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주년]
환상! : BlueRose (8)
― Mirror...?
때가 되었구나.
그렇게 직감한 건, 수려한 금발과 녹안을 가진 남자가 또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이 몇 번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환상의 주인을 만났다.
(반복재생XXX)
1학년인 카린과 에이미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올 일이 없는 3학년 교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왔다.
두 여학생의 손 위에는 1학년 교사 캐시의 심부름으로 쥐어진 안내문 뭉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재난 요령 개편안이라고?"
"네, 이번에 개선점도 많고 요즘 학교 외곽 도시에 CSE레벨이..."
간단한 수다를 떨면서 3학년 7반 앞을 지나갈 때쯤 문득 그림자가 지는 느낌에 카린이 정면을 보았다.
검은색 티셔츠 위에 받쳐 입은 하복 와이셔츠와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선글라스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좀 더 시선을 위에 올리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서, 선배?!"
"여어. 심부름 가는 길인가 보네. 들어줄까?"
"아, 아뇨! 괜찮아요!"
에이미는 제이크의 실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꽤 훤칠한 외모를 보고 소리 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오~
예상하지 못한 인물― 아마도 존경하고 있는 선배를 갑자기 마주친 탓에 어쩔 줄을 모르는 카린과 제이크를 번갈아보는 에이미.
처음 보는 게 실물을 가까이서 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가 짝사랑하는 남자랑 대화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처음 보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오늘은 카운터즈 활동 없어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또 좋네."
"ㄴ, 네. 그러게요...! 층이 다, 달라서 못 볼 줄 알았어요... 아하하..."
으이고, 화상아... 진정을 못하네.
아닌가? 저쪽이 능구렁이 인건가? 하는 말들에 버터 좔좔 흐르는 거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똑 부러지던 친구가 사랑 앞에서는 이렇게 바보멍청이가 되는구나―라며 에이미는 두 사람 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너네 심부름 온 1학년 애들이지? 이리로 가져와라."
교무실 밖으로 나오다가 저-멀리 종이뭉치를 가득 든 학생 무리를 발견한 강민우가 카린과 에이미를 향해 외쳤다.
강민우의 목소리를 들은 제이크는 뒤를 돌아 가져오라고 손짓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곤, 카린과 에이미를 향해 한번 씩- 웃어보더니 두 여학생의 종이 뭉치를 단숨에 빼앗아 들었다.
"어... 어어? 선배! 지금 장난치시면 안 돼요!"
"에이, 너무하네. 장난치는 거 아니고, 나도 어차피 교무실에 볼 일 있어서 내가 갖다드릴게. 겸사겸사 도와주면 좋잖아~"
"오오, 이게 3학년 선배의 드넓은 배려심?"
"뭘 좀 아는 애네! 하하! 다음 부활동때 보자 카린. 카린 친구? 도 조심해서 가~"
"서, 선배! 아악!" "바이바이~"
에이미는 무작정 1학년 교실로 가는 계단 앞으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카린의 팔을 잡아 끌었다.
혹시라도 넘어질라, 카린이 자기가 알아서 걷겠다고 두어 번 외치고 나서야 비로소 팔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갑자기 잡아당기면 위험... 엑!?"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짓는 음흉한 친구의 미소에 카린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니... 음흉하다 못해 그냥 변태 같은 미소에 저절로 눈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카린~ 진전이 좀 있었나 봐?"
"무,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흐흥, 그렇지 않고서야 못 봐서 아쉽다는 말이 어떻게 나와? 아, 달달하다~ 달달해~"
"아니라니까요―!!!"
거의 놀리다시피하는 에이미의 말투에 카린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자신이 질러놓고도 놀랬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자후를 연상케하는 큰 목소리에 계단과 복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카린에게 꽂혔고, 에이미도 갑자기 귀에 바로 꽂힌 큰소리에 귀가 먹먹해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카린을 바라보았다.
"아... 아,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에이미!!"
완전 폴더로 허리를 굽히고 냅다 사과를 한 뒤에 도망가는 카린.
에이미의 성격상 딱히 큰소리로 화낸다고 토라지거나 삐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친구의 흥분한 모습을 처음 본 탓에 잠시 몇 초간 그대로 얼어있었다.
"으어? 같이 가, 카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이미가 도망가 버린 카린을 찾으러 뛰어내려 가자, 학교에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에이미에게 제대로 사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순간에 평정심을 잃고 화를 낸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듣는 오후 내내 생각이 너무 많았고, 도서실로 갈 준비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카린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책가방에 자신의 교과서를 집어넣었다.
내일 보자며 인사하는 반 친구들의 인사도 대충 잘 가라며 손인사로 대꾸하고, 이젠 아예 책상 앞에 서서 자신의 머리끈을 매만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아..."
우스운 소리일지 몰라도, 첫 만남은 순정만화 같았다.
그 뒤로 같은 동아리에, 때로는 방위활동, 선물도 받고, 수영장에서 놀기도 하고...
어쩌면 친구들의 호들갑대로, 짝사랑일지도 모른다. 보통 처음엔 부정하기 마련이니까. 그럴리가 없다고.
제 3자의 눈은 피할 수 없다.
받고 있는 호의나 감정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에이미가 반쯤 놀리듯이 물어본 '진전'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제이크의 행동 대부분은 그저 사람이 시원시원하고 선해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가 인기가 많은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의 행동은 결코 카린 자신을 향한 호감이 아니라는 걸. 이성이라는 영역, 머리, 카린 자신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의 영역, 마음. 소위 말하는 두근거림, 설렘.
정말로, 정말로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일까?
"됐어... 가야지... 도서실..."
카린의 축 처진 어깨에 가방끈이 올라갔다.
아무리 심란해도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자신의 교실을 벗어나 도서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
분명히 마주칠 때마다, 이름을 들을 때마다, 희미하게라도 목소리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뛰고 머리가 새하얘지곤 했지만, 항상 그런 기분을 스스로 수습하는 게 다였다.
선배는 항상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며, 모두에게 존경받을만한 사람.
이 정도의 평가에서 카린은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점심시간에 나누었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친구만도 못한 사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
짝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조언을 구하기엔, 편향적인 시선에 갖힌 제 3자와, 창피함, 부끄러움.
아, 비슷한 상황에 처하거나 겪어본 사람이 있다면...
아냐, 있을리가 없지...
"여기서 뭐해."
"으아?! 네?"
멍을 타며 서있는 카린의 옆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나머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인기척이 나지 않는 반대편으로 피하는 카린을 보며, 샬롯은 손인사를 해 보였다.
이젠 카린의 반응에도 익숙한지, 정작 샬롯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도서실가?"
"아... 그렇죠? 샬롯은요? 선도부실에 안 가나요?"
"책 빌리려고. 같이 가자."
나란히 도서실로 향하는 두 여학생.
정말 친한 친구면 아무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던데... 꼭 그렇지 않아도 샬롯은 원래 수다쟁이가 아니었으니 조용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어, 비 온다."
"네?! 아... 어떡하지. 샬롯은 우산 있어요?"
"선도부실에. 우산 없으면 하교할 때 선도부실로 와 하나 빌려줄게."
"아, 다행이다. 우산을 두 개가지고 있는건가요?"
"아니. 학생회장님께서 이럴 때를 대비해 우산 여유분을 준비하셨거든."
"그, 그렇군요..."
역시 참된 학생회장이라고 해야 할지...
특이하면서도 대단한 사람이다. 학생회장의 완벽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분명 클라레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샬롯은... 클라레스 선배님을 참 잘 따르네요. 카운터즈에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에요?"
"아니. 내가 들어가겠다고 했어."
"엑, 스카우트된 게 아니에요?"
"응."
의외의 이야기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샬롯 정도의 실력이면... 아니, 애초에 카운터를 스카우트해서 부원을 뽑는데?
"그럼 왜 지원한 거예요?"
"네가 먼저 말한 대로, 존경하는 학생회장님을 따르고 싶어서."
"아..."
영양가 없는 질문에 비해서 굉장히 솔직한 대답에 괜히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는 듯했다.
정작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그... 샬롯은 원래 그렇게 솔직했나요?"
"왜? 난 물어본 거에 답해준 건데."
"클라레스 선배님을 잘 따른다고 한 거요?"
"응. 학생회장 일로도 바쁜데, 카운터즈의 리더로서 동아리를 잘 이끌고, 성적 전교권도 안 놓치고, 존경의 대상으로는 손색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따르고 싶어서 따르는 거야."
역시, 샬롯도 학생회장 만큼이나 신념이 올곧은 친구였다.
...
어느새 도서실 앞에 도착하고, 먼저 도착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최지훈 선배가 카린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타박을 주었다.
카린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데스크에 앉아 바쁘게 도서부 사서 일을 할 준비를 했다.
000 총류,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400 자연과학, 500 기술과학, 600 예술, 700 언어...
샬롯은 십진분류법으로 분류되어 적혀진 무수히 많은 책장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그렇게 걷다가... 800 문학의 책장 쪽으로 꺾어들어갔다.
검지를 들어 천천히 책을 훑는다. 문학에도 다양한 문학이 있다. 보통은 나라별로 분류하지만... 이제 와서 나라는 의미가 없으니 장르로 구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샬롯은 '찾았다.'라며 제일 구석진 칸 위에 꽂혀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서로 다른 책들의 상태중에서도 꽤 양호해 보이는 책이었다.
푸른색의 표지를 가진,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책을 소중하게 들고, 카트를 끌며 반납된 책을 분류별로 정리해 꽂아 넣는 최지훈을 지나 책장 숲에서 벗어났다.
데스크에서 준비를 마친 카린이 책을 들고 다가오는 샬롯을 보곤 가져오라며 손짓했다.
샬롯이 건넨 책을 받자마자 카린이 놀란 표정으로 샬롯에게 물었다.
"샬롯은 역사 책을 많이 보지 않았어요? 소설책에 관심이 생긴 건가요?"
"학생회장님께서 추천하셨어."
"아... 샬롯답네요... 음, '백일몽'... 저도 다음에 한 번 읽어 봐야겠어요. 읽고 저한테도 어땠는지 알려줘요. 샬롯."
"...그래. 그러지뭐."
샬롯의 학생증과 책표지에 붙은 바코드가 읽히는 소리가 나고, 이제 가져가도 된다며 돌려주었다.
"혹시 선도부실 갔는데 나 없으면 그냥 하나 꺼내가면 돼."
"아! 고마워요. 샬롯. 덕분에 비는 안 맞겠어요."
샬롯은 대답 대신 손인사를 해 보이며 유유히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밖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도서실 안에 있던 학생들은 자연의 위대함에 모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와... 엄청나네..."
"오늘 무사히 하교할 수 있겠죠...?"
카트를 끌고 돌아온 최지훈이 창밖을 보면서 감탄했다.
우산을 빌린 건 좋았는데 무사히 하교할 수 있겠지...?
마치 장마를 연상하게 하는 거센 빗줄기가 도서실의 유리창을 하염 없이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