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르 평원, 로테니아 시 18km 지점》


결국 차가 뻗었다. 제한 속도를 넘어서 평원에서 시속 110마일로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운전병은 버려 두는 게 좋겠습니다. 데려가 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으니, 가시죠. 로테니아 시까지 가면 루슬란트 복귀도 금방입니다."


대섭정 새끼, 묠니야 궤도항에서 죽치고 있는 모양인데, 밤 내내 이 지랄이 일어나는데 최고결정권자가 사실상의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안 그래? 기사단국 지배자들이 상식이 있다면 그는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겠지.


그나저나 저 운전병, 쓰러져 죽은 것처럼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안녕, 잘 있어라.


"적어도 오데르 평원에서 로테니아에 인접한 지역에는 적군이 배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 또 통신이 막혔네요. 적이 주기적으로 방해전파 같은 걸 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거면 곧 다시 복구될 거야. 여기 경치는 엄청 좋은데 이 나라 귀족들은 여기 개발은 안 해?"


"오데르 평원 남부의 나이세 강변이 지배층들의 주요 거주지긴 합니다."


평원은, 모행성이 중천에 뜨면서 자주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특이한 풀들이 빛을 반사하면서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뿜었다.


저 멀리에는 야생 소떼와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던 평원의 경치를 자연스럽게 장식했다.


과연 윗대가리들이 살 만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기만 나는 장갑차에서 나와서 그림 같은 평원을 걸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대한 평원 끝에, 고딕 양식의 도시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룬하임, 베르너슈타트, 포센, 로테니아 모두 더럽게 중세적인 건축양식인데, 누가 저렇게 디자인한 거야? 기술의 시대에 어울리는 건축은 아닌데."


"1세기 전, 파괴된 히페르보레아의 지표에 성지 - 도시를 만들 때, 기사단국의 지도자들은 선언했습니다. 고대 히페르보레아 문명의 위대한 건축들을 본받겠다고요."


"내가 보기엔 그 유적에 비하면 저 도시는 부족한 것 같은데? 기술의 차이인가."


"고대 히페르보레아인들의 신비한 건축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들이 가졌던 창조정신도 기술도 없으니까요. 교조적인 모방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딱히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고, 루슬란트에서부터 히페르보레아까지 온 기사단국 영토가 중세적인 꽉 막힌 거대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불만일 뿐이었다. 7개월 전만 해도 가장 미래적인 대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도 그 오래되고 낙후된 디자인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촉매였을 것이다.


"방금 무선 통신인데, 결국 노예 반란 조기 제압에 실패했다는군요. 280km 아래 오벨 숲 서부지역 오벨란트 산업지대에서 일어난 반란군과의 교전 소식이 우리 지역에서 겨우 29km 남쪽 오벨 숲 북부지대에서 들려왔습니다."


"이겼대?" "이겼으면 제가 이걸 반란 제압 실패라고 하지 않았겠죠."


"저능한 새끼들이, 노예들을 제압도 못하나? 그럴 거면 노예는 왜 만들었다니?"


"휴우, 수도성에는 규율상 중무장 부대는 두는 게 불가능합니다. 보병대도 대부분이 저 인공지능의 부대에게 결딴난 지 오래고요. 오벨란트의 노예만 6천만입니다. 그들 중에 10퍼센트가 반란을 일으키면 6백만 명이죠."


이번 사태가 그녀가 그저 기사단국 역사 강의 때 알려 준 어지간한 내전 이상의 피해를 하룻밤 사이에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래도 겨우 걸어다니는 노예들입니다.로테니아 시에는 아주 많은 군대가 있습니다. 그들을 믿어 보는 게 유일한 해답이겠군요."


"그렇다면 빨리 입장하는 게 해답이겠는걸?"


우리는 보랏빛 평원을 걷고, 또 걸었다. 평원 곳곳에 약한 연기들이 솟아오르는데, 위험한 거 아닌가?


"그건 이 지역 지열이 워낙 강해서 그렇습니다. 이 지역 위도가 61도나 되는데, 다른 곳과 다르게 풀이 자랄 만한 환경인 이유죠. 아마 고대 히페르보레아인들이 이곳을 보존한 것도 이것 때문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러면 저 연기가 유해하지는 않은 건가?


"야외에서는 괜찮겠지만, 너무 과량을 흡입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군요. 이 평원 지하로에서 광물을 채취하는 노예들의 4할이 매년 가스 흡입으로 죽는답니다."


"너희 정부가 그런 것도 해결을 안 해준다니? 그렇게 노예들을 굴려서는 이득 볼 게 없잖아."


"노예 인구가 히페르보레아에만 8억입니다. 그리고 노예들은 5년마다 10퍼센트씩 늘어나고 있고요. 저렇게 노예를 많이 소모해야 과다한 노예 수를 조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무슨 저 따위 짓을 하지? 확실히 나와는 마인드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 같다.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그것이 그들을 소모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 아닌가?


"그래, 인간을 자원 취급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울리히 님께서 이곳과 반대의 체제에서 살아오셨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별로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권한을 가지게 된다면 이것을 놔 둘 생각도 없다. 적어도 루슬란트로 돌아간다면, 루슬란트라도 개선하겠다.


"루슬란트 영토에 대한 권한은 울리히 님께 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만, 그러신다면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주목을 사지 않을까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내가 29년간 살아왔던 모국에서는, 사람을 사람이 억압한다는 걸 정당화하지는 않아, 오히려 배격하지. 


이건 인간성의 문제야. 그들이 뭐라 하던, 정치적인 것보다는 인간성의 문제라고."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말했다.


"그런 규칙이 절대적인 건 아니잖습니까? 식민정부에는 그들 연방의 규칙이 있는 것일 거고, 기사단국에는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난 기사단국 신민이 아닌데, 내 자유를 좀 존중해 봐. 응? 너희 나라에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말야.


"어쨌든 걸음을 좀 더 빨리 하셔야겠습니다. 노예 반란군들이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는군요. 로테니아 입구까지 8km 남았으니, 조금만 더 빨리 걸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은 어떻게 될까? 이번에 그대로 기사단국이 망해버린다면 모르겠지만, 기사단국의 영토가 히페르보레아뿐인 것은 아니다. 결국 그들의 자유를 찾는 외침은 아무도 듣지 못한 채 사그라들 것이다. 


기사단국이 절망과 고통의 체제를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 다시금 실감된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은 외부 국가에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언젠가 돌아가면 이것을 폭로할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폭압적인지는 모두가 알아야 한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국민보수주의자 모두 공감하는 하나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제 미천한 전자두뇌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폭로 말씀이십니까?"


"생각을 읽는 것도... 선이 있는 거야. 너, 그 선을 방금 넘을 뻔 했어. 이런 능력을 좀 더 현명하게 쓰길 바란다."


"울리히 님의 감정과 정신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제 임무고, 제가 울리히 님께 배정된 이유도 보통 중앙 귀족들은 저희 같은 감정을 읽는 이들을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넌 떠넘겨진 존재라는 건가? 인생 참 불만스럽겠구만.


"고대 유물-기술력은 제 의지로 이식받은 것이어서, 큰 불만은 없습니다. 게다가 고대의 혈통을 보좌하는 영광을 부여받았는데, 누가 감히 불만을 표하겠습니까?"



이제 로테니아 시 외곽의 거대한 신전과 사무소, 노예 수용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전파가 다시 잡히는군요. 우리 군대 표준 통신 양식입니다. 아마 제 전파로 보내면 바로 지원군이 올 겁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이서야 전파가 잡히다니, 통신망이 박살 나긴 했나 봅니다."


"뭐야? 통신 내용이 좀 이상한데, 보좌관? 이거 제대로 온 거야?"


[운터맨쉬... 반란... 도시 청사 방어에... 집중... (푸지직) ..... 기사단국은 .... 건재하다.... 아니,.... 즉각 도시 외부로 후퇴... (신호 미약) ... 우리의 자유를... 예속된 자들아 우리의 것을 되찾자..... 대섭정 각하는 건재하시다.... 모든 부대는 자리를 지ㅋ... (신호 끊김)]


보좌관의 얼굴이 하앟게 질렸다. 그 통신이 끊기자마자, 도시가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하얀 폭발광과 버섯구름이 연속적으로 울리며 도시의 대부분이 산산조각 났다. 


"결국 도시를 Komplett entfernt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공군이고 뭐고 끝장이군요." "그게 뭐야?"


"<완전 제거>입니다. 기사단국이 후퇴할 때, 도저히 적에게 넘길 수 없는 도시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제거합니다. 저 도시처럼 말이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폭발의 충격파가 우리에게 닿으며, 우리를 멀리 던져버렸다.


"이게 뭐야?! 아악!"


쿵. 그리고 아주 빠르게 의식이 흐려졌다. 차라리 아픈 것보단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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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치시진 않으셨군요! 다행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 불찰입니다."


"다친 데는 없나 봐. 머리가 띵하네, 그래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가 해서 도시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때 고딕 양식의 관청이었던 거대한 건물이,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며 쓰러지고 있었고, 노예 수용소는 분노의 포격이라도 당한 듯 거대한 구덩이가 되어 있었다. 부서지고 녹아내린 건물이 연속적으로 폭발하고 파편을 흩뿌리는 모습이 5마일 바깥에 있는 나에게도 들렸다.


"표준 통신망에, 구조 신호라도 보내겠습니다. 부디 누군가는 이 통신을 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상황이 아주 비관적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앞의 요새 도시는 도시 전체가 기사단국에게 파괴당했고, 우리 뒤 29마일 뒤에는 노예 군대가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노예들의 군세는 엄청나게 위협적이다. 애초에 군수산업 지대를 점거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들은 오벨 숲의 부대를 모두 박살내고 진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기사단국은 이 사태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어. 자기들의 최고 군사요충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후퇴하다니! 그 버러지들, 섭정의 군대는 뭘 하는 거야?"


"곧 리보니아와 프랑크, 루슬란트에서 흑색군단 정예병들이 도착할 겁니다. 차라리 베르너슈타트로 다시 떠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적어도 그 도시에 당분간은 머무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 통신망도 정찰대가 복구했고요."


이럴 거면 왜 온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디가 안전 지대지? 적어도 이 행성의 대부분은 고대 유적으로 차 있잖아. 우리가 온 곳들이 수도성에서 사용되는 거의 대부분 면적 아냐? 더 남은 도시가 뭐가 있는데, 히페르보레아에 기사단국 세력이 남아 있긴 해?"


"그래도 울리히 님, 제가 방금 들은 소식인데, 기계 군단의 공세는 많이 약해졌답니다. 곧 우리의 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지요."


그게 도대체 언제인가? 자유를 찾는 노예 무리 수백만 명이 우리 뒤에서 미친 듯이 몰려오고, 군대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곳까지 버리고 도망쳤다. 


우리는 우주선을 찾아야 하지만, 적어도 페룬하임과 베르너슈타트에 제대로 작동하는 우주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다리자. 폐허가 된 도시라도, 그곳에서 살 수는 있겠지. 물론 로테니아로 들어가는 건 무리니까. 다시 평원을 건너서 포센으로 돌아가야겠지.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


"30km 정도는 가야 될 것 같습니다. 내일 해가 뜰 때쯤 도착하겠군요."


불안한 점은, 이 초원에 맹수 같은 게 없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타이탄 로봇이 아직도 평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는데, 무슨 수로 포센까지 돌아간다는 걸까?


"기계 군단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의 목표를 이룬 모양이겠죠. 그리고 혹시, 나중에 저를 변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원칙적으로 울리히 님에게 어제부터 일어났던 일은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부디 저를 변호해 주셔서, 제게 울리히 님을 계속 섬길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넌 무고하고, 최선을 다해서 날 지켜냈고, 그 덕에 내가 살아 있는 거니까."


그녀는 정말 감사하다며 몇 번이나 말했다.


"그렇다면... 이거라도 먹고 출발하지."


아직 내 외투 안에 이런저런 식량 바가 있긴 하다. 그거 몇 개로 버틸 수 있으려나?


고기 맛이 나는 바를 하나 꺼내고, 그녀에게도 하나 건넸다. 그녀는 몇 번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서 그녀도 한 입 먹었다. 모행성이 슬슬 지평선으로 져 가면서, 보라색이었던 땅은 파란색 노을로 인해서 바닷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곧 찾아올 텐데, 이거 괜찮은 건가?


"울리히 님 외투 왼쪽 주머니에 있는 안경집 보이십니까? 3급 유물인데, 어둠의 안경이라는, 고급 야시경 역할도 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다른 기능은 나중에 설명드릴 테니, 좀 이따가 해가 지면 쓰기만 하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와 그녀는 계속 그 평원을 걸어갔다. 아무리 지열 지대라지만, 저녁이 되니 북위 61도답게 엄청난 추위가 몰아닥쳤다. 발열 외투를 꽁꽁 싸매고 있는데도 엄청난 추위가 몰아닥쳤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안경도 껴 볼까. 과연 고대 유물답게 성능은 식민정부의 야시경 그 이상이었다. 물론 안경이므로 훨씬 편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거의 8마일 바깥까지 보였다. 포센 시는 아직도 16마일이나 남아 있으니 보이지는 않는다. 보좌관의 전자두뇌에 의지해서 정확한 지리를 찾는다.


"방금 감시위성에 접속 성공했습니다. 오벨란트 노예들, 아직 그 숲 안에 머무르는 것 같군요. 저긴 치안대가 대대 단위로 흩어져 있을 텐데, 그들을 노리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 치안대라면 노예 관리도 주 업무랬지? 그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노예들한테 1만 명이 찢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긴 해." 평원으로 나와 봐야 궤도 함대가 합법적으로 포격할 수 있는 곳이니까, 숲에서 나오지는 않겠지. 


한밤중의 오데르 평원은 새까만 하늘 아래, 지열이 올라오는 곳만 짙은 붉은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과, 그들 중 약간 이질적인 우주항과 궤도 노예 거주 시설들이 은빛으로 빛나며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지배자가 기사단국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몇 마일을 걸었지만, 군대나, 하다못해 낙오된 민간인도 못 봤다.


아직 포센까지는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