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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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게슴츠레 뜬 눈동자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뱀처럼 번득인다.

 

“이란아, 내 말을 못 들은 거니?”

 

욕실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소리를 문짝 한 겹 사이에 둔 탈의실에서 이시연은 싱긋 웃었다.

 

그녀의 시선에 백이란은 어깨를 흠칫 떤다.

 

“벗으라니까?”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건가요…?”

“그건 네가 신경쓸 게 아니라고 말했잖니.”

 

그러다가 이시연은 몸을 홱 돌린다.

 

“정 싫으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도 된단다? 문희는 이제 이 밖으로 못 나오게 되겠지만.”

“자, 잠시만요!”

 

백이란은 그녀를 멈춰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이시연은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로 훌쩍 다가온다.

 

“참고로 문희 방에 있던 여벌옷도 전부 숨겨뒀어.”

 

그가 뱀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만 것은 단지 그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미 백이란은 그녀의 똬리 안에 칭칭 감겨있었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타인의 옷을 빌린다는 선택지도 ‘처음에 지급된 복장’이라는 전제가 있기에

확실하게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적어도 그는 강문희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도박은 원치 않았다.

 

“…벗으면 되죠?”

 

결국 선택지는 그뿐이었던 것이다.

 

백이란은 조심스럽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기지 않고도 덮치겠다며 백은하가 가위질을 해댄 탓에 이미 고간이 훤히 들어난 옷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적때기에 가까운 것을 벗을 뿐인데도 어째서인지 얼굴이 화끈해졌다.

 

“부끄럽니?”

“그럼 안 그렇겠어요?”

“아하하, 귀엽네.”

 

그러고 보면 여기 들어온 이후 스스로의 의지로 타인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억지로 벗겨질 뿐이었다.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이 오르는 것을 봐선 귀까지 붉어졌으리라.

 

이내 백이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수치심이 몰려와 양팔을 모아 고간을 가렸다.

 

“손 좀 치워볼래?”

“윽…….”

 

이시연은 그의 다리 앞에 풀썩 주저앉더니 얼굴을 내밀었다.

이어서 올려다보며 명령을 내린다.

 

백이란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수치심에 움찔거리면서도 천천히 팔을 치워 차렷 자세가 된다.

 

“힉?!”

 

그리고 그 순간 아직 늘어져있던 그의 페니스를 이시연이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갑자기 찾아온 자극에 백이란은 몸을 움츠렸다.

 

“서, 선생님…?”

“역시 그냥 단순한 터치까지는 규칙 위반이 아닌가.”

 

그런 백이란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이시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려면 일단…….”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입김을 훅 불었다.

근질근질한 감각과 함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끝까지 커졌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지.”

 

이내 이시연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벌려 그의 페니스 위로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가 자지에 닿는 그 순간

전류가 흐르는 듯한 쾌감을 받으며 백이란은 전신을 경련시켰다.

 

“방금 그건 대체…….”

“아, 미안해. 말을 안 했구나? 내 능력이란다.”

 

순식간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부풀어오른 그의 강직을 보고서야 이시연은 다시 웃었다.

 

“하으?!”

“쥐는 것까지도 일단은 오케이인가.”

 

이윽고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꽉 쥐었다.

한동안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흔드는 것부터는 성행위 판정이네.”

 

나름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시연의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모습에 기회인가 싶어서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백이란 역시 무언가에 짓눌린 듯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야 못 움직이겠지. 이렇게 잡힌 상태로 허리를 움직이면 그건 이제 야한 짓이잖니.”

 

당황하는 백이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반대쪽 손까지 가져와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어때? 이렇게만 있어도 기분 좋지?”

 

그러곤 사방으로 둘러싸인 페니스에 침을 주욱 흘려온다.

희미한 맥박과 함께 조여드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파고들었다.

 

자지가 움찔거릴 때마다 저릿한 쾌감이 신체를 덮쳐왔다.

 

“흐윽, 선생님… 그만…….”

“왜 그러니? 선생님은 그냥 우리 이란이 자지를 잡고 있을 뿐인데.”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금 입김을 훅 불자 허리힘이 풀릴 정도의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등 뒤에서 누가 떠받치는 감각 탓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규칙이 그의 몸을 강제로 얽어매고 있었다.

 

미칠 것만 같은 자극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만약 이 자리가 침대였다면 이불을 마구 쥐어뜯었으리라.

 

그러나 허리를 움찔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더욱 죽을 맛이었다.

 

차렷 자세로 있던 손은 어느새 스스로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쿠퍼액이 왈칵 쏟아져 침과 뒤섞이는 감각이 장대를 훑어내렸다.

 

“윽, 흐윽…….”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에 시간감각조차 흐려졌다.

 

대체 얼마가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겁처럼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시연은 쿡쿡 웃으며 그의 페니스를 쥔 손을 놓아주었다.

 

몸을 강제로 고정시키고 있던 규칙의 억제가 사라지자 백이란은 순식간에 풀썩 주저앉았다.

 

전신에서 땀이 송골송골 배어나왔다.

그녀에게서 풀려난 이후에도 차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이란은 본능적으로 스스로의 아랫도리를 훑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후후, 기분 좋니?”

 

그런 가운데 갑자기 코앞에 다가온 이시연의 얼굴에 의식이 현실로 끌어올려진다.

 

“이란아, 그런데 혹시 문희가 옆에 있는 거 잊지는 않았지?”

“그, 그건…….”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당한다.

 

그러나 손의 움직임은 그치지 않았다.

쾌락에 주린 몸이 차마 멈추질 않는다.

 

“윽, 선생님…!”

 

이시연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 엎드리듯 하며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가져가더니

이윽고 쏟아진 정액을 얼굴로 받아내었다.

 

백이란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꽤나 절륜한 편이었다.

그랬던 정력이 부여받은 능력에 의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쌓이고 쌓이다 둑을 부수고 터져나온 이번 사정은

여태껏 있었던 가운데에서도 최고로 많은 양이 쏟아져나왔다.

 

정말로 한 번에 사정으로 나올 수 있는 양인지 의심되는 그 탁류를 이시연은 황홀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정액이 얼굴을 적시고 목덜미로 흐른다.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튄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하아…….”

 

백이란은 전신을 쥐어짜는 쾌감의 여운에 잠겨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내 이시연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그녀는 얼굴에 묻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훑어 모으더니 요염하게 빨아먹었다.

뒤이어 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게슴츠레 눈웃음을 짓는다.

 

달그락.

이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반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어?”

 

자그마한 캠코더였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캠코더 끝자락에서 빛나는 LED는 그것이 촬영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다음에 문희한테 이걸 보여주는 게 어떨까?”

“그건…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더 심한 것들도 눈앞에서 보여줬잖니.”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백이란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니, 그렇지만 이건…….”

 

이시연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분명 백이란은 연인 앞에서 몇 번이고 범해졌다.

 

그러나 그때는 문자 그대로 범해진 것이었다.

백이란의 의사 따위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그냥 덮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협박당해서 백이란이 스스로 추태를 드러냈다.


그것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첫째 이유.

 

하지만 더욱 큰 이유는 그 협박의 원인이 강문희였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심성이 선하다.

그렇기에 분명 이 일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부주의를 자책하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요새 있었던 일들로 정신이 마모되어가던 강문희였다.

그녀에게 더욱 책임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혼란에 빠진 가운데 백이란이 내린 결론은 결국 그것이었다.

 

“…….”

 

백이란은 굴욕적인 분노를 담아 이시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굴욕의 근간이 복종에서 온다는 것을 이시연은 금세 알아차리고 히죽 웃는다.

 

“이란아. 앞으로 잘 부탁해?”

 

이시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미소지었다.

 

 

1.

 

샤워기를 한참 틀어놓은 탓에 바닥에는 물이 얕게 고여 있었다.

 

문에 기댄 몸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주저앉는다.

 

철퍽.

허벅지가 바닥에 닿자 바닥에 고여 어느새 식은 물이 튀었다.

 

문 너머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란아.”

 

귀를 가져다대고 있던 강문희는 연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샤워기에서 떨어져는 물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는 허망하게 흩날렸다.

 

샤워를 하는 도중 백이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깜짝 놀랐다.

 

그래도 처음에는 욕실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찾아온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목소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고 위화감을 느꼈다.

 

대체 왜 욕실에 누군가와 함께 찾아온 것일까.

 

탈락자들이 그런 플레이를 위해 끌고온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아직 투표함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걸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

 

강문희는 바깥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샤워기를 켜둔 채

살금살금 걸어가 문에 귀를 갖다대었다.

 

그리고 들려온 것은 이시연의 목소리.

 

그녀는 백이란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강문희는 뒤이어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자 더욱 놀랐다.

 

탈락자가 아닌 이시연으로서는 폭력도 성행위도 불가능했다.

강문희가 생각하기에 백이란이 그녀의 말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였는지 백이란은 그렇게 했다.

 

그 이후로 들려온 것은 백이란의 헐떡이는 소리.

그리고 희열에 가득 차서 그를 몰아세우는 이시연의 목소리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런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가 흥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만다.

 

어느새 그녀는 스스로의 비부를 조심스레 문지르고 있었다.

따스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가락을 적셨다.

 

샤워를 한 탓이라기에는 이미 몸이 식어있었다.

달라붙은 문에서 전해져오는 냉기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백이란과 이시연이 몸을 겹치며 서로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의 욱신거림도 체내의 흥분도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해선 안 되는 상상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몸이 말을 들어주질 않았다.

 

결국 강문희는 작게 흐느끼듯 하며 절정에 달하고 말았다.

 

배덕감과 죄책감이 마구 뒤섞여 의식을 휘감았다.

 

“이란아, 미안해… 미안…….”

 

문 너머에 있던 두 사람이 떠나가고서 강문희는 여전히 주저앉아 반쯤 울먹이는 소리를 내었다.

 

자신은 분명 최악의 연인이리라.

그녀가 부족해서 남자친구가 범해지는데 이런 생각이나 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문희는 마음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탈의실에 들어간 순간 물씬 풍겨온 비릿한 냄새에 또다시 몸이 달아오르고 만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바닥에 튀어있는 액체에서 억지로 눈을 돌리고서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몸도 제대로 닦지 않고 나와서 향했던 테이블에는 이미 백이란이 앉아있었다.

그는 강문희를 알아차리고서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강문희에게서 시선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물들여갔다.

 

“…이란아,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좀 피곤한가봐.”

“그래, 그렇구나…….”

 

그 표정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제발 알아채지 말아달라는 애원이 섞여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강문희는 눈치채고 만다.

 

그는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의 고뇌를 전부 나누고 함께 아팠으면 좋겠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이란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꺾을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란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믿는 것뿐이었다.

 

“사랑해.”

 

자신의 연인이 참아내고 노력한다면, 그녀도 끝까지 버텨내야만 했다.

 

그에게 품고 있는 모든 감정을 끌어모아 그 짧은 단어에 담는다.

 

그녀의 말에 백이란은 어안이 벙벙한 듯이 잠깐 멍하니 있다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쁨에 가득 찬 미소로 환하게 웃었다.

 

“나도 사랑…… 흐읍.”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샌가 다가온 성란이

백이란의 뒷덜미를 잡더니 홱 돌려 입술을 겹쳤다.

 

혀를 섞으며 타액을 교환하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려퍼진다.

 

강문희는 그와 입맞춤을 이어나가는 성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시선을 피하고 만다.

 

고양이상의 눈매가 쾌락으로 녹아내린 백이란의 표정은

여태껏 그녀가 알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니다. 강문희는 부정했다.

분명 뇌가 착각한 것이다.

 

자신은 이런 일에 흥분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추잡한 인간이 결코 아니었다.

 

아니어야만 했다.

 

 

2.

 

어두컴컴한 것은 시설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어두운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빨리 적응했던 것은 아마 박루미였을 것이다.

 

원래부터 그녀는 집에서 불을 끄고 지내곤 했다.

 

눈이 빛에 민감해서이기도 했고,

앞이 보일 정도만 되면 굳이 전기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이란아.”

 

하지만 그런 그녀는 지금 그다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

 

홀로 있는 방에서 박루미는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유일한 친구, 언젠가 조금 더 나아간 관계가 될 그의 이름을.

 

과연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살 수 있는 날은 언제가 될까.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또 언제가 될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 꿈들을 뭉게뭉게 피워올리다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였다.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방해물이 너무 많았다.

남의 소중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음란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생각을 했더니 짜증이 몰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성란과 백은하의 만행은 어떻게든 인내가 가능했다.

 

어떤 수를 써도 대항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분노를 보류해둘 수 있었다.

 

강문희의 경우는 신경쓸 것도 없었다.

 

백이란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잠시 길을 엇나갔을 뿐이고

그 찰나의 실수로 인해서 그녀를 폄하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신에게 몹시도 친절히 대해주는 것을 보아서는 실수가 있었을 뿐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백이란의 연인으로 인정하고 있지를 않으니 질투할 것도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쉽사리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백이란의 반응에서 보건대 오늘 이시연이 그를 덮친 게 분명했다.

사랑스러운 그를 마구 더럽힌 것이 틀림없었다.

 

박루미는 그의 마음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분명 그는 이시연에게 강제로 범해졌고 그 일을 몹시도 슬퍼하고 있었다.

 

얼추 사실이었다.

백 번에 아흔아홉 번은 빗나가는 박루미의 분석이 이번에는 맞아떨어졌다.

 

아무튼 확실한 점은 더럽혀진 그를 자신이 깨끗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던 와중 어느새 스크린에 문장이 떠오른다.

 

‘규칙 제정 시간에 책상 위에 앉는 행위를 금한다.’

 

[찬성] 14

[반대] 0

 

규칙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행동을 넣어서 대충 넘기려는 생각이었으니까.

 

표가 나온 상태를 보면 아무래도 돈도 벌 겸 탈락자들도 투표권을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지금 박루미의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얼른 탈락해서 백이란을 독차지하겠다는 생각과,

내일 그를 깨끗이 만들어줘야 한다는 사명감뿐이었다.

 

박루미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통화방을 나온 뒤 스크린을 조작해 물건을 구입했다.

 

이내 호박 머리를 한 괴인이 나타나 책상 위에 주문한 물건을 내려놓고 다시금 사라진다.

 

그것을 바라보며 박루미는 음침하게 웃었다.

 

 

3.

 

『게임 8일차 결과』

 

[규칙]

1.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백이란과의 성행위를 금한다.

3. 12시부터 13시까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함께할 것.

4. 홀에서는 처음에 지급된 복장을 완벽히 착용해야 한다.

5. 스크린은 손으로만 터치해야 된다.

6. 규칙 제정 시간에 책상 위에 앉는 행위를 금한다.

 

[탈락자]

- 성란

- 백은하 

 

[백이란]

- 소지금: 124,000

- 투표권: 5



사실 이제 매일 탈락자들이 방에 쳐들어와서 주인공은 투표도 못할 텐데

이제 슬슬 투표권 개수는 안 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