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감싸는 보드라운 감촉, 뒷머리에 닿는 폭신한 베개의 편안한 감각이 느껴졌다.


"으으윽... 아이고 두야, 두야..."


그와는 별개로 나를 괴롭히는 숙취의 두통에 정신을 차리던 중 위화감을 느꼈다.


"어우씨, 이게 뭐야...!"


침대를 공유한 채 나신을 이불로 감싼 채 혼곤히 잠든 알 수 없는 미모의 여성.


백금색의 머리칼이나 이목구비, 어느 한 곳을 뜯어보아도 고귀한 느낌이 풍겨져 나오는 것이 범상찮은 구석이 있었던 탓이었다.


'좆된 것 같다.'


이 세상에 남작가 아들내미로 다시 태어난 인생 어언 20년.


20년의 짧다면 짧은 내 인생 최대의 위기가 내 눈 앞에 놓여버렸다.


'술 좀 작작 쳐 마실껄'


일하느라 바빠 답장 할 시간도 없어 소홀히 대한 약혼녀가 파혼을 통보했다. 그런 꿀꿀한 기분으로 사교회에 나갔으니 술이나 진탕 마셨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만취상태의 내가 저지른 실수의 증거가 내 옆에 누워있으니. 술김의 하룻 밤의 실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나기 전 웹툰에서 흔히들 보던 원나잇 물의 주체들은 여성이었다.


만나기는 커녕 존안 한번 보기도 힘든 황제인지 대공인지 나발인지랑 어떻게 원나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치들은 본인이 여성이니 자기들이 순결을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닌가.


'이대로 버리고 간다면?'


싸튀충이라는 단어가 머릿 속을 맴도는 지라.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었다.


"으응..."


창가에서 비친 눈부신 햇살 탓일까 그녀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지더니 부스스 눈을 뜨고 있었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당신..."


옷을 입은 채 방을 나설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뇌까지 침투한 알코올의 여파로 눈에 자체적으로 씌워진 필터가 벗겨져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일지도 몰랐다.


"아, 이... 이건 말입니다! 그, 서로 하룻 밤의 불장난...! 그래! 불장난인 것이니 서로 잊고 살도록 합시다, 그럼 저는 이만!"


빠르게 랩을 하듯 다다다 말하고 튀려던 나의 발길을 붙잡는 것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위엄어린 목소리였다.


"잠깐. 지금 본녀를 하룻 밤의 불장난으로 치부하겠다는 것 이냐?"


남작가 영식 나부랭이가 영지에서 주름 좀 잡는다고해서 번데기인 것은 변함이 없다.


나는 그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가만히 듣는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그대를 황녀를 순결을 억지로 뺏은 자로 말을 할 수 밖에 없지않느냐? 그대는 선택하거라."

"무, 무엇을... 말입니까?"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좆됐다 '


어딜 건드릴 것이 없어서 황녀에게 손을 댄단 말인가.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본녀의 순결을 더럽힌 책임을 질 것인지, 도망가다 붙잡혀 죽던지. 선택은 그대 몫이다."

"아, 아니...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어떻게 순결..."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았지만 그녀는 대답대신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이불을 들추어 내었다.


붉게 물든 시트...


'쾌락없는 책임...'


남작가 아들내미 나부랭이가 황녀의 남편으로 코가 꿰인 순간이었다.



강의 듣다가 ㅈㄴ 심심해서 30분 뚝딱해서 로판 클리셰 뒤집어서 적어봤는데 어지럽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