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witter.com/lonesomnia_art/status/1491556250265571328 (대충 얀순이 얼굴)



https://twitter.com/blupixl__/status/1495920200574959616/photo/1 (대충 얀붕이 얼굴)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멜랑콜릭?한 분위기임 수위높거나 우울한 묘사도 많구....

BGM틀고 보는거 추천함







"하아... 하아........"


"나에게... 말해봐."




빗소리와 겹쳐지듯, 방 안에 울려퍼지는 욕망에 찬 한마디.



불이 꺼진 방은 잿빛으로 가득차 냉랭한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 냉랭함을 견뎌내려는 듯이 방의 두 남녀는 서로의 살갗뿐인 몸을 맞댄채로,


아니, 여자의 일방적인 접촉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있었다.


남자의 몸은, 네 의사따위 묻지 않겠다는 여자의 뜻으로서 온몸이 구속되어 있었다.




"......."




"어서!"




그녀는 처음으로 만난 날과 똑같이 비가 내린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런 냉랭한 잿빛과 이슬비가 감도는 어딘가에서,


서로 상처를 핥아주던 광대 두명이 처음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의 기억 속에는 그런 날은 없었다.


때문에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상황은 그를 원인으로 몰고갔다.




"이..이젠..."


"도망가지..... 않겠.. 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




방안에 울려퍼지는 그녀의 웃음소리.


감정을 못 참는 듯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는 너무나 또렷했으나


그 방에 있던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우릴 이렇게 만든 세상을 탓함을 뜻하는 눈물.


애증이라는 액체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피스톤질하는 서로의 성기.


모든 진상은,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저 여기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것만이 진실이 되었다.





난 잠에서 깨자마자 축축한 침상을 걷어 차내고 빌라를 뛰쳐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우산도 쓰지 않은채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더러운 시멘트 바닥을 달리면서 발에 이슬이 묻어났고,


그 전단지를 붙인 전봇대에 도착했을 때는 전신에 이슬이 묻어 넘쳤다.


바보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 걸...


전단지도 나도, 서로 푹 절은 들개 꼴이 되어 서있었다.


어머니의 사진과 사라진 곳, 내 연락처는 잉크가 녹아 완전히 못 알아보게 되어있었다.


진이 다 빠진 나는 그 옆에 있던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어머니가 없어진 날 이후 그랬던 것처럼 난 멍하니 앉아 정신을 어딘가 먼 차원으로 보내려했다.


더 이상 현실에게 상처받기 싫었던 나는 그런식으로 고통을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산을 쓴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다.





무뚝뚝한 인상의 아이였다. 무언가 환멸에 찬 눈빛은 나도 모르게 섬찟했다.


...아니, 잘 보니까 그 애였다.


같은 반의... 얀순...이라는 이름이었나? 


학교를 자주 빼먹던 애였는데, 때문에 내심 한심하게 보던 내 옛날 감정이 떠올라 순간 부끄러웠다.


그러는 지금 나는 학교를 아예 나가지도 않는데..


이러한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즈음, 눈가를 찌푸린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너 뭐하냐...?"




퉁명스런 한마디에 정신이 돌아온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아, 아니 그..."



"이거 때문이야?"




그녀 손에 전단지가 들려있었다. 처음 보면 못 알아 볼 정도였는데, 어떻게 알았지?




"어.... 으, 응."



"......."



그녀의 눈가가 조금 고심에 찬 듯이 변했다.



"...도와줄까?"



"어?"



"도와줘도 되냐고."



"무슨 말..."



"대답만 해..."



"어, 어.."



"....내일, 12시.. 여기로 와."




그러고는 그녀는 내 어깨에 우산을 얹어주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너머로 사라지듯 달려나갔다.


...오랜만에 참 신기한 날이었다.





신기한 날들은 반복되었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나날이 신기한 날들이었다.


그녀는 내 어머니 찾기를 도와줬다.


경찰의 신고나 흥신소의 소속은 물론 돈이 드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자기가 맡았다.


항상 미안해하던 내가 이유를 물어보면,


"집에 있음... 짜증나."


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녀는 그런 애였다. 모든게 무뚝뚝해서 사람들이 오해하기 좋은 애였다.


항상 갑작스런 짓을 반복해서 날 놀래키곤 했다.


어느날은 갑자기 내게 키우라며 고양이를 한마리 가져왔었다.


물론 정중히 거절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했다.


또 어느날은 내 손을 잡고 날 옥상으로 끌고갔다.


갑자기 난간에 서서 떨어질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


난 필사적으로 그녀를 말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런 날 보고 실실 웃고만 있었다.


집에 와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돌려보곤 했다.


이런 순간은 금세 사라지니까. 이런 식으로 잊지 않으려고 해야한다.


훗날에 회상하면, 내가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알게된 지 한달쯤 되었을까.


처음 만났던 그 날과 같이 조용히, 단단하게 비가 내렸다.


그 빗소리를 뚫고 갑자기 부산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옅은 잠에 안겨있던 나는 그 소리에 다시 현실로 굴러떨어졌다.


날 현실로 끌고 내려온 소리를 쫓아 호기심에 사이렌을 쫓아갔다.


사이렌은 약 6블록 위의 고급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다.


내가 좋아하던 밤거리의 풍경 속 은은하게 카스테라 색 조명을 내뿜던 그 건물들.


그 고풍스럽던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보기만해도 압박스러운 경찰차들이 즐비해있었다.


사람들을 떼놓으느라 여념이 없는 경찰들 사이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경찰차 이상으로 그 광경에 더욱 어울리지 않았던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


얀순이는 지금의 나와 달리 우산도 들지 않은 채 그때의 나처럼 어디론가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 기묘하게 비틀어져 반복되는 데자뷔를, 난 놓칠 수 없었다.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그 벤치를 향해 달려갔고, 그 벤치 위에 그 때의 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앉아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해주었듯, 똑같이 우산을 그녀 어깨에 얹어주었다.


그녀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할 것없이 눈동자에서 물줄기는 끝없이 흘러내렸고,


열정에 차있어야 할 눈빛은 퇴색되어, 세월 속에 빛바래버린 검붉은 빛깔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면 대신 피가 흐를거 같은, 그런 눈.




...난 항상 누군가를 구원하고 싶었다.


그게 설령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이기에, 내가 구원받기를 더 원한걸지도 모르지만,


그 첫발을 내딛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지금의 난 너무 보잘것 없기에, 어머니를 구원하지 못했고, 어릴 적의 나 자신도 구원할 수 없었다.


누구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혼자서는 외롭지..."


".....?"




그녀의 손을 잡고서 무작정 내 집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흠뻑 젖어버린 겉옷들을 벗겨주고, 빗물에 절은 몸을 욕조에 눕혀줬다.





"좁은 곳이라 웅크려야 할거지만, 일단 따뜻한 물은 나오니까..."


"그럼, 천천히 씻고 있어. 커피라도 타올게."



"......잠깐."



"?"



"머리... 감겨줘."



"...자, 잠깐. 아무리 그래도 그건..."



"괜찮아... 어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중, 그녀가 입을 뗐다.


그녀가 이렇게나 말을 많이 했다는 것에 놀랐지만, 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뚝뚝했던게 아니다. 그저, 해야할 말들을 자기 안에 떠안고만 있었던거다.




그녀의 이름은 얀순. 나와 같은 얀챈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나 등교를 거부 중.


대기업의 일개 직원였던 아버지와, 정략된 결혼으로 이어진 회장의 딸인 어머니.


금전적 문제없이 유복하게 자라던 얀순은 20XX년 12월 31일에 본인의 삶을 자조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날를 기점으로 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나갔다.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한 순간의 환상처럼 사라졌다.


8살의 얀순의 눈으로도 이유는 충분히 예측가능했다.


아버지의 모든 행동, 습관, 사상, 정신 모든 것에 관여하려들던 어머니.


언제나 아버지의 시선을 관리했으며, 자신에게 적합한 사랑과 인간상을 요구해왔다.


아버지를 어느 방에 끌고가 사지를 구속한 채 무어라 고함지르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그런 어머니 밑에 살던 아버지기에, 아버지는 사라졌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알 수 없는 슬픔이 점점 어깨 위를 기어올라,


13살이 됐을 때에는 매 순간마다 머리 위를 짓누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라지자 어머니의 히스테릭은 얀순에게로 옮겨갔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식이었기에 아버지에게 하던 짓은 할 수 없었지만,


그 바로 아래에 준하던 짓은 아무렇지 않게했다. 내 자식, 내 소유물이니까.


결국, 오늘 어머니와의 사소한 충돌 끝에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그 주먹으로 곪은대로 곪은 인과에 끝장을 내고 만 것인걸까. 얀순은 알 수 없었다.


부모 밑의 자신의 무력함, 인과관계없이 쏟아지는 폭력, 점점 의미없는 사회생활. 자신에게  강요되는 세상의 윤리와 인간상.


얀순은 지쳐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만 존재했다. 그 누구도 없이.


어느 비오던 날, 얀순은 전단지를 손에 쥔 채 비를 맞고 있던 소년과 마주쳤다. 


불현듯 머릿 속에서 어느 비전을 기억해냈다. 


학교에 가끔 가던 날, 옅은 미소속에 느껴지던 씁쓸함을.


갑자기 비어버린 책상 위에 얹어져있던 몇개의 꽃과 응원의 편지들을.


학교 근처의 구조물에 붙혀져 있던, 어머니를 찾는다는 실종 전단지를.


그 비전이 일으킨 동정의 충동일까, 타인에게 자신을 겹쳐본다는 파렴치한 이기심이었을까.


그렇게 그와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환멸스럽지? 이제 나와 만나지 않아도 좋아."




"환멸이라니... 그럴리가."


"환멸은 커녕, 언제나 너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는걸."




"..."




"엄마가 나간 뒤로 깨달았거든. 앞으로 얼마 안될 만남, 소중히 하자고.."


"오히려 내가 환멸당하지 않을까 걱정인걸. 하하..."




"...나, 난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어."


"그냥 전부 다 지긋지긋해져서.."




"괜찮아.. 이해해. 전부 다른 탓으로 돌려버려도 되니까..."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자..."




"...이런 기분, 내가 느껴도 될까?"


"난 행복해선 안될 거 같아..."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린 너무 어리니까."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잖아. 그치?"




"......."





"그렇지, 이거.. 너한테 줄게."




"...?"




"엄마가 자주 끼던 반지야. 항상 생각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




"...받아줄래?"




"..고마워."




말없이 이어지는 샴푸질.


그녀의 두피에 묻은 거품을 씻겨 흘려보내며, 악몽이 전부 사라지길 빌었다.


저기 하수구라는, 평생 볼일없는 악취나는 곳에 전부 떠내려갔음 했다.


그곳을 두번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런 순수한 생각으로 가득차, 신기하게도 여태까지 지겹게도 눌려오던 현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창문을 바라보니, 비가 그치고 푸르스름한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와 만나면 신기한 일뿐이다.






그 남자애와 알게 된지 6개월이 되간다.


아니, 그 아이를 만나 나 자신이 변하게 된게 6개월이라 하는게 맞겠다.


그 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이기심이라고 겸손하게 굴지만,


내게 있어 크나큰 구원이었다. 매 순간이 전환점이었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말해주고 있다.


그래, 지금 난 행복하다.



하지만, 아직도 그 아이의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애도 알고 있겠지.


환상을 좇고 있는거다. 그 애와 나는.


이제 슬슬 현실을 깨닫고, 돌아봐줬음 한다.


네 욕조에 들어간 그 날 이후로 난 쭉 같은 마음인데...


그 사람은 더 이상 네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오늘, 말할 생각이다.


이젠 그 사람 대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래, 오랫동안 숨겨왔다.


난 바보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해가 질때까지 그 애 뒤만 쫒아다녀도 봤고.


그 애가 다른 인간과 마주보며 웃어도 아무말도 못하고.


그 애가 언제 떠나가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부숴버린 물건이 몇개였는지...


그 애가 말했다. 얼마 안될 만남을 소중히 하자.


그래, 그 말대로야. 오늘이야말로.....


.........





평소와 다를 거 없는 동네.


차들과 각종 구조물로 답답하게 좁은 골목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날 이후로, 당분간 엄마와 싸우는 일은 삼갔다.


엄마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날 어지럽게 만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점점 마음도 편하게 추스려졌다.


이제 날 괴롭히는 것 따윈 없을거야.


이런 나날이 반복될거야. 난 아직 젊고, 모르는 것도 많으니까.


그 애도 분명 옆에서 기뻐해주겠지?


그래. 이제는....




"얀순아!!!!"


"야, 얀순이 맞지...?"




독백을 깨는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


갑자기 몹시 불쾌해졌다. 대체 누구...





"야, 얀순아. 기억해? 아빠야, 아빠!"


"마, 많이 자랐네 우리딸...?"




풀려버린 눈에 곳곳이 주름과 수염이 즐비한 얼굴과 그에 걸맞는 차림.


거지같은 몰골의 남자가 자신을 아빠라는 소개를 댄다.


...뭐지? 갑자기 눈앞이 흐려진다.


그 비오던 날처럼 시야에 칙칙한 구름이 껴간다.


혼란스럽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뭐로 정의해야하지? 진짜인가?




"그래서 말인데, 지금 아빠한테 100만원만 줄 수 있어?"


"아빠가 항상 우리딸 용돈은 넉넉하게 줬잖아..? 그 정돈 할 수 있지?"


"그, 그래, 너희 엄마 아직도 XX통장 쓰지...?"


"그거, 그거 갖고와. 빨리. 아빠 급해. 빨리!!"




눈앞에 생겨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난 괴롭히는 것 따위 없다고 인식했는데.


왜지? 왜 하필 이제와서 내게 이러는 거지?


드디어 행복을 쫒아가려는 내 목덜미를 잡아서 어쩌려는 거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




"...뭐야.... 왜 말이 없어......"


"너도 날 무시하고 있었던거야!!??"


"그 여자나 너나 똑같아! 세상 모두가 나를 깔보고있어!"


"죽어, 죽어버려!! 이 쓰레기 같은 년들!!"


"평생 뺏겨만 온 나한테 이정도도 못해준단 거야??!!"


"으아아아아아!! 돈!! 돈내놔!! 어서!!"




"무슨 소리야...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이제 와서 대체 뭐냐고!!!"




"이... 이 좆만한 년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


그 때도 분명 눈에 구름이 끼었다.


뭔가 화가나서 어딘가에 닿아버리는 감각을 느꼈다.


머리가 징해지는 느낌과 함께 뭔가에 취한 듯 멋대로 몸이 움직였었다.


구름이 걷히면 같은 반 아이들이 몸 곳곳이 빨갛게 달아오른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손에는 계속해서 떨림만이 남아있고, 계속해서 어른들의 꾸짖음이 들려왔다.


그 날 이후로 학교에서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라는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끔찍한 기억이다.






정신이 들고보니, 다행히도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었다. 더 최악이었다...


아빠라고 주장하던 그 남자는 내 옆에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박은 채 말이 없다.


콘크리트에는 붉은 색 피가 흐르고 있다.


피가... 흐르고 있다.. 


손이... 떨리고 있다......


피가... 손이...


아... 아아.......




"야, 얀순아...?"


"이게... 어떻게 된...."




안돼.


그 아이였다. 안돼......


난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행복이라니, 지독한 착각이었다.





내용 없는 검은 꿈만이 이어졌다.


차라리 계속 그딴 환각이나 꾸고 있는게 나았는데.


눈을 뜨고, 병원 침대에서 바라본 창문 밖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듯 무채색의 구름이 막을 쳤다.


그 옆에는 호들갑을 떨며 울어대는 어머니와 몇몇 학교 선생들이 와 있었다.


날 눈엣가시로 여기던 인간들이 이렇게 구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그 애를 제외하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상황은 어이없을 정도로 내게 유리하게 일단락되었다.


당시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그 애를 빼곤 아무도 없었고,


허름한 길가에는 CCTV조차 없었다.


정말로 내 친아버지 였을지도 모를 그 남자는 그대로 영원히 모르게 되어버렸고,


내 우발적인 행동도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약간의 벌금을 지불하는 걸로 끝났다.


세간에는 어떠한 화제될 거없이 끝나버렸다. 기사가 한두개 났던 모양이지만, 그게 다였다.


분명 어머니의 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주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넌... 살인자야.


아니야! 난... 그런 짓... 못해...


변명할 셈이야?


난, 난 모르겠어. 그 때는 의식이 없어졌어. 무슨 짓이 벌어졌는지 몰랐다고.


그 손떨림을 잊어버린거야? 그 손에 묻었던 피는?


하, 하지만 아닐수도 있잖아.


거짓말 하지마. 기억 못해도 알 수 있어. 

넌 그 사람이 달려드는 걸 떨쳐내지 못해서 그대로 벽에 던져버렸겠지.

그 사람,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아마?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 상태로 그런 짓을 당했으니...


아니야! 아니라고!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


그럼, 그걸 지켜봤던 그 애는 지금 어디있지? 그 날 이후로 어디에 갔지?


......!!







갑갑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 그 꺼림칙한 길가를 지나, 그 남루했던 빌라 사이를 지나,


그 애의 집 현관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어떠한 통화 하나 없이, 흔한 이별의 글자 하나 없이 집은 빈 껍데기가 되었다.


그 아이가 즐겨입던, 옷걸이에 걸린 셔츠와 자켓. 바닥에 어지럽혀진 전단지 뭉치.


그 날이 되기 전에 그 애가 자주 타줬던, 식어버린 믹스 커피 잔.


모든 물건이 그 날 이후로 멈추었고, 변한 건 사람의 온기뿐이었다.





감정이 싹텄던 그 욕실에 들어갔다.


그 싸늘한 기온이 감도는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그대로 욕조에 들어갔다.


아직 온수가 돌아가고 있었다. 온수 속에 온몸을 담그고 오랫동안 있었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물이 스며들었지만, 반지는 전혀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물이 빠져나가야 할 하수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하수구는 무언가에 막혀, 물이 빠지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 흘러가도, 하수구는 막힌 채로 욕조 밖에 물이 넘치고 있었다.


목욕물은 소금기를 띄었고, 맑은 온수는 잿빛으로 변해갔다.


...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그 날 이후, 수많은 비를 맞아왔다.


욕조에서 싹튼 마음은 그 비를 맞고 자랐다.


하지만 기나긴 그리움와 기대, 질투와 의심을 양분으로 삼아 자란 마음은,


푸른 새싹의 빛깔 따윈,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 속의 생존만을 목표로 질기게 버틴, 흉측한 꽃이 피었을 뿐이다.






"아이고, 얀순 사장님.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은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인재양성용 기숙사식 학원이라고 하셨죠..?"




"네. 연락드린대로, 저희 회사에서도 큰 기대를 걸고 주선한 사업입니다."


"센터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물론이죠. 항상 저희 청소년 센터에 후원해주시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되죠."


"아, 선발하신 친구가 이미 있으셨다고 하셨죠? 그러니까.. 이름이..


"그래, 얀붕..이라는 아이 맞죠? 평소 행실도 올바르고 취업의사도 높아서, 충분히 좋은 인재로서 길러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정신적으로 많이 유약한 부분일까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과거 기억이 없이 흘러들어온 친구라, 자기주관도 부족하고 우울한 모습도 많습니다.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그런 부분에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금방 적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뭐, 얀순 씨의 말씀이시니 믿겠습니다만..."


"아무쪼록 조심히 잘 부탁드립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럼, 잠시 얀붕 친구와 짧게 상담시간을 가질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수많은 비가 내리는 사이, 많은 사실들이 잊혀지고, 변해갔다.


세상에게 도망치던 우울증 소녀는 어느덧 세상을 휘두룰 만한 23살의 젊은 대기업의 여사장으로 변했다.


그렇게나 싫어했었던 가족의 뒤를 이었고, 무뚝뚝하던 성격도 용모도 변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바꾼걸까.


그것은, 왼손 약지에 낀, 오래되어 빛바랜 반지가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남겨두고 갈 수 없었던 과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쫓게 되버린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그녀 안에서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버렸다.


그것만 생각하면 감정에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 짜디짠 목욕물에 빨려가 익사할 것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기나긴 나날 동안 억눌려온 마음 속 무언가가 분출되어버릴 것 같은 위험한 감각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 무언가만을 찾아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무언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진실마저 왜곡시킬 마음마저 갖추고 있었다.


설령, 그게 자신의 업보라고해도.







"...아, 안녕하세요."




"...후후후, 안녕, 얀붕아...."


"...아니, 정말... 오랜만이야?"




"..? 네?"




"정말 만나고 싶었어. 정말이지..."




"저, 혹시.. 저랑 어디서 만났었나요..?"




".........."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이네."


"...겉치레같은 자기소개 따윈 집어치울게. 이제부터 알게 될테니까."




"네..?"




"그래, 네 말대로 난 너랑 알고지냈던 사람이야."


"아니, 알고지냈던 정도도 아니지. 서로 사랑하던 사이었으니까."




"!!.. 뭐, 뭐라구요?"




"서로 정말 뜨거웠었는데, 정말 잊어버린 거야?"




"아.. 그... 아니..."


"기.. 기억나지 않아요."


"잊어버리고 싶어서 잊어버린게 아니라서..."




"아니, 넌 잊어버리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지."


"넌....... 사람을 죽였어."




"...!!! 무, 무슨 말....."




"풋, 진실이야."


"그리고선 그걸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한테서 도망쳤지."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알면 너무 잔혹하려나?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게 나아."




"그, 그만! 듣기 싫어요! 제발..."




"...아하하하하하!!"


"그거야, 그 얼굴... 아주 맘에 들어..."


"나한테서 도망치다니.. 그 대가는 제대로 치뤄야지...?


"넌...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




"아... 아아........"




"근데, 넌 그 광경을 나한테 들켜버렸던 거야. 그리고 그게 두려워서 나한테 도망친거지."


"어떻게든 잘 도망쳤지만, 어느날 갑자기 차에 치였다고 하더라고?"


"그러고선 넌 모든 걸 그대로 잊어버린 거야.. 차에 치인 걸 계기로, 도망치고 싶던 마음이 그대로 모든 걸 놓아버린 거지."


"정말 불쌍하게도..."




"이, 이 이상 말도 안되는 협박하지 말아요! 그런 소릴 듣고 나도 가만히 있진..."



"가만히 있진 않을거야? 해봐. 세상에 알려지고도 네가 무사할 수 있다면."




"......."




"안 믿을까봐, 여기 실존하는 증거도 있어. 원한다면 봐도 된다만..?"




"...날 속였군요..."




"먼저 속인건 누굴까나... 후후후."




진상을 깨닫기 전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애가 날 떠난 뒤 3일. 난 어디에도 있지 못했다.


삶을 이어나갈 모든 이유를 잃은 나에게, 현실이건 마음이건 있을 곳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을 돌고 돌아, 정신을 차려보면 문득 그 추억의 벤치 앞에 와있었다.


벤치 위 올려진 신문 하나. 남겨진 거라곤 그것 뿐이라 느낀 나는 신문을 펴들었다.


...우리 동네에서 생긴 사고였다.


날짜는 내가 그 짓을 저지른지 고작 며칠 뒤의 일이었다.


어느 한 어머니와 아들이 차량 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자주 있는 사고였다.


당일 내리던 심각한 폭우와 운전자의 지나친 과속으로 인해, 큰 사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즉사. 아들은 의식불명.


허나 그 피해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모든 사실이 퍼즐이 풀린 것처럼 짜맞춰졌다.


누군가를 피해 서두르던 엄마를 따라 무작정 집을 나온 그 애는,


가장 특별하게 여기던 사람에게 결국 이런 결말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서로가 알지 못했던 그 짧은 찰나의 사이, 그 애는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행방은 알 수 없었고, 때문에 난 미쳐가고 있었다.




...그 애에게는 내가 소중하지 않았던 걸까?


급하게 떠나야 했던 건 알 수 있었다. 항상 내게 사소한 거라도 말해주던 그 애였으니.


하지만 왜지? 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거지?


내 세상을 유일하게 구원해주었던 네가,


내 모든 걸 이해해주었어야 했던 네가,


모든 걸 이해해버려 내 살인마저 지켜봐주었던 네가,


아무도 모르는 내 진실을 혼자 떠안고 있는 네가,


내가 사랑했던 네가.




네가 밉다. 아니, 그립다. 아니, 질투가 난다. 아니, 사랑스럽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혼돈에 빠진 머릿속은 금세 하나의 도표로 정리가 되었다.


그 애를 찾아야 한다.


찾아서, 평생 내 옆에 두어야한다.


나와 하나가 되어야한다.



"....기다리고 있어..."



...그 날, 내게 살아가야할 목표가 생겼다.





"...안심해, 난 널 괴롭히려고 온게 아니야."


"난 그저, 옛날처럼 너와 지내고 싶어."


"그래, 서로 사랑했던 그 시절처럼."




"......."




"예정대로 여길 떠나서, 내 회사로 와."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너와 나, 단둘이서만."


"물론...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





"...이번엔 놓치지 않아."



...밖에서 또 다시 잿빛 비가 내렸다.





"후흐흐...!! 하.. 하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던 짓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나에게 좋은 참조가 되고 있었다.


역시 사랑하는 이는 이렇게 다뤄야지만,


세상 어느 것에라도 눈 따윈 돌릴 수 없게 만들어야지만,


그래야지만 내 곁에 둘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사랑해서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할 수 있어.......




".....하으읏!"


"흐읏!.... 아아..... 이거야......."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는,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 구속구들 뿐이다.


그렇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었던 건, 가문을 위한 정략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구속구를, 아주 잘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더, 더 이상 못해요......"


"이... 이젠... 더 안 나와....."


"...흐윽...! 아으윽!"




"뭐? 아하하!!! 아직 멀었어...!"


"좀 더.... 좀 더...........!!!"




그녀는 그의 목에 손을 갖다 댄다.


그의 얼굴이 점점 무언가로 일그러져 간다.


그 무언가는 그녀가 언제나 상상해왔던 무언가와 똑같았다.


그녀는, 또 다시 눈앞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네가 말했었지... 우린 어리니까 포기하기에 아직 이르다고 말야..."


"이제 알았어, 이런 뜻이었구나... 이런 뜻이었어......!!"


"그래, 네가 준 반지, 아직도 내 손에 끼고 있어... 보여?"


"반지의 뜻을 알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의 것이라는 증거로서 주는 것이래......"


"너도 분명 그런 의미로 나에게 준거였지? 그렇지? 대답해봐....!!"




"......."




그리고 맞닿아있던 서로의 살곁에, 이번에는 행복의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행복했다. 그가 행복해지는 것도 시간의 문제였다.


변하지 않는 과거따윈 아무 상관없었다. 그녀와 그의 마음따윈 더 이상 아무 상관없었다.


두 사람만의 세계는 여기 존재하고, 이제 누구도 그들을 가를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창밖엔 잿빛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얀붕아..."


"사랑해........."




원랜 그냥 취미로 쓰던 소설이었는데 마침 얀챈에서 후회물 대회를 한다길래 

후회물이 된건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막 써봤네.. 새벽에 쓰는거라 그런지 감성이 촉촉해짐

역시 얀데레중 최고는 애증물이 아닐까싶음

떠오르는 대로 막 휘갈겨쓴거라 개연성이 있을런지 몰겟음ㅋ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안가시는 부분있으면 댓글로 물어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