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이후 6개월, 루슬란트 국가판무관부


기사단국의 수도 히페르보레아, 행성 전역에 수많은 도시 유적들이 가득 찬 곳. 기사단국은 이곳을 성지로 생각한다고 한다. 이미 3세기 전에 멸망한 문명의 추한 잔재들이, 죽은 것만을 붙잡고 흔들어대니 진보가 있겠는가. 그런 감상을 가볍게 말하니, 기계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발 그런 말씀은 공개적으로 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울리히 님은 무사해도. 제가 책임을 지고 교육하는 분이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하긴, 거의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 주는 저 여자가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게 예의겠지. 이 무시무시한 체제서는 더욱 그렇고.


"그리고, 5일 후에 히페르보레아의 성지 유적을 방문하셔서, 고대의 기계 영혼을 만나야 합니다.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니, 제 교육을 잘 따라오셔야 됩니다." 


그래. 너가 시키는 데로 하는 게 편하겠지. 적어도 귀가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시다시피 기사단국이 루스인, 리보니아인 같은 이들을 증오하고 노예로 삼는 이유는, 공식적인 성명에 따르면 히페르보레아 제국과 헬베티아 재단 사이의 대전쟁에서 히페르보레아 제국이 패배한 이유가 그들에게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어, 내가 아는 역사랑은 좀 느낌이 다른데? 어쨌든 들어나 볼까.


"울리히 님께서 아시는 역사는 식민정부에서 통하는 역사입니다. 적어도 기사단국의 사람으로써, 기사단국의 해석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니들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어차피 내가 말한다고 달라질 문제도 아니니까. 그냥 들어보련다.


"어쨌든 히페르보레아 문명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무기들을 적에게 들이밀었습니다. 분명히 재단은 수많은 동맹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루스인들과 리보니아인들은 히페르보레아 제국을 배신하고, 재단의 편에 섰습니다.


재단은 히페르보레아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들의 문명을 구성하던 수천억의 인구를 거의 몰살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후, 표면을 뒤덮은 세계도시의 폐허 속에서 수백만의 생존자가 히페르보레아 기사단을 선포했고, 다시 궤도로 날아올라서, 비열한 루스인과 리보니아인에게 마땅한 징벌을 가했습니다. 


다시 한 번 순수한 히페르보레아인이 우주로 날아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1세기가 지난 시점에, 가장 순수한 새로운 군주 옆에 서실 선택받은 분이 태어났습니다. 영광스러운 울리히 님, 당신은 그 영광의 주인공이십니다."


어휴, 가만히 들을수록 참담하다. 티레네 공산당도 이 정도로 찬양받는 사람마저 손발이 오그라들게 찬양하지는 않는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울리히 님이 처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차선책 아닐까요."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그렇지만 나의 양심은 아직도 비명을 지른다. 수백 년 전의 증오를 이유로, 수십억의 생명을 비참한 상황 속으로 내몰고, 불과 수십 년 전에는 무의미하고 광신적인 전쟁을 일으켜서 내 나라의 무고한 생명을 살상한 체제를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이들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과연 나를 지키는 길일까? 올바른 길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거부감을 가진다고 모든 것이 울리히 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당신께서 뜻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판 의식과 인본주의는 완전히 거세된 곳, 적어도 나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사단국이 인류가 만든 가장 비인간적인 체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체제의 톱니바퀴가 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고? 스스로 생각하고, 옳은 것을 택하려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울리히 님의 자유의지를 따지기 전에, 이곳은 울리히 님의 변하지 않는 운명인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그만. 제발 그만해! 남의 생각을 멋대로 재단하지 마!"

"난 정말로, 거부감으로 죽을 것 같아! 이미 결단했다."


여긴 내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 나간다. 최근 며칠 동안 너무 안일했다. 군주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 속에 담긴 체제의 비인간성을 깨닫지 못했다.


"이 이야기, 누구에게도 하지 마라. 네가 나를 정말로 군주 옆에 설 영광된 이로 생각한다면."


학살범의 체제에 동조하지 않겠다. 저항할 수는 없어도, 귀가라는 목적 때문에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면, 나도 공범이 되고 말 거니까. 


최악의 상황에서도,나는 나의 양심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 이 체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고 해도, 마음까지 동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울리히 님의 신념이군요... 고귀하신 혈통의 강력한 의지를 지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스스로 힘든 길을 걸어가시겠다면..." 


그래. 그래도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맹세이다. 




"히페르보레아 제국의 후손이고, 기사단국 군주의 배우자인 나 율리시스 에버트는, 나의 마지막 양심을 수호하며,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유일신의 명령과 나의 의지를 수호할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 가문이 보통 중대한 맹세를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맹세가 나의 가장 중대한 갈림길에서 광명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소망하노라. 150년 9월 21일, 율리시스 W.에버트." 


"그건 에베르트 가문만의 맹세 방식입니다... 언젠가 알려드리려 했는데, 알고 계셨군요."


그래.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나는 단순한 소시민이 아니다. 나의 도덕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