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하는 일어나자마자 바로 1층으로 내려가 몸을 씻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닦인 마루 위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그것은 기름을 칠한 듯 광택이 나는 복도의 바닥에 반사되어 집 안을 밝히고 있었다. 경하의 하얀 발이 그 위를 걸으며 닿고 떨어질 때마다 마루에서는 작은 소리가 났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의 층계참에서, 경하는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내려다 보았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그 정원의 호수는 전과 변함 없이 평정한 수면을 유지하며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옷장을 열고, 경하는 조선에서 출발했을 때 사 어제 입었던 그 양복을 꺼냈다. 셔츠와 코트와 바지, 조끼까지 모든 것을 꺼내 외출을 하기 위해 그것을 몸에 걸치며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장롱의 문 안쪽에 붙여진 거울은 정확히 경하의 흉상까지를 비추고 있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경하는 장롱의 문을 닫고 책상의 서랍에서 지갑과, 고등학교 입학 안내서를 꺼냈다.


“이 정도면... 교복은 충분히 살 수 있겠지.”


조선은행에서 발행하는 원이 아닌 일본은행에서 발행하는 엔으로 된, 지폐와 동전들을 확인하고선 경하는 조용히 말했다. 조선에서 쓰는 화폐는 일본에서 통용되지 않았기에 경하는 출발할 때부터 그것들을 전부 엔화로 바꾸어 두었었다.


경하가 지금 옷을 입고 외출을 하려는 것은,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어 새로운 교복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경하는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을 중학교 때의 교복을 조선에 두고 온 채였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경하는 이제 더 이상 조선에서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기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것들을 전부 조선에 놔두고 그대로 일본으로 왔기에 그 교복 또한 조선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었다.


“교복 구매처는... 도겐자카 양복점?”


경하는 ‘제1 고등학교 입학 안내서’ 에 적힌, ‘교복 구매처’ 문단을 읽어 보았다. 그곳은 이름 그대로, 시부야의 도겐자카(道玄坂)에 있는 학생 전문 양복점인 듯했다. 남학교 교복뿐만 아니라 여학교 교복도 여기서 판매하고 있다고, 안내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시부야... 시부야면, 전차 타고 가야겠다.”


시부야 도겐자카부터 니시카타까지의 거리를 대략적으로 계산해 본 뒤, 경하는 전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뒤 지갑과 열쇠를 가방에 넣고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방의 문을 닫고,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현관으로 간 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 문을 잠근 다음 대문까지 걸어갔다.


조선에서 출발하기 전에 본 도쿄의 지도에 따르면, 니시카타로부터 시부야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대략 10킬로미터가 넘었기에 걸어 가다가 지치기는 싫어서 경하는 전차를 타기로 결심했다. 어제처럼 중간에 길가에서 지친 뒤에 택시를 또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녀올게요.”


경하는 아무도 없는 집의 정원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의 작별 인사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가 아니라 이 집 그 자체, 혹은 경하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인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경하는 대문을 열고 니시카타 5초메의 거리로 나와 다시 그 문을 잠갔다. ‘야나기(柳)’라고 적힌 대문의 우체통에는 아직 미나모토의 편지가 도착해 있지 않았고, 경하가 문 열쇠를 빼낸 시점에서 더 이상 니시카타 5초메 15번지의 집에는 주인 외에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고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동시에 경하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전차를 타기 위해 카스가(春日)정류장을 향해 걸어 가면서 문득 조선에서 살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마치 읽다가 잠들어 버려 내용이 머릿속에서 끊겨 버린 소설을 다시 이어서 읽듯이, 그것은 천천히 경하의 머릿속에서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장면부터 다시금 재생되었다.




새벽의 꿈은 경하가 조선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장면을 재생하였고, 그것을 전부 재생했을 시점에 경하는 꿈에서 깨어났었다. 만약 단순히 옛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 보는 행위도 꿈을 꾼다고 말한다면, 경하는 지금 깨어 있으면서 꿈을 꾸고 있는 게 될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 조선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경하의 모습을 재생했다면, 이번에는 일본인들에게조차 환영받을 수 없는 경하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총독부가 그것을 “훈공”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조선에서는 훈공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설령 조선에 사는 절대 다수의 인구를 차지하는 조선인들이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총독부의 뜻은 곧 조선의 뜻이었기에 조선에서 경하의 가문이 한 일은 “훈공” 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총독부의 관료들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것을 훈공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경하의 가문이 이루어낸 ‘훈공’ 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경하와 경하의 가문들에서, 훈공이 아닌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로 그것이 총독부에게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업적이지만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앞에서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결점인,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저 멀리서 전차가, 도로 위의 철로를 타고 시부야까지 가기 위해 그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이내 경하가 있는 카스가 정류장 앞에 멈추어 섰다.




내선일체(内鮮一体)라고 하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일본()과 조선(鮮)이 하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내선일체라는 말을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일본인들이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부모라는 단어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만, 경하의 부모는 자신들의 자식인 경하를 낳았음에도 경하를 사랑하지 않았다. 


경하의 부모에게 있어서 ‘부모’와 ‘가족’ 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사람을 구별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듯이, 일본인들에게도 ‘내선일체’ 라는 말은 단순히 총독부가 만들어낸 구호,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지니지 않았던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해서 ‘내선일체’ 라는 구호가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지 않다’ 라며 그 내선일체라는 말의 반대 사상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경하는 전차에 올라 탔다. 시부야까지 가는 요금을 내고 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보이는 도쿄의 거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그 기억들을 재생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선과 일본은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고 바다와 반도로서 떨어져 있으며,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오는 일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오는 일도 절대적인 수로 따지면 현저히 적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조선인들을 일본인들과 같은 권리를 누릴 대상으로 생각하였다면, 총독부와 조선 총독의 직위 따위는 진작에 철폐시키고 메이지 시대에 폐번치현을 하였듯이 조선 또한 현으로 나눈 뒤 일본과 똑같은 헌법을 적용시키고, 그들과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고, 그들처럼 선거를 치룰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로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인이라는 인종은 단순히 자신들의 나라의 영토에서 사는 하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권리를 조선인들에게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영국이,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두어 그곳의 사람들을 자신들을 위한 하인으로 삼고 그들의 발 밑에 두었던 것처럼 일본인들 또한 조선을, 만주를,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어 그곳에 사는 조선인, 만주인, 대만인들을 자신들을 위한 하인으로 삼아 자신들의 발 밑에 두었던 것이다.


본래 모방이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의 뇌리에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들보다 더욱 우월한 존재를 보면 그것을 따라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일본인들 또한 자신들보다 더욱 우월한 서양의 국가들과,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그것을 따라하였던 것이다. 


타인을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하인으로 만드는 행위와 그러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한 본능이었던 것이다.


딱히 일본인이라서 그것을 따라한 것이 아니다. 딱히 조선인이라서 따라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인 본능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의 주도권을 누가 먼저 잡았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당연하고 명백한, 어쩌면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인간의 본성을 따른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하인으로 두는 것에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조선인들이, 조선인인 경하가, 그런 사상을 지니지 않은 일본인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비판한다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미 주도권을 먼저 잡은 일본인들의 막강한 권력은 조선인들의 요구 따위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기에 더 큰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것을 부수지 않는 한 조선인들의 요구가 성취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을 다시 해석하자면,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하인’이라는 말은 조선인들이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아래에서 제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권리를, 부를, 번영을 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하극상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경하의 부모님은 일본인이 되려는, 조선인으로서 용납받을 수 없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전차는 멈추지 않고 도쿄의 거리 위를 달렸다. 칸다 강을 거치고 거리에 있는 카페, 서점, 양복점과 서민가들을 지나치고 기사는 다음 정류소인 진보초(神保町)를 향해 계속해서 시가지를 달렸다.




본래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의 자리가, 자신의 부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권리와 더불어 그들이 가진 것들이 없어지고, 빼앗기는 것에 매우 민감하며 그것을 두려워한다. 일본인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일본인’이기에 누릴 수 있는 그 부가, ‘일본인’이기에 누릴 수 있는 그 권리가 자신들의 ‘아래에 있는 하인인 조선인’ 들에게 빼앗겨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부와 권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그러할 기미가 보이는 순간 철저한 처벌을 내렸다. 그것은 마치 헌법처럼 당연하게 적용되는 법률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하극상의 죄는, 경하에게까지 적용되어 그 죄를 부모와 함께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경하의 의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는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였다. 어디까지나 조선인들에게 허락된 교육의 장소는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하인이기에 일본인들을 위한 ‘소학교와 중학교’ 보다 떨어지는 수준의 교육을 받아도 무엇이라 항의할 권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빼앗긴 지 오래였다.


하지만 조선인인 경하는 ‘조선인들이 가야 할’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가 아닌 ‘일본인들을 위한’ 소학교와 중학교에 갔고, 그것은 곧 하극상의 죄였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보낸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였지 경하가 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인’인 경하가 ‘일본인’들의 자리를 탐내는 하극상을 저질렀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하극상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유경하는 일본인들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유경하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며 조선인임에도 자신들의 자리를, 권위를,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유경하에게 멸시와 차별이라는, 인간의 심리에 있어 가장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쟤는 애초에 저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고요! 왜 조선인이 중학교에 버젓이 다니는 거예요?”

“경성의 보통학교랑 고등보통학교는 전부 무너지기라도 한 거야? 왜 우리 학교에 너 같은 조선인이 있어야 해?”


하지만 일본인들의 말에도 틀린 것은 전혀 없었다.


총독부는 곧 조선이고,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뜻은 곧 조선 전체의 뜻이었다.


총독부는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제창하며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다고 했음에도 정작 조선인들이 겪는 차별을 해결하지 않는 기만을 저지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곧 조선의 뜻을 대변하는 존재인 이상 그들이 하는 ‘하인으로서의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것은 곧 조선의 뜻이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자신을 대변하지 않음에도 대변하고 있다는 위선적인 존재인 총독부의 행위에 따라 그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받았고 그것에 반기를 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총독부의 뜻에 따르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죄였던 것이다.


하극상의 죄의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가혹했다. 설령 죄인이 그럴 의사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결코 감형의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그 죄를 만들고 벌을 결정하는 재판관이자 법관인 일본인들은 그것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결국 경하는 부모가 진 죄를, 자신이 전부 뒤엎은 채 그 벌을 받았다. 고통스럽고 쓰라린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으며, 그저 그 죄의 용서만을 빌 뿐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일본인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은 같은 사람인 조선인과 일본인으로서의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했을 테지만 일본인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것은 곧 ‘평등한 조선인과 일본인’ 이라는 가치관에 대한 위선이었다.


그의 뒷 말은, "세상을 보면 사람 간에 격차가 존재하는데, 그 격차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학문을 배웠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고 말했었다.


그 학문을 배워 격차를 줄이는 것조차도, 일본인들은 그 행위를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신민이라면 보통학교와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와 중학교로 나누지 않고 모두가 같은 곳에서 같은 학문을 배웠어야 할 테지만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순이라고, 위선이라고 지적한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조선인의 말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본인들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고,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과 부와 권리가 빼앗기는 것만을 두려워했다.


물론, 잘 찾아보면 그런 일본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보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월등히 많았고, 그들은 너무나도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 아무런 힘도 없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것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경하는 생각했다. 어쩌면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말은, 단순히 총독부가 자신들의 명령 및 지도 등을 따르지 않고 저항 및 반항 등을 하는 조선인들만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조선인들을 전부 싸잡아서 지칭하는 것이라고. 


그 중에서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불령선인” 이라 지칭하고, 설령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까지 “잠재적인” 불령선인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 있던 조선인은 오로지 그들의 위선적 행위에 동조하고 비판을 가하지 않았던 극소수의 경하의 가문 같은 사람들 뿐이었다.




“아, 아.... 다음 정류소는, 시부야- 시부야입니다.”




경하는 시부야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사의 안내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이내 속도가 줄어들어 가는 전차의 객실 좌석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긴 뒤 전차가 멈춰 서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부야에 내렸다.


‘선처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겠지, 아마.’


시부야의 정류소에 내려 도겐자카로 가는 길을 걸으며 경하는 속으로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마치 더 이상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을 해 버린 듯한 그 말로, 도쿄의 아침은 해가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오르는 동시에 낮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