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딩때 쓰다가 소재고갈되어서 때려치운 습작 (필력 개판)


#1

 

표준력 1523

 

"이봐일어나교대 시간이야."

 

 누워 있던 베르너은 마지못해 3층 침대에서 기어나왔다떨어져 내렸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을 것이다균형을 잡으려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누군가를 거의 걷어찰 뻔 하고요동치는 선실 때문에 비틀거리며 사다리까지 걸어간 베르너는 잠긴 목소리로 수직 통로를 향해 외쳤다.

 

 "교대하러 갑니다."

 "참 빨리도 오는군."

 

 에버스만이 강철 다리를 철컥대며 사다리를 내려왔다.

 

 "족히 세 시간은 저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말이지."

 

 에버스만이 선실 안으로 사라지자베르너는 사다리를 타고 수직 통로를 지나 총탑 안으로 들어갔다. 50구경 기관총 두 정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안전장치가 발사 위치에 있는지 확인한 다음 총탑을 좌우로 회전시켜 보았다.

 

 "우현, 2시 방향대각선 아래 방향을 주시해구름 사이에 무언가 있다."

 

 선장이 전성관에 대고 외쳤다베르너는 초속 100미터가 넘어가는 대회랑의 바람을 받아 가늘게 떨리는 강화 유리 관측창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선장이 말한 방향에 시선을 고정했다바람을 타기 위해 펼쳐 놓은 커다란 연 아래로 검은 형상이 나타났다.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큽니다이반 족일까요?"

 "그놈들도 이렇게 깊이까지는 안 들어와이봐기관도 없는 배가 이 바람을 견딜 것 같아?"

 "놈들은 고도 십오 킬로미터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듭니다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우리는 지금 겨우 고도 십이 킬로미터에 떠 있는 게 아닙니까?"

 "기다려 봐이 사람아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잡고 있으니까혹시 이반 족이면 바로 쏴버려."

 "불빛 신호를 안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저쪽이 먼저 신호를 보내지 않은 걸 보니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몰라굳이 위치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하긴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배는 드물지구름 벽 안으로 일 킬로미터만 들어가도 어지간한 태풍에 맞먹으니 말이지......."

 

 조타수인 리스트는 방향타를 오른쪽으로 틀어 검은 형상에 접근했다두꺼운 구름 장막이 옅어지면서 검은 덩어리 같던 무엇인가의 윤곽선이 드러냈다거대한 포탑이 가장 먼저 어둠을 뚫고 튀어나왔고바람에 망가진 금속 구조물과 갑판 위로 높게 솟은 함교가 뒤따랐다.

 

 "가까이서 보니 난파선 같은데카르노 함이군."

 

 난파선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긴 세월 동안 바람을 맞으면서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녹슨 모습이었다본래 두 개였던 연돌은 무너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마스트는 밑동만 남아 있었다바람을 버티지 못해서 깨진 관측창들은 놀라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전함이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조타수가 물었다.

 

 "얘기 못 들었나저건 세상의 반대편을 보고 돌아온 전함이라고들 하지원래는 사람 잡아먹는 전함으로 유명했는데아무래도 카르노 함에서는 특히 수병들을 가혹하게 다뤘던 모양이야군대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소문이 돌기 힘든 곳인데 어지간한 훈련병들도 다 알았다고 하니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가지?"

 

 선장은 잠시 물을 마신 다음 말을 이었다베르너는 카르노라는 전함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었다그 배는 수십 년 전 처녀 항해를 마치자마자 수병 몇 명을 먹어치웠다분명 평온한 기류 속을 항해했는데도 불구하고 갑판병 몇 명이 사라진 것이었다육 개월도 지나지 않아 부포 탄약고에 불이 붙어 또다시 서른 명이 죽었고함장이 재판정에 섰다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소문과 함께 공포와 혐오가 퍼졌다카르노는 적이 아닌 아군에게 있어 사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최신예 전함으로써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장교들과 수병들 사이에 적대감이 피어났다.천을 적시는 물과 같이 배를 서서히꾸준하게 잠식해 나갔다.

 

 "결국 선상반란이 터졌지두 번그런데 첫 번째 반란이 진압된 다음 주동자들을 처형한 것이 역효과를 낳았던 모양이야선상 반란을 막는 것은 히드라와 싸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어히드라가 뭔지는 알지머리가 여럿인 괴물머리를 자르면 또 다른 머리가 자라난다고 하던가아무튼 주동자들이 처형된 후에도 잔당 사이에서 반란 모의는 계속되었지결국 원양 항해 중에 또다시 반란이 터지면서 선장과 몇몇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교가 죽었지.

 "잠시만선장이 살아 있었다고요?"

 

 리스트가 물었다.

 

 "포탄을 견딜 수 있게 만든 함교 안에 스스로를 가뒀으니까기관실도 장교 몇몇이 필사적으로 사수한 끝에 함락되지 않았어."

 "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는 말이네요."

 "수병들은 선장과 협상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당연히 선장은 듣지를 않았지무사히 살아 돌아간다 해도 불명예 제대를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어쨌든선장은 자기와 뜻을 함께하는 장교 몇몇과 함께 대회랑 한가운데로 전함을 몰았어배와 함께하려 했던 거지결국 어떻게든 배를 멈추긴 한 모양인데그때는 이미 구름벽 안으로 이십 킬로미터 이상을 파고든 후였지."

 "남아나는 게 없었겠군요......"

 

 베르너는 대회랑의 깊숙한 부분을 생각하니 오싹해졌다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폭풍의 일부인 대회랑은 중심부에서 흐르는 기체의 흐름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로 수백년간 대륙을 잇는 통로로 사용되었고현대에 와서도 항해 시간을 줄이고 연료를 아끼기 위해 수백척의 선박이 대회랑을 이용한다그렇지만 대회랑 외곽의 구름 벽 안으로 삼심 킬로미터 이상 파고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 이상 전진하면 음속에 달하는 속도로 부는 바람과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얼음 파편소문이 무성할 뿐인 북부의 미개척지가 나타났다

 

 "관측창은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을 테고바람이 너무 강해서 아무리 전함이라 해도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거야선원들은 다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살하고끝까지 버티기로 결심한 선원들도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얼마 못 버텼겠지해군이 10년 전에 특수한 고속정으로 저 배를 조사한 적이 있었어그 고속정을 본 적이 있는데배에 기관을 단 게 아니라 기관을 배로 감쌌다고나 할까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거의 다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더군하긴,대회랑은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가는 게 문제니까 말이지그 고속정의 기관사였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카르노 함에는 성한 곳이 없었다더군수병들이 필사적으로 배를 멈추려고 한 모양이야함교를 부포로 쏘기까지 했는지 함교 장갑 곳곳에 탄흔이 있었다고 하던데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저건 어떤 짓을 해서도 끌어낼 수가 없었어그럴 만한 가치도 없었고...... 그래서 지금도 바람을 타고 떠다니고 있지북부의 미개척지를 지나 그 이상까지 나아갔다고들 해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타고 있지 않은데 말이야."

 "끔찍한 이야기군요......."

 

 선장은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나아니면 뛰어난 소설가일 것이라고 베르너는 생각했다능숙하지 못한 허풍쟁이들은 종종 거짓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지 못한다그렇지만 선장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그는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았고중간에 끊기거나 모순되는 부분도 없었다.

 

 "그리고 중앙 총탑에는 베르너인가에버스만은 자러 들어갔나 보지?"

 "그렇습니다핍입니다."

 

 핍 베르너는 올해 20소년 시절부터 배를 타기 시작해 1년 전 협상국 소속의 사략선 현접호에 고용되었다그는'하늘의 일족이반 족이나 기계 인간과 같은 강인한 육체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가족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본래 그는 식민지의 해안에서 살았었다. 5살이 될 때까지는 모든 일이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불안이 없는 평온한 시기였고본토가 있는 북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불안 요소들도 그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았다불행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국경선 하나를 두고 있던 국가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고어느 순간 그는 가족과 떨어졌다그렇지만 피난에 동원되었던 화물선의 한 선원의 도움으로 배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그렇게 10년 이상 쌓은 경험은 그가 현접호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봐, 7시방향불빛이다!"

 

 선장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오싹해질 무렵 후방 총탑에서 시즈모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베르너는 손잡이를 작동시켜 포탑을 180도 회전시켰다현접호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상선인가형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우현으로 5도쯤만 틀어봐......그렇지......조금만 가까이 가 보자고기관실?"

 "그래들려."

 

 기관을 담당하는 닥터의 낮은 목소리가 다른 전성관에서 흘러나왔다현접호는 400톤의 고속정으로기관실을 담당하는 인원만 서너 명이 필요하지만 주머니 사정상 그렇게 많은 선원을 고용할 수 없었다그렇지만 닥터는 경력30년의 베테랑이었다네 명 몫을 너끈히 해 내는 사람인 것이다.

 

 "돛을 접는게 좋을 것 같아."

 "그러지."

 

 기관실은 기동할 준비를 시작했다바람을 타고 한 방향으로 질주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빠른 방향 전환을 할 때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연 돛을 접는 것이 우선이었다희미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의 권양기가 작동하면서 직사각형의 돛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동시에 바람을 받던 캔버스 천이 풀어지면서 돛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활대가 뱃머리의 장치에 제대로 고정될 수 있도록 권양기가 출력을 높였고펄럭거리는 캔버스와 철제 구조물로 이루어진 돛이 베르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들 깨워야 할까요?"

 "조금만 더 두고 보는게 어떨까?"

 "불을 모두 꺼조타실과 총탑에 필요한 것만 켜 두고 나머지는 모두빛이 새어 나가면 절대 안되니......."

 

발각될 위험을 최소화한 현접호는 구름 장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나아갔다불빛은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앞서 있었던 현접호는 접근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야 했다가까워지던 빛은 점차 여러 개의 덩어리로 갈라졌다처음에는 허공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불빛 아래에 타원 모양의 형상이 점차 드러났다.

 

 "상당히 크네요대충 100미터는 넘으려나한 1만톤 정도는 되겠지요?"

 "글쎄순양함일지도아군인지 아닌지는 알아봐야겠지형상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도록 하지."

 

 현접호는 두 배의 거리가 500미터가 될때까지 근접한 뒤배의 종류와 소속을 살펴보기 위해 한동안 속도를 맞춰서 항해했다사략선은 해군에 소속되기는 했지만 용병 취급을 받았다이중 스파이 활동을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적군 선단의 위치 정보를 대략적으로 전달받을 뿐아군 함선이나 선단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다행히도 비교적 바람이 약한 대회랑의 가장자리로 나온 덕에 침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확실히 순양함인 것 같죠아직도 잘 안보인다만...... 여기쯤 오면 구름이 이것보다 훨씬 적어야 정상인데 이상하네요."

 "함급은 알 수 있겠어?"

 "일단 아군은 아니에요아군 순양함 중에 저런 실루엣을 가진 함선은 없어요더 가까이 가면 발각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거리를 유지하는 게......?"

 "베르너들리냐함급 확인해 봐라."

 

 베르너는 적군 및 아군 군함들의 실루엣이 나열된 함정표를 꺼내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순양함 항목에서 멈췄다.관측창에 함정표를 가져다 대고 실루엣이 일치하는 군함이 나올 때까지 의문의 순양함과 함정표의 그림을 하나 하나 대조해 보았다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베르너는 선장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같습니다만."

 "적군이네튀자."

 "선단 호위 임무를 맡은 거라면 더 바깥쪽에 상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후퇴하기는 아쉽지 않습니까?"

 "아니아니장갑순양함까지 붙었는데 덤볐다가 무슨 꼴이 나려고그냥 빠지자거기다가 저놈 혼자 돌아다닐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이지주변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래방호순양함이라던지......"

 

 선장의 말을 들은 닥터가 증기터빈의 출력을 다시 높였다순양함과 같은 속도로 이동하던 현접호는 점점 속도를 높여서 순양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점점 멀어지는 뱃머리를 바라보던 베르너는 함정표를 다시 넣어두었다점점 교대 시간이 다가오면서 집중력이 흐려졌지만주변에 다른 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장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갑자기 구름이 옅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베르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전방을 예의주시했다그때 구름 한 폭이 크게 찢어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장...... 선장님! 2시방향대각선 아래요!"

 "이런 망할!"

 

 베르너가 전성관에 대고 외치자 조타수와 선장이 그 방향을 바라보았고그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일순간에 이해했다현접호는 구름 장막 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었다구름이 이상하리만치 두껍다고 생각한 조타수의 생각은 옳았다현접호는 불빛을 쫓다가 구름 장막 밖으로 길게 튀어나온 기형적인 구름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그대로 전진했다가는 적함의 수백 미터 앞에서 탁 트인 하늘로 나오게 될 판이었다.

 

 "비상비상전원 기상!"

 

 날카로운 경고음이 모든 선실에 울려퍼졌다잠자고 있던 선원들은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끙끙대다가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산소마스크와 귀마개를 찾으려고 옷걸이를 덜그럭거리는 소리갑판을 뛰어가는 소리가 배를 뒤흔들었다베르너는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포탑을 돌리고기관총의 안전장치를 다시 확인했다그 순간 순양함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현접호의 측면을 스쳐 지나갔다.

 

 "우릴 봤다우현 아래로 세게 틀어!"

 

 방향타와 승강타가 작동하면서 베르너는 포탑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서치라이트 불빛이 집중되면서 눈을 뜨는것조차 어려웠다다시 자리를 잡을 틈도 없이 대공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포탄 하나가 상갑판 위에서 작렬하면서 수많은 파편이 포탑을 때렸다관측창에 금이 가고베르너는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파편 하나가 기관총에 맞으면서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베르너는 재빨리 자리 아래에서 산소마스크와 귀를 보호할 귀마개를 착용한 다음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다시피 하는 총성이 울리면서 50구경 기관총은 예광탄과 철갑탄을 쏟아 냈다그렇지만 베르너는 기관총으로는 순양함의 장갑판에 흠집조차 낼 수 없으며지금 예광탄을 쏘는 것은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짓일 뿐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탄약을 아껴지금 쏘는 것은 소용없다!"

 

 6인치 단장포를 담당하는 스트루커가 외쳤다순양함은 현접호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어뢰에 맞을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베르너는 순양함 뱃머리의 2연장 포탑이 서서히 회전하는 모습을 관측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초탄부터 명중탄을 낼 확률은 없다시피 하지만, 1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거리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현접호의 장갑판은 기관포탄이나 파편 정도만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순양함의 주포는 고사하고 부포도 버틸 수 없다.

 

 "뭐 하고 있어구름 속으로 들어가야......"

 

 선장의 말은 직후의 폭발음에 가려져 일부밖에 들리지 않았다순양함의 부포가 불을 뿜었고포탄은 거의 모두 현접호의 위아래로 지나가며 허공을 갈랐다그렇지만 순양함에게는 행운현접호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지만8.8cm 부포의 철갑탄 한 발이 현접호의 측면에 명중했다포탄은 장갑을 뚫고 들어가 기관실 근처에서 작렬하면서 방향타를 망가뜨렸다.

 

 "미안선장자이로스코프가 망가졌어."

 "부력을 0까지 낮춰꽤 빨리 떨어질테니까 다들 꽉 붙들어."

 

 닥터는 기관을 역회전시켜 현접호를 공중에 띄워주던 부력을 일시적으로 없앴다조종장치를 잃은 현접호는 마구 회전하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2

 베르너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현접호가 자유 낙하를 시작하면서 선체 내부는 잠시 동안 무중력 상태가 되었다. 


 "선장, 함재정이 떴다."

 "이렇게나 빨리? 말도 안돼!"

 "아마 정찰 용도로 띄워 놓았던 것 같은데......"


 전성관을 통해 들려온 선원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순양함의 방향을 바라본 베르너는 순양함의 밝은 서치라이트 불빛 속에서 또다른 불빛을 보았다. 프린츠 아달베르트급에 탑재된 S급 경비정이었다. 기계 날개가 한 쌍 달린 경비정은 마치 거대한 바다새처럼 보였다. 기관이 뿜어내는 화염과 배기가스가 공기 중에 긴 포물선을 그렸다. 베르너가 마지막으로 읽어본 함정표의 내용에 따르면 경비정은 내부 무장창과 날개에 항공 폭탄 또는 대함 로켓을 탑재할 수 있었다. 250킬로그램 폭탄은 구축함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베르너는 총탑을 회전시켜 경비정을 쏘려고 했지만 요동치는 선체 때문에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다. 


 "쏘려면 선체를 바로잡아야 해!"

 "알아! 조금만 더 강하하면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기다려!"


 현접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구름장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닿지 않게 되자 닥터는 선체를 바로잡았다. 300미터 정도 위에서 경비정의 탐조등 불빛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경비정은 구름 속에서도 현접호를 놓치지 않았다.


 "방향타는 고치려면 조금 걸려."

 "경비정은? 아직도 따라오나?"

 "그런 것 같은데?"

 "쏴, 쏘라고! 이제는 조준할 수 있을 것 아니야."


 요동치던 선체가 잠잠해지자 스트루커가 6인치 포를 발사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큰 포성이었다. 베르너와 시즈모어는 50구경 기관총을 경비정에게 퍼부었다. 포곽에 장착된 기관포도 놀라울 만큼 큰 총성을 내면서 불을 뿜었다. 경비정은 현접호 주위를 몇 번 선회하다가 6시 방향에서 갑자기 날개를 접으며 돌진했다. 뒤로 발사할 수 없는 6인치 포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대함 로켓 4발이 불을 뿜으며 날아왔다. 경비정의 기관총좌에 앉아 있는 승조원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로켓 한 발이 배꼬리 근처에 명중하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베르너는 현접호에서 떨어져 나가는 금속 파편을 보았다.


 "이러다가는 다 죽겠다! 손상 보고해!"


 선장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베르너의 전성관을 통해 현접호 이곳저곳에서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모르겠어! 크게 구멍이 뚫리긴 했는데......"

 "시즈모어는? 살아 있기나 한거냐?"

 "긁히지도 않았어! 총탑이 조금 망가진 것 같긴 해."

 "다음에는 폭탄이 날아올거다! 어떻게든 이 고물을 움직여 봐!"


 증기 터빈으로 고압의 증기가 뿜어지면서 현접호는 빠르게 가속했다. 배수량에 비해 강력한 기관에서 발생하는 힘이 총탑까지도 전달되면서 관측창이 진동을 일으켰다. 경비정은 현접호의 대각선 위 방향에서 다시 한번 공격하기 위해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경비정의 길쭉한 선체에 기관총탄 몇 발이 명중하면서 불꽃이 튀었지만 경비정은 그리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너의 왼쪽 기관총이 갑자기 발사를 멈추었다. 너무 오랫동안 연속해서 발사한 탓이었다. 기관총을 고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베르너는 오른쪽 기관총만으로 계속해서 사격했다. 경비정은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현접호를 서서히 따라잡고 있었다. 

 "선체에 쏘지 말고 조종실을 한번 노려 봐!"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베르너가 시즈모어의 말에 대답하기 무섭게 선장이 전성관에 대고 다시 고함을 쳤다.

 "대함 로켓 발사 준비!"
 
 한 번에 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대함 로켓 발사기는 현접호의 뱃머리 근처에 장착되어 있었다. 진행 방향으로만 발사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로켓 한 발의 위력은 상당히 강력했다. 소형선 정도는 단 한 발로도 무력화할 수 있었다. 

 "12발 모두 문제 없어!"
 "젠장, 비켜봐!"

 선장이 조타수를 옆으로 밀쳐내고 키를 잡았는지 조타실에서는 누군가가 바닥에 넘어지는 쿵 소리가 들려왔다. 리스트가 불평하듯이 입을 열었지만 선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말해 봐!"

 베르너는 재빨리 경비정과 현접호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300 내지는 4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놈들이 200미터 정도 거리에 오면 바로 알려 줘! 그리고 누가 초시계 좀 가져다 줘!"

 조타실 안에서는 명령과 대답이 바쁘게 오갔다.

 "베르너!"
 "예!"
 "아까전에 놈들이 로켓을 4발 쐈나?"
 "그런 것 같습니다!"
 "놈들은 공격하기 직전에 뱃머리를 내릴 거다! 그러면 몇 초 뒤에 로켓이 날아올 테니 부저를 울려서 알려 줘야 한다! 닥터, 듣고 있어? 경고음이 들리면 최대 출력으로 하강해!"
 
 닥터는 확실히 들린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인 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알았어!"
 
 그때 현접호를 따라오던 경비정이 뱃머리를 내렸다. 베르너는 경보를 울릴 때 쓰는 작은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경고음이 울리기 무섭게 현접호가 급강하하면서 베르너는 포탑 천장에 머리를 또다시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본 베르너는 대함 로켓이 내뿜는 흰 연기를 볼 수 있었다. 경비정이 발사한 로켓 4발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현접호를 스쳐 지나갔다. 경비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뱃머리를 양 옆으로 흔들다가 선체를 기울이며 급강하했다. 

 "맞지 않았어! 빗나갔다!"

 시즈모어가 안도감과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저놈들도 한동안은 로켓을 못 쏠 거야!"

 S급 경비정은 로켓 발사관 8개를 갖추고 있었다. 한 번에 8발을 발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첫 번째 공격에서 4발, 방금 전 4발을 발사했으니 재장전을 해야 할 터였다.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조금 있으면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텀블러를 띄울 수 있을까?"
 "누굴 저승 보낼 셈이야?"

 리스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태우지 않아! 텀블러를 띄울 수 있냐니까?"
 "띄울 수는 있겠지! 왜, 쇳물도 한 번은 마실 수 있다고 하잖아!

 선장은 분노가 담긴 리스트의 대꾸를 무시하고 격납고의 그리즐리에게 통하는 전성관을 붙잡았다. 

 "이봐, 격납고! 듣고 있지? 나머지는 모두 사격을 멈춰!"

 베르너는 왼쪽 기관총에 걸린 탄을 빼내면서 그리즐리의 대답을 듣기 위해 팔꿈치로 격납고와 연결된 전성관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즐리는 부상으로 망가진 성대를 정교한 기계 장치로 교체한 탓에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들려."
 "텀블러에 폭약을 장착할 수 있겠어?"
 "이봐, 마켄젠. 요즘은 제트모터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엔진은 떼어 놔. 1분 안에 끝낼 수 있겠어?"
 "한번 해 보지. 기관 말고 다른 부분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거지?"

 현접호의 격납고에 2대가 탑재되어 있는 정찰기인 텀블러는 거의 나무와 도프칠한 천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선장의 말을 빌리자면 '대포에 공기 역학적 껍질을 씌워 놓은 듯한' 형상을 가진 텀블러에서 가장 비싼 부분은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기관이었는데, 기관 자체가 추가 생산이 불가능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남부의 식민지에서 군용으로 수입되는 물량은 대부분 전투기를 생산하는데 사용되었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해서 사용되지 않는 한정된 물량이라 해도 군수업체 관계자가 아닌 이상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텀블러는 엔진을 빠르게 분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동체나 날개가 망가지더라도 엔진만 멀쩡하다면 나머지는 다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폭약은 장착했어. 엔진은 떼어 놨고. 큰 폭발력이 필요할까 싶어서 연료 탱크는 그대로 두었어. 이제 뭘 어떻게 할 건지 좀 알려 줘."
 "앞에 먹구름이 보이지?"
 "음, 여기서는 앞을 볼 수 없다만."
 "상관없어! 저 안으로 들어가면 글라이더를 풀어 버릴 거야. 내가 신호를 줄 테니까 정신 차리고 있어."

 수백 미터 앞에서 검은색 장벽과 같은 먹구름이 가까워졌다. 강력한 기류와 번개를 머금고 있는 구름이었다.

 "닥터? 방향타 상태가 좀 어떤지 말해 줘."
 
 선장은 너무 고함을 친 탓에 목이 쉬었는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조타실이랑 연결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수동으로 조작하는 건 가능해."
 "알았어. 내가 말하는 대로 조종하면 될 거야."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한 리스트가 선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젠장, 혼자서 다 하려고 좀 하지 말라니까! 뭘 하려는지 좀 알려 줘야지!'

 선장은 그대로 말이 없었지만, 선장의 생각을 이해한 듯한 시즈모어가 전성관을 통해 답변했다. 고함치는 것이 아닌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놈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거야."
 
 시즈모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가 치면서 사방이 잠시 동안 밝아졌다. 먹구름에 가까워질수록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선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총탑에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베르너는 기관총에 안전 장치를 걸고 사다리를 타고 선실로 내려간 다음, 한 층 아래의 격납고와 이어진 바닥의 덮개 문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아니. 여긴 두 명이 들어오기엔 너무 좁아. 심심하다 싶으면 기관실로 가서 닥터 좀 도와 줘."

 그리즐리는 현접호의 선원들 중에서는 베르너를 제외하면 가장 인간에 가까웠다. 용병으로 일한 탓에 인간인 부분이 거의 남지 않은 시즈모어나 초창기 강화병 프로젝트에 참여한 에버스만, 식사도 거의 하지 않는 수준으로 개조된 선장에 비하면 인공 성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베르너는 생각했다. 육군에서 공병으로 일한 적이 있는 그리즐리는 여러 장비의 점검을 담당했는데, 가끔씩 기관실에서 닥터의 일을 돕기도 했다. 

 "이봐, 베르너! 이것 좀 잡아 봐."
 
 격납고 바로 앞의 기관실로 통하는 문을 열자 냉기와 바람이 밀려왔다. 기관실에 포탄이 명중하면서 바깥 공기가 드나들 수 있게 된 탓이었다. 닥터는 기관실 내부의 기압을 유지하기 위해 방수 처리가 된 캔버스로 긴급 수리를 했지만 차가운 공기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 거길 붙들고......"

 닥터는 방향타에 커다란 금속 손잡이를 끼워 넣고 있었다. 방향타와 기관을 연결하는 파이프들은 급하게 땜질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 정도였기에 다행이지! 포탄이 반대쪽 선체를 거의 뚫고 나서야 터졌어. 직격이었다면 아예 고칠 방도가 없었을 거야. 아, 젠장.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겠구만. 받아 봐."

 베르너는 한 손을 뻗어 전성관을 집어 들었다. 엔진과 여러가지 장비들이 작동하는 소리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것을 우려한 것인지 기관실의 전성관에는 경종이 달려 있었다.

 "우현으로 전타! 내가 말할 때까지 돌리고 있어!"
 "뭐라는 거야?"
 "우현으로 완전히 돌리랍니다!'
 "이리 와 봐. 한 명이서는 돌아가지가 않는구만."

 베르너는 방향타와 연결된 손잡이를 힘껏 밀었다. 손잡이가 부르르 떨리면서 자이로스코프 안에서 나지막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갑판이 빠르게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좋아! 이제는 나 혼자서도 될 거야. 이제 이건 놓고 선장이 무슨 말 할때마다 좀 알려 줘."

 선장은 침착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배의 방향을 지시했다. 현접호는 기관을 정지하고 한참을 서 있다가도 갑자기 전력으로 전진했고, 불규칙하게 방향을 바꾸기를 반복했다. 기관실의 소음에 둘러싸인 베르너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현접호의 움직임을 그려 보려고 애썼다. 어느 순간 조타실에서 선체를 급상승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베르너는 선장의 지시에 따라 명령을 닥터에게 복창했다. 선체가 45도를 넘어서는 각도로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베르너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난간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지금이다! 수직으로 강하! 빨리!"
 "수직으로 강하!"

 닥터가 방향타 손잡이를 위로 밀어 올리자 뒤로 기울어져 있던 갑판이 순식간에 절벽으로 돌변했다. 베르너는 한 손으로는 전성관의 고깔을,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잡고 매달린 모양새가 되어 기관실 앞쪽으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요란한 엔진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베르너는 희미하게나마 대함 로켓이 발사되는 고음의 나팔을 부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타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베르너는 선체가 안정을 되찾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타실을 향해 달렸다. 선원들이 잠을 잘 때 쓰는 선실과 양 옆에 문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 선체 가장 앞쪽의 조타실에 이르른 베르너는 노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조타실 문을 열었다. 

 "진짜로 해냈다! 놈들이 추락한다!"

 조타실의 커다란 관측창 밖에서는 경비정이 불타고 있었다. 대함 로켓 여러 발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인지 날개 한 쪽이 떨어져 나가고 상부구조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3

 

 "자, 다들 정신줄 챙기고, 신호를 보내." 

 

 선장이 조용히 입을 열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조타실 바닥에 앉아 있던 리스트가 황급히 일어나서 조타실 한 켠에 설치된 신호기를 켰다. 열고 닫을 수 있는 셔터를 단 탐조등인 신호기는 레버를 짧게 혹은 길게 눌러서 불빛 신호를 보내는 데 사용되었다. 

 

 "내용은?"

 "그냥 아무거나 지어 내."

 

 리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냈다. 항복하지 않겠다면 다시 발포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경비정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승조원들이 죽거나 다쳐서 신호를 보낼 수 없는 상태이거나, 신호기가 파괴된 것일지도 모른다. 베르너는 선장에게 이 생각을 말할지 고민하다가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선장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변 없는데......"

 "좀 뜸을 들였다가 두번 더 보내고, 그때까지도 답변이 없으면 생존자 구조는 안 한다. 베르너? 아, 바로 옆에 있었군. 사물함 아래쪽 서랍에 사진기가 들어 있어. 뭘 해야 하는지는 알지? 그리고 배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베르너는 조타실 벽에 고정된 사물함을 열고 사진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묶어 둔 끈을 풀었다. 우표보다 조금 더 큰 필름을 사용하는 소형 카메라였는데, 화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튼튼했기 때문에 전쟁터의 종군 기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베르너가 철제 보관함 바로 옆에 있는 관측창에 사진기를 대고 셔터를 몇 번 열고 닫을 즈음, 그리즐리가 조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장, 텀블러는 그냥 미끼였던 거지?"

 

 그리즐리가 선장에게 물었다. 

 

 "저놈들, 우리 방향타가 고장났다는 걸 알고 있었어."

 

 선장은 조타기 앞의 나침반을 가리켰다.

 

 "경비정이 구름 뒤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어. 그런데 이걸 보라고. 바람벽 쪽으로 가고 있잖아. 저 안은 선체를 찌그러뜨릴 만큼 기압이 높아."

 

 리스트가 선장의 말을 정리하듯이 끼어들었다. 

 

 "놈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배를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움직이는 목표물보다는 멈춰 있는 목표물이 훨씬 맞추기 쉬우니까. 텀블러가 분리되었을 때 놈들은 우리가 배를 버린다고 생각했을껄?" 

 "그럼 폭약을 설치한 이유는?"

 "텀블러가 바람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지다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추락하면 우리가 사고로 죽은 것처럼 보였겠지...... 그런데 고맙게도 놈들이 텀블러에 충각 공격을 해 주었더군. 확실히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텀블러에 실어 둔 대함 로켓 탄두는 신관이 아직 살아 있었지. 저길 봐, 뱃머리가 다 우그러졌잖아. 조타수는 아마 무사하지 못했을걸?" 

 

 베르너는 사진기를 내려놓고 관측창 밖을 내다보았다. 기관포를 막아 내는 정면 장갑이라도 대함로켓 탄두 2개가 바로 앞에서 터지는 충격은 버틸 수 없다. 경비정의 유선형 뱃머리는 뼈대만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심하게 뒤틀린데다가 뭔지 모를 꿈틀거리는 심홍색 물질이 묻어 있었다.  

 

 "대장, 저기 뱃머리에 묻어 있는 것 말인데요, 혹시......"

 

 "아, 하긴, 베르너는 저게 뭔지 모르겠군. 실전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아마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정확히 말하면 혈액와 근육 조각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리스트, 경비정은 아직도 답변이 없나?"

 

 "그렇긴 한데, 누가 갑판 위를 걸어다니고 있어." 

 

 베르너는 신호기의 망원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신호를 보내는 대상에 불빛을 정확히 비추기 위해 장착된 것이었다. 보호복을 입은 승조원이 상갑판에 서 있었다. 한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다른 손에는 해군기를 든 상태였다. 보호복의 흉갑에 크게 새겨진 계급장은 그가 대위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손에 든게 뭔지 보이나?"

 

 선장은 타륜에 걸려 있던 쌍안경을 집어들었다.

 

 대위는 해군기의 깃대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한 손으로 깃발을 묶은 줄을 풀었다. 그는 바람에 사납게 펄럭이는 깃발을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리면서 반대쪽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제서야 베르너는 그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반자동 권총이었다. 

 

 "젠장, 자결해 버렸군. 항복은 절대 안하겠다는 건가......"

 

 기울어진 갑판 위로 쓰러진 대위의 시신은 두 번 가량을 굴러 까마득한 허공으로 던져졌고, 순식간에 베르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정이 배기관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기관을 죽인 거야. 다 같이 자폭할 생각인가 보군." 

 

 선장이 씁쓸하게 내뱉었다. 

 

 경비정은 천천히 떨어지다가 기관실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현접호는 잔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머물다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뱃머리를 돌렸다. 선실에 들어가서 쉬라는 선장의 말에 따라 베르너는 3층 침대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두 시간 뒤에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조타실로 집결해야 했다.  

 

 "에버스만, 그라임스, 맥나이트, 닐슨, 커스, 스트루커, 그리즐리, 시즈모어, 블랙번, 루이즈, 베르너...... 닥터 빼고는 아무튼 다 모였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만 총탑 하나가 못 쓰게 되었고, 외부 선체에 구멍이 몇 개 뚫렸고, 방향타는 수동 조작해야 하는 상태고, 아무튼 좋지는 않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방향타는 어쩔 수가 없어. 아쉽지만 수리를 받으러 가야 할 것 같군."

 

 선장은 배의 상태가 나쁘다며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몇몇 동료들의 의견은 달랐다. 특히 선장과 늘 사이가 좋지 못했던 닐슨과 블랙번 일당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런, 대장. 일 주일만에 이런 꼴이 난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벌써 돌아가자고? 방향타는 정말 고칠 수 없는 거야?"

 "닥터 말로는 지금은 전혀 방법이 없다더군. 거기다가 텀블러도 이제 한 척이 부족하니, 상선 같은 걸 발견한다 해도 승선조 전원이 한번에 올라탈 수가 없지."


 승선조는 상선에 직접 올라타 승조원들을 제압하는 역할을 맡는 기계 인간들을 의미했다.


 "본토까지 갔다가 수리를 받고 돌아오려면 보름은 걸릴 거야. 대장, 우리는 결국 용병이야. 해군 소속이다 뭐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전적 없이 돌아갔다가는 다시는 항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선장과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리스트, 그라임스, 그리즐리는 선장의 편을 들었다.

 

 "우리는 격침 톤수가 순위권에 들기 때문에 상관 없다니까! 해군을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마. 겨우 한번 정도 빈 손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계약을 해지시켜버릴 정도였으면, 3달 전의 그 선장은 진작에 변방으로 추방당했을걸. 왜, 선단 호위 임무 때 도망가버린 용병대장 있잖아."  

 "그 선단은 순양함 두 척에게 습격을 당한 거였어. 반면에 우리가 상대한 건 뭐지? 조그마한 경비정 한 척? 젠장, 대장. 애초에 대장이 해도만 제대로 봤어도 이런 일은 안 생겼을 거야."

 "해도에 구름 모양까지 나오는 줄은 몰랐군, 블랙번 하사.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앞으로는 그쪽이 지휘하도록. 잠시만, 그러면 살아 돌아갈 수가 없잖아?"

 

 그라임스의 빈정거리는 한 마디에 분노한 블랙번은 성인 남성의 몇 배 힘을 낼 수 있는 기계 팔로 단검을 순식간에 빼들었다. 그라임스는 이에 맞서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았다. 쇠칼이 날아다니려던 찰나, 선장이 고함 소리와 함께 막대형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당장 그 흉측한 것들을 집어넣지 않으면 네놈들을 폭파해 버리겠다! 투표로 결정할 테니,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도록."

 

 몇몇 사람이 손을 올렸다. 

 

 "반반이라니, 이런. 그러면 다시 할까?"

 

 순간, 베르너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돌아가기로 결정인가. 해산!" 

 

 블랙번은 스쳐 지나가며 기계 팔의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베르너의 옆구리를 찔렀다. 실수로 그랬다기엔 어색한 모양새였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베르너는 블랙번의 분노하는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고 뒤돌아섰다.

 

 "아, 베르너. 할 말이 있다." 

 

 조타실을 나서려는 베르너를 선장이 불러세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고 있던 수류탄은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아까 전에 하던 말을 다시 하자면......"

 

 선장은 사물함에서 설계도로 보이는 종이 몇 장을 꺼내 해도가 놓인 책상 위에 펼쳤다. 동맹국 구축함의 설계도였는데, 기관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져 있었다.

 

 "동맹국은 특이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짐승의 살과 내장으로 기계를 만드는 기술이지.

 

 동맹국의 제 3 공화국은 아직까지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한 연구소 덕택에 생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세계 최고에 달했다. 그들은 동물의 근육과 장기, 심지어는 뇌 일부를 활용해서 살아 있는 군함과 전차, 보행병기까지도 만들어 냈다. 한참 동안 그리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동물 학대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꼽히기까지 했던 이 놀라운 기술은 선대 황제의 후원으로 급속하게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생체 기관에 대한 이야기는 기초 훈련 때도 들었습니다. 그저 기계가 생물처럼 피를 흘린다는 것이 신기해서......"

 

 "하긴, 좀 충격적이긴 하지. 어찌 보면 저건 배를 만든다기보다는 동물에게 강철 껍데기를 씌워 주는 것에 가까우니까. 일단 겉보기에도 일반적인 기관에 비해 단점이 훨씬 많아 보이지. 동맹국 포로들한테 듣기로는, 생체 기관은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라더군. 지휘관과 기관이 서로 잘 맞지 않으면 기관이 반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 이건 기밀이긴 한데....... 하긴, 말해줘도 별 이상은 없겠지."

 

 선장은 평소 본인이 잘 아는 주제가 등장하면 쉴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주제라면 더욱 말이 많아졌다. 그가 주의를 집중시킬 때 즐겨 쓰는 말은 '이건 기밀인데......' 였지만, 실제로 기밀 사항인 정보는 거의 없었다.

 

 "일단 기관으로 가공할 대상이 필요한데, 기관의 쓰임새에 따라서 필요한 동물의 종류도 달라지지. 짐승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내장만을 도려 내는지, 또 그걸 어떻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어. 제 3 공화국에도 정확한 원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껄? 다만 포로로 잡힌 구축함 함장이 '살아 있는 미라를 만드는 것' 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 걸 보니 꽤나 지저분한 일인 모양이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요?"

 "확실히 그쪽 지휘관들은 생체 기관을 선호하는 것 같긴 해. 가장 큰 장점은, 연료가 거의 필요 없는 기관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이겠지."

 

 베르너가 마지막으로 읽어 본 전술 교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었다.  

 

 "그런 기관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거죠? 그건 분명......"


 선장은 베르너의 말을 끊었다.


 "으음...... 물리 법칙을 죄다 무시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일단 한번 들어 봐. 고래는 성체가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지? 그게 다 몸 속에 있는 어떤 장치 덕분이라는 거야. 이 장치는 태양과 비슷한 기능을 해서 거의 무한한 동력을 만들어 내는데, 제 3 공화국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이 장치를 사용한 생체 기관을 개발했다더군. 상용화되는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말이야.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소형함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전함 같은 대형함에게는 이상적인 동력원인 셈이지."

 "본국에서는 그런 걸 만들 수 없는 건가요?"

 "당연하지. 격침한 군함에서 기관을 노획하는 방법도 고려해 봤지만, 동맹국 놈들이 기관을 확실하게 파괴해 버리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어."

 "잠시만요. 아까전에 기관을 죽였다고 했던 게......"

 "약물을 주사해서 기관을 안락사시켜 버리지. 그렇게 망가진 기관에서는 건질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대장,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유는?"

 "아, 그냥.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이제 들어가 봐. 내일부터는 해상 봉쇄를 뚫어야 하니, 지금부터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베르너는 선실로 돌아갔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아직 잠들지 못한 몇몇이 고개를 들어 베르너를 바라보고는 다시 누웠다. 선실 한 켠에서는 잠을 청할 생각이 없는 듯한 블랙번과 루이즈가 수군대고 있었다. 베르너는 3층 침대에 누워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고 애썼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4


 현접호가 본토로 돌아오기 위한 항해를 시작할 무렵, 최남단 함대의 로제스트벤스키 해군 제독은 긴 여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남부 식민지 최남단의 거점인 클라인 군항에 주둔한 최남단 함대는 구식 전함 10척, 순양함 25척, 구축함 10척 이상의 서류상에서는 엄청난 전력이었지만, 지노비 제독을 비롯한 다수의 해군 지휘관들은 이 함대가 구식 함선들을 위한 요양원 같은 곳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승조원들은 오랜 시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했고, 함선들은 대부분이 무가치했다. 구식 전함 10척 중 7척은 깡통이나 다를 바가 없는 철갑함이었고, 순양함 일부는 정비 부족으로 인해 항해조차 곤란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최남단 함대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상부는 아직 가치를 지니는 몇몇을 제외한 함대의 다른 함선들을 고철로 재활용하기로 결정하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최남단 함대 사령관으로써의 마지막 임무를 부여했다. 50여 척에 달하는 함선들을 이끌고 무사히 본국까지 귀환하는 것이었다.

 제독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제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지난 몇 년 동안 군 생활을 한 항구를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본국으로 돌아간 뒤 북부로 재배치될 제독은 더 이상 클라인 항에 올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 산책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가던 제독은 마침 없어진 선원을 찾기 위해 배에서 내린 막시밀리안 셰어 선장을 만났고, 잠시 대화를 가졌다.

 "이렇게 보는건 또 오랜만이군."

 제독이 인사를 건네자, 셰어 함장은 다소 지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는 기함인 카노푸스 함을 지휘했고, 제독은 그를 함대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함장은 해군사관학교와 포술학교를 졸업한 뒤 남부 식민지 개척 원정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는 개척된 식민지들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최남단 함대에서 복무하기를 선택했다. 제독은 가끔 그가 그 결정을 후회하는지 생각해 보곤 했다.

 "오랜만일 수밖에요. 마지막으로 출항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니까."

 함장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제 이 짓거리가 너무나도 지겹습니다, 제독. 오늘 아침 점호가 끝나고 사격 훈련이 있었는데......"
 "아니, 사격 훈련을 할 포탄이 있었다고? 왜 보고하지 않은 거지?"

 가장 가까운 항구와도 며칠 거리일 만큼 외딴 곳에 위치한 클라인 군항은 늘 보급 문제에 시달렸다. 이것은 병사들의 훈련 수준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였다. 주기적으로 사격 훈련을 할 만큼 탄약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을 것은 없었는데, 함선의 갑판에 흙을 덮고 식물을 길러야 할 정도였다.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려는 시도는 현지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실패했다. 대부분이 광업에 종사하는 클라인 항 주변의 주민들 역시 추운 날씨 때문에 식량이 풍부하다고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는 탄약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본국까지 귀환하는 도중 적함을 마주칠 확률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적재된 탄약의 양을 조금 줄이더라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좋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면, 사격 훈련을 하던 중 수병 몇 명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포탑 하나가 응답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훈련을 중지시키고 배를 수색해 보니 구명정 하나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훈련 때문에 배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병사들이 도망친 것 같아 시내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입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지난 몇 달 동안 도망친 병사만 20명이 넘고, 그 놈들을 찾자고 한 고생을 다 말하자면 며칠은 걸릴 겁니다. 여객기에 탑승하는 데 성공한 탈영병들을 잡기 위해 토르스하운까지 가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함대가 해체된다는 소식이 기쁠 지경입니다."

 제독은 함장을 위로하고자 그에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코냑 한 병을 건네주었다.

 "애초에 제대로 관리도 안 되는 식민지를 돈 들여 개척한 게 문제지. 다른 배들에게서 들은 소식은 없나?"

 함장은 술병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시고 대답했다.

 "으음...... 다른 배들이 어떤지는 그리 많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플렉시블 함의 기관이 상태가 영 좋지 않다고 합니다. 3단 팽창 증기기관이 아니라 부유 기관이 문제라고 합니다. 계속 출력이 떨어진다더군요. 늘 그렇지만 이유는 모릅니다."

 함장은 손가락으로 항구 상공에 떠 있는 전함을 가리켰다. 마치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것처럼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토해 내고 있었다. 부유 기관의 기본 출력이 너무 떨어져서 증기 기관을 추가로 가동해야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상황인 듯 했다.

 "아직까지 멀쩡히 떠 있긴 한데, 아무래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 합니다."

 함선들을 공중에 띄우는 부유 기관은 정식 명칭이 따로 없었고, 사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기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한지조차 알 수가 없는 이 장치는 막대한 양의 힘을 담고 있는 발광체와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공장에서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광산에서 완제품의 형태로 채굴되는 것이었다. 부유 기관은 수백 년 노천 은광의 지층 속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한 세기 전 뉴커먼이 기관의 제어 장치에 보조 기관을 연결하여 안정적으로 작동시키는 방법을 개발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작동 원리를 포함한 많은 것들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어떻게 이런 복잡한 장치들을 수천, 수만 개 만들어 땅에 묻어 놓은 것일까? 제독은 그간 수많은 관련된 논문을 읽어 보았지만, 믿을 만한 것은 드물었다. 땅 속에서 일련의 화학 작용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다는 가설은 그럴 듯했지만 그 화학 작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히 설명하지 못했고, '초고대 문명' 이 부유 기관을 만들었다는 속설은 들어 볼 가치도 없었다. 

 막시밀리안과의 대화를 마친 제독은 거처로 돌아가 개인 비행정을 불렀다. 부유 가스가 든 풍선으로 공중에 뜨는 것이었다. 제독은 비행선에 올라타면서 조타수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 기함으로 가자고 말했다. 조타수가 버너를 작동시켜 부유 가스의 온도를 높이자 비행정은 천천히 상승했고, 제독은 갑판의 해치를 통해 선실로 들어가 관측창 앞의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군항 상공에 정박한 카노푸스는 각종 보급품들을 싣고 있었다.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낡은 전함은 여러 척의 보급선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선원들은 갑판 위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식량과 연료를 배에 싣고 있었다. 제독은 조타수에게 다시 지시를 내리기 위해 해치를 열고 외쳤다.

 "이봐! 카노푸스 주변을 한 번 선회하고, 저쪽에 있는 인플렉시블 쪽으로 가자. 되도록 빨리......"

 조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행정의 방향타를 한 쪽으로 크게 돌렸다. 왼쪽으로 기울며 한 바퀴를 돈 비행정의 뱃머리가 향한 전함은 눈에 띄게 고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최남단 함대 소속의 전함들은 모두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만들어지기 전에 건조된 구식 전함이었는데, 인플렉시블은 그 중에서도 특히 낡아 제대로 된 정비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어가는 함선이었다. 제독은 선원들이 갑판 위에 집결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비상 착륙 절차 중 첫 번째였다. 비행정이 전함의 갑판 위를 지나가자, 제독의 비행정을 알아본 선원 몇몇이 경례를 했다. 제독은 조타수에게 비행정을 사령탑 옆에 가까이 붙이라고 말했다. 

 "함장! 문제가 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인플렉시블의 함장은 비교적 경력이 짧은 스티븐슨이었다.

 "제독? 모르겠습니다! 기관 출력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을 최대 출력으로 유지하고 있는데도 부유 기관 출력이 4분의 1 정도에서 멈춰 있습니다."
 "기관 재시작 절차를 시도해 봤나?"
 "으음...... 그건......"

 부유 기관은 작동 원리가 불명확한 탓에 가끔씩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한 예로 잘 작동하는 기관이 갑자기 정지하는 현상이 종종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보조 기관을 활용해 기관의 재시작을 시도해야 했다.

 "설마 기관 재시작 절차를 아직 시도하지 않았다는 건가? 자네는 사관학교를 도대체 어떻게 졸업한건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지금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제독은 어이가 없었다.

 "선원들이 죄다 갑판에 모여 있는데 뭘 어쩌려고! 그냥 비상 착륙 절차를 수행하고, 고장난 부분은 나중에 수리해야지 뭘 어쩌겠어."
 "제독! 하지만 오늘 본국으로......"

 제독은 허탈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었다.

 "나에게는 네놈이 지휘하는 그 깡통을 데리고 본국까지 갈 인내심이 없다! 수리가 끝나는 대로 알아서 본국까지 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자신이 있으니 함선 관리를 그렇게 엉망으로 하는 것이겠지. 네놈을 호위할 순양함과 구축함 몇 척 정도를 남겨 놓을 테니 걱정 말도록."

 제독은 비행정을 돌려 계속해서 뭐라 소리치는 스티븐슨을 두고 기함으로 향했다. 인플렉시블은 계속 고도가 떨어지다가 눈 덮인 공터에 천천히 내려앉았고, 제독은 전함의 하층 갑판 몇 개가 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뭉개지면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서진 갑판에 승조원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몇 시간 뒤, 이전의 작전 회의에서 정한 출항 시간이 되자 카노푸스는 기적을 울리며 천천히 항구를 떠났다. 아직까지도 항해를 하지 못하는 몇몇 함선들과 기관이 고장난 인플렉시블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함선들이 카노푸스를 뒤따랐다. 함대는 몇 시간 동안 항해하여 남부의 얼어붙은 바다 위에 이르렀고, 기함의 신호에 따라 고도를 높였다. 고도 사 킬로미터에 이르자 카노푸스의 모든 해치가 닫혔고, 갑판에서 작업하는 대공포반은 보호복을 착용했다. 

 항해 시작 후 며칠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적함을 마주치지 않았고, 고장난 함선도 없었다. 그렇지만 배들의 통행량이 많아지는 해역에 이르자, 몇몇 의욕이 넘치거나 과도하게 겁을 내는 병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기항지인 플롬 근처에서는 한 순양함이 존재하지도 않는 동맹국 어뢰정의 접근을 보고하는 일이 있었고, 결국 출항한 지 2주일 만에 큰 사고가 터졌다.

 카노푸스의 부포들이 갑자기 불을 뿜기 시작했을 때, 함대는 항로 두 개가 겹치는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포성을 들은 제독과 함장이 황급히 무슨 일인지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사방에서 적함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독은 당장 발포를 멈추라고 지시했지만, 겁을 먹거나 흥분한 선원들은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카노푸스가 발포하는 것을 본 다른 함선들까지 사방으로 포를 쏘기 시작했다. 결국 셰어 선장은 배 곳곳을 뛰어다니며 승조원들을 말려야 했고, 제독은 직접 무전기를 잡고 발포를 당장 멈추라는 신호를 함대 전체에 보냈다.

 함대가 잠잠해지자, 머리끝까지 분노한 제독은 포술장에게 사령탑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봐라! 무슨 짓을 한 건지 좀 보란 말이다! 저건 어뢰정이 아니라 화물선이다!"

 카노푸스의 선원들은 평화롭게 항해하던 몇몇 화물선들에게 때아닌 날벼락을 선사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함대는 며칠 동안 기항지인 누크에 머물어야 했고, 제독은 해운 조합을 찾아가 손상을 입은 화물선의 선주와 선원들에게 직접 사과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병사들의 포술이 너무나도 나빴던 탓에 심한 손상을 입은 배는 없었다. 오히려 손상을 입은 것은 함대의 함선들이었다. 항구에서 카노푸스의 장갑판을 점검해본 결과 탄흔 최소 6개가 발견되었다. 몇몇 순양함들이 두려웠던 나머지 아군 함선들의 위치마저 잊고 서로에게 발포했던 탓이었다.

 제독은 함대 사령관을 사임할 것을 상부에 건의했지만, 당연하게도 거절되었다. 

 이후의 항해도 말썽의 연속이었다. 어선을 어뢰정으로 본 견시 때문에 오발 사고가 한번 더 있었고, 구축함 두 척이 서로 충돌하는 사고가 났고, 함대가 트롬쇠에 정박했을 때는 갑판병 여러 명이 또다시 도망쳤다. 기항지에 들릴 때마다 승조원들이 가지고 오는 기념품들도 문제가 되었는데, 남부의 이국적인 동물들을 애완동물 삼는 승조원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나머지 베르겐에 도착할 무렵에는 갑판을 뛰어다니는 동물들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될 정도였다. 물을 제대로 끓이지 않은 탓에 배 안에 풍토병이 돌기도 했고, 오랜 항해에 지친 승조원들이 정신 질환을 호소하는 일도 잦았다. 심지어 한 순양함에서는 장교들이 배 안에 숨겨 둔 술을 마신 갑판병이 고도 10킬로미터에서 갑판 해치를 여는 일이 있었는데, 어째선지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순양함의 함장이 재빠르게 대처하여 기밀문을 닫았지만, 무려 20명의 승조원들이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수많은 불협화음 때문에 항해 막바지, 본국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기항지인 하마르를 며칠 앞두고 전함 인빈시블이 적 전함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을 때, 제독은 반신반의는 커녕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대낮에 어선과 어뢰정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놈들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는 한밤중에 전함을 발견했다고?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셰어 함장마저 적함 여러 척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자, 제독은 보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곳은 정말로 동맹국 함대를 마주칠 수도 있는 지역이었던 탓이었다. 제독은 침실을 나와 사령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셰어 함장에게 물었다.

 "적함의 규모, 숫자, 위치를 좀 정확하게 말해 봐."

 셰어 함장은 해도 위에 모형 함선 몇 척을 올려놓으면서 대답했다.

 "4시방향, 20km가 살짝 안 되는 거리이고, 계속 가까워집니다."

 제독은 최남단 함대가 제대로 된 동맹국 함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승조원들을 깨워. 모든 함선들을 10시 방향으로 돌리고, 전속력으로!"

 함장은 비상벨을 울렸다.

 "전원 전투 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