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년]
환상! : BlueRose (3)
― HAPPEN
훼손된 자료를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것을 써 내려간 현자 같은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오늘 카린은 방과 후 도서실의 데스크 자리 대신, 고등부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주로 실험실이나 음악실 등의 특별실이 많아 오후에 동아리 활동을 하기 위해 몰린 학생들로 북적였다.
주로 도서실에만 상주한데다, 음악수업이나 미술수업 같은 게 아니고서야 올 일이 적었기에, 활기가 가득한 별관이 낯설게 느껴졌다.
카운터즈가 주로 있는 곳은 제일 낮은 1층, 그것도 후문과 가장 가까운 곳.
쉽게 말하면 구석진 곳이었다.
학교 지원은 꽤 많이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잘 안 보이는 곳에 박혀있는 걸까.
누가 보면 비밀결사대인 줄 알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카운터즈의 동아리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우..."
카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동아리실의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은은하게 홍차 향기가 퍼져 나왔다.
문을 완전히 열자 보이는 것은, 진짜 홍차가 담긴 찻잔과 그걸 고고한 모습으로 그것을 음미하는 학생회장과 맞은편에 앉아 똑같이 찻잔을 들고 있는 샬롯이 보였다.
몸 쓰는 활동하는 동아리에서 웬 홍차?
생소한 풍경에 어이없어하는 카린을 제일 먼저 반긴 것은 학생회장이었다.
"오, 좋은 결정이다, 카린 웡. 카운터즈에 잘 왔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와 함께 조심스럽게 동아리실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구석에 처박힌(?) 동아리실 치고는 꽤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부원들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귀족들이나 쓸 것 같은 휘황찬란한 대검들의 모습도 그렇고, 홍차도 그렇고...
이 동아리 부실... 인테리어가 영국 왕실을 연상시킨다?
생소한 부실의 풍경을 본 카린은 자신이 중세 시대로 시간여행을 왔나 싶어 부정하듯이 눈을 비벼댔다.
"헤이! 굿 애프터눈 미스터!"
"와아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큰 목소리에 놀란 카린이 몸을 돌려 뒷걸음질 쳤다.
아니, 이 장면이 또 나올 줄이야.
뒤에서 한 손을 들어 인사하던 제이크가 격한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카린의 뒤로 클라레스와 샬롯은 동시에 제이크를 향해 말했다.
"지각이다." "지각입니다."
고상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고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제이크는 왠지 모르게 약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야! 집합 시간 안 지났거든?"
"신입보다 늦었다는 점에서 자격 미달이다. 제이크."
"오? 그 제안해 봤다는 신입이 너였구나?"
비겁하게 팩트로 상대하는 클라레스에게 반박하다 이례적으로 신입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관심을 카린에게로 향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며, 카린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제이크 딴에는 살살 두드린 것이었지만, 카린은 아픈지 맞은 어깨를 부여잡고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아! 아파요!"
"이야! 기가 막힌 우연이네! 저번에 나 1학년 수학쌤한테 귀 잡혔던 거 기억나? 하아, 그 일 때문에 제대로 얘기도 못해서 나중에 다시 가려 했는데 너무 바빠서 말이야―"
"흠. 제이크, 지금 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지 않나?"
"반가워서 잡담 좀 할 수 있지. 참 너무하네."
클라레스의 지적에 제이크가 볼멘소리를 내는 동안, 샬롯이 카린에게 이리로 오라며 조용히 손짓했다.
아직 이 동아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카린은 그나마 아는 얼굴이자 친구인 샬롯이 오라는 대로 뒤를 따랐다.
동아리실 한쪽에는 홍차와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사물함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이 조금 틀어졌는지 샬롯이 조금 힘을 주고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곧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거 학교 반입 금지 물품들 아닌가?
안에는 척 봐도 평범한 학생이라면 보기 힘든 살벌한 무기들이 가득했다.
도검부터, 각종 총기류는 기본.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법한 스태프처럼 생긴 막대에 보기 만해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낫. 거대 도끼, 망치...
카린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거대 무기고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는 뭐가 좋아?"
"네? 뭐가 좋냐니요...? 이런 살벌한 무기들을 보고,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고르라는 거예요?"
"응. 맘에 드는 거로 골라봐."
"으와..."
카린이 질겁하며 샬롯에게 되물었지만, 샬롯은 뭐가 문제냐며 카린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학교에 아무렇지 않게 있다니...'
'카운터즈에 왔으면 당연히 카운터로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골똘히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샬롯과 카린의 사이로 클라레스가 끼어들어왔다.
"처음부터 카운터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카린의 뒤로 다가온 클라레스의 손에는 그만의 고유 무장으로 보이는 대검이 있었다. 동아리실에 들어오며 보았던 두 대검 중 하나였다.
그의 키만큼이나 큰 대검은 매일 정성껏 손질했는지 새것처럼 반짝였다. 마치 실전에 쓰이는 것이 아닌, 관상용처럼. 흠집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 학생회장님이 들고 있는 무기도 이 사물함에서 시작한 걸까?
"카운터에게 중요한 것은 가능성. 그리고 카린 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선택해 보아라."
"하지만 이렇게 대뜸 골라보라고 해도..."
"분명히 마음이 가는 곳이 있을 것이다. 없다고 해도 좋다. 무기 하나 없이 자기 맨손 하나만 믿는 사람도 있으니."
멀리서 다리를 꼬고 거의 의자에 눕듯이 앉아있던 제이크가 그거 내 얘기냐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라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린에게 다 안다는 듯 저 수많은 무장들 중에 골라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카린의 선택을 기다렸다.
아직도 감을 못 잡겠는지 카린은 샬롯의 눈치를 살폈다. 샬롯은 어느새 클라레스를 따라서 똑같이 자신의 검을 가져와 옆에 서 있었다.
유독 학생회장의 대검보다 더 번쩍거리는 저 검도 관리하는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저 두 사람이 들고 있는 것들... 직접 고른 것들이겠지...?
카린은 심호흡 한 번과 함께 저 무기고 같은 사물함의 내부를 제대로 훑었다.
없어도 괜찮으니, 마음이 가는 무기를 찾아라.
카린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눈동자에 비치는 무기가 달라졌다.
짧고, 길고, 날카로운 도검들을 지나고. 아무리 카운터라 한들 차마 들어보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각종 폴암과 해머를 지나...
"호오..."
카린의 선택에 클라레스가 감탄했다.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고른 것은 평범한 소총 한 자루였다.
이 소총을 고른 데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한 외형이며 이 거대 무기고에서 그나마 친숙한 모습을 가졌다―라는 게 전부였다.
딱히 총기류에 따로 지식을 가진 건 아니었으나, 도서부 데스크에서 단 한 번 총기류에 관한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괜히 총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외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처음부터 자신의 무기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견착까지 해 보이자 샬롯도 클라레스를 따라 감탄사를 뱉었다.
"오..."
"오오, 클라레스 녀석이 그렇게 꼭 스카우트하겠다고 그러더니 진짜 엄청난 애가 들어왔네."
"다들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죠...?"
멀리서 지켜보던 제이크도 단숨에 다가와서 카린의 완벽한 견착 자세에 감탄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사격술에 일가견이 있는 건 둘째치고 견착조차 제대로 모르는 평범한 학생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수상하리만큼 견착 자세를 바르게 잡은 카린도 마찬가지였다.
카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있다가, 곧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급히 자세를 풀었다.
"따로 배운 적이 있는 건가?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군."
"배운 적 없어요. 실제로 총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고요!"
"오오, 그럼 이게 바로 그 군필 여고생인가 하는 그런 건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이크가 무심코 던진 농담에 카린이 기겁하며 소총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격한 반응이 딱 놀려먹기 좋은 반응인지라, 제이크는 얼굴이 빨개져서 자신을 노려보는 카린에게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아~ 역시 공 맞고도 멀쩡하다고 했을 때 나도 내심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너 진짜로 대단한 애였구나?"
"그, 그냥 도서부에서 사격술 관련 서적을 본 것뿐이에요!"
"글만 읽고? 혹시 진짜 군필 여고생?"
"하지 마세요! 정말!"
끝없는 제이크의 농담에 동아리실이 떠나가라 시끄러워지고,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클라레스. 그리고 그 옆에 서있던 샬롯이 시끌 거리는 풍경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열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 집합 시간 다 됐구나.
곧 발소리의 주인공이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도에 다 울린다~"
"에, 보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상외의 인물에 카린이 인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소미를 바라보았다.
보건 선생님이... 이 동아리 지도교사?
"스카우트했다는 부원이 카린이었구나? 가자~ 테스트해 봐야지?"
"테스트요...?"
"응. 고유 무장도 고른 것 같고... 별로 어렵지 않아, 간단한 테스트야. 따라오렴?"
"아! 네!"
―카운터 능력을 제대로 활용해 보지 못한 학생은 테스트와 사전 지도를 통해 충분히 익숙해지도록 하고, 방위 활동부터 천천히 시작하게 된다.
전에 받았던 유인물의 문구가 기억난 카린은 심소미를 따라 동아리실 밖으로 나갔다.
정작 소총은 그대로 둔 채...
"적응은 한참 걸리겠네~"
제이크가 카린이 두고 간 소총을 집어 들고, 무작정 심소미를 따라 나간 카린의 뒤를 따랐다.
클라레스는 오래간만에 괜찮은 인재라며, 세 명만 있을 때보다 더 시끌벅적해진 분위기는 적응해 보면 되겠다는 평과 함께 샬롯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아, 사물함. 닫고 가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얼른 따라 나오도록."
***
두 명은 검을 쓰고, 그나마 있는 한 명은 맨손. 세 명 모두 총기 관련 지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따라서 별다른 관여 없이 테스트 대기자용 의자에 앉아 카린의 테스트를 지켜보는데...
세 명은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결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카운터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테스트 장비만큼은 다른 카운터 특수 양성학교에 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테스트 장비에서 완벽이라는 결과를 출력하고 있으니, 일단 뭐가 뭔지는 몰라도 모두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주먹과 검으로는 절대 흉내 낼 일 없는 견착 자세, 미친 명중률과 집탄률...
"진짜 군필 여고생이야?"
잔뜩 집중한 카린에게 제이크의 농담은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눈앞의 가상 테스트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지도 선생님 심소미도 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홀로그램 화면 속 계속해서 올라가는 수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레스는 자신이 이런 놀라운 인재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뿌듯한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군.
"저 정도면 바로 실전에 투입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
"... 학생회장님?"
입을 가리고 쿡쿡대는 학생회장을 본 샬롯이 입을 다물었다.
급한 사안도 아니니 굳이 다른 생각 하는 것을 제지할 이유가 없었다.
"후우... 결과는요?"
테스트를 마친 카린이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뱉으며, 결과가 잘 나왔는지 물었다.
아무도 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자 의아함에 스스로 테스트용 바이저를 벗고, 홀로그램 화면의 결과표를 본 카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했다.
웬만한 군인이나 용병들도 기겁하고 펑펑 울고 갈 사격 솜씨임을 보여주는 결과표였다.
테스트를 지켜보던 심소미가 완벽하다며, 클라레스에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클라레스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주 훌륭합니다. 정말... 당장 실전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실전이요?"
"자신감을 가져라, 카린 웡. 테스트 결과가 너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실전이라는 말에 카린이 깜짝 놀라 바짝 쫄아버렸다.
테스트는 테스트일 뿐이고, 이제 시작인데 벌써 실전 배치를 염두에 두다니...
그때 제이크가 다가와 카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완전 재능 있는데? 멋있어~"
"아... 감사합니다. 그치만..."
"왜? 나는 결과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잘했어!"
제이크가 격려와 함께 엄지를 척하며 보여주자, 왠지 얼굴이 화끈거려 카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갈 곳 잃은 눈을 굴리다, 테스트 대기자용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샬롯과 눈이 마주쳤다.
카린도 샬롯을 따라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축구공 맞고, 기절하던 가녀린 여고생 맞아?"
"그 얘기는 그만해주세요!! 선배!!"
"오? 주먹도 이제 쓰는 건가? 대련해 볼래?"
얼굴도 빨개지고, 잔뜩 뿔난 카린이 양손을 들어 위협(?)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자 제이크는 주먹으로 자기와 겨뤄보려고 하는 거냐며 주먹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심소미와 클라레스는 새 부원의 테스트 결과에 대해 이야기 중이니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샬롯뿐이었다.
샬롯은 이제 다음 테스트로 넘어갈 겸.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잠깐 두었던 카린의 소총을 챙겨 들어 다가갔다.
"카린. 이거 받아."
"네?"
"이제 네 거야."
카린은 샬롯이 건네는 소총을 받고,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색한 총기의 외형을 훑었다.
한참 장난을 치던 제이크도 진지하게 외형을 살피는 카린을 보곤 한 발자국 뒤로 빠졌다.
"...혹시 파츠 같은 거도 붙이나요?"
"응? 벌써 튜닝을 생각하는 거야?"
"아뇨, 아뇨!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총신이 조금 허전하다고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카린의 얼굴을 본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생각에 잠긴 얼굴도 곧 제이크의 장난에 흐트러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