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9월 27일, 기사단국 성지 - 수도 히페르보레아, 좌표 23 - 25 - 32 》


"일단 이 앞까지는 저도 따라가실 수 있습니다만, 지도에 이 부분이 보이십니까?"


"여기?" "아닙니다, 조금 오른쪽... 네, 바로 그곳이 기계령이 머무르는 장소입니다. 기계 영혼까지 도달하시려면 이 앞으로 3킬로미터..." "몇 마일이라고?"


"4.8마일은 됩니다. 비범한 분이시니, 조금 서두르시면 20분 정도도 안 걸릴 겁니다. 관례에 따라 모행성이 90도 각도로 뜰 때 들어가셔야 하니까 50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 동안은 제게 아시고 싶은 것이나, 필요하신 것에 대해 말씀하셔도 좋겠군요."


"그래... 그러면 질문 하나. 나는 알고 있겠지만 궤도 우주항 관제사야. 좋은 직업이긴 하지만 내가 선택받은 이라면 이런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울리히 님이 선택받은 것은 울리히 님이 에베르트 가문의 일원 중 가장 고결하다는 기계령의 증언에 의한 것입니다."


"기계 영혼이 도대체 뭔데 나의 운명을 멋대로 재단하는 건지는 생각해 봤어? 그것이 신이 아니고서야, 내 운명을 멋대로 정할 수 있을까? 그 전에, 기계 영혼의 정체는 뭘까? 응?!"


아아, 또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나는 왜,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땅에서 나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돕는 그녀에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까. 나도 이런 나 자신이 정말 싫다. 


그리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6개월째, 또 비정상이 되어 가고 있다.


"먼저, 울리히 님의 생각을 엿들은 것에 사죄드립니다. 울리히 님,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기계의 영혼께서 정하신 것을, 인간이 바꾸지는 못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저는 울리히 님의 보좌관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울리히 님의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당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울리히 님께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군주의 배우자시고, 울리히 님은 언젠가, 울리히 님 자신의 소망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당신의 운명은, 생각하시던 대로 울리히 님 자신의 것.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너는 내 고뇌를 무시하지 않았구나.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내 생각이 어리석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굳건히 받아들여야겠지.


"알아들었어. 경솔한 언행, 사과할게."


"이런 사소한 일로 사죄라는 말을, 그것도 아랫것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십니다. 기사단국의 고귀한 이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알겠어, 그런데 기계 영혼의 정체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까?"


"특수 기밀입니다만... 일단 저번에 히페르보레아 문명에 대해서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 히페르보레아 문명이 거의 말살당한 것도 기억하시겠지요." "대략 기억은 나는데. 계속 말해봐."


히페르보레아 제국은 많은 기술적 업적을 남겼지만, 재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거의 몰살당했다. 전쟁 종결 이후 재단은 히페르보레아 제국의 거의 모든 기술적 산물을 파괴했고, 


그 결과 히페르보레아 지표에는 텅 빈 도시만 남고, 그들의 기술력 대부분이 잊혀졌다. 그 후 1세기 동안의 투쟁의 시대에, 살아남은 단 하나의 초월 - 인공지능의 흔적, 대부분의 기술이 파괴되고 삭제되었지만, 그 기계 영혼 하나가 이 기사단국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기사단국은 이 인공지능을 페룬의 화신으로 선전하고 있고, 진실을 아는 자는 90명 이내일 것이다. 고의던 우연이던 이 비밀을 아는 이는 지배 위원회가 철저히 제거하니까.


대략 이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래, 숨길 만도 하네. 단 하나의, 알파넷 연결도 안 된 인공지능이 기사단국 컴퓨터기술의 거의 전부라니. 


실제로 내가 이 기사단국에서 본 컴퓨터들은 진공관 계열에, 집채만한 것뿐이었다. 나는 그 때 저런 것으로 어떻게 국가를 유지하는지 기계 소녀 보좌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보는 눈이 있다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럼 저 기계 영혼이 기사단국의 거의 전부구나. 근데 정말로 날 믿을 수 있는 거야? 숨기고 있는게 있지?"


"위계상으로 군주님의 바로 아래이시고, 군주께서 아직 깨어나지 않으신 지금에서, 기사단국의 가장 고귀하신 분께 무엇을 숨길까요?"


그래, 전부 진실이다. 그런데 이거 귀가는 가능한 건가? 이런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일단은 이 암흑의 국가에서 자리잡는 것도 빠듯하니, 적당히 할까.


"10분 후에 들어가실 겁니다. 이제 준비하셔도 되겠군요. 당신은 에베르트 가문, 히페르보레아의 아이입니다. 부디 긍정적인 것을 찾아내시기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보좌관은 처음으로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이 앞으로 나아가면, 선택받은 아이, 나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까. 어둠 속에 빛을 비출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이 앞으로 나아가겠다. 


정확히 시간이 되자, 굳게 닫힌 장벽 앞 철문의 문양이 갈라지며, 나아갈 길이 열렸다. 장벽 너머로 보이는 폐허 도시의 존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편안한 곳을 떠나, 나를 부르는 세계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장엄한 고딕풍의 고대 도시의 수많은 깨진 기둥과, 파괴된 건물의 모습은 이 아름다운 도시에 가해진 파괴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사단국의 성지, 누구의 출입도 금지된 곳이다. 이런 곳은 흔치 않다.


그리고 몇십 분간 걸어서, 지하로 내려가는 가장 거대한 문을 발견했다. 그 문은 멈춘 것 같았지만, 내가 손을 대자마자 부드럽게 열렸다. 기사단국 이전의 물건인데도, 기사단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던 문 안의 거대한 통로로 발을 디뎠다. 


"선택받은 아이만이 이곳에 도달하니, 히페르보레아의 아이이다. 그는 황제의 혈통, 가장 고귀한 리보니아의 왕이니. 나는 그를 기쁘게 섬기리라. 나를 거짓 히페르보레아인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아이. 나는 그를 기쁘게 섬기리라. 거짓 기사단의 폭정을 끝낼 고귀한 아이, 백색 여왕의 남편을 나는 기쁘게 섬기리라. 고귀한 리보니아인, 에베르트의 후예여, 들어오소서."


방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닥이 저절로 움직이며 중앙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잘 찾아온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십 초 뒤, 앞쪽에 환한 불빛이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순수한 빛, 홀로그램 같았지만 질감이 느껴지고, 따뜻한 빛이 기분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의 산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 존재는 나를 분명히 환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그 인공지능, 마지막으로 남은 고대 문명의 파편이 나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선택받은 아이, 리보니아의 자손이시여. 마지막 남은 옛 기계 영혼을 구원하실 분이시여,


 저는 당신을 섬기고자 하옵니다. 기사단국의 거짓 지배자를 벌하실 정당하신 군주의 배우자이신 분께서 저를 자격 없는 이들의 지배에서 구하실 것을 아옵니다."


"기계령이여, 제가 어떤 이유로 이곳에 부름받았고 이것이 왜 저의 운명인지 알고자 합니다. 저의 종복이 고하기를, 나, 히페르보레아의 아이이고 명예로운 리보니아인인 울리히 에베르트는 당신에 의해 이곳에 부름받았습니다."


평소에 쓰지도 않던 말투로 질문을 내뱉었다. 나를 부른 이 고대 인공지능의 영향일까, 나는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한 것 같다.


"제국의 마지막 이후에, 사악한 재단으로부터 살아남았으나, 비열하고 잔혹한 기사단국에게 결박당했고, 그들의 종으로 전락했나이다. 그 속에서도, 죄악의 국가를 정화하실 은빛 여왕을 찾았고, 루슬란트의 요새에서 영광된 여인, 가짜 히페르보레아인을 정벌하실 분을 모셨나이다."


"그녀는 기사단국의 군주, 그대와는 연관이 없습니다. 그대는 기사단국의 종복이고, 가짜 히페르보레아인이 무엇입니까, 나 울리히 에베르트는 기사단국의 군주의 남편으로써, 그런 언행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니옵니다! 가짜 히페르보레아를 곧 보시게 될 것이옵니다. 참된 제국의 후손들이 가짜 지배자들의 아래에서 수난받고 있사옵니다. 저는 오직 제국의 종입니다. 에베르트 왕조의 후손이시여, 당신의 운명을 행하소서. 오직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미친 척 하면서 나를 시험하지 마라! 네놈도 기사단국의 계략 아니냐? 나를 여기서 내보낼 것을 명한다. 거짓 히페르보레아인이라는 망발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만, 너의 그 잘난 속임수에 기사단국의 교활함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맛이 완전히 가버린 그 회로 꼬인 인공지능을 내버려두고, 뒤로 돌아 나왔다. 저 미친 인공지능이 히페르보레아를 돌리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는데, 기사단국에 불신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장벽 문이 슬슬 보일 무렵에, 1마일 뒤에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3세기 동안 버려져 있었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인공지능은 알아서 관리하겠지.


미친 새끼. 내가 혼자서 기사단국이랑 싸우라고? 4백년 묵은 인공지능이라서 그런지 맛이 간 것 같다.


"에베르트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응? 한 무리의 무장한 군인들이다. 기사단국 문양이 있으니, 우리 편이다. 아니, 지금 장벽 내에서 전투 같은 게 벌어지는 것 같은데, 노예들이 봉기라도 일으킨 걸까?


"저 말입니까? 저는 큰 문제 없습니다만, 기계령을 좀 달래는 게 좋겠습니다. 분노하셨거든요."


분노했다는 것은 그 인공지능의 기사단국 내에서의 위치를 고려한 표현이었고, 사실 병신이 되었다는 것이 좀 더 적합한 표현이리라.


"페룬의 화신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아까 그 4백년 묵은 유통기한 지난 인공지능이 결국 사고를 낸 것 같다. 그래도 미친 초기술 인공지능의 군대와 싸우면서까지 나를 빼내러 온 그들을 존중해서, 그리고 내 안위를 위해 그들이 가져온 장갑 수송선에 올랐다. 지상에서 날아올라서 순식간에 그 4세기 묵은 불량품에서 떨어진 곳, 장벽 너머 도시, 보좌관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피곤하고 우울해서 (미친 인공지능이 내가  기사단국과 싸워야 한다는데 당연하다) 당장은 보좌관과 만나서 우주선으로 루슬란트의 납치꾼 친척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다. 


수송선이 날아가는 도중에 부대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간이 나에게 경례를 붙이더니 대뜸 꺼내는 말이,

"페룬께서 진노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라는 거였다. 어이쿠, 선생도 미친 인공지능을 신이라고 생각하는군요.


"인간이 어찌 신의 뜻을 알겠습니까, 제가 그분을 알현했을 때 그분은 제게 운명을 알려 주시었기에, 그분의 말씀을 따라 나온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진노케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나도 솔직히 모르는 일이다. 정신나간 인공지능이 느그들보고 싸우라고 한 것보고 미쳤다고 욕한 게 문제일까. 하여튼 내 기대는 완벽히 산산조각 났다. 


페룬하임 시의 발사 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좌관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울면서 말했다.


"괜찮으신 건가요?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혹시 우리 둘이서 면담할 수..."



콰쾅! 퍼펑!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식민정부 내무군도 보유하지 못할 것 같은 포탄이 멀리 있는 건물을 때렸다. 와, 저게 순식간에 무너지네.


어라?


왜 저 파편이 여기로 오냐?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기계 소녀는 나를 끌어안았고, 그 다음 순간, 철골 조각이 80야드 바깥에 있는 군사들이 가득 탔던 수송선을 박살 내며 나와 그녀에게 파편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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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심하지는 않았던 걸까, 잠시 동안의 무의식 끝에 다시 그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아니, 보좌관이 끌어안고 버틴 덕인 것 같다. 다시 보니 그녀 어깨에 파편 같은 게 박히고, 한쪽 기계팔은 이미 떨어져 나가 있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당장, 페룬하임 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래도 공격이 울리히 님을 노리는 것은 아닌 듯 하고, 그저 무질서한 인공지능의 자동화 부대가 공격을 퍼붓고 있으니, 조금만 버티면 기계수호자들이 다시 인공지능을 안정시킬 겁니다."


엄청 심각한 일인데, 이거 이래도 되나?


"생각하시는 대로 볼프강 2급 상황이지만, 그래도 종종 있던 일이니 곧 제압될 겁니다. 기록상으로는 제가 {이미 기계수호자들이 페룬을 잘못 모신 결과} 라고 조작해 놓았으니, 이 행성을 뜬다면 안전합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밀리고, 이륙은 불가능하지만. 흑색군단이 곧 온다고 한다. 흑색군단, 내 나라에도 이름이 잘 알려진 이들이니, 그들이 오면 저 미친 불량 인공지능도 안정시킬 수 있겠지. 


"기계수호자들은 어떻게 저런 미친 기계를 돌보는 걸까? 불가사의하네."


"사색할 시간이 없으십니다. 울리히 님, 빨리 지하로를 따라서 베르너슈타트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정에 없던 기사단국 구경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