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딩때 쓰다가 소재고갈되어서 때려치운 습작 (필력 개판)
#1
표준력 1523년
"이봐, 일어나. 교대 시간이야."
누워 있던 베르너은 마지못해 3층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떨어져 내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을 것이다. 균형을 잡으려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누군가를 거의 걷어찰 뻔 하고, 요동치는 선실 때문에 비틀거리며 사다리까지 걸어간 베르너는 잠긴 목소리로 수직 통로를 향해 외쳤다.
"교대하러 갑니다."
"참 빨리도 오는군."
에버스만이 강철 다리를 철컥대며 사다리를 내려왔다.
"족히 세 시간은 저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말이지."
에버스만이 선실 안으로 사라지자, 베르너는 사다리를 타고 수직 통로를 지나 총탑 안으로 들어갔다. 50구경 기관총 두 정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안전장치가 발사 위치에 있는지 확인한 다음 총탑을 좌우로 회전시켜 보았다.
"우현, 2시 방향. 대각선 아래 방향을 주시해. 구름 사이에 무언가 있다."
선장이 전성관에 대고 외쳤다. 베르너는 초속 100미터가 넘어가는 대회랑의 바람을 받아 가늘게 떨리는 강화 유리 관측창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 선장이 말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했다. 바람을 타기 위해 펼쳐 놓은 커다란 연 아래로 검은 형상이 나타났다.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큽니다! 이반 족일까요?"
"그놈들도 이렇게 깊이까지는 안 들어와. 이봐, 기관도 없는 배가 이 바람을 견딜 것 같아?"
"놈들은 고도 십오 킬로미터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듭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우리는 지금 겨우 고도 십이 킬로미터에 떠 있는 게 아닙니까?"
"기다려 봐, 이 사람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잡고 있으니까. 혹시 이반 족이면 바로 쏴버려."
"불빛 신호를 안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저쪽이 먼저 신호를 보내지 않은 걸 보니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몰라. 굳이 위치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하긴,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배는 드물지. 구름 벽 안으로 일 킬로미터만 들어가도 어지간한 태풍에 맞먹으니 말이지......."
조타수인 리스트는 방향타를 오른쪽으로 틀어 검은 형상에 접근했다. 두꺼운 구름 장막이 옅어지면서 검은 덩어리 같던 무엇인가의 윤곽선이 드러냈다. 거대한 포탑이 가장 먼저 어둠을 뚫고 튀어나왔고, 바람에 망가진 금속 구조물과 갑판 위로 높게 솟은 함교가 뒤따랐다.
"가까이서 보니 난파선 같은데. 아, 카르노 함이군."
난파선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긴 세월 동안 바람을 맞으면서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녹슨 모습이었다. 본래 두 개였던 연돌은 무너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마스트는 밑동만 남아 있었다. 바람을 버티지 못해서 깨진 관측창들은 놀라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전함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조타수가 물었다.
"음? 얘기 못 들었나? 저건 세상의 반대편을 보고 돌아온 전함이라고들 하지. 원래는 사람 잡아먹는 전함으로 유명했는데, 아무래도 카르노 함에서는 특히 수병들을 가혹하게 다뤘던 모양이야. 군대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소문이 돌기 힘든 곳인데 어지간한 훈련병들도 다 알았다고 하니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가지?"
선장은 잠시 물을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 베르너는 카르노라는 전함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배는 수십 년 전 처녀 항해를 마치자마자 수병 몇 명을 먹어치웠다. 분명 평온한 기류 속을 항해했는데도 불구하고 갑판병 몇 명이 사라진 것이었다. 육 개월도 지나지 않아 부포 탄약고에 불이 붙어 또다시 서른 명이 죽었고, 함장이 재판정에 섰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과 함께 공포와 혐오가 퍼졌다. 카르노는 적이 아닌 아군에게 있어 사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최신예 전함으로써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장교들과 수병들 사이에 적대감이 피어났다.천을 적시는 물과 같이 배를 서서히, 꾸준하게 잠식해 나갔다.
"결국 선상반란이 터졌지. 두 번. 그런데 첫 번째 반란이 진압된 다음 주동자들을 처형한 것이 역효과를 낳았던 모양이야. 선상 반란을 막는 것은 히드라와 싸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어. 히드라가 뭔지는 알지? 머리가 여럿인 괴물. 머리를 자르면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난다고 하던가. 아무튼 주동자들이 처형된 후에도 잔당 사이에서 반란 모의는 계속되었지. 결국 원양 항해 중에 또다시 반란이 터지면서 선장과 몇몇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교가 죽었지.
"잠시만, 선장이 살아 있었다고요?"
리스트가 물었다.
"포탄을 견딜 수 있게 만든 함교 안에 스스로를 가뒀으니까. 기관실도 장교 몇몇이 필사적으로 사수한 끝에 함락되지 않았어."
"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는 말이네요."
"수병들은 선장과 협상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당연히 선장은 듣지를 않았지. 무사히 살아 돌아간다 해도 불명예 제대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선장은 자기와 뜻을 함께하는 장교 몇몇과 함께 대회랑 한가운데로 전함을 몰았어. 배와 함께하려 했던 거지. 결국 어떻게든 배를 멈추긴 한 모양인데, 그때는 이미 구름벽 안으로 이십 킬로미터 이상을 파고든 후였지."
"남아나는 게 없었겠군요......"
베르너는 대회랑의 깊숙한 부분을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폭풍의 일부인 대회랑은 중심부에서 흐르는 기체의 흐름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로 수백년간 대륙을 잇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항해 시간을 줄이고 연료를 아끼기 위해 수백척의 선박이 대회랑을 이용한다. 그렇지만 대회랑 외곽의 구름 벽 안으로 삼심 킬로미터 이상 파고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상 전진하면 음속에 달하는 속도로 부는 바람과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얼음 파편, 소문이 무성할 뿐인 북부의 미개척지가 나타났다.
"관측창은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을 테고, 바람이 너무 강해서 아무리 전함이라 해도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거야. 선원들은 다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살하고, 끝까지 버티기로 결심한 선원들도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얼마 못 버텼겠지. 해군이 10년 전에 특수한 고속정으로 저 배를 조사한 적이 있었어. 그 고속정을 본 적이 있는데, 배에 기관을 단 게 아니라 기관을 배로 감쌌다고나 할까,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거의 다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더군. 하긴,대회랑은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가는 게 문제니까 말이지. 그 고속정의 기관사였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카르노 함에는 성한 곳이 없었다더군. 수병들이 필사적으로 배를 멈추려고 한 모양이야. 함교를 부포로 쏘기까지 했는지 함교 장갑 곳곳에 탄흔이 있었다고 하던데.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저건 어떤 짓을 해서도 끌어낼 수가 없었어. 그럴 만한 가치도 없었고...... 그래서 지금도 바람을 타고 떠다니고 있지. 북부의 미개척지를 지나 그 이상까지 나아갔다고들 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타고 있지 않은데 말이야."
"끔찍한 이야기군요......."
선장은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뛰어난 소설가일 것이라고 베르너는 생각했다. 능숙하지 못한 허풍쟁이들은 종종 거짓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선장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았고, 중간에 끊기거나 모순되는 부분도 없었다.
"아, 그리고 중앙 총탑에는 베르너인가. 에버스만은 자러 들어갔나 보지?"
"예, 그렇습니다. 핍입니다."
핍 베르너는 올해 20세, 소년 시절부터 배를 타기 시작해 1년 전 협상국 소속의 사략선 현접호에 고용되었다. 그는'하늘의 일족' 이반 족이나 기계 인간과 같은 강인한 육체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가족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본래 그는 식민지의 해안에서 살았었다. 5살이 될 때까지는 모든 일이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불안이 없는 평온한 시기였고, 본토가 있는 북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불안 요소들도 그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불행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 국경선 하나를 두고 있던 국가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고, 어느 순간 그는 가족과 떨어졌다. 그렇지만 피난에 동원되었던 화물선의 한 선원의 도움으로 배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렇게 10년 이상 쌓은 경험은 그가 현접호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봐, 7시방향! 불빛이다!"
선장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오싹해질 무렵 후방 총탑에서 시즈모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너는 손잡이를 작동시켜 포탑을 180도 회전시켰다. 현접호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상선인가? 형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우현으로 5도쯤만 틀어봐......그렇지......조금만 가까이 가 보자고. 기관실?"
"그래. 들려."
기관을 담당하는 닥터의 낮은 목소리가 다른 전성관에서 흘러나왔다. 현접호는 400톤의 고속정으로, 기관실을 담당하는 인원만 서너 명이 필요하지만 주머니 사정상 그렇게 많은 선원을 고용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닥터는 경력30년의 베테랑이었다. 네 명 몫을 너끈히 해 내는 사람인 것이다.
"돛을 접는게 좋을 것 같아."
"그러지."
기관실은 기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한 방향으로 질주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빠른 방향 전환을 할 때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연 돛을 접는 것이 우선이었다. 희미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의 권양기가 작동하면서 직사각형의 돛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람을 받던 캔버스 천이 풀어지면서 돛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활대가 뱃머리의 장치에 제대로 고정될 수 있도록 권양기가 출력을 높였고, 펄럭거리는 캔버스와 철제 구조물로 이루어진 돛이 베르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들 깨워야 할까요?"
"조금만 더 두고 보는게 어떨까?"
"불을 모두 꺼. 조타실과 총탑에 필요한 것만 켜 두고 나머지는 모두. 빛이 새어 나가면 절대 안되니......."
발각될 위험을 최소화한 현접호는 구름 장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나아갔다. 불빛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앞서 있었던 현접호는 접근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야 했다. 가까워지던 빛은 점차 여러 개의 덩어리로 갈라졌다. 처음에는 허공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불빛 아래에 타원 모양의 형상이 점차 드러났다.
"상당히 크네요. 대충 100미터는 넘으려나? 한 1만톤 정도는 되겠지요?"
"글쎄, 순양함일지도? 아군인지 아닌지는 알아봐야겠지. 형상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도록 하지."
현접호는 두 배의 거리가 500미터가 될때까지 근접한 뒤, 배의 종류와 소속을 살펴보기 위해 한동안 속도를 맞춰서 항해했다. 사략선은 해군에 소속되기는 했지만 용병 취급을 받았다. 이중 스파이 활동을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적군 선단의 위치 정보를 대략적으로 전달받을 뿐, 아군 함선이나 선단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비교적 바람이 약한 대회랑의 가장자리로 나온 덕에 침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확실히 순양함인 것 같죠? 아직도 잘 안보인다만...... 여기쯤 오면 구름이 이것보다 훨씬 적어야 정상인데 이상하네요."
"함급은 알 수 있겠어?"
"일단 아군은 아니에요. 아군 순양함 중에 저런 실루엣을 가진 함선은 없어요. 더 가까이 가면 발각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거리를 유지하는 게......?"
"베르너, 들리냐? 함급 확인해 봐라."
베르너는 적군 및 아군 군함들의 실루엣이 나열된 함정표를 꺼내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순양함 항목에서 멈췄다.관측창에 함정표를 가져다 대고 실루엣이 일치하는 군함이 나올 때까지 의문의 순양함과 함정표의 그림을 하나 하나 대조해 보았다.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베르너는 선장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같습니다만."
"적군이네. 튀자."
"선단 호위 임무를 맡은 거라면 더 바깥쪽에 상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후퇴하기는 아쉽지 않습니까?"
"아니, 아니. 장갑순양함까지 붙었는데 덤볐다가 무슨 꼴이 나려고. 그냥 빠지자. 거기다가 저놈 혼자 돌아다닐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이지. 주변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래. 방호순양함이라던지......"
선장의 말을 들은 닥터가 증기터빈의 출력을 다시 높였다. 순양함과 같은 속도로 이동하던 현접호는 점점 속도를 높여서 순양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뱃머리를 바라보던 베르너는 함정표를 다시 넣어두었다. 점점 교대 시간이 다가오면서 집중력이 흐려졌지만, 주변에 다른 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장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갑자기 구름이 옅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베르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전방을 예의주시했다. 그때 구름 한 폭이 크게 찢어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장...... 선장님! 2시방향, 대각선 아래요!"
"이런 망할!"
베르너가 전성관에 대고 외치자 조타수와 선장이 그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일순간에 이해했다. 현접호는 구름 장막 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름이 이상하리만치 두껍다고 생각한 조타수의 생각은 옳았다. 현접호는 불빛을 쫓다가 구름 장막 밖으로 길게 튀어나온 기형적인 구름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그대로 전진했다가는 적함의 수백 미터 앞에서 탁 트인 하늘로 나오게 될 판이었다.
"비상! 비상! 전원 기상!"
날카로운 경고음이 모든 선실에 울려퍼졌다. 잠자고 있던 선원들은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끙끙대다가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 산소마스크와 귀마개를 찾으려고 옷걸이를 덜그럭거리는 소리, 갑판을 뛰어가는 소리가 배를 뒤흔들었다. 베르너는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포탑을 돌리고, 기관총의 안전장치를 다시 확인했다. 그 순간 순양함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현접호의 측면을 스쳐 지나갔다.
"우릴 봤다! 우현 아래로 세게 틀어!"
방향타와 승강타가 작동하면서 베르너는 포탑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집중되면서 눈을 뜨는것조차 어려웠다. 다시 자리를 잡을 틈도 없이 대공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탄 하나가 상갑판 위에서 작렬하면서 수많은 파편이 포탑을 때렸다. 관측창에 금이 가고, 베르너는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파편 하나가 기관총에 맞으면서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베르너는 재빨리 자리 아래에서 산소마스크와 귀를 보호할 귀마개를 착용한 다음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다시피 하는 총성이 울리면서 50구경 기관총은 예광탄과 철갑탄을 쏟아 냈다. 그렇지만 베르너는 기관총으로는 순양함의 장갑판에 흠집조차 낼 수 없으며, 지금 예광탄을 쏘는 것은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짓일 뿐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탄약을 아껴! 지금 쏘는 것은 소용없다!"
6인치 단장포를 담당하는 스트루커가 외쳤다. 순양함은 현접호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어뢰에 맞을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베르너는 순양함 뱃머리의 2연장 포탑이 서서히 회전하는 모습을 관측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초탄부터 명중탄을 낼 확률은 없다시피 하지만, 1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거리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현접호의 장갑판은 기관포탄이나 파편 정도만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순양함의 주포는 고사하고 부포도 버틸 수 없다.
"뭐 하고 있어! 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선장의 말은 직후의 폭발음에 가려져 일부밖에 들리지 않았다. 순양함의 부포가 불을 뿜었고, 포탄은 거의 모두 현접호의 위, 아래로 지나가며 허공을 갈랐다. 그렇지만 순양함에게는 행운, 현접호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지만8.8cm 부포의 철갑탄 한 발이 현접호의 측면에 명중했다. 포탄은 장갑을 뚫고 들어가 기관실 근처에서 작렬하면서 방향타를 망가뜨렸다.
"미안, 선장. 자이로스코프가 망가졌어."
"부력을 0까지 낮춰! 꽤 빨리 떨어질테니까 다들 꽉 붙들어."
닥터는 기관을 역회전시켜 현접호를 공중에 띄워주던 부력을 일시적으로 없앴다. 조종장치를 잃은 현접호는 마구 회전하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장, 함재정이 떴다."
"이렇게나 빨리? 말도 안돼!"
"아마 정찰 용도로 띄워 놓았던 것 같은데......"
전성관을 통해 들려온 선원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순양함의 방향을 바라본 베르너는 순양함의 밝은 서치라이트 불빛 속에서 또다른 불빛을 보았다. 프린츠 아달베르트급에 탑재된 S급 경비정이었다. 기계 날개가 한 쌍 달린 경비정은 마치 거대한 바다새처럼 보였다. 기관이 뿜어내는 화염과 배기가스가 공기 중에 긴 포물선을 그렸다. 베르너가 마지막으로 읽어본 함정표의 내용에 따르면 경비정은 내부 무장창과 날개에 항공 폭탄 또는 대함 로켓을 탑재할 수 있었다. 250킬로그램 폭탄은 구축함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베르너는 총탑을 회전시켜 경비정을 쏘려고 했지만 요동치는 선체 때문에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다.
"쏘려면 선체를 바로잡아야 해!"
"알아! 조금만 더 강하하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기다려!"
현접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구름장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닿지 않게 되자 닥터는 선체를 바로잡았다. 300미터 정도 위에서 경비정의 탐조등 불빛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경비정은 구름 속에서도 현접호를 놓치지 않았다.
"방향타는 고치려면 조금 걸려."
"경비정은? 아직도 따라오나?"
"그런 것 같은데?"
"쏴, 쏘라고! 이제는 조준할 수 있을 것 아니야."
요동치던 선체가 잠잠해지자 스트루커가 6인치 포를 발사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포성이었다. 베르너와 시즈모어는 50구경 기관총을 경비정에게 퍼부었다. 포곽에 장착된 기관포도 놀라울 만큼 큰 총성을 내면서 불을 뿜었다. 경비정은 현접호 주위를 몇 번 선회하다가 6시 방향에서 갑자기 날개를 접으며 돌진했다. 뒤로 발사할 수 없는 6인치 포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대함 로켓 4발이 불을 뿜으며 날아왔다. 경비정의 기관총좌에 앉아 있는 승조원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로켓 한 발이 배꼬리 근처에 명중하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베르너는 현접호에서 떨어져 나가는 금속 파편을 보았다.
"이러다가는 다 죽겠다! 손상 보고해!"
선장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베르너의 전성관을 통해 현접호 이곳저곳에서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모르겠어! 크게 구멍이 뚫리긴 했는데......"
"시즈모어는? 살아 있기나 한거냐?"
"긁히지도 않았어! 총탑이 조금 망가진 것 같긴 해."
"다음에는 폭탄이 날아올거다! 어떻게든 이 고물을 움직여 봐!"
조타실의 커다란 관측창 밖에서는 경비정이 불타고 있었다. 대함 로켓 여러 발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인지 날개 한 쪽이 떨어져 나가고 상부구조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3
"자, 다들 정신줄 챙기고, 신호를 보내."
선장이 조용히 입을 열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조타실 바닥에 앉아 있던 리스트가 황급히 일어나서 조타실 한 켠에 설치된 신호기를 켰다. 열고 닫을 수 있는 셔터를 단 탐조등인 신호기는 레버를 짧게 혹은 길게 눌러서 불빛 신호를 보내는 데 사용되었다.
"내용은?"
"그냥 아무거나 지어 내."
리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냈다. 항복하지 않겠다면 다시 발포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경비정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승조원들이 죽거나 다쳐서 신호를 보낼 수 없는 상태이거나, 신호기가 파괴된 것일지도 모른다. 베르너는 선장에게 이 생각을 말할지 고민하다가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선장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변 없는데......"
"좀 뜸을 들였다가 두번 더 보내고, 그때까지도 답변이 없으면 생존자 구조는 안 한다. 베르너? 아, 바로 옆에 있었군. 사물함 아래쪽 서랍에 사진기가 들어 있어. 뭘 해야 하는지는 알지? 그리고 배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베르너는 조타실 벽에 고정된 사물함을 열고 사진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묶어 둔 끈을 풀었다. 우표보다 조금 더 큰 필름을 사용하는 소형 카메라였는데, 화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튼튼했기 때문에 전쟁터의 종군 기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베르너가 철제 보관함 바로 옆에 있는 관측창에 사진기를 대고 셔터를 몇 번 열고 닫을 즈음, 그리즐리가 조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장, 텀블러는 그냥 미끼였던 거지?"
그리즐리가 선장에게 물었다.
"저놈들, 우리 방향타가 고장났다는 걸 알고 있었어."
선장은 조타기 앞의 나침반을 가리켰다.
"경비정이 구름 뒤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어. 그런데 이걸 보라고. 바람벽 쪽으로 가고 있잖아. 저 안은 선체를 찌그러뜨릴 만큼 기압이 높아."
리스트가 선장의 말을 정리하듯이 끼어들었다.
"놈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배를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움직이는 목표물보다는 멈춰 있는 목표물이 훨씬 맞추기 쉬우니까. 텀블러가 분리되었을 때 놈들은 우리가 배를 버린다고 생각했을껄?"
"그럼 폭약을 설치한 이유는?"
"텀블러가 바람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지다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추락하면 우리가 사고로 죽은 것처럼 보였겠지...... 그런데 고맙게도 놈들이 텀블러에 충각 공격을 해 주었더군. 확실히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텀블러에 실어 둔 대함 로켓 탄두는 신관이 아직 살아 있었지. 저길 봐, 뱃머리가 다 우그러졌잖아. 조타수는 아마 무사하지 못했을걸?"
베르너는 사진기를 내려놓고 관측창 밖을 내다보았다. 기관포를 막아 내는 정면 장갑이라도 대함로켓 탄두 2개가 바로 앞에서 터지는 충격은 버틸 수 없다. 경비정의 유선형 뱃머리는 뼈대만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심하게 뒤틀린데다가 뭔지 모를 꿈틀거리는 심홍색 물질이 묻어 있었다.
"대장, 저기 뱃머리에 묻어 있는 것 말인데요, 혹시......"
"아, 하긴, 베르너는 저게 뭔지 모르겠군. 실전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아마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정확히 말하면 혈액와 근육 조각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리스트, 경비정은 아직도 답변이 없나?"
"그렇긴 한데, 누가 갑판 위를 걸어다니고 있어."
베르너는 신호기의 망원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신호를 보내는 대상에 불빛을 정확히 비추기 위해 장착된 것이었다. 보호복을 입은 승조원이 상갑판에 서 있었다. 한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다른 손에는 해군기를 든 상태였다. 보호복의 흉갑에 크게 새겨진 계급장은 그가 대위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손에 든게 뭔지 보이나?"
선장은 타륜에 걸려 있던 쌍안경을 집어들었다.
대위는 해군기의 깃대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한 손으로 깃발을 묶은 줄을 풀었다. 그는 바람에 사납게 펄럭이는 깃발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리면서 반대쪽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제서야 베르너는 그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반자동 권총이었다.
"젠장, 자결해 버렸군. 항복은 절대 안하겠다는 건가......"
기울어진 갑판 위로 쓰러진 대위의 시신은 두 번 가량을 굴러 까마득한 허공으로 던져졌고, 순식간에 베르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정이 배기관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기관을 죽인 거야. 다 같이 자폭할 생각인가 보군."
선장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경비정은 천천히 떨어지다가 기관실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현접호는 잔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머물다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뱃머리를 돌렸다. 선실에 들어가서 쉬라는 선장의 말에 따라 베르너는 3층 침대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두 시간 뒤에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조타실로 집결해야 했다.
"에버스만, 그라임스, 맥나이트, 닐슨, 커스, 스트루커, 그리즐리, 시즈모어, 블랙번, 루이즈, 베르너...... 닥터 빼고는 아무튼 다 모였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만 총탑 하나가 못 쓰게 되었고, 외부 선체에 구멍이 몇 개 뚫렸고, 방향타는 수동 조작해야 하는 상태고, 아무튼 좋지는 않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방향타는 어쩔 수가 없어. 아쉽지만 수리를 받으러 가야 할 것 같군."
선장은 배의 상태가 나쁘다며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몇몇 동료들의 의견은 달랐다. 특히 선장과 늘 사이가 좋지 못했던 닐슨과 블랙번 일당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런, 대장. 일 주일만에 이런 꼴이 난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벌써 돌아가자고? 방향타는 정말 고칠 수 없는 거야?"
"닥터 말로는 지금은 전혀 방법이 없다더군. 거기다가 텀블러도 이제 한 척이 부족하니, 상선 같은 걸 발견한다 해도 승선조 전원이 한번에 올라탈 수가 없지."
승선조는 상선에 직접 올라타 승조원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맡는 기계 인간들을 의미했다.
"본토까지 갔다가 수리를 받고 돌아오려면 보름은 걸릴 거야. 대장, 우리는 결국 용병이야. 해군 소속이다 뭐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전적 없이 돌아갔다가는 다시는 항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선장과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리스트, 그라임스, 그리즐리는 선장의 편을 들었다.
"우리는 격침 톤수가 순위권에 들기 때문에 상관 없다니까! 해군을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마. 겨우 한번 정도 빈 손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계약을 해지시켜버릴 정도였으면, 3달 전의 그 선장은 진작에 변방으로 추방당했을걸. 왜, 선단 호위 임무 때 도망가버린 용병대장 있잖아."
"그 선단은 순양함 두 척에게 습격을 당한 거였어. 반면에 우리가 상대한 건 뭐지? 조그마한 경비정 한 척? 젠장, 대장. 애초에 대장이 해도만 제대로 봤어도 이런 일은 안 생겼을 거야."
"해도에 구름 모양까지 나오는 줄은 몰랐군, 블랙번 하사.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앞으로는 그쪽이 지휘하도록. 잠시만, 그러면 살아 돌아갈 수가 없잖아?"
그라임스의 빈정거리는 한 마디에 분노한 블랙번은 성인 남성의 몇 배 힘을 낼 수 있는 기계 팔로 단검을 순식간에 빼들었다. 그라임스는 이에 맞서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았다. 쇠칼이 날아다니려던 찰나, 선장이 고함 소리와 함께 막대형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당장 그 흉측한 것들을 집어넣지 않으면 네놈들을 폭파해 버리겠다! 투표로 결정할 테니,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도록."
몇몇 사람이 손을 올렸다.
"반반이라니, 이런. 그러면 다시 할까?"
순간, 베르너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돌아가기로 결정인가. 해산!"
블랙번은 스쳐 지나가며 기계 팔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베르너의 옆구리를 찔렀다. 실수로 그랬다기엔 어색한 모양새였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베르너는 블랙번의 분노하는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고 뒤돌아섰다.
"아, 베르너. 할 말이 있다."
조타실을 나서려는 베르너를 선장이 불러세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고 있던 수류탄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아까 전에 하던 말을 다시 하자면......"
선장은 사물함에서 설계도로 보이는 종이 몇 장을 꺼내 해도가 놓인 책상 위에 펼쳤다. 동맹국 구축함의 설계도였는데, 기관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동맹국은 특이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짐승의 살과 내장으로 기계를 만드는 기술이지.
동맹국의 제 3 공화국은 아직까지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한 연구소 덕택에 생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세계 최고에 달했다. 그들은 동물의 근육과 장기, 심지어는 뇌 일부를 활용해서 살아 있는 군함과 전차, 보행병기까지도 만들어 냈다. 한참 동안 그리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동물 학대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꼽히기까지 했던 이 놀라운 기술은 선대 황제의 후원으로 급속하게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생체 기관에 대한 이야기는 기초 훈련 때도 들었습니다. 그저 기계가 생물처럼 피를 흘린다는 것이 신기해서......"
"하긴, 좀 충격적이긴 하지. 어찌 보면 저건 배를 만든다기보다는 동물에게 강철 껍데기를 씌워 주는 것에 가까우니까. 일단 겉보기에도 일반적인 기관에 비해 단점이 훨씬 많아 보이지. 동맹국 포로들한테 듣기로는, 생체 기관은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라더군. 지휘관과 기관이 서로 잘 맞지 않으면 기관이 반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 이건 기밀이긴 한데....... 하긴, 말해줘도 별 이상은 없겠지."
선장은 평소 본인이 잘 아는 주제가 등장하면 쉴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주제라면 더욱 말이 많아졌다. 그가 주의를 집중시킬 때 즐겨 쓰는 말은 '이건 기밀인데......' 였지만, 실제로 기밀 사항인 정보는 거의 없었다.
"일단 기관으로 가공할 대상이 필요한데, 기관의 쓰임새에 따라서 필요한 동물의 종류도 달라지지. 짐승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내장만을 도려 내는지, 또 그걸 어떻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어. 제 3 공화국에도 정확한 원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껄? 다만 포로로 잡힌 구축함 함장이 '살아 있는 미라를 만드는 것' 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 걸 보니 꽤나 지저분한 일인 모양이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요?"
"확실히 그쪽 지휘관들은 생체 기관을 선호하는 것 같긴 해. 가장 큰 장점은, 연료가 거의 필요 없는 기관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겠지."
베르너가 마지막으로 읽어 본 전술 교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었다.
"그런 기관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거죠? 그건 분명......"
선장은 베르너의 말을 끊었다.
"으음...... 물리 법칙을 죄다 무시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일단 한번 들어 봐. 고래는 성체가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지? 그게 다 몸 속에 있는 어떤 장치 덕분이라는 거야. 이 장치는 태양과 비슷한 기능을 해서 거의 무한한 동력을 만들어 내는데, 제 3 공화국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이 장치를 사용한 생체 기관을 개발했다더군. 상용화되는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말이야.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소형함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전함 같은 대형함에게는 이상적인 동력원인 셈이지."
"본국에서는 그런 걸 만들 수 없는 건가요?"
"당연하지. 격침한 군함에서 기관을 노획하는 방법도 고려해 봤지만, 동맹국 놈들이 기관을 확실하게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어."
"잠시만요. 아까전에 기관을 죽였다고 했던 게......"
"약물을 주사해서 기관을 안락사시켜 버리지. 그렇게 망가진 기관에서는 건질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대장,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유는?"
"아, 그냥.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이제 들어가 봐. 내일부터는 해상 봉쇄를 뚫어야 하니, 지금부터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베르너는 선실로 돌아갔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아직 잠들지 못한 몇몇이 고개를 들어 베르너를 바라보고는 다시 누웠다. 선실 한 켠에서는 잠을 청할 생각이 없는 듯한 블랙번과 루이즈가 수군대고 있었다. 베르너는 3층 침대에 누워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애썼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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