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 숲을 빠져나오고 나서 1시간 후, 베르너슈타트 공군기지 남동쪽 8마일 지점》



"갈수록 태산이군요. 이제는 거의 모든 군사 신호가 파편화되고 있습니다."


"뭔 소리야, 신호의 파편화라는 게?"


보좌관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군대는 일정한 지휘체계에 따라 그물망처럼 통신망이 짜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통신이 단편적이고, 그것도 무질서해진 상태라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걸까?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적군의 위치 파악과 도청을 막기 위해 의도적인 무선침묵을 시행 중이거나," "두 번째 상황은 뭐지?"


"아예 히페르보레아 지휘체계가 붕괴된 겁니다. 이 시점에서 외부 지원이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죠. 모든 통신망, 가장 비밀스러운 통신망의 신호도 저는 잡아낼 수 있으니, 이게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몇 달 전 수업에서 기사단국의 지휘 체계는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지휘 체계가 아주 복잡하고 신중하게 짜여진다는 사실은 들었다.


이 이야기는 이 행성 지휘부가 몰살당하고, 이미 그 지휘를 재개할 만한 고위직이 도망치거나 몰살당했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려나? 베르너슈타트 공군기지 전화번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린 베르너슈타트 공항에는 가지 않게 될 것 같군요. 에베르트 판무관님, 거긴 아마 십여 분 전에 다 죽었을 겁니다."


허, 그럼 어디로 가나? 미친 인공지능을 피해 도망칠 곳이 이 행성 안에 있을까? 


"그 정신나간 인공지능 군대에게 붙잡히면 우리가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잠시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공지능의 공격목표는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 소리야? 내 헛소리 때문에 미쳐 버린 거 같은데"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하기로는, 8분 전에 통신망이 다 꺼져 버리기 전까지는 분명히 주요 인구밀집지대랑 군사시설을 박살내고 다니는 것을 확인했고, 우리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가설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사단국 내에서 대부분의 전산 작업이나 통신망은 저 인공지능과 연계된 거 아니었어? 그러면 전산망이나 통신 시스템만 붕괴된 거지, 군대는 그대로 아닐까?"


"그게 곧 붕괴나 마찬가지입니다, 울리히 님, 현대 군대는 통신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통신망이 파괴되면 군대의 효율적인 배치도, 빠른 공격이나 퇴각도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발이 묶인 채 끝장날 거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그렇다면 기사단국의 다른 위성들로 도망쳐 가도 그곳도 똑같지 않겠는가? 끔찍하게 위험하겠지만, 집으로 돌아갈 기회이기도 하다!


"허튼 짓 마십시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녀는 내 팔을 아주 세게 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이 썅년아! 당장 내 손 놔라?"


"절대로 그냥 가시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울리히 님이 생각하시는 걸 모를 줄 아셨습니까?"

그녀는 생각보다 내 생각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체계가 붕괴되는 곳은 고대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이곳뿐입니다. 리보니아, 모리안, 루슬란트의 군대가 울리히 님을 뒤쫓을 겁니다. 기사단국의 의무는 고귀한 이를 이곳에 머물도록 하는 일이니, 저의 의무를 저버리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보좌관으로써 울리히 님이 의무를 저버리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완벽히 포기했다. 저 여자, 아직도 날 그렇게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니, 그러니까 집에 가려면 저 여자를 제껴버려야 한다는 거다. 당분간은 어렵겠네.


"군주님이 깨어나시면 배우자의 지위를 이용해서 저를 합법적으로 해임하실 수 있을 겁니다만, 그때쯤 되면 울리히 님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지겠죠."


더럽게 치밀한 년, 야비한 년 같으니라고. 날 잘 이해할 수밖에 없었겠지? 내 생각을 멋대로 읽어내니 말이다.


일단 그게 문제가 아니긴 하다. 당장 살아남기도 어려운 판이니, 일단 다른 놈들이 뒤졌는지 살았는지, 루슬란트는 아니어도 적어도 궤도상의 우주선까지 안전히 도달할 수단이 필요하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숲 서쪽 오벨란트 산업구역에서 노예들이 수천만이나 봉기했다는군요. 여기서 230km밖에 안 떨어져 있으니, 위험해도 조금 도시 쪽으로 걸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가 어째? 도시? 저 미친 기계들이 박살내고 있는 도시 말인가?"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외곽 지역은 큰 공격을 받지 않고, 기계 부대는 9분 전까지 병력과 주요 시설만을 포격해 파괴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외곽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수십 분 안에 궤도의 함대가 곧 포격을 개시할 거고, 그러면 적어도 베르너슈타트 시는 흉한 구덩이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적어도 루슬란트의 노예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이 위성은 전체가 성지로 지정되 있으니까요."


"비상 상황의 암묵적 예외는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에선 말이죠."


그녀는 이 말을 꺼내면서도 한심한 상황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 내 예상이 맞긴 했었다. 도시 외곽 쪽으로 다가갈수록, 총소리와 폭음이 계속 땅을 진동시켰다. 아직 군인들이 남아 있긴 한 모양이다. 물론 그들이 오래 버틸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건물을 단 한 발로 결단내던 에너지 광선을 봤으니까. 


후진적인 장비로 무장한 기사단국 지상군이 승산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저기서 죽을 것이고, 인공지능에게 멍청한 소리를 마음에서 나온다고 해 버린 내가 멍청이였다. 그 기계가 폭주하는 이유가 결론적으로는 나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 혐오스러운 기계지성이 날뛰는 지 아십니까?"


"그 멍청한 기계가 나와 군주를 거짓 기사단국을 벌할 자라고 예언했거든. 거기다 대고 개잡소리 집어치우라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기사단국의 군주가 기사단국을 벌한다니, 그 기계도 4세기 묵는 동안 회로가 녹슬은 모양입니다."


하긴, 그렇지? 그 미친 인공지능의 헛소리에는 내가 말한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모두가 숭배하는 기계 영혼의 상태가 저 모양이라니, 어떻게 체제가 유지된 걸까? 그래도 도시 외곽 장벽 서쪽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공군기지의 관제소가 보인다.


"좋아, 저기가 공군기지지? 수송선 편대가 대기하고 있길 바라자고."


"잠깐... 저기 보이십니까?" "뭐가?"


"불빛이 원래는 더 밝아야 합니다. 수송선들 엔진 소리도 전혀 안 들리니, 조금 이상하군요."


하긴, 새벽에 우리가 올 때는 거의 5마일 바깥에서도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수송선 수천 대가 착륙해 있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불길하다.


"그래도 몇 대는 있겠죠. 저공비행으로 가거나 자동차라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형편없게 절단되고 눌린 기지 앞의 전기철조망을 지나서, 활주로 옆을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몇 개의 포탄 구덩이가 활주로를 박살 내고 있었고, 이미 죽은 징집병의 시체더미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저 군인들, 타려다가 죽은 거 같은데, 수송선 멀쩡해? 내가 봐서는 잘 모르니까, 좀 봐줘."


"절대로 궤도에 나갈 수 있는 우주선은 아닌 듯 합니다. 여기 총탄 구멍들이 있군요. 저 쪽의 수송선들은 아예 전소됬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되지? 군대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저 인공지능을 왜 박살내지 않은 건가? 저건 신이라기보단 혐오스러운 기계지성이다." 


"그 말씀이 옳으십니다만, 지금은 탈것을 찾아보는 게 더욱 급선무 아닐까요? 국가가 우리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자동차는 저기 건물 차고에 가득할걸? 그것보다 그 기계놈들이 여긴 없는 게 이상한걸."


"몇 잔존 부대의 구조 요청신호에 따르면 적어도 우리 북서쪽 35km 지점에나 기계 군단의 일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전체 통신망은 복구되지 않았군요."


당연히 저 미친 기계 군단이 다가오기 전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들어오는 통신 신호도 긴박한 구조요청뿐, 군대의 통신망은 보이지도 않는다.


"좋습니다, 이제 당분간 필요할 때만 통신을 켜고 평시에는 닫아 놓겠습니다. 이 표준 통신도 고대 인공지능이 많이 관여했으니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큰 권한을 가지게 되면, 저 가증스러운 고대 인공지능 놈의 머리통을 때려부수리라.


"울리히 님의 동기 부여에 큰 도움이 된 것 같군요.저 고대 인공지능이 지금 보니 그렇게 나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나쁘지, 그리고 동기 부여는 저런 끔찍한 것 말고도 더 좋은 것으로도 할 수 있을 텐데? 



까캉!


창고 자물쇠는 보좌관이 내려치자 쉽게 열렸다. 잠시 들어가서 천천히 살펴보더니, 어느 트럭 앞에서 "이 차가 제일 멀리까지 갑니다. 어서 탑승하시죠." 하고는 나를 태웠다. 그런데 이 차는 좀 상태가 이상한데,이런 차가 그리 멀리 가려나?


"기지 바깥에서도 사용하도록 설계된 트럭입니다. 아마 이 차가 제일 튼튼하겠죠. 안내용 지도도 있군요. 아마 인트라넷 접속도 못 하는 상황에서는 이 트럭 컴퓨터에 있는 자료가 꽤 유효할 겁니다."


일단 출발했다. 그녀의 말로는 일단 베르너슈타트 북북서 방향의 포센 시는 전파가 활발하니,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진 않고 그 방면은 아직 군사 통신이 약하게 잡히긴 한다는데, 그래도 결국은 함락당하겠지.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 도시에는 기계 군대가 신경쓰지 않는 작은 착륙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먼저 이 난리가 난 건 히페르보레아 한정이다.


루슬란트나 리보니아는 정상 상태라고 하니 여기만 떠나면, 루슬란트로 가서 보좌관과 향후 계획을 논의할 수도 있다. 우주선만 찾으면 일이 풀릴 것이다.


"일단 포센 시는 여기서 250km 정도 바깥입니다. 현재 시각은 0854, 곧 모행성이 다시 뜨겠군요. 좀 눈 좀 붙이시죠. 아직 어두울 때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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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보니 다시 보랏빛의 가스 행성이 뜨고 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운전만 계속하고 있고, 어느새 오벨 숲은 빠져나온 건지 도로 옆은 황량하고 추운 평원뿐이다.


"오데르 평원입니다. 이 평원의 서쪽 끝에 포센 시가 있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오히려 좋은 소식입니다. 울리히 님과 제가 가는 포센 시에, 잔존 부대의 대부분이 모여 있고, 이제 무선 통신망도 복구되가고 있답니다. 그래도 언제 공세가 다시 들어올지 모르니 빨리 거기 수송선대와 합류해서 루슬란트로 복귀하는 게 현명하겠죠, 루슬란트는 울리히 님의 권한으로 움직이니, 그곳에 있으면 책임 문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나랑 네가 책임질 일은 거의 없잖아? 기록상으로는."


"양피지 기록 자체가 타버렸으니, 다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혈통 덕에 당장의 규탄과 처벌은 피하겠지만, 울리히 님의 위치가 불안하게 되는 일은 제가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빨리 포센 시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겠군. 그런데 뭐라고? 양피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무와 플라스틱이 부족하지만, 양은 1200억 마리가 넘으니까요." "양들이 너무 많은데?"


"기록물을 확보하는 주 수단이니까요. 기사단국 식량의 절반 이상이 저 양들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어느새 평원의 능선에, 거대한 기둥과 고딕풍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포센 시군요. 29킬로미터 남았습니다. 저기로 가면 이제 좀 살겠군요."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은, 도시에서 엄청나게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는 거다.


"뭐지? 어느새 일이 저기도 생긴 것 같은데."


그리고 한 무리의 군인들이 우리 차를 세우더니, 갑자기 내게 경례를 붙였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현재 포센 시는 시가전 상황에 돌입하여, 대섭정께서는 판무관 각하를 모시기 포센 시가 부적합하다고 판단, 저희 242기갑척탄병여단이 각하를 모시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군대를 만나긴 했다. 방금 털린 것 같은 행색의 군대라 신뢰는 안 가지만, 군대는 맞으니 믿어 볼까.


"섭정의 명령대로 수행하라. 즉시 루슬란트행 우주선을 수배할 수 있으면 좋겠군."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지휘장갑차 한 대를 비우더니, 그 차에 나와 보좌관을 거의 성물 모시듯 태웠다.


"불편하시더라도 부디 노여워 마시고...."


"루슬란트행 우주선 수배는 잘 되는가? 철저히 해야 할 걸세."


보다 못한 보좌관이 귀찮다는 듯 말을 막았다. 그리고 그 군인은 송구함을 감추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 물러났다.


그리고 몇 분 동안 그 군인 놈은 두들겨 맞았다. 나는 그래도 저 군바리에게 미안한 마음에 보좌관에게 불만을 표했다.


"아니, 기계 소녀 양? 저 신병 꼬마가 쳐맞을 빌미를 왜 제공하지? 저 꼬마는 좋은 의도로 말한 거야. 모르겠어?"


"저런 천한 놈이 울리히 님과 말하게 둘 수 없으니까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울리히 님께서 이런 행동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모욕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불충입니다."


무슨 옛 시대의 기사 같은 말이네, 아 여기 기사단국이었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빨리 가자고 해야겠는데."


"지휘관? 중대한 문제니 최대한 신속하게 모셔주시게. 판무관 각하의 부재를 빨리 해결해야 하니 말이야."


딱 봐도 준장은 될 거 같은 고위장교가 인사하며 들어오자 그녀는 갑자기 아주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예. 판무관 각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즉시 모시겠습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그 높으신 장교 양반이 쩔쩔매며 내게 저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거지꼴 여단은 출발했고,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큰 문제 없이 움직였다. 


"포센이 결국 함락됬습니다. 연락에 따르면 패잔병들의 후퇴로와 우리의 철수로가 겹친다는군요. 사실이렇게 군인들을 주렁주렁 달고 움직이라니 대섭정 각하께서 어떤 의도로 이런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긴, 우리를 도우려면 조용히 보내주는 게 제일이었을 텐데, 쓸데없이 애매한 수천 명의 병력을 붙이니 아까 둘이서 차량으로 움직일 때보다 훨씬 불편하고 느리다. 무엇보다 기계 군대의 관심을 끌 우려도 있있지 않은가? 


대섭정의 지위라면 우리에게 이런 애매한 숫자의 병력을 주는 게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잘 알 텐데, 혹시 죽어도 책임을 피하려고 애매한 병력을 넘겨준 게 아닐까? 


게다가 대섭정은 사태가 터지기 10여 분 전 급히 페룬하임 시를 떠났고, 242여단장의 말에 따르면, 궤도의 묠니야 우주항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대섭정이 이 일을 주도한 것이라고 미리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의도를 가지고 이 사태를 방관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겨우 1시간 동안의 전투로 80만에 달한다는 페룬하임 주변의 방어부대가 와해되고 통신망이 이상하게 빨리 파괴된 것도 설명되지 않을까?


"울리히 님께서 깊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여단장 혹시 자리 좀 내줄 수 있겠나?"


여단장이 황급히 경례를 붙이고 옆 지휘차량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깊은 추론을 하신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사실 저는 울리히 님의 추론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이 추론을 부정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을까?"


"첫째, 기계령의 난동에 대한 책임은 군주 부재시의 최고 임시직인 대섭정 각하께서 져야 합니다. 이번 사태는 아주 유례 없는 규모고, 도시 여러 개와 수도가 불탔으니 심각한 문제죠. 사태가 끝나면 대섭정 각하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겁니다.


둘째, 상대적으로 울리히 님은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죠. 울리히 님이 기계령을 알현하는 중에 그 사태를 내는 것은 명백히 울리히 님을 제거하겠다는 의도입니다만, 누가 수도성을 박살내고 신성한 유적을 박살내면서까지 그런 일을 할까요?


이 두 가지 근거면 대섭정의 무고함은 증명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의도로 인공지능을 폭주시킨 걸까? 역시 내 발언이 문제였구나 하는 순간 멀리서 병사들의 비명과 포성이 울려퍼졌다.


"뭐지? 또 포격인가?"


내가 관측 센서 너머로 본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높이만 200피트는 될 법한 거대한 로봇이 여단의 군인들을 말 그대로 박살 내고 있었다. 로봇의 몸체에 있는 수많은 대포와 광선이 소대 하나를 순식간에 불태우고, 구웠다. 장갑차 몇 대가 대전차포를 쏘며 저항했지만 거대로봇은 간단하게 손목에 달린 포로 장갑차 3대를 일격에 파괴했다. 여단의 잘 짜인 전투 대형이 타이탄이라고 불리는 이 로봇 한 대에 박살 나고 있었다. 준장과 


내 일행의 지휘장갑차는 6km나 떨어져 있었지만 고성능 감지 센서는 저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야! 운전병 너 이 새끼 빨리 안 밟아? 저 시발 타이탄새끼 포대가 여기까지 닿겠네? 좆빠지게 안 밟으면 뒤진다?"


어... 보좌관이 6달 전 본 후로 처음으로 이성을 잃은 채 앞 칸 운전병에게 소리쳤다. 저 엄청난 건물 같은 기계가 우리가 처음 본 고대 인공지능의 무기였다. 


생각해 보니 1시간 만에 80만 명이 와해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주력 육군부대는 전부 외곽에 있고 수도성에는 반란 우려로 보병대만 배치하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높으신 분의 발광에 겁에 질린 운전병은 엄청난 속도로 악셀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붕괴를막으려던 여단장은 그의 두번째 지휘장갑차와 함께 미사일 한 방에 호위 중대와 같이 불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못 미더운 군바리 놈들을 붙여주다니, 기사단국이 정신머리가 정말 썩었다. 


최근 들어서, 타인의 죽음에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는데. 다시금 사람 목숨이 파리만 못한 곳이라고 실감했다.


어쨌든 제한속도도 무시하고 들판을 끝없이 달려서, 다음 도시 로테니아 쪽으로 달렸다. 


"로테니아는 히페르보레아에서 가장 잘 요새화된 도시이고, 수십 개의 공군기지가 위치합니다. 여기는 결코 함락되지 않을 도시니, 이제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8일 후에는 루슬란트에 도착하겠네요. 그리고 방금 그 언행은...”


“별 거 아냐, 괜찮으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하자.”


이제서야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