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13년, 3월 29일.

 

유경하는 해풍이 부는 여객선의 갑판에 선 채로, 난간에 기댄 채로 서서 바다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속적인 바다의 풍경 탓에 제대로 체감하기 힘들었지만, 유경하가 탄 배는 확실하게 도카이도의 앞바다를 항해하며 도쿄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태평양이 너무 넓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도카이도(東海道)란 분명 유경하가 읽었던 일본의 지리에 대해 설명한 책에 나와 있는 단어였다. 옛 에도, 지금의 도쿄부터 교토까지 약 5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연결한 육로와 그 주변의 번국들을 통칭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유경하가 탄 배가 이제 카나가와의 미우라 앞바다를 거쳐 도쿄 만의 요코스카 앞을 지나친 뒤 도쿄로 향하는 동안, 유경하는 생각에 잠겼다.


‘도쿄에는 얼마나 더 있어야 도착하는 걸까.’


유경하가 탄 여객선은 부산에서 출발해 도쿄로 향하는 배였다. 경성에서 출발한 아카스키 호 기차를 타고 7시간 뒤 부산에 도착한 후, 다시 그곳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시모노세키와 키타쿠슈 사이의 좁은 해로를 지나 시코쿠, 와카야마, 도카이도의 앞바다와 도쿄 만을 멈추지 않고 순항한 지 정확히 이틀이 지난 채였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편을 구해 출발했고,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경유지에는 때때로 도착해 연료나 화물을 실었지만 추가 승선이나 하선도 없이 빠르게 출발했기에 유경하는 지금까지 여관에 숙박한 적이 없었고 수면은 전부 선실의 침대에서 해결했다. 비록 가장 높은 등급의 객실이라 해도 역시 배의 흔들림은 사라지지 않아서 깊게 잠들지 못하고 중간에 깨는 일이 잦았다.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피로감을 느낀 동시에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유경하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유경하가 이제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무렵, 선내에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 아- 이제 곧, 도쿄- 도쿄에 도착합니다.”


여객선 내부에 기계음이 섞인, 일본어로 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저 멀리 작은 점으로 육지가, 도쿄가 보이며 그 점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도쿄는 더욱 더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가득한 해면 너머로 제국의 최대 도시가 보이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경하는 배의 객실로 내려갔다. 


‘도쿄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 열쇠를 동봉함.’


유경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객실에서 짐을 챙기며 조선에서 출발할 때 받았던 편지지를 들고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앞으로 유경하가 도쿄에서 지낼 집의 주소였으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편지 봉투에 들어 있었던 열쇠를 꺼냄과 동시에 유경하는 객실의 책상 위에 올려진, 아직 뜯지 않은 편지 한 통을 조심스레 들었다. 발신인은 ‘미나모토 소타로(源奏太郎)’, 수신인은 ‘야나기 케이나츠(柳景夏)、’로 된 그 편지는 조선에서 살 때부터 연락하고 지내던 한 내지인이 보낸 편지였다.


발신자의 주소는 도쿄 하라주쿠, 수신자의 주소는 경성의 혼마치로 된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도착할 도시의 어떤 집에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유경하는 편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그 다음으로는 책상 위에 읽다가 만 영어로 된 소설 책 한 권을 덮고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중후해 보이는 짙은 남색의 표지로 된 두꺼운 책에는, 영어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제목이 금색 라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미국의 마가렛 미첼이라는 한 소설가가 지었다는 방대한 내용의 그 소설은 조선에서 출발하기 바로 전날에야 구할 수 있었고, 선실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지만 아직 20분의 1도 다 읽지 못한 채였다.


‘집에 도착하면 그 때 읽자.’


모든 짐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은 직후 배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유경하는 마지막으로 잊은 것이 없는지 확인한 뒤 짐을 들고 출입구로 내려갔다. 


“짐 전부 챙겼어? 잊은 건 없지?”


“선실 너무 흔들리더라.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출발한 지 이틀이나 돼서야 도착인가...”


유경하가 있었던 1등 선실에서 2등 선실로, 3등 선실과 하부의 출입구로 향하는 도중에 자신처럼 짐을 들고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전부 방금 전 선내에 울린 스피커의 목소리처럼 내지의 일본어를 구사하며 유경하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본래 자신이 하지 않던 말이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대화를 뒤로 한 채, 유경하는 해풍을 맞으며 출입구를 내리는 배의 뒤편에서 바다의 끝에 자리한 도시를 보았다.


태평양으로부터 밀려 온 파도가 씻어 내린, 도쿄의 항구 너머로는 수십 년이 넘게 쌓아 올린 도심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콘크리트와 나무, 철심과 석재로 이루어진 건물들의 너머로는 눈이 쌓인 후지산이 보였다. 넓은 간토의 평야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늘어서며 거대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쇼와 13년, 1938년의 봄에 유경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쿄에 도착했다.


항구를 나와 유경하는 천천히 도시를 향해, 자신이 앞으로 지낼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에 있는 집을 향해 길을 걸어 갔다. 자동차와 자전거가 돌아다니는 넓은 도로의 양쪽에 놓인 인도를 걸으며 유경하는 조심스럽게 주변의 모습을 보았다.


서점, 상점, 카페와 수많은 건물들이 양 옆으로 늘어선 거리에는 유경하처럼 양복을 입고 있거나 기모노를 입은 내지인들이 돌아다니며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음악과 분위기와 오늘의 날씨는 너무나도 맑았지만 왜인지 유경하는 그 분위기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만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야나기 케이나츠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본어를 사용했지만, 유경하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었으니까.


자신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비관을 품은 채, 유경하는 활기차면서도 쓸쓸한 3월의 거리를 걸어 갔다.




얀데레 채널에도 올렸던 1930년대 일본 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올리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