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밤 카페에 올렸던 습작 (을 한번 이어서 써 볼까 고민중인 1인)


#1


검은색 진압복을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1월의 차가운 공기에 흰색 입김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한 시간 전, 긴급 지원 요청을 받고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폐공장으로 달려간 경찰 병력의 일원이었다. 충격 흡수 재질이 충전된 조끼의 등에 찍힌 흰색 글씨는 그가 경찰특공대 소속임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주소록에서 상관의 번호를 찾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표본이라... 음...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일단 검거... 아니, 아니죠. 표본 확보에는 성공했습니다만... 예, 과학수사 버스도 여기 있습니다."


과학수사 버스는 증거물 수집, 분석, 감정을 한꺼번에 할 수 있게 해주는 고가의 장비이다.


"한참 전부터 효용성이 없다, 체험학습 때나 쓴다 하고 언론에서 한참 씹어댔는데, 오랜만에 쓸 곳을 찾았네요."


전화기의 반대쪽에서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농담할 시간이 아닐세.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진압복을 입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출구를 모두 봉쇄할 수는 있었습니다. 부상자가 몇명 나오긴 했습니다만 심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출혈이 약간 있는 대원이 한 명 있는데, 지시받은 대로 들것에 결박해 두었습니다. 현재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중입니다."


"일단은 알겠어. 다른 일이 생기면 보고하도록. 주변에 민가가 없는건 확실하지?"


"그건..."


과학수사 버스의 증거분석실 안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답이 없기는 저도 마찬가지에요! 애초에 저는 생물학 관련된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의대생이란 말입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요... 뭐, 밀접한 관련이 있긴 하지만 저의 지식을 이런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젠장, 도움이 안 되는군. 나가서 다른 친구들이나 좀 도와줘."


특공대원들의 복장과 같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버스에서 초록색 체육복 위에 흰 실험가운을 차려입은 소년이 뛰어내렸다. 역대 최연소 박사, 역대 최연소 연구원 등의 화려한 칭호를 보유한 이 소년의 이름은 이재현. 상부의 긴급 호출을 받고, 영문도 모르는 채로 집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골까지 끌려온 직후였다. 귀중한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팀장을 제외한 현장에 파견된 모든 관련자들은 기본적인 사전 브리핑만을 거쳤다. 이재현을 포함한 휘하의 인원들은 자세한 사실을 현장에 도착한 이유에나 알 수 있었다. 이재현은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있는 한 특공대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특공대원은 화들짝 놀랐지만, 다가온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자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휴대폰이 먹통이야. 아까전에 그놈이 후려쳤을 때 망가졌나 봐."


"출혈이 없었던 게 확실하죠? 다른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혹시 피가 나는 상처를 입으셨다면..."


이재현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걱정 마, 피는 안 나니까. 보호복이 조금 망가지긴 했지만 살까지 닿지는 않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고, 계속해서 허벅지를 주무르는 데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특공대원을 이재현은 유심히 관찰했다. 작전 브리핑 때, 팀장은 절대 출혈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세 차례나 강조했다. 물론, 이재현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원은 자세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팀장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잡담은 그만. 조금 전에 말했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싶군.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좀 말해 봐."


어느새 다가온 팀장이 이재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무도특채 경관으로, 키는 190cm에 달했으며 몸무게는 격투기로 따지자면 헤비급이었다. 단검을 든 폭력배와 1대 1 결투를 펼쳐 제압했다던가, 10대 1의 맨손 싸움을 승리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도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이재현은 당황하면서도 휴대폰의 메모장을 열어 준비해온 자료를 읽었다.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습니다. 마약에 의해 폭력성이 유발된 것이라면 모발 검사나 소변 검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둘 다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재현은 실험복에 식은땀을 닦았다.


"죄송합니다만... 머리카락은 없습니다. 다른 체모도 싹 밀어버린 것처럼 하나도 남아 있지가 않아요. 혹시 내성모발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확인해봤지만 모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왁싱이라도 받은건지... 채혈 검사를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주사기가 듣지 않습니다."


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재현을 바라보았다.


"주사기가 듣지 않는다고?"


"바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피부이기나 한건지 의심스러웠을 정도입니다. 근육에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힘을 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입니다. 같은 이유로 마취도 불가능합니다. 전신 마취를 할 때처럼 가스를 사용한다면 잠재울 수 있을 듯 합니다만, 여기는 그런걸 할수 있는 설비가 없습니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밧줄을 사용해서 묶어 두었습니다."


"신종 마약인 건가?"


가장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민통선 근처 철원의 한 농촌에서 벌어졌다. 산악회의 중년 회원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모양새로 오래전에 버려진 창고 건물 안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처음 현장을 발견한 사람이 다른 이유로 취재를 나온 기자였던 데다가, 몰려든 주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탓에 경찰이 현장 통제를 실패하면서 사건 현장의 사진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황당한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고, 그중 '이 사건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라는 주장이 초기에 큰 호응을 얻었다.


군대에 관한 간단한 지식만 있어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했다. 심지어 여러 차례 군 관계자들에 의해 반박되었고,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담화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희생자들을 부검한 결과, 총상에 의한 사망보다는 야생 동물에게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DMZ에 호랑이가 서식한다' 는 또다른 음모론이 생겨나자, 일명 '북한군 양민학살설' 은 급속히 인기를 잃었다. 하지만 이 어이없는 주장은 일부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한 극단주의 단체는 '피의 복수'를 부르짖다가, 주요 인사들이 체포당하고 단체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사건 몇 주일 뒤 사제 폭발물을 장착한 초대형 풍선을 민통선 넘어 날려보내는 대형 사고를 터트렸다. 대북전단을 살포할 때 사용하는 풍선에 가스통으로 만든 조잡한 장치를 매단 것이었다. 천운으로 사상자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후 이재현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인재' 라는 본인의 위치를 적극 활용하여 보도되지 않은 여러 차례의 비슷한 사건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론 통제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이재현이었지만, 철원 사건의 후유증을 겪은 이후에는 정부의 조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원도, 충청도, 전남, 경북, 심지어 제주도까지, 이유 없는 폭력 사건이 패턴 없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 내에서는 국내에 폭력성을 유발하는 신종 마약이 유통되었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는 듯했지만, '피의자들은 정신병원에 긴급 구금된 이후 모든 치료를 격렬히 거부한 끝에 36시간만에 사망하였다', 또는 '사건 현장에서는 마약성 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 는 보고를 읽을 때마다, 그는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재현은 메모장의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일부 마약은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하긴 하니까요. 마이애미 좀비 사건 (실존하는 사건이다.) 기억나시죠? 생물학 전문연구요원이 아니라 저를 부른 걸 봤을 때...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도 무슨 신종 마약이 유통된 것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문제는..."


"...마약으로는 절대 저런 꼴이 나지 않는다는 거지. 마이애미 좀비 사건은 나도 알아. 그냥 약에 취한 작자가 사람을 물어뜯었다 뿐이지, 뭐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발휘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어. 아니, 애초에 아까전에도 봤지만... 마약은 신체의 변형을 가져오지는 않지.. 눈이 충혈된다던지, 땀이 심하게 난다던지, 피부에 반점 같은 것이 생긴다던지,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마약이 아니라면..."


이재현은 팀장의 말을 끊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겨둘 순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쪽도 알고 있잖아. 정확한 원인도 모르는데...:


이재현은 듣지 않았다. 그는 휴대 전화의 주소록에 저장된 수많은 전화번호를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다.


'도재화'


그는 중학교 이후로 처음 전화해보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옆에서는 아까 전 망가진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대원이 눈에 띄게 부풀어오른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