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gijjdd&no=521802


글먹은 남들이 보고 싶은 글을 '써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함.

상업작가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작가의 신념도, 뛰어난 작품성도 아닌 그냥 재밌는 장면이고, 재밌는 장면은 대부분 '독자가 원하는 장면'이니까.

 

 

그런데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떠나서 나는 저 글에 동의할 수가 없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함.

 

그냥, 그렇게 쓰려고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진짜 많기 때문임.

 

 


가끔씩 감평을 하다 보면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남.

 

극단적으로는 '너한테 감평은 맡기는데 내 작품을 나쁘게 말하는 것 같으니 구태여 수정하진 않겠음'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고, 반대쪽으로 극단적인 사람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써보면 어떨까요?'하고 예시로 내어준 문장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하는 사람도 있음. 그런데.

 

 

사실 이런 사람들은 비율로 따지면 20%도 안됨.

 

감평하면서 장면을 분석할 때 내가 항상 감평 받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있음. '혹시 어떤 의도로 이 장면을/장치를 사용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하는 거임.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말이 딱 하나임.

 

이게 트렌드라. 이러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전부 이 대답임. 자기 만족을 위해 장면을 넣는 사람은 진짜 드뭄. 그 사람들은 이미 작품성이나 철학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임.

 

그런데 그 장면이 재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

 

 

사실 나도 그랬음.

 

트렌드를 분석한다고 했고,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많이 분석했으면서도 그동안 썼던 작품들의 연독률은 계속 25화 기준 50%내외였음. 자존심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개똥 철학도 넣지 않고 오로지 독자들이 바라는 장면만 넣으려고 했었는데도 그랬었음. 그렇다면 왜 그럴까? 나는 왜 계속 망할까?

 

 

단순하게 생각해서, 독자들이 뭘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임.

 

이런 장면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넣고 나면 '엥? 이걸 원한 게 아닌데'하는 독자들이 떨어져 나감. 전작도 그랬고, 전전작도 그랬고, 전전전작도 그랬음.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유료화는 갔지만 겨우 유료화 찔끔 간다고 해서 기성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계속 생각을 했음.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원하는 걸 캐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독자의 시선과 내 시선을 맞출 수 있을까?'

 

 

물론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그걸 알아낼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음. 하지만 4질 가량을 완결치고 스무작품을 넘게 갈아엎어보면서도 나는 독자의 시선으로 보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없었고, 그래서 결론 낸 건 단 하나.

 

 

독자의 시선을 공식화하자.

 

 

이게 내 결론이었음. 이게 아마 작년 중반 쯤에 내렸던 결론이었던 걸로 암.

 

 

이때부터 진짜 갖은 방법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공식화하고자 했음. 플롯을 짜는 버릇을 들였고, 장면이나 장치를 새로 짤 때 이 장면과 장치로 취하려하는 이득이 뭔지 반드시 정리했음. 기대감에 대해서도 정리해보고, 캐릭터에 대해서도 공식화해보고. 웹갤에 있는 팁이란 팁은 거의 다 뒤지고, 기성작가님들이 가르쳐주신 팁도 전부 보관해서 공부하고.

 

 

막막하더라고. 행아웃 가서 도대체 독자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도 해봤음. 내 재능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아무리 해도 더 모르겠다고.

 

그런데 대작가님 한 분이 '그 고민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겪는 고민이다'라고, 안타깝다고, 힘내라고 하시더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나처럼 재능이 없어도 이 악물고 어떻게든 써서 성공한 작가들이 있다는 뜻이잖아.

 

 

내 스스로 밟아 짓이기던 불씨를 어떻게든 되살리기 시작했음. 모르면 공부해야지. 누가 글쓰라고 강요한 거 아니잖아. 내가 글로 먹고살고 싶어서 글 쓰는거잖음.

 

다시 하나씩 팁을 정리하고 '내게 옳은 팁'과 '옳지 않은 팁'을 분류하기 시작했음. 그렇게 옳은 팁을 분류하고 나니까 옳은 팁도 최소한 수십가지가 넘데? 이게 한 2월 말쯤이었나?

 

 

이즈음 문피아에 신작 연재를 시작했음. 제목은 악역가문의 독식천재가 되었다.

 

그동안 생각하고 공식화했던 걸 글로 풀어내서 연재를 했었지. 그런데 이게 웬걸.

 

 

23화즈음 보니까 연독률이 90퍼 좀 넘게 나오더라고?

 

 

연독률이 이렇게 높게 나온 건 처음이었고, 나는 내가 잡은 방향성이 틀리지는 않다는 걸 알았음.

 

그런데 이즈음해서 오히려 문제점이 생김. 쌓이고 쌓인 팁들에 매몰되다 보니까 오히려 너무 글을 강박적으로 쓰게 된 거임.

 

 

이쯤에 이 장면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이 인물에게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매력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

 

열 시간, 열다섯 시간 씩 한글을 붙잡고 있어도 글이 안 나옴. 다음 화를 얽매는 '조건'이 너무 많더라고.

 

그렇게 강박적으로 24화를 쓰고 올렸음. 댓글 반응은 나쁘지 않더라. 그런데 연독률이 갑자기 폭락함.

 

연독률이 폭락하니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음. 그런데 돌이켜봐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음. 그냥 팁대로.

 

팁대로 썼는데 왜?

 

 

이제와서 반추해보면 간단함. 팁 하나를 지키려고 다른 팁들을 모조리 무시해서 그럼. 숲을 봐야 하는데 나무를 봤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4화만에 연독률이 20퍼가 넘게 폭락했음.

 

 

그래도 애정 있게 쓰던 작품이라 유료화 가고 싶었는데 이즈음해서 내 문매 담당자 분이 퇴사했고 문피아 매니지 시스템에 다소 변동이 생김. 그래서 내 계약이 붕 떠버려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새 작품으로 시리즈 독점을 한 번 해볼까 생각했었고, 아는 작가님 소개로 시리즈 강세 매니지랑 계약함. 이게 4월경.

 

그런데 새 작품을 쓰자고 보니 위에서 설명한 문제점들이 계속 눈에 밟힘. 글을 너무 강박적으로 씀.

 

 

이때 쓰려고 했던 게 아마 대요괴인 주인공이 사정으로 인해 힘을 봉인하고 몰락한 청성파의 제자로 들어가는 소재였음. 개인적으로는 재밌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글을 강박적으로 쓰니깐 어떻게 되겠음?

 

계속 1화부터 3화까지 쓰고 갈아엎고 쓰고 갈아엎고, 거의 3주동안 갈아엎었는데도 내 눈에 프롤로그가 안 참. 분명 어떻게 해야하는 지 아는데 손이 안감.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이 소재로 안되겠다 하고 새로운 소재를 잡아서 들어감. 그리고 이즈음부터 강박증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함.

 

6월쯤 되니까 내가 무슨 팁을 읽었는지 좀 많이 까먹더라고? 구태여 기억을 떠올리면 생각이 나긴 하는데 무의식 저편으로 팁들이 하나둘씩 가라앉기 시작함.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될까?

 


그냥 정말 중요한 팁만 남는 거임. 얽매이는 조건이 하나씩 풀리니까 글이 재밌어지더라고. 쓰다보니까 어? 이거 내가 봐도 좀 괜찮은 것 같어.

 

그래서 원고 쓰고 시리즈 심사 넣었음.

 

새 편집자님도 재밌다고 해서 제발 단독 매열무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묶음 메인만 주세요하고 물 떠놓고 기도함.

 

 

시간이 흘렀음.

 


심사가 끝나고 판정이 나왔음.

 

 

정연이었음.

 


물론 정연 됐다고 내가 무슨 기성작가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님. 나는 아직도 망생이라고 생각하고, 발전 도중이라고 생각함. 지금 작품도 여태 쓴 부분까지는 잘 뽑혔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후로 말아 먹을 수도 있겠지.

 

그냥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임.

 


글로 적어도 이렇게 김. 기억으로 반추해보면 더 길고, 전환점이 아닌 것까지 떠올려보면 진짜, 진짜 긴 거임.

 

이렇게까지 해야만 겨우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음. 시장에 처음 진입한 신인들이 구매수 2천, 3천, 5천 띄울 때 나는 구매수 2부터 시작했었지. 세태와의 타협? 그딴 건 처음부터 했었다고. 독자들이 재밌어하는 작품 대부분은 내 눈에도 재밌었으니까. 그냥 그런 작품을 쓰고 싶었음. 작품성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데도 2년을 투자해서 겨우 이 정도 왔음.

 


모두가 다 같은 출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음. '이러면 글먹할 수 있다'는 건 대부분 다 알음. 그런데 글먹하지 못하는 건 그냥, 지금의 내가 못하기 때문이고.

 

지금의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그 시점에서 세 부류로 나뉨. 부정하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긍정하고 포기하거나, 아니면 긍정하고 미래의 나를 만들거나.

 


나는 이 '미래의 나'를 만드는 원동력이 글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함.

 


쓰고 싶으니까 2년, 3년 버텼고, 기성이 되고 싶으니까 머리 깨지도록 분석하고 공부했음. 돈 많이 버는 거 솔직히 나한테 중요하지도 않아. 갖고 싶은 것도, 사치욕도 별로 없어서 통장에 고료 들어오면 10퍼만 남기고 다 부모님 드림. 그런데도 그냥.

 


작가 되고 싶어서.

 

글 써서 먹고 살고 싶어서. 이 직업으로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음.

 

 


이 글은 아직 망생이인 내가,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망생이들에게 헌정할 수 있는,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줄 수 있는 팁임.


 

자신의 한계를 섣불리 재단하지 마셈.

 

시작지점은 달라도 골은 같음. 다른 사람들이 빨리 달린다고 해서 내가 완주할 수 없는 건 아님.

 

아무리 꽉 막혀있는 벽이라도 어딘가엔 뛰어넘을 수 있는 장치가 있음. 퍼즐을 풀듯이 끊임없이 궁리하고 궁리해서 완주하면 그만임.

 


뒤 없이 살지 마셈.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을 버리셈. 마지막이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 이번 한 번으로 주저앉을 정도로 네 가능성은 초라하지 않음.

 

돈이 없으면 일하면서 글을 쓰셈. 계속해서 뒤에 길을 놓아야만 버틸 수 있음. 자신을 극단적으로 몰고가지 말았으면 좋겠음.


절박하되 임박하지는 말자.


 

이만 줄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