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슬란트 국가판무관부, 모스카우 시 국가판무관 사무소




여기 끌려온지도 거의 4개월이 다 되간다. 그들은 라트비아 위성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나를 끌고 이 얼음덩어리 세상에 던져 놓았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내가 선택받은 혈통이고, 곧 태어날 군주의 배우자가 될 몸이라며 떠받드는 것 같던데, 그렇다기에는 그들의 행동이 나의 의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소시민으로써 살아가는 게 어울리는 나를 왜 여기로 끌고 와서, 그들 멋대로 완벽한 인간으로 개조해 놓으려는 걸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4달 전, 150년 3월 12일이었다. 기사단국 에버트 가문의 후손 중 한 명으로써, 잠시 톰스크 우주항의 관제사 일을 멈추고 가문의 영토인 모리안 위성으로 향했다. 즐거운 파티가 끝나고,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신뢰하던 친척들은 나를 보내주지 않았다. 




마실 것에 담겨 있던 무언가는 나를 무려 78시간이나 잠들어 있게 만들었고, 그리고 나를 태운 우주선은 식민정부령이 아니라, 기사단국의 루슬란트로 향했다.




나는 그곳에서 친척 아저씨의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




"군주의 배우자시여, 저희가 당신을 기다렸나이다. 우월 인종을 영원히 이끄실 군주의 영광스러운 배우자로써 모시고자 하옵니다."




나는 당연히 80시간 전까지 나에게 양고기를 권하며 웃고 대화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언제 가냐고 물어보자 그는 말했다.




"군주의 배우자의 집은 곧 기사단국입니다. 당신께서 군주에게 하사받으신 루슬란트 땅을 보십시오."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며 집에 보내 달라고 다시 말했지만, 마치 영광스러운 주인을 모신다는 표정의 그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집에 돌아가야 했다. 아빠는 내가 3월 16일에는 집에 들어올 것이라고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위험한 체제의 중심핵에 설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며칠 지나면 이 쇼도 끝나고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저씨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것인 줄 알았다.






"루슬란트 국가판무관부의 주요 산업은 광산업으로...." 




아저씨가 저 이상한 기계 소녀를 가정교사로 붙여주기 전에는 그랬다. 기계 소녀는 관심도 없는 루슬란트의 노예 수나, 노예 경제의 원리, 인종주의 수업 같은 것을 아주 열성적으로 나에게 가르쳤다. 




"이런 건 너희 나라 애들한테나 가르치지 그래? 깡통 년아. 나는 너희 장난질에 놀아날 생각이 없다. 제발 너희들이 나를 숭배한다면, 제발 집에 갈 수 있게 해줘. 부탁이야."




저절로 부드러운 어조가 나왔다. 그리고 그 깡통 계집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울리히 님이 계시고, 이곳에 오신 것은 필연입니다. 고귀하고 우월한 혈통을 가지신 분이시여, 저희가 울리히 님을 운명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 그냥 시키는 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그녀의 아래에서 거의 2달 내내 많은 것을 배웠다.




노이에란트 기사단국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정 떨어지는 동네였다. 인구의 60퍼센트는 노예고, 28퍼센트는 일반 노동자와 기술 계급, 나머지 10퍼센트는 군인들, 그리고 2퍼센트만이 지금 나와 같은 특권 계급이었다.




"그리고 그 특권 계급의 정점에 다다른 인물이 군주, 다른 말로 최고영도인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입니다. 기사단국의 최고 지도자이고,  그 아래에서는 고개를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되지만, 울리히 님은 당연히 예외입니다."




"왜? 루슬란트 판무관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리고 내 이름은 율리시스 에버트다. 너희 나라 사람도 아닌데 왜 너희식으로 이름을 부르지?"




"먼저 그 이유는 울리히 님께서는 군주의 남편이니까요. 남편이 아내의 옆에서 고개 숙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존댓말로 예의바르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그 군주인가 하는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 듯 하다. 그 여자도 날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예의바르게 말해야 생이 늘어날 것 같다. 집에 가기는 고사하고, 이 위험한 곳에서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인 걸까? 그래도 나는 집에 갈 것이다. 나는 우주관제사지, 군주의 배우자 따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사단국 성립 이전에, 성지 히페르보레아의 선대 문명은 약 330년 전 붕괴되었습니다. 신화적으로는 모행성 스베토비드의 분노를 사고, 페룬 신의 노여움을 사서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헬베티아 관리 재단과의 전쟁으로 멸망했습니다. 그 행성의 유적은 아직도 대부분 작동합니다만,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법은 이미 소실되었고, 다만 에베르트 가문의 혈통만이 그 유적을 가동시키고 고대의 인공 정신을 깨웁니다. 울리히 님도 그곳에 방문하시게 될 겁니다."




"무슨 장대한 헛소리를 하는거야? 헬베티아의 초과학집단이 외부에 개입한다고? 장대한 헛소리 좀 하지 말아줄래?"




저 헛소리에 참으로 어이를 상실할 것 같았다. 그래도 수도의 귀족 놈들과 사교적인 헛소리를 나눌 수 있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래서, 군주는 어디 있는데? 그 여자랑 자야 되는 거면 한 번 정도는 만나 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그분과 그런 류의 관계를 가지는 건 조금 지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만... 표정을 보니 기대하시는 것 같군요?"




강제 결혼이 맘에 들지는 않고 (사실 끔찍하지만) 그래도 한 번 쯤은 만나보는 게 예의 아닐까. 기사단국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와의 전쟁에서 한 짓을 생각해보니 별로 자비롭거나 아름다운 성격은 아닐 것 같았다.




 그 결론을 도출할 당시에는 코로 전 대통령처럼 올빼미 산에서 떨어지는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도 인간이니 말은 통할 것이다.




"이 위성의 가장 튼튼한 요새에 누워 계십니다. 울리히 님은 그분의 유일한 사랑이 되실 분. 그분을 알현하는 것도 언제든 가능합니다. 그러실 생각이 있으시면 저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녀를 만나러 갔다. 모스카우 시에서 고속차량으로 8시간이나 걸렸으니 수천 마일은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행성 지름이 4천 8백 마일이라는데, 그 정도는 간 것 같다.




8시간 동안의 쾌적한 수면 속에서의 주행이 끝나고, 차를 운전하고 있던 가정교사 기계소녀가 나를 다시 깨웠다.




얼음 산 중턱에 커다란 요새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시 보니 높이가 6마일쯤 되는 것 같은 엄청나게 높은 산이었다. 그 요새 안으로 2마일쯤 걸어 들어가서, 마침내 마지막 문에 도달하자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제 계급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그 문에 손을 대 보시지요. 아니, 조금만 더 왼쪽입니다. 됐군요. 잘하셨습니다. 




그분은 방 한가운데 기계 침대 안에 누워 계십니다. 11년간의 형성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 중이니, 완전한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방 안은 요새에서도 가장 서늘했고, 경비 로봇 같은 것이 돌아다녔다. 상당히 음침한 분위기 속에, 내가 찾던 관 같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기계 소녀가 말하기로는, 이 요새는 우리가 아니라 선대 문명이 만든 것이고, 저 로봇도 선대 문명의 주인이셨던 에버트 가문의 내 조상들이 만드신 것이라고 한다. 식민정부가 설립되기도 전에, 내 조상들은 이런 일을 하고 계셨구나.




새삼 에버트 가문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아빠가 하시던 가문 이야기를 좀 더 열심히 들을 걸 그랬나? 집에 가면 다시 물어봐야겠다.




관 가운데에는 유리 창이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나는 나를 끌고 온 기사단국에 대한 불만을 잠시 잊어버리고 그것을 멍하게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정말 1초만 바라보아도 반할 것만 같은,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앳된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톰스크 우주소녀도 저 여자랑 비교하면 오크 수준에 불과할 거다.




고귀함을 나타내는 듯한 은빛 머리카락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목구비.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저 소녀의 절반이라도 따라가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정말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그때만큼은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 (사실 가정교사가 말하기로는 이미 가족들에게는 소식을 전달했다지만) 도 잊고 이 소녀를 조용히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런 소녀의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미남 범주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극히 일반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인데, 이런 고귀한 아이의 순결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까? 그러는 동안 깡통소녀의 메시지가 내 몰입을 깨뜨렸다.




[그녀를 알현한 이들은 모두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의 지위에 만족하시는지요?]




이곳의 사람들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 듯 하다. 물론 저곳에 누워 있는 여자아이가 내 목을 언제든 칠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 톰스크방송의 "기사단국은 지금" 프로의 애청자로써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잘 안다.




하느님, 제가 안전하게 저 여자랑 자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런 여자랑 잘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어쨌든 군주와의 첫 대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제 흡족하신지요. 그러니 앞으로는 군주의 배우자로써의 의무를 배우는 데 좀 더 열성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상상하시는 것을 정정해드리자면, 군주님 위에 올라가는 게 아니고, 아마 그녀 아래에 눕게 될 겁니다."




"넌 추잡한 망상도 읽어낼 수 있구나. 누구 기술이야?"




"선대 문명의 기술입니다. 그들의 기술은 거의 파괴되고  잊혀졌지만, 주문과 기도서의 형태로 그 기술의 파편이 남은 것입니다. 저 같은 것을 톰스크 시에서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 같은 인간이 뭔지는 헬베티아 재단에 문의해도 안 가르쳐줄 것 같아서 포기."




약간 지저분한 망상은 좀 숨겨 주지. 그래도 단둘이 있는 곳에서만 말하니 다행이야.






집(이라고 해야 할 곳)에 오자마자 친척 아저씨는 나를 유독 반겼다.




"군주님을 알현하고 오셨군요? 그분을 알현한 이들은 충성을 자연스럽게 다짐하게 된다고 합니다. 울리히 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으실 그분을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내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급이 높은 것 같은데, 그래도 대학교 졸업 후 5년 만에 이런 여자를 보니 좋긴 하다. 




1주 후에 안 결과,귀가 계획은 아주 꼬였다. 정말로 부모님이 알고 계신 것이었다. 3일 후에는 엄마랑 개인 전화로 영상통화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10초 시간지연에도 불구하고 알아낸 것은 부모님도 이걸 아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면 내 일은 이 위험한 국가에서 살아남고, 언젠가 귀가하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사단국을 탈출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은 뉴 라트비아의 궤도 우주항의 직원 숙소이지, 결코 기사단국의 수도는 아니다.




납치 이후 4개월이 되던 어느 날, 나 율리시스 에버트는 새로운 주관과 목표를 결심했다. 항공관제과 진학 이후 최대 결단이다. 


나의 결심을 증명하는 듯, 창 밖 모스카우 시에는 새하얗고 아름다운 눈발이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