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경험이자 견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며 쓸 것.

 

기본적으로 모든 묘사의 목적은 작가가 구축한 심상을 독자의 뇌리에 재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머릿속에는 묘사하려는 장면의 구체적인 심상이 들어있어야 마땅합니다. 작가 본인에게 모호한 것은 독자에게도 모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독자가 풍경을 보려면 그 풍경이 작가의 심상 속에 있어야 하고, 독자가 냄새를 맡으려면 그 냄새도 작가의 심상 속에 있어야 하며, 독자가 소리를 들으려면 그 소리 또한 작가의 심상 속에 있어야 합니다.

 

전투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가 원본으로서 그리는 심상은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그 장면을 묘사하기가 벅차 글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아직 경험이 덜 쌓였기 때문일 뿐 방법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처음부터 '전투씬은 구체적인 영상을 그리며 쓰면 절대로 안 돼.'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이 작가에게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향후의 발전 가능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르려고 하지 않는데 높아질 리가 없잖습니까.

 

잠시 제가 보았던 게시물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절대 영화나 애니 전투씬 상상하고 쓰지 마라

 

영상에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한 스크린 안에서 우리가 인물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은 직접 읽어야 한다. 당연히 실시간이 될 수 없음. 영상에서 1초면 보고 지나갈 장면을 글로는 두줄 세줄로 묘사하고 독자는 그걸 머릿속으로 투사해야 한다, 또 읽는 속도도 차이가 난다. 절대로 영상의 그 속도를 쫒아갈 수 없다.

 

 

우선 원문을 작성하신 작가님께 양해 말씀을 구합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에 앞서 반대항을 명확히 하여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인용입니다. 불쾌하게 해드리려는 의도는 없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의 장면 묘사가 영상매체의 속도를 쫓아갈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서술 그 자체만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체감하는 속도는 별개입니다.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은 자신이 상상으로 재구성한 장면의 속도감이니까요.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자면...

 

 

2. 독자가 체감하는 속도는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독자가 상상으로 완성한 장면으로부터 느끼는 체감속도, 그리고 독자가 그 장면을 완성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결코 서로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후자가 전자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요. 그러나 그 영향은 묘사의 완성도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입니다.

 

소설에 대한 몰입은 몰입하고 있는 동안의 체감시간을 삭제하거나 축소시킵니다. 여러분께서도 분명 같은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즉 계속해서 갱신되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흥미롭다면, 독자는 그 정보를 쉼없이 받아들여 장면을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즐거움은 시간을 왜곡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독자는 자신이 그려낸 심상으로부터 완성된 속도감을 전달받습니다. 이 주관적인 속도감은 객관적으로 고정되어있는 영상매체의 속도감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묘사를 통해 제공되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흥미로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묘사의 완성도가 낮을수록, 덜 다듬어지거나 배치가 잘못되었거나 불필요한 정보가 많을수록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도 늘어집니다. 우리 작가들이 묘사의 완성도를 끊임없이 제고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3. 그렇다면 속도감을 살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부터는 정말로 저 개인의 요령이니 참고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단문과 장문의 배치.

 

단문이 장문에 비해 속도감을 전달하는 데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전투묘사에 있어서 장문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것도 최선의 선택은 아닙니다.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은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의 총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데, 단문이 담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좋은 묘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독자의 체감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연체를 쓰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만연체는 급박함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문체입니다.

 

제 경험상 가장 좋은 것은 단문을 주로 사용하되 독자의 몰입을 깨지 않겠다 싶은 한도 내에서 사이사이 적당한 길이의 장문을 삽입하는 것입니다. 정보량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이러한 삽입은 두 번째 요령과 연관이 있습니다.

 

둘째. 감각, 배경, 인물, 행동, 심리의 전환.

 

전투묘사는 독자의 뇌리에 쉴 새 없이, 숨가쁘게 새로운 정보를 꽂아넣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는 매 순간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독자가 지루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예컨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다채로운 감각적 묘사의 사용은 그 자체로 지속적인 새로움의 갱신이며,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숨가쁨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퇴고를 할 때 묘사가 어느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어느 감각이 결핍되어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은 묘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서로 다른 감각과 서로 다른 배경, 인물, 행동, 심리를 끊임없이 교차시키세요. 언어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만, 사람의 인지구조는 이미 안다고 여기는 것에 보다 적은 주의를 할애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각각의 구성요소가 이전과는 다른 내용으로서 서로의 꼬리를 물며 다채롭게 이어진다면 독자의 인지구조는 각각의 구성요소에 대한 최선의 주의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완성될 심상에 담아낼 수 있는 정보의 총량도 많아지고요.

 

셋째. 문장의 구조.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인지구조는 이미 아는 것, 이미 본 것, 이미 이해한 것(혹은 그렇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보다 적은 주의를 할애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는 문장의 구조에도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만약 동일한 형태의 문장 구조가 반복된다? 그건 그 자체로 독자의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입니다. 이미 보았던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다양한 문장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상상의 여백.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모든 묘사는 독자에게 상상을 펼칠 최소한의 단서를 제공한다는 느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코 심상의 전부를 일일이 다 설명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전투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정보량의 증대는 구성요소의 변화와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텍스트는 소통의 도구이지, 그 자체로 완성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소설은 독자가 읽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작가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독자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합니다. 즉 작가에겐 독자의 상상력 또한 소설을 쓰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묘사를 함에 있어서 독자가 상상으로 채워넣을 여백을 어떻게 배치하는가가 좋은 묘사를 판가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출처: 동료 작가분들께 전투장면 묘사에 관하여 드리는 제언 - 웹소설 연재 갤러리 (dcinsi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