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고등학교의 입학식 전날밤

집 안에선 호위할 필요가 없었기에 방 안에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던 범이는 진동 소리를 느껴 휴대폰을 켰다.

"얘 또 문자왔네..."

진동의 원인은 문자.

sns를 하지 않는 범이에게 3주간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왔었기에 범이는 이제 진동만 와도 그녀임을 예상할 정도였다.

문자의 발송인 수아는 범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내주는 것부터 시작해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고 크게 개인정보를 묻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일상적인 이야기나 관심사를 묻는 것이었기에 범이 또한 그것을 크게 귀찮아하진 않았다.

"아, 출출해."
저녁에 나온 게의 껍질을 까는데 시간이 걸려 많이 못 먹었던 탓일까 아니면 아까 몸이 생각보다 잘 움직여 너무 많이 땀을 흘렸던 탓일까, 밤 10시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에서 나는 신음에 범이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나갔다.

평소 이 시간대엔 불이 다 꺼져있을 주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긴 범이 안으로 들어가니 본래 9시에 퇴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고무장갑을 낀 채 오늘 저녁이었던 게껍질을 검은 봉투에 담는 모습이 보였다.

"이모,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어, 물 마시러 나왔니? 오늘 요리가 손이 좀 많이 가는 거라 정리가 늦네. 아, 이것만 버리고 저 설거지만 하면 이제 다 끝이야."

"아, 그럼 제가 나머지는 할테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니가? 왠일로?"

"아, 저 출출해서 라면하나 끓여먹을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겸사겸사 같이 해놓을 게요."
"너, 설거지 할 줄 알아?"

"에이, 제가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꼼꼼하게 배웠는데요. 제가 이모보다 더 잘할 수도 있어요?"

"되도 않은 허세는, 그래, 니가 해준다면 나야 편하지."

범이보다 먼저 이 집에 들어온 그녀도 범이가 유라가 있을 떄와 없을 때의 모습이 크게 차이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친근하게 말을 걸었고 범이 또한 그녀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들어가세요~"

그렇게 혼자 남은 주방에서 라면과 냄비를 꺼내는 범.

"뭐가 좋으려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떤 라면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범이는 평범하면서도 보증된 맛을 가진 신라면을 골랐고 추가로 냉장고에서 파, 계란, 치즈등을 추가로 꺼냈다.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고 라면을 끓일 때면 항상 나타나는 놈들이 있었기에 2개 반을 넣고 나머지 반개는 생면으로 뜯어먹으며 물이 끓기도 전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뚜껑을 덮었다.

잠시 후 뚜껑을 여니 얼굴 가죽을 달구는 증기와 함께 스프로 덮인 개거품을 내는 라면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범이는 흰자 노른자를 분리한 계란을 넣고 그것이 다 익자 위에 치즈들을 얹어 식탁으로 옮겼다.

"완성~"
뜨거운 것을 잘 못 먹기에 범이는 작은 그릇에 면과 국물을 옮겨 젓가락을 든 순간,

"어? 라면 먹냐?"

"진짜 니네 타이밍 잡고 온 거지?"

귀신같이 나타난 지섭과 그의 오른팔 선우.

본인들은 언제나 우연이라 주장하지만 3년 동안 이어진 우연은 더이상 우연이라 볼 수 없었기에 범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이럴 걸 알고 처음부터 많이 끓였기에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젓가락을 권했으나.

"아냐, 나 요즘 건강관리 하느라 밤에 콜레스트롤 높은 거 먹으면 안돼. 선우 넌 먹지 그러냐?"

"아뇨, 큰형님께서 참으시는데 제가 어찌."

"그럼 먹지 말던가."

큰 미련을 보이지 않고 다시 자기 그릇을 비우기 시작한 범.

후루루룩!!

치즈와 라면 스프가 자아내는 자극적인 냄새와 작은 그릇에 담은 면과 그 면을 적신 국물이 만든 환상적인 비주얼, 또 그것을 한 젓가락으로 크게 잡아 입에 집어넣는 범이의 동작과 마치 cf에 나올 것만 같은 선명하고 꼬불꼬불한 소리까지, 지섭과 선우의 침샘을 자극시키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야, 나, 하, 한입만."

"형님께서 드시겠다면 나도..."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둘은 식탄 구석에 둔 수저통에 손을 뻗었고 그 모습을 범이는 어이없어 하며 쳐다보았다.

이것까지 포함해 3년간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아니 맨날 먹을 거면서 왜 튕기는데... 뭐 한 번 튕기면 면발이 더 탱글해져?"

"허, 후, 후, 하!"

범이가 딴지를 걸거나 말거나 자신이 끓인 라면을 무슨 3일 굶다 먹는 것처럼 신음까지 내며 급하게 배로 밀어넣는 둘.

세 남자가 한 테이블에서 야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도중 울린 휴대폰.

지잉-!

또 다시 온 수아의 문자에 범이는 답장을 보냈고 평소에 부모나 그의 팔불출 스승 외엔 연락하는 것을 보지 못한 둘은 젓가락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범이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왜, 뭐, 뭔데."

라면을 먹으며 시선을 자신을 향하는 괴상한 장면을 범이는 떨떠름하게 느끼며 문자를 보내다 말고 그들에게 고개를 향해 물었다.

"아니, 그거 누구랑 연락하는 거야?"

"그때, 걔 있잖아, 졸업식 때 갑자기 나랑 사진 찍어달라던 애."

"아~ 걔? 너 걔랑 따로 연락해?"

"내 쪽에서 하진 않지만."

"오올~ 우리 범이, 몰랐는데 여자도 잡고 남자네~"

"아, 지금 문자보내는 게 여자였어?"

"그런 거 아니여."

"그보다 나 한 접시만."

"나, 나도."

"어우 이 양반들 진짜..."



"하핫, 답장왔다~"
한 편, 지하실에서 전등을 키지 않은 채 휴대폰의 밝기에만 시야를 의지한 채 범이의 답장을 기다리던 수아는 답장이 오자마자 그것을 읽었다.

"아아~ 라면 먹고있구나~ 라면, 나도 좋아하는데~"

범의 답장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듯 되세기며 웃는 수아.

어둠 속에서도 선을 유지하는 밝은 핑크색의 곱슬머리가 찰랑이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탁 트인 그곳에는 가구라곤 가운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수술대와 전열대, 의자 두개가 끝.

"읍!으읍! 우우우읍!!!!!"

그리고 그 수술대 위에는 한 남자가 묶여서 필사적으로 버둥대고 있었다.

"어머? 그러니까 왜 나를 노리니?"

수아는 자신의 옆에 있던 나이프를 들고 그의 피부에 대고 가볍게 쓸었다.

힘을 주지 않았기에 남자의 피부는 상처가 나지 않았지만 눈 앞에 깔이 자신의 몸을 쓸고 지나간다는 모습에 더욱 버둥대는 남자.

"나는 말이야, 사람과의 관계는 죽음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해."

남자가 버둥대거나 말거나 일절 신경쓰지 않은 채 멋대로 입을 열기 시작한 수아.

"인간관계라는 건 아무리 잘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바뀌어 버리잖아? 서로 목숨도 걸 수 있었던 친한 절친도 서로 싸워서 소원해지거나 마음이 맞는 더 좋은 친구, 혹은 연인이 생기면 그 관계가 옅어지는 것 처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가장 좋았던 관계를 그 상태로 쭉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그런데 어라? 죽어버리면 거기서 끝이잖아? 최고의 관계에서 상대를 죽여버리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좋은 관계인 채 영원히 이어지는 거였잖아! 응? 안 그래? 너희도 부모님이 죽었을 때 만약에 유산같은 걸로 싸운 직후에 죽어버리면 나쁜 부모로 기억해버리잖아? 응? 그렇잖아?"

홍조를 띄며 거친 숨을 내쉬는 그녀의 광기어린 모습에 남자는 오줌을 지리고 눈이 사시나무 처럼 가늘게 떨었다.

 "하물며 그 백호파의 짐승이라니! 그도 분명 나와 같을 거야! 안 그렇게 생각해? 응?"

"읍! 읍!"

"저기 말이야, 혹시 살고 싶니?"

"으읍...?"
"아까도 말했지만 난 죽음으로 인간관계가 완성된다 생각하거든. 그런데 지금 나랑 당신의 관계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솔직히 죽이는 건 꺼린단 말이지. 나는 좋은 관계만 가지고 싶고, 그래서 말인데, 내 부탁하나만 들어주면 살려줄게, 응?"

자애의 천사같은 상냥한 어조였지만 남자는 여전히 남아있는, 아니 어쩌면 더 커져있을 그녀의 눈 속의 광기를 놓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퍽!

"아니 이 새끼들은 겨울 휴가도 없나, 사람 잡아다 죽이는 새끼들 주제에 왤케 성실해."

언제나 처럼 유리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을  할아버지의 쿠크리 나이프로 절명시킨 범이는 와이셔츠에 묻은 피를 보고 혀를 찼다.

"사, 살려...컥!"

"지가 덤벼놓고 뭐라는 겨."

물론 이 피는 범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경맥이 잘린 자객들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튄 것이었다.

자기 것이든 아니든, 흰 와이셔츠에 피가 튀었다는 것은 짜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그것이 처음 입어본 고등학교 교복이었다면 더더욱 신경질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젠장, 피 빼는데 세탁비 많이 나오는데...아니 그보다 찝찝해."

그나마 자켓을 벗어뒀기에 망정이지라며 골목 옆에 있던 실외기 위에 놓아뒀던 자켓을 입어 와이셔츠를 가리며 범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시체 하나 생겼으니까 뒷처리해."

전화를 받은 지섭은 대관절 또 뭔소리냐 앞뒤 맥락 다 잘라먹은 범이에게 따지려 했지만 언제나 처럼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야! 휴대폰 하나 찾는다고 가더니 왜 이렇게 늦어!"

"아, 금방 찾긴 했습니다만 실외기 밑에 있어서 꺼내는데 시간이 걸려버렸습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자켓에 먼지가 묻은 거였어? 근데 왜 그렇게 자켓을 꼼꼼히 잠궈? 평소엔 그냥 대충 걸치잖아."

"아, 네... 오늘 따라 몸이 좀 추워서요."

항상 무관심해 보이면서 의외로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기억하고 있는 유리에게 놀랐지만 그녀가 지섭의 딸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맨날 딸 만나겠다고 일도 내팽게 치고 정시퇴근하는 것 치곤 조직이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거 보면 의외로 유능하단 말이야...'

"흐음~ 너도 추위를 느끼긴 하는구나."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유리가 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

"오빠~!"

둘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수아의 목소리와 모습을 알어본 둘은 걸음을 멈췄다.
"쟤는 분명..."

"수아라고, 저희랑 같은 반으로 편입된 아이입니다."

"오빠! 3주만이네요! 우와! 교복 엄청 잘어울리세요!"

"...그래"

범이는 졸업식 때도 느꼈던 거지만 유리를 고양이라 비유하면 수아는 강아지같았다.

"아, 유리야! 안녕! 우리 인사하는 건 처음이지! 난 수아라 해! 너도 교복 진짜 예쁘다!"

"어, 어.."

나름 사교적인 성격인 유리였지만 수아 수준엔 못 미치는지 그녀의 대답에 버벅였고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수아는 범이에게 다가가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오빠! 우리 같이 사진 또 찍는 거 어때요? 유리도 같이 껴서요!"

"아가씨?"
졸업식 때와는 달리 유리가 앞에 있었기에 그녀의 의사를 물었고 유리의 표정은 어째선지 상당히 뚱해 있었, 던 걸 넘어 어딘가 싸늘했다.

"사진도 좋긴 한데, 지각 안 하려면 얼른 가는 게 좋을걸?"

"응?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우리 일단 뛰어요!"

차갑게 쏘아붙인 유리의 핀잔에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하나 내지 않고 유리는 둘의 손을 잡고 끌고갔고 둘은 어이없어 하며 그녀에게 끌려갔다.

"응?"

그러나 유리는 순간, 수아에게서 싸늘하고 가학적인 미소를 보고 살짝 당황했으나 다시 보니 여전히 강아지 처럼 활기찬 미소임을 확인하고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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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니 벌써 새벽이네....이제 자습실 가야겠다....

사실 범이는 생긴 것도 어느정도 그렇고 성격은 완전 그렇고 원래 쓰던 판타지 소설 주인공의 재탕에 가까운데 이렇게 장르를 바꾸니까 뭔가 신박하다.

마지막 유리의 행동은 사람의 본질을 보는 그녀 나름의 재능입니다.

아빠한테 물려받은 재능이에요.

사실 지섭도 개그에 묻혀서 그렇지 상당한 만능캐에요.

머리랑 경영능력은 현재 나온 캐릭터 원탑이고(사실 이건 아직 나온 캐릭터가 적음...)

싸움도 조폭 두목답게 13살 시절의 범이랑도 오느정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잘하고. 애초에 범이가 지섭을 못 죽인 것도 처음 기습이 막히고 그 다음 부하들한테 제압당해 실패했던 겁니다. 물론 지금 붙으면 걍 한 큐에 목이 떨궈지겠지만.

아무튼 유리의 재능은 전체적으로 지섭한테 물려받았다고 봐야합니다.

얼굴도 딸이란 거 알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 부분도 어느 정도 있는데 오직 성격만 하나도 안 닮음.

그리고 수아 이년 저번화에 일단 등장시키고 성격이랑 구상한 건데 제대로 각 잡고 만들어보니까 제대로 미친년이 되버렸네...

근디 뭔 대회하네...나도 이거 잠깐 멈추고 참가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