했다.


그녀의 한 발짝 뒤에 꿇어앉은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아란."


"...."


"그대의 남편 되는 이로써 이리 청하니."


"...."


"이만 화를 풀어주지 않을래?"




어딘지 심하게 오글거리는 대사를 읊으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란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의 대목에서 따온 이 대사들은 나만의 또 다른 대 아란 결전병기였다.



지금도 입은 댓발 나왔고, 눈은 마주쳐주진 않지만 손은 놓고 있지 않는 아란의 모습이 그 효과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그 모습마저 못내 귀여워 미소를 짓게 된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란."


그런 아란을 안으며 달래자, 그녀가 품에서 훌쩍이며 웅얼거렸다.






"나빴어...."


"미안해."


"...거짓말."


"안 그럴게. 미안해."




...이럴 때 할 생각은 아니지만.


머리 하나 반 쯤 차이가 나는 키의 아란은 꼭 껴안기 좋은 베개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란은 한동안 내 품에서 웅얼거린 후에야 겨우 화를 풀었다.


여전히 입은 댓발 나왔고, 눈은 마주쳐주지 않지만.



몸을 기대오는 것 하며 마주잡은 왼손은 놔주질 않는 것이 아마 곧 원래대로 돌아올 모양이다.


참고로 오른손은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해서 당장은 놓아준 상태.



 

다시 나무 밑동에 앉아서, 아란의 화를 달래며 기분좋게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했다.



'뭐...나름 나쁘진 않은가.'



깨끗한 공기. 어딜 봐도 신선한 판타지 풍경.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딱히 매인 것 없는 일상.


'지구'를 그리워하다가도 문득 되돌아보면 나름 이곳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곤 했-.



꾸욱- 꾸욱-


"...알았어, 알았다구."



아란의 뿔이 내 턱을 찔러대는 것이 또 길어지는 잔생각에 손이 멈추었었나 보다.




여튼.


어딘가 열받고, 이상한 말투에, 잘 토라지고. 

애 같지만.


귀엽고, 아름답고, 잘 웃고, 잘 울고, 아이 같이 순수한.


그런 아내와 함께하는 자유로운 일상이라면.


뭐, 그런 거라면.



그래, 뭐.

나쁘진 않을지도.







이 때까지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 때까지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