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1편

3-2편

4-1편

4-2편

5편



1.

"후우."


방금 전까지, 남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던 탓일까.

고작 문자 알람 소리에 놀라 쿵쿵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희수가 긴 심호흡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안 봤다.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여러번 숨을 의식적으로 들이내쉬자 놀라 어쩔줄 모르던 자신은 자취를 감추고, 차츰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띠링, 띠링!


다시금 문자가 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놀라는 일은 없이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마저 온 김실장의 문자를 보았다.


[해당 위치 입니다.]


김실장의 간결한 문장을 끝으로, 지도 어플리케이션과 연동되는 링크 주소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아요.'


그런 말을 내뱉으며, 더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얼굴로 떠난 정우였으니, 제법 이곳에서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들었다.

과연 어디까지 갔을까.

강원?

경상?

제주?

어쩌면 해외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소를 누르자, 어플리케이션 하나가 구동하더니 어느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기 시작했고, 이내 찾아가기 편하게끔, 이 곳에서부터 해당하는 위치까지의 거리를 대략적인 시간으로 나타내었다.

그 시간은, 몇 시간.

아니, 그 수준도 아니었다.


차량으로 약 오 분.


"...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 순간이지만, 김실장이 실수라도 했나 생각해버릴 정도로 터무니 없이 짧은 거리가 표시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것이 약간 믿기지 않아, 잠깐 눈을 떼고 다시 한번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그게 사실이라는 듯 어플이 해당 주소의 상호를 표기해주었다.


YS편의점.

희수가 아는 곳이었다.

워낙 주변의 인적이 드물어, 이곳에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편의점이라 그녀도 종종 오가던 곳이었다.

지금, 왜 저기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그 짧은 시간 사이, 김실장의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했다.


[혹시 몰라 사진도 몇 장 찍어놓았습니다. 보내드릴까요?]


원래라면, 그런 질문도 없이 평소처럼 사진부터 보냈겠지만, 김실장도 그 짧은 거리 탓에, 허락을 구하고 있다.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직접 볼 것 인지, 아니면 사진만 받을지.


그 문자를 보며 조금 고민이 들었다.

어제부터 맴돌던, 갑작스레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그 남자.

김실장에게 그저 '네'라는 한마디만 써보내도 작금의 문제는 곧장 해결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얼굴. 그 표정.

정말로 그 가면이 벗겨졌는지, 아니면 그저 한 순간의 착각에 불과했는지는, 김실장이 보낼 그 사진 몇 장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자 한 통만 보내면 해결될 간단한 일 조차도, 이상하게도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확실히 하는게 좋겠지.

몇 분의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듯 희수가 김실장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장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만에 하나일 경우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사진으로는 부족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우에게 투자할 그 오 분의 시간은, 그간 자신의 머리에 맴돌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치고는 매우 싼 편이니까.

머지않아 주차해둔 차에 올라탄 희수의 표정은 어쩐지 조금은 기대에 차 있어 보였다.





2.

찾았다.

편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면, 들키지 않을 만한 적당한 자리에 차를 댄, 희수가 곧장 시선을 테라스의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막 편의점을 나와, 테이블에 자리잡고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모습.

어제 봤던 그대로의 약간은 후줄근한 복장.

그녀가 찾던 남자, 이정우였다.


정말 여기 있었네.

들키지 않으려고 조금 떨어져 댄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정우라는 사실만으로도 희수는 묘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또야.

또 이런 느낌이야.

정우의 방에서 느꼈던 감정.

그 옷을 만지며,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남아있을 정우의 잔향이라도 맡으려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다시 재생된다.

이상하리 만치 쿵쾅대는 가슴.

정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희수의 안에서는 자신조차 모르겠는 무언가가 샘솟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후우..."


뭔지도 모를 감정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희수는 잘 보이지도 않는 정우의 얼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것이 구태여 차까지 끌며 여기까지 온 목적이니까.

정우의 얼굴에 덧씌워졌던 그 가면이 정말 없는지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른채 정우에게 집중하던 사이, 그가 다시금 목울대를 넘겨가며 무언가를 들이켰다.


그것은 술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희수로서는 꽤나 의외의 모습이었다.

오 년 간 같이 생활하며, 술은 커녕 피우던 담배마저도 끊었던 정우였다.

기호품이나, 서로의 취미에 터치는 없었지만, 정우는 말도 없이 알아서 그리 하였다.

그래서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순간, 희수의 안에 음습한 마음이 일어났다.

보고 싶어.

지금. 그 얼굴을 보고 싶어.

취하기 시작하는 그 얼굴을...

그 흐트러진 표정을...

그 진심을...


희수는 술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따진다면 자신이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기 보단, 남들이 마시며 취해가는 그 과정을 좋아했다.

과음으로 인한, 무절제.

그것이 가려놓았던 사람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흐트러지고, 인사불성이 된 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며 주절거리는 그 추한 모습.

속에 감추어놨던 그 역겨운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마주하며, 속으로 잔뜩 조소하는 것이 그녀의 안에 숨겨둔 음습한 취미중 하나였다.


취한 정우는 과연 어떨까.

그 생각이 스쳐지나자 마자, 희수는 다시금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다섯 걸음.

그 정도만 더 다가가면 확실하게 얼굴을 볼 수 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다가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희수가 조심스레 차에서 나왔다.


한 걸음.

정우에게 다가가는 것 만으로도 억눌러놓았던 감정이 휘몰아친다.

다시금 쿵쿵대는 심장소리는, 남들에게 들리지도 않을 것인데도 마치 천둥처럼 희수의 몸을 울려댔다.


두 걸음.

온 신경이 곤두서서 날카로워 진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얼굴에 뒤집어 쓴 가면이 격정에 휩싸여 떨리고 있었다.


세 걸음.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시선을 고정한 남자는, 안주로 사놓은 과자를 씹어넘기며, 다시금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네 걸음.

이제 곧...보여...



다섯...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눈 앞의 장면이 흐트러지고 만 탓이었다.

하나의 풍경처럼, 또는 하나의 물건만을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정물화처럼 정우를 비추던 눈이,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에 흔들려 어그러지고 있었다.


그 불청객은 일면식도 없는 여자였다.

혼자 술을 마시던 정우에게 제멋대로 다가온 그 여자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내 둘이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머지않아 여자가 떠나려 하자, 그것을 붙잡은 정우가 갑자기 손을 쫙 펼쳐보였다.

어떤 오해가 있는지 갑자기 정우가 그 여자에게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여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 이내 여자가 정우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식간에도 볼 수 있었다.


"...역시."


벗겨져 있었다.

정우의 가면은 없었다.

그 사실 만으로도, 무언가가 탁 풀어지듯 희수의 안에서 흩어져갔다.

다만, 그것이 후련하다거나 시원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釘)에 가까운 무언가가 세차게 내리찍은 것처럼 통렬한 아픔과 괴로움만이 가득했다.


배신 당했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마저도 어제부로 끝난 관계였고, 그대로 평생동안 잊고 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도, 다시금 그 얼굴과 마주할 수 있다면, 아무리 늦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잠깐의 여지도 없이 끝나버렸다.

그 얼굴로, 그 표정으로 나만 바라봐줬으면 했는데...

정작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신은 아니었다.

이미 배신 당했기에, 일말의 믿음조차 없었던, 그 남자에게 또 배신당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희수의 안에서는 또 한번 배신당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느새 짜게 식은 눈으로 희수가 차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길.


툭, 툭, 툭.


예의 버릇처럼, 하지만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핸들을 두드리던 희수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공구함을 뒤지다, 마땅치 않자 부엌으로 향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짜증나.

짜증나.

진짜 짜증...나아!

이내 원하던 것을 찾았다.

정우가 아침을 차려줄때 항상 써왔었을 그 것.

거치대에 놓여있는 그 것을 뽑자, 번뜩이는 금속의 면이 잔뜩 찡그려진 희수의 눈을 비추고 있었다.


걸음을 옮겼다.


쾅!


정우의 방문을 부술 기세로, 거칠게 열은 희수가 곧장 옷장에 널브러진 정우의 옷으로 다가갔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우를 만나기 전, 손에 쥐고있었던 그 양복.

그 것을 바닥에 내던진채 손에 쥐고있던 것으로 그어냈다.


부우욱...


더.

한 번으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해, 다시금 그었다.


찌직...찌지직...


그가 입던 양복이 점차 상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톱도, 잘라낼 것이라면 몇 배는 쉬울 가위 같은것도 아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찍어버리듯 날을 세워 긁어내자, 조금씩 그 면이 찢겨져 나갔다.


짜증나...


찌익.


짜증나...


찌익.


짜증나...


찌익.


하나, 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점차 앞에서 형체를 잃어간다.

찍어내기 쉽게, 역수로 쥔 손잡이의 감촉이 나쁘진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여태까지 참아왔던 충동이 한번에 터져버린듯, 희수는 그렇게 누군가를 투영한채 몇 분, 몇 시간을 한 동작을 반복했다.


내 꺼야...


찌익.


내 꺼야...


찌익...


내 꺼야...


찌이이...드르륵.


자루를 타고 느껴지는 마루를 긁는 감촉에, 손이 멈추었다.

반복되는 행동에 결국 구멍이 나버린 양복.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일련의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듯, 맹렬하게 자신을 휘감던 감정의 격류가 멈추자, 조금은 진정한 눈으로 내려다본 정우의 양복은, 이제 옷이라고 하기도 뭣할 만큼 완전히 망가져있었다.


아파.

손이 저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던 식칼을 내던지고, 이제는 찢어지고 망가진 옷을 들었다.

맡고 싶어.

이제는 다른 충동이 다가왔다.

정우를 상상하며, 그 옷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그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흐읏..."


그것이 뭇내 못 참겠어서, 다른 옷들의 냄새를 맡아보지만, 정우의 옷에는 역겨운 섬유유연제 말고는 그 어떠한 체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으읏..."


급했다.

정우가 남아있는 것이 필요했다.

정우의 흔적이 필요했다.

황급하게 시선을 돌리던, 희수의 눈에 그의 이불과 베개가 들어왔다.

어제는 여기서 잤으니까...분명.

그 생각이 들자마자, 희수가 곧장 지퍼를 힘으로 뜯어냈다.


투두둑...


"흐읍..."


곧장 거칠게 맡아낸다.

아.

있다.


"하읍...흐응...하아아..."


냄새가 있다.

정우가 남아있다.

이불에도, 베개에도 전부 남아있다.

그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 안으로 채워넣듯이, 희수가 정우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아, 하으읏...흐응..."


들이 내쉴때마다 정우의 향이 느껴진다.

알 수 없이 가득 채워지는 그 느낌에, 희수는 더욱 탐욕스럽고, 미친듯이 그것들을 갈구했다.

떠올라.

희미해지던 정우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 망상속에서, 정우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흐응, 흐응...정우....씨..."


오 년간 집에서 단 한번도 부르지 않던 이름을 부르짖었다.

뜨거웠다.

망상에서의 정우는 자신을 사랑스러운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 정우, 정우...하으읏..."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하반신에서 부터 등을 타고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희수도 알고 있었다.

이내, 정우의 베개를 꼭 쥐고있던 양 손중 하나가 천천히 희수의 아랫도리로 내려갔다.


질척...


젖어있다.

축축히 젖어있는 비부를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휘는 듯한 쾌락이 쏟아지는 것을 느낀 희수는, 이내 미친듯이 그것을 손으로 문지르며 하나의 이름을 달뜬 목소리로 외쳤다.


"정우 씨잇...정우씨이히...정우...하아앙...정우씨..."


금세, 정우의 방에 음란하고 질척이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하지만, 희수가 그 충동에서 벗어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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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나름 애증임?

계속 그 단어만 생각해서 써봤는데, 잘 표현 했는지는 모르겠음.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