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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경순양함 시리우스


"시리우스의 몸은 어떠셨나요?" 





시리우스는 연분홍빛으로 물든 얼굴로

약간은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물음에 응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됬을까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내 왼손은 확실히 부드러운 것을 잡고 있었... 아니, 잡혀있었다

그녀의 거대한 가슴을 그녀의 손에 의해 

강제로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떠내고 물어도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정말,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이 지경에 빠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시리우스의 침대에 누웠던 것은 기억났다

분명이 그녀가 차를 끓이는 동안,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누워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였다


어젯밤, 론에게 강제로 껴안기고 있었던 탓인지

이상한 기분과....약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미지근한 느낌이였기 때문에

개운하게 쉬었다는 느낌조차 아니였다


게다가 처음에는 부드러웠을지 모르지만

자는 내내, 힘 조절을 실패했는지

내장을 다 토해낼 정도의 괴로움을 느꼈었다


다행히 1시간 쯤 지났을 때

론의 힘이 다 빠져서 그런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에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어떻게 됬었을까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일으켜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려고도 생각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다니... 조금 벌이 필요 하겠군"


잠꼬대인지 아니면 내게 보내는 메시지인지

론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때문에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해가 뜨기 전에, 일찍 눈을 뜬 나는 소파에 누웠지만

곧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과 눈 앞의 미녀가 시야에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일찍 일어났던 덕에

이렇게 예정보다 빨리 돌아올 수 있었건만...


피로가 부족했던 탓인지, 나는 시리우스의 침대에서 잠을 청해버린 것이였다




시리우스는 지금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하기야, 남의 방... 더구나 침대에서 덜컥 누워서 자버리다니

여자 아이의 프라이버시는 매우 중요하단 말도 있잖아


솔직히 나도 누군가 내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싫었다

결혼했다던가, 사귀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 참작 여지가 있겠지만

그렇게 친근한 사이도 아닌 사람을 재우는 것은 역시 싫었다


특히 최근에 벨파스트가 매일 아침 무릎베게를 하고

나를 깨우는 일이 일과가 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자기 방에 누굴 초대하는 것조차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시리우스가 자고 있던 나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것에 동의하고

덜컥 누워버린 나도, 매우 나빴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들이받아버린다고나...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벨파스트 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도 아니고

갑자기 떠밀려서 벽에 부딫인 것 같은 충격이였다


놀람과 함께 잠에서 깬 내가 본 것은

본 적도 없는 시리우스의 얼굴이였다


이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뭐랄까, 굉장히 심각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늘 곁에서 날 지켜보던 부드러운 눈동자는 어딘가에도 없었다

본 적이 없는 매우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


아니, 예전에 본적은 있었다

비슷한 눈동자를 말이다

다른 함선에게서...


시리우스는 눈을 부릅뜨고 벽을 뚫어버릴 정도로, 나를 응시했다




무서워

그녀와는 오랫동안 봤던 것 같았는데

그런 그녀가 본 적도 없는 면을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고, 거리를 둘 수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면서 그녀의 다음 한 마디를 기다릴 뿐




함선은 강했다

단순히 사람보다 힘이 셌다

시리우스도 겉모습만 보면 미녀 같은 풍모지만, 속은 남들보단 사뭇 달랐다

그녀가 진짜로 때린다면, 

그야말로 아픈 것으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녀의 눈동자에, 나는 한심하게도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내 팔을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항도 하지 못했다

만약 반항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시리우스의 절망적인 얼굴이 수치스럽게 변하고

강렬한 눈동자는 부끄러운 듯 살짝 나를 피하며

내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더욱 끌어당기면서


"...자랑스러운 주인님"


"으...응?"


그녀는 몇 분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긴장했는지 내 손을 조금 위로 올렸지만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고서는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소감을 좀 말씀해 주세요"


"소...소감?"


"네"



그녀는 보다 강하게, 내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감촉이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



"시리우스의 몸은 어떠신가요?"


"...그렇게 물어도"


"솔직한 마음을 알려주세요"


"............"



어떻게 대답하는 게 정답일까

말을 잘못했다간, 아까와 같은 눈총을 받을까?

이런 상황인데도 가슴에 새겨진 앞선 상황 때문인지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메워졌다


그녀는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내 손을 다정하게 쥐며, 나의 대답을 재촉했다


으...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까



"아... 부드럽네"


"그것뿐인가요?"


"...따뜻해"


"다른 건?"


"......기분 좋아"



나는 될 때로 되라하며,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단답형을 뱉었다

물론 부정적이라던가 싫은 내색 따윈 할 수 없었다



"기분 좋다... 인가요?"


"......으....응"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라도

나는 그녀에게 싫은 내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시리우스의 말대로 솔직하게 느낀 점을 전했다



"자랑스러운 주인님"


"응?"


"시리우스의 몸과 마음은 모두 주인님의 것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떼고 살며시 껴안아 왔다

조금 전까지 잡았던 부드러운 그것은

이제는 머리 전체로 느끼게 되었다


온 시야가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얼굴빛도 모두 사라졌다

그 자체만으로도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마다

나에게 달콤한 냄새를 풍길 때마다

평소의 그녀로 돌아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리우스는 자랑스러운 주인님만을 위한 것

당신 곁에 있는 것만이 행복일 뿐, 그 이외에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메이드 입니다

주인님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든 지시 해주세요"


시리우스는 "그러니까..." 라고 하며, 잠시 뜸을 들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끝났구나 생각하는 나를 속이듯

살짝 고개를 쳐 들며, 내 시선을 빼앗듯이

부드럽게, 소중하게, 망가뜨리지 않게 내 볼을 꼬집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시리우스를 곁에 둬주세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과의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주인님의 이름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

본래라면, 이러한 소망을 가슴에 품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저는 주인님의 얼굴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이런 상스러운 메이드라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숨긴 채, 내일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만약, 자랑스러운 주인님 곁을 떠나라고 하신다면..."



그래

잊고 있었어

여러 가지의 화제가 많았던 탓에 깜빡 잊고 있었다

나는 시리우스에게 말을 전하러 왔던 것이다




시리우스가 계속 옆에 있어줘서 도움이 되었어

시리우스가 비서관이 아니였으면, 분명 이렇게 잘 해낼 수 없었을 거야

고마워, 계속 내 옆에 있어줘서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이제 시리우스는 비서관이 아니게 될 거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나도 사실 이러기 싫어

계속 옆애 있어 준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싫어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래도 모두에게 말한 이상, 바꾸는 수 밖에 없어

분명, 위에 선 사람으로서 개인의 방자하고 사사로운 정으로

고집을 관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니까 말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해야 해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말해야지


"그러니까..."


말해야 하는데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리우스는 나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까 자신의 소망을 내뱉은 것에

걸맞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녀의 얼굴은 희망에 넘쳐 있었다


방금 전까지와의 얼굴과는 정반대였다

따르는 주인님의 말씀을 어제나저제나 애타게 기다리는 눈동자...


나는 그 눈동자가 좋았다

그 눈동자 덕분에, 남과 대화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분명 다른 함선이 비서관이였다면

나는 더더욱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있을 것이다

함선에 둘러싸인 채, 그저 모두의 위에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리우스와 만났다

그녀의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듯한 눈동자 덕분에

그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가 할 말을... 자신이 원하는 말을...



"..........."


말해야 해

이름만 번지르르한, 장식에 불과한 지휘관이 아니야

위에 선 자로서의 모습을, 내 앞의 눈동자에게 보여줘야 해

언제까지나 그 눈동자에 매달릴 수 없음의 소리를 내야해


나는... 나는...



"......젠장할"




이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제까지 쭉 현실에 맞서왔다

그것은 지휘관으로서 함선들 곁에 있어줄 것


그것은 내겐 고통이였다

나의 운명을 억지로 뒤틀은 존재... 그 힘에서 나온 파편...

그것이 바로 그녀들이였다

그녀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나도.... 나도 살해 당할거라는 불안을 느꼈다


세이렌이 갑자기 나타나 세계의 혼돈을 물고 온 것처럼

함선이란게 나타나 인류에게 희망을 찾아 준 것처럼

세계는 전조 없이 변하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상식은 한 순간에 날아가버린 세계

나도 그걸 체감해 온지라, 그녀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랬기에 시리우스의 눈동자는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녀들의 지휘를 하는 자로서, 이 두려움을 감춰야 해

그녀들의 동경을 받는 자로서, 이 두려움을 감춰야 해

그러니까 시리우스는 필요해.... 필요하지만...



"...자랑스러운 주인님"


"어떻게든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후훗, 주인님의 말씀이라면 괜찮을 거에요

주변에서 반발한다 하더라도, 시리우스만은 곁에 있겠어요

당신 곁에서 당신을 부정하는 것을 부숴버리겠습니다.

오직 시리우스만이 계속 지켜드릴테니, 안심해주세요"


이 현실에서 도망친다고, 좋은 일이란 없을 것이다

분명 다른 함선들이 언성을 높일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시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돼

주위의 소리를 듣는 척하면서 도망치면 돼

그렇게 그냥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거야...


순간 나의 얼굴이 축 늘어졌다

두 팔은 허공에서 한심한 모양으로 흔들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이 도망에 대한 책임이

자신이 한 말의 무책임함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인지, 어깨가 무거웠다

이 무게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두의 실망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형체도 갖추지 못한, 나의 무능 때문일까


"자랑스러운 주인님!?"


그녀는 나의 이런 변화에 당황했는지

잠시 두리번 거리다가, 바닥을 보고는

평소의 미소를 보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시리우스

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홍차를 끓여 왔었는데 말이죠...

다 식어 버린 것 같으니까, 새로 끓여 오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놓인 찻잔

내가 벽에 부딪힌 충격이 컸는지, 테이블에 상당한 내용물이 넘쳐나 있었다


나는 무표정으로 그녀보다 빨리, 테이블에 놓인 찾잔을 집으며



"...맛있네"


"네, 연습했으니까요"


벨파스트가 만드는 홍차보단 아직 뒤쳐지지만

그래도 극한 단맛이나 극한 쓴맛은 없었다


이것이면 마른 목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다음엔 조금 달았으면 하는 군"


"네, 알겠습니다

지휘관님께서 원하신다면 이 시리우스가 언제든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시리우스는 나의 대답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 다행이야

이제 무서운 것은 없어진 거 같아


나는 도망치듯 그런 생각을 자꾸만 떠올렸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할까?

물론 생각한 것은 없다


생각해보니까, 이번 건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간

아무리 말해도 납득해주는 함선은 없을 것이다

다들 비서관이 되고 싶어하는 함선이였기에

그런 그녀들이 포기할 만한 다른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긴장감에 손에 주머니를 넣고 있다가

뭔가 작은 조각들을 느꼈다

그것을 꺼내니



"그건 뭔가요?"


"별사탕이야, 옛날에 신세진 함선에게 받았지

그 함선 덕에, 내가 지휘관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었어..."


그러고보니 마침 생각이 났다

내가 어릴 때, 나를 도와주었던 함선의 얼굴을...


특별히 희망을 찾은 것은 아니였다


도망치기만 할 뿐인 내게, 그런 달콤만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희망이란게 있을리가 없지


다만, 최악의 결과를 향해가고 있는 내게서

조금이라도 결과를 개선해 줄만한 묘안을 내줄 것 같은

아니면, 나에 대한 모두의 반응을 알려주고

마음의 준비를 시켜줄 수 있는

그런 그녀의 존재를 말이다.


시리우스가 신기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과자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함은 내가 바라던 것이였다

나에 대해서 달콤한 나에게, 보다 달콤한 것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 같은...


그러고보니 달콤함을 느낄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내가 곁에 있어줄테니, 다른 함선들과는 거리를 확실히 유지하는 거야

지휘관으로서 부하들과의 거리를 생각한 채, 대하는 거야


미사카 씨에게서 들었던 그 말은

내게 모두를 대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였다

부하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어떻게 해야 배울 수 있을까?


고향이 사라지면서, 지휘관이 될 때까지

미사카 씨는 내 상사로서 계속 곁에 있어주었다

그녀와 나 같은 거리감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언제가 되어야, 그녀는 내 곁에 있어 줄 것인가

도와줘요, 미카사 씨

내게 가르쳐줘요

난, 형태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지휘관이에요



이대로 도망치기엔

이 현실이 너무나도 무서워


달콤하다(あま-い)는 일본어로 무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휘관은 달콤하다 = 지휘관은 물러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