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휴, 내가 못 살아"

저 인간, 이번엔 또 무슨 지랄을 했는지 거지행색을 하고 쳐맞고 있다.

5분전, 나는 언제나 처럼 저 놈이 여행가자고 졸라서 온 동부지방의 관광지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가 뭔가 발견한 듯이 한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나보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순순히 듣긴 했지만 뭔가 께름칙해 그를 따라갔다.

그는 외진 골목길에서 삥뜯기고 있던 소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경찰을 부르겠지.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인지 멀쩡하던 옷을 다 찢고 머리를 헝클고 불량배들에게 일부러 부딪혀 놓고서는

"아이고, 아이고 이 늙은 이가 앞이 안보여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장님에 노인네 행세까지 하며 맞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그를 도와주려 했으나 그는 하지마라, 가라고 손짓했다...

대체 뭐야?


이윽고 불량배들은 제 풀에 지쳤는지 기분 잡쳤다며 가버렸다.

소년이 "아저씨 괜찮아요?"라고 물어보자 그는 갑자기 소리쳤다.


"들어라 소년!"

갑작스런 호통에 소년은 어안이 벙벙해 졌지만 나는 그 다음 대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하 진짜, 내가 미쳐."


"이것이,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기를 택한 죄인의 말로다. 빼앗는 자들은 그 다음은 더 큰 것을, 그 다음에는 너의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며, 마지막은 너의 신체와 영혼, 심지어 소중한 사람마저도 내놓으라 할 것이다. 도망치지 마라! 맞서 싸우는거다!


"그치만 저 형들 너무 힘도 세고, 제가 이길 수 없는걸요..."


"You fucking weak!"


또 한번의 호통에 소년이 화들짝 놀랐다.


그래, 그 대사 나올 때 됐지?


"약한 것은 죄가 아니나. 강해지려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ㅡ Understand? You FUCKING WEAK!"


"으... 으앙! 이 아저씨 뭐야 이상해! 무서워!"


소년은 도망가고 그 놈만이 홀로 남아 독백했다.


"그래... 너는 이렇게 죄 짓지 말고 살아라..."


"지랄하네 진짜."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용사 아르카>의 죽은 아버지가 되어 본 기분은?"


"일단 부축 좀 해줄래...? 허리가 빠개질 것 같아서 말이야."


-


내 남편은 얼간이다. 헛된 망상이나 하는 멍청한 오타쿠이다. 소설, 만화... 그중에서도 소년만화를 특히 좋아하며, 가끔... 저런다.

집에 책장에는 피규어와 만화, 소설이 가득하며, 그중에는 그가 쓴 소설도 있다.

판매량은... 그럭저럭이다. 딱히 대박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자기가 쓴 소설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지금와서 보면 생활비도 위태로운 푼돈이지만, 부모님한테 용돈타 쓰는 고딩들 중 몇몇 철없는 이들의 눈에는 자취하고, 사고싶은거 사고, 여행가고 하는 그는 참 멋있게 보였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세상의 온갖 절경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곤 했었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었고, 피아노는 어찌나 그렇게 멋들어지게 치던지...(죄다 게임 브금들이었지만) 몇몇 철없는 이들은 그런 모습에 반하곤 했었다.

나도... 그 철없는 고딩 중 한명이었고.

그의 등에 파스를 발라주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이 놈은 원래 이런 놈이었어. <팀 카마야시>를 보고 파쿠르 한답시고 후드티 입고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넘기 하다가 주민신고 걸렸던 적도 있고, <바람의 검객 요스오>를 보고 학교에 장검을(가검이긴 하지만) 들고와 발도술을 보여주다가 압수당한 적도 있고... 그리고 <사랑의 계절> 24권을 완독하고는 졸업식에서...

졸업식에서...

그래도 아무리 철이 없었다지만 그땐 진짜 미쳤었지.

수능공부도 던져버리고 고등학교 졸업식에 프러포즈를 해버리는 남자랑 결혼을 하다니...

졸업식의 마지막 순서로 교가제창을 하고, 지휘를 하던 내가 단상에서 내려가려는 찰나 방송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었어.


"잠시만요. 아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학생여러분, 잠시 자리에 계셔 주십시오."


그리고는 흠흠, 하며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단상에 서 계시는 이선화 양?"


이라며 내 이름을 불렀어. 그리고 내가 당황해서는


"네?"라고 하자 그가 마이크를 들고 학생들 사이를 가르며 나와, 뒤에있던 스크린에 그동안 나에게 보여준 사진들을 띄웠어. 문예창작부 부실에서, 우리가 창작한 이야기의 배경으로 쓰이곤 했던 그의 여행 사진들...

그리고 학생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그가 다시 이야기 하기 시작했어.


"나는, 아름다움을 찾아 온 지구를 헤매었지. 그런데 멀리 갈 필요는 없었던 것 같네. 지중해의 햇살보다도, 향긋한 튤립밭보다도 아름다운 것이 바로 여기 있었어."


학생들이 웅성거렸고, 웅성거림은 반지를 내밀며 던진 그의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비명에 가까운 환호로 바뀌었지.


"내 인생의 아름다움이 되어줘."


얼떨결에 반지를 받는 순간. 그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려서는


"선화야! 싸랑한다!" 


라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며 달려나갔어. 밖에는 어디서 빌렸는지 오픈카를 대기시켜놨었지.

그래, 이 놈은 이런 놈이었어...


하 진짜, 이딴 놈이랑 왜 결혼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