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릭터 특성 부여를 위해 ~노 등의 사투리가 포함된 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지역감정에 찌든 정치병자가 절대 아니며, 또한 특정 정치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1월 24일.


수능도 이틀 전에 끝났고, 이제 남은 건 학교 축제와 방학 뿐이었던 11월 말의 어느 날이자,


사실상 11월의 종언을 고하는 날이었다.


방금 막 종례를 마친 교실은 요란했다.

동삼고등학교 3학년 이유리는 짱친 윤서를 만나기 위해 혼잡하기 짝이 없는 교실을 가로질렀다.

“오늘도 거기 갈거야?”

“어, 가지싶은데.”

“그럼 빨리 가자. 나 오늘 친척 만나러 서울 올라가야되서.”

“알았다, 알았다.”


유리와 윤서는 교문의 인파를 뚫고 학교 옆 카페로 향했다.

“뭐 마실 거야?”

“난 늘 마시던거로. 설탕 3개 넣으래이.”

“너 맨날 그거만 마시더라. 안 질려?”

“설탕 들어간 거는 안 질린다.”

몇 분 뒤, 유리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카페 문을 나섰다.

“여기 니 꺼.”

“땡큐.”



둘은 학교 옆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고운 모래가 노을에 비춰져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윽고 동네의 한 작은 항구에 들어서자 갈매기가 산 쪽에서 튀어나와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오, 흰색 비둘기다. 근데 얜 잘 날아다니네?”

“그야 가는 비둘기가 아니라 갈매기니까 그렇제..”

“아 갈매기였구나.”


유리는 갈매기를 쫓아 부둣가를 달려갔다. 

그러자 유리가 들고 있던 커피가 유리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떨어진 커피 컵은 부둣가를 구르더니 옆에 있던 한 어선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 내 커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갑판에 커피가 어느 정도 엎질러져 있었다.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기달려봐래이, 주워 오께.”

윤서는 커피를 내려놓고 배에 올라타 아직 반 정도는 남아 있는 유리의 커피를 집었다. 

“다 배맀네. 그래도 바다로 안 떨어져서 다행이다.”

“땡큐.”


유리가 윤서에게서 커피를 받자마자 저 멀리 어딘가에서 섬광이 일었다.

잠시 뒤, 섬광이 빛난 자리엔 칠흑같이 어두운 먹구름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근데 니 뒤에 저거 뭐꼬? 구름 같은데.”

“구름? 어디?”

“저기 저쪽에. 어째 점점 커지는 거 같다?”

“뭐야 저거?”

두 사람이 거대한 먹구름을 구경하는 동안, 폭발 후폭풍이라 불리우는 뜨거운 바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이 바람은 부둣가에 서 있던 유리를 바닷가로 밀치며 주변 공기를 순식간에 달구었다.


“꺄악!”

“괘안나? 안 다칬나?”

“앗 뜨거! 안으로 들어가자. 빨리!”

“이게 뭐꼬!”

둘은 필사적으로 선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밀어닥치는 바람에 맞서 겨우 선실의 문을 닫는 데 성공한 윤서는 선실 한켠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한숨 돌렸네.”

“아까 그 바람은 도대체 뭐지?”

“일단 바람 좀 멎을 때까지 여 있자.”

“그러자.”

그러나 불행히도, 밧줄이 불타서 끊어진 배는 항구를 떠나 점점 먼바다로 떠내려갔다.


한참 후, 유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문 너머는 아까 전의 후폭풍은 지나간 듯 했지만 실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길 건너의 가로수들은 뿌리가 뽑혀 쓰러진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폭삭 내려앉은 단골 카페, 불에 휩싸인 채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학교..

이 일대가 겨우 몇 초만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이다.


유리는 밖을 보자마자 절망하고서 다시 문을 닫았다.

“바깥이.. 완전히 불에 휩싸였어.”

“맞나?”

윤서는 선실 문에 난 작은 관측창으로 바깥을 들여다보았다.

배는 점점 육지로부터 멀어져갔지만 윤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바깥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가에 한눈이 팔려 있었다.


“참말이네.. 이 우짜면 좋노?

그보다 우리 지금 바다 위 아이가?”

“뭐야 그럼.. 우리 지금 떠내려가는 거야?”

“그런갑다. 우짜노 이거?”


절망과 좌절이 지나간 선실 내부에는 곧 적막함이 찾아왔다.

유리가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였다. 곧 은박지에 싸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콜릿, 먹을래?”

“어.”

두 사람은 손바닥만한 비상식량 초콜릿을 나눠 먹었다.

그러던 사이, 둘이 탄 배는 항구를 빠져나와 먼바다를 향해 계속해서 떠내려갔다.


윤서는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두고 선수 방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앞쪽 조종실에는 키와 각종 계기판이 놓여 있었다

‘일단 이걸 어떻게 해 봐야 되돌아가든 탈출하든 하겄제.’

그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남기고 간 것처럼 항해 설명서가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윤서는 아직 비닐도 뜯기지 않은 조종석에 앉아 주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이게 속도 조절기. 이건 동력 가동이구만.’

윤서는 빨간 색으로 강조된 레버를 힘껏 밀었다.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산항만청 소속 연안어선 한산호가 역사적인 첫 출항을 하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런 진동에 놀란 유리가 함교 구역에 들어왔다.

“뭐야 갑자기..?”

“이 배, 조종하는 법을 방금 알았다 아이가."

“그럼 다시 육지로 들어갈 수 있어?”

“뭐, 몬하는 건 아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래이.”

윤서는 조종석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편, 동네 인근의 어느 방파제.


노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등진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