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부만 조금 수정했고

1~5편 본 사람은 6편부터 보셈


1



 일어나.



 가슴이 뚫리는 격통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액체가 온몸을 적셨다. 심장이 선홍빛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아직도 서로 싸우고 있었다. 어린아이답게 몸짓은 크지 않았고, 싸움 역시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들의 등에 붙어 있는 끔찍한 형상의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난파된 기억의 파편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제까지 우리는, 웃고 울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아픔을 공유했다. 그림 같은 꿈을 늘어놓으며 함께 웃었다. 여기서 나가서 자유로워지면 꼭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난생처음으로 생긴 친구라는 존재를, 우리는 서로의 손으로 죽였다. 각자의 몸에 심어진 ‘그것’을 이용해서. 나 역시 누군가를 죽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눈이 초롱초롱하던 남자아이였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곧바로 나는 누군가에게 뒤에서 심장을 찔렸다.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죽음을, 자유를 선물해준 아이를 조금이라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



 아픔은 점점 희미해지고,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피와 비명과 시체가 난무하는 이 참혹한 광경도, 조금만 지나면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눈을 감았다. 차갑기만 했던 바닥에서, 부모님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하늘나라에 가면, 곧바로 엄마랑 아빠부터 만나러 가자.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이대로 괜찮아?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이거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엾은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저길 봐.



 귓가에서 곧바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악마처럼 교활하면서 달콤하고, 동시에 절대자처럼 진중하고 무거웠다.



 시선을 저 멀리 옮겼다. 어른들은 우리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이 참상을 보고, 만족한 듯이, 행복한 듯이,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복수하고 싶지?



 평온했던 호수에, 누군가 바위를 던졌다. 감정이 마구 흔들렸다. 분노가 일었다.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살고 싶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고동이 온몸을 울렸다. 걸레짝이 된 피부가 끈적한 무언가로 휘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겨우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한계였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아. 죽어도 엄마 아빠 곁에 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이미 늦었는걸.



 늦지 않았어.



 정말?



 그래. 널 살려 주고, 힘도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점차 눈이 감기며,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간절한 염원이었으며, 소망이자 부탁이었다.



 인간을 모두 먹어 치워줘.



***



 꿈을 꾼다. 나는 총을 그것들에게 겨눈다. 파괴적인 데시벨의 소음을 내며 그것들은 녹아내린다. 총알을 맞지 않은 한 개체가 내 눈앞으로 다가와, 내 다리에 검보랏빛 이빨을 들이민다. 이대로라면, 다리를 뜯어먹히고 만다.



 “헉!”



 다리가 잘리기 직전의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고 자신의 다리를 만지며 제자리에 붙어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곳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었다. 하물며 더 이상 전장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찰나의 순간 느끼던 선명한 공포는, 아직도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꿈……인가.’



 나는 폐에 산소를 몇 번이나 더 공급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는 날이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일어났다. 미지근한 물밖에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를 틀어 대충 얼굴을 씻었다. 보급받은 옷을 입고 옥수수빵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무던하게 퍽퍽한 빵을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아침의 풍경은커녕, 재투성이의 무기력한 세계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벌써, 겨울인가.’



 이 빌어먹을 세상은, 그런 일을 겪고도 용케 멸망하지 않았다. 이계종(異界種)의 등장.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봐도 경이로운 속도로 인간 사회 전체를 동시다발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들이 언제 처음 나타난 것인지, 정확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단지 수년 전에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물리법칙을 거스른 경로를 통해 등장했다는 사실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불가해성에 의한 공포. 단지 러브크래프트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 지구를 호령하며 마치 우주를 지배한 것처럼 기고만장하던 인간은, 존재조차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생명체에 의해 흔적도 없이 죽어 나갔다. 으레 자신들이 무심코 불어서 날려버렸던 먼지처럼.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의미로 그 생명체를 이계종으로 명명했다.



 이계종의 형태는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다만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무력한 민간인 정도는 우습게 학살할 수 있는 완력과 민첩성을 보유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지성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들이 지성을 갖고 있었다면, 압도적인 물량 공세만으로도 벅찬 인류는 진즉 멸망했을 것이다.



 그것들의 목적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식인. 도대체 지구에 오기 전에는 무엇을 주식으로 삼았을지가 궁금해질 정도로, 그들은 정말 인간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이제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색일 것이다. 시체가 없는 곳은 없었다. 피 냄새가 익숙해졌다. 빵을 굽는 냄새가 아니라 시체가 부패하는 썩은 냄새가 아침을 알렸다.



 나는 이계종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도망쳤다. 겨우겨우 살아남아 군의 장기 말이 되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만큼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는 길은 없었다. 국민이 국가에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낡아빠진 사상이 되었다. 군대가 곧 힘이었고 힘은 곧 권력이었다. 죄 없는 민간인이라 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려졌다. 나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살기 위해 죽이는 법을 배웠다. 인외의 존재를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시시각각 변화하던 그들의 흉악한 형체가 점차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결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을 뿐이었다.



 수십 번의 토벌 작전을 겪으며 나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재활 치료 끝에 걷는 정도는 가능해졌지만, 뛰는 것은 확실하게 불가능했다. 상부에서는 내가 더 이상 전투에 나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쓸모가 없어진 나를 공개적으로 내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상부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았다.



 ‘실험체 X의 관리……?’



 나는 방을 나서며 며칠 전에 받은 통지서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짧고 명료한 내용이었지만, 명령 통지서에는 군부 장관의 직속 날인이 찍혀 있었다. 이유 모를 중압감을 느끼며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동봉된 지도에 그려진 연구 시설로 향했다.



 시설의 입구에는 멀대같이 큰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나는 가벼운 묵례를 하고 시설 내로 들어간 뒤, 통지서에 적힌 대로 받았던 문서를 모두 소각했다. 그리고 안내 역할을 맡은 연구원의 안내를 받아, 금방이라도 고장 날 것처럼 낡고 좁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는 복잡한 순서로 버튼을 누르더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품속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원래 100번까지 있었습니다만, 전부 죽어 버려서 그냥 번호를 X로 바꾸어 버렸습죠.”



 음영이 잔뜩 드리운 얼굴로 매캐한 담배를 피워대던 연구원이 문득 중얼거렸다. 평소에 혹사당하는 것인지 굉장히 마르고 힘이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퀭한 얼굴로 제 담배 연기에 제가 콜록거리는 모습이 꽤 볼썽사나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간과 이계종의 합성이라니……그것도 어린애들을 갖고……정말 인간은 이계종 따위보다 더 악랄하다니까요.”



 그는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로 걸걸거리며 웃었다. 잠시 그의 눈에 자조적인 눈빛이 스친 것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덜컹거림이 멈췄다.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 왔습니다. 아, 그리고 조언 하나 해도 될까요?”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고개를 돌렸다. 이전과는 다른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의 안내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그는 담배꽁초를 휙 던지며, 점차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말했다.



 “죽지 마세요. 당신이 스물네 번째거든요.”



 위로인지 조소인지 모를 의미심장한 표정만을 남긴 채,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두침침하고 습한 지하실에는 익숙한 냄새가 감돌았다. 피가 마르고, 살이 썩는 냄새.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길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군화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누구 있어?”



 정적을 깬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여자, 그것도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묘하게 진정되는 음색과는 달리, 내 가슴은 두근거리다 못해 쿵쾅거렸다.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존재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인간과 이계종의 키메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상대로 자행된 잔혹한 인체 실험. 공식적으로 문서화조차 되지 않은, 그 비인도적인 실험 끝에 탄생한 괴물.



 “너야? 내 새로운 관리자가.”



 갑작스럽게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초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칼에서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이름은?”

 “야, 얀붕.”

 “군인 맞아? 약해 보이는데.”



 그녀는 발돋움한 뒤 내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뽀얗고 부드러운 줄 알았던 살결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역시 그녀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그녀의 외형은 매혹적이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와 찬란한 루비색의 눈동자는, 과거에 존재했던 ‘인형’이라는 물건에 충분히 비유할 수 있었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넌 죽을 테니까.”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렸다. 칼날 같은 형상의 촉수가 수십 개 튀어나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서 튀어나온 이계종의 신체가 무언가를 갈구하듯 파르르 떨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주먹이 떨리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어라? 안 놀라네? 울고 불면서 쓰러질 줄 알았는데.”



 살며시 눈을 뜨자, 징그러운 촉수는 온데간데없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키득거리는 어린 여자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헐렁한 흰 티셔츠 사이로 그녀의 미성숙한 가슴이 살짝 보였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아?”

 “……무서워.”

 “근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

 “이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왜? 살고 싶은 게 정상 아냐?”

 “나한텐 이제, 소중한 사람도 없거든.”



 그녀의 얼굴에서 여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화목하게 웃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족을 지키려다가 몸이 두 동강 나버린 아버지가 떠올랐다. 뒤처진 동생의 손을 잡으려다 사지가 뽑힌 어머니가 생각났다. 배가 뚫리고 피를 토하면서도 내게 살려달라고 외치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중한……사람이라.”



 그녀의 표정이 진중함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넌 정말 따분한 녀석이구나. 분명 맛도 없을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각오로 오기는 했지만, 첫날부터 개죽음은 사양이었다. 쓸모가 없어진 군인을 처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관리자가 스물세 번이나 교체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모두 그녀의 위장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지금까지 관리자는 하나같이 다 똑같았는데, 넌 어딘가 좀 다르구나.”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분명히 거칠었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에겐 분명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괴물, 실험체, X, 이계종……다양하게 부르지만, 나한테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있어.”



 나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녀가 지었던 표정의 의미를. 실험체에 지나지 않을 그녀가 품고 있는 어떠한 감정의 정체를.



 “난 얀순이라고 해. 잘 부탁해, 얀붕아.”



 그것이, 나와 얀순이의 첫 만남이었다.




2




 관리자의 업무는 지극히 단순했다. 실험체, 즉 얀순이를 24시간 감시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얀순이가 갇힌 음침한 지하의 보안실로 거처를 옮겼다. 법적으로 사유 재산의 소유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사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놀랍게도 따뜻한 물과, 배급용 옥수수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급스러운 식사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질 좋은 ‘먹이’를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보안실에 있는 수많은 모니터로 얀순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처음 이틀 동안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그녀는 내가 담당자로 배정되기 전 기밀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전에 나가서 한바탕 전투를 치른 뒤에는, 이렇게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보안실에 정리된 문서에는 지금껏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이계종을 학살했는지가 무미건조한 숫자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잠드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에 대한 문서를 읽으며 보냈다. 현재까지 관측된 이계종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한 살상력과 기동성을 보유한 그녀는 여타 다른 이계종처럼 인간을 주식으로 삼았다. 본래 인간의 몸이기에 평범한 음식도 섭취할 수 있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인간을 먹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의 힘을 크게 잃고 평범한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게 가만히 놔둘 리가 없겠지…….’



 당연히 군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허울뿐인 직책을 통해, 그녀에게 신선한 인육을 공급하는 것이겠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내용이 담긴 문서를 보안실에 버젓이 놔두는 것 자체가, 어디 도망치려면 도망쳐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죽여서 그녀 앞에 갖다 놓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믿기 힘든걸.’



 온통 기밀 사항뿐이라 별로 읽을 것도 없는 문서를 전부 읽은 뒤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 너머로 잠든 얀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정말 이렇게 앳된 아이가 수많은 이계종들을 죽였을까.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 순간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들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참, 내 주제에 무슨 동정이람.’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보다 먼저 관리자로 배정되어 목숨을 잃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녀도 결국 나처럼 죄 없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불과했다. 사실상 내 부모님을 죽인 이계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계종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이 멋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쓸데없는 상상은 한동안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



 “얀붕아. 거기 있어?”



 얀순이가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날이었다. 그녀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처음으로 부른 것은 내 이름이었다. 나는 그녀 몫의 식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또 이중으로 설치된 철창을 열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식사를 전달하는 것. 내가 두 번째로 그녀를 마주하게 되는 임무였다.



 “아, 왔구나.”



 얀순이는 가볍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녀가 크게 기지개를 켜자, 팔 곳곳에서 이계종의 비늘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반은 이계종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앞에 식사를 내려놓았다. 쇠고기를 본 것은 이계종의 침공 이후로 처음이었다.



 “뭘 그렇게 떨어. 고마워. 잘 먹을게.”



 그녀는 작게 소리 내 웃은 뒤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줄 알았건만, 마치 식사 예절이라도 지키는 양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아, 잘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얀순이는 쇠고기 한 덩이를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무심코 그녀의 새빨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넌 안 먹어?”

 “나?”

 “응. 소고기, 귀하잖아?”

 “별로. 예전에 먹어본 적도 있고.”

 “예전? 언제?”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정말?!”



 얀순이가 갑자기 내게 바짝 다가왔다. 코가 서로 닿을 듯한 거리가 되어 나는 무심코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이계종이 나타나기 전의 세상을 알고 있어?”

 “응. 어렸을 때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조금은.”

 “얘기해 줘! 엄청 궁금해!”



 얀순이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허탈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간 내게 응석 부리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얀붕아?”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얀순이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마치 예전에 동생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줬을 때처럼.



 “그래.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



 그 후로, 나는 얀순이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나는 이야기하는 쪽, 그녀는 듣는 쪽이었다. 그녀는 내 단편적인 옛 기억과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에도 즐거워했다. 나는 나대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줄곧 외로웠던 감정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얀순이도 조금씩 자신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고통과 실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역시 나처럼 이계종에게 부모를 잃은 그녀는, 눈을 떠보니 어떤 시설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이계종과 몸이 합쳐진 채로.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 했으며, 각종 인체 실험과 전투 훈련을 받았고, 심지어는 이계종이 가득한 소굴에 맨몸으로 던져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 내 이야기는 역시 재미없지?”



 얀순이는 웃으며 내게 사과했다. 그녀에 비하면 내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시나마 그녀를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했다. 결국, 그녀도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나도, 이계종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어.”



 나는 줄곧 피해왔던 가족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어쩐지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 미안…….”

 “왜 네가 미안해.”

 “일단은 나도, 이계종이니까…….”



 얀순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풀죽은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속에서 어떤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응?”

 “네가 말했잖아. 사람들은 너를 괴물이나 실험체라고 부르지만, 너한테는 얀순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나는 얀순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한 손으로도 넘칠 만큼 가녀린 어깨였다. 그녀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넌 괴물도, 실험체도 아니야. 넌…….”

 “하지만 난……사람을 죽였는걸?”



 그녀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목소리로 감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래. 하지만 그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사람을 죽여 봤어?”



 갑자기 그녀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넌 내가 사람을 먹는 모습을 모르지? 너도 곧 갈기갈기 찢겨서, 나한테 먹힐 거라는 걸 모르지?”



 울부짖듯이 소리치며 그녀는 나를 밀쳐냈다. 그녀의 몸과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검푸른 칼날이 그녀의 몸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맞아. 몰라.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

 “…….”

 “전부, 네 잘못이 아니야.”



 얀순이가 서슬 퍼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긴장감이 가득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그녀의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했다.



 “가.”



 짧고 명료한 한마디였다. 그러나 여전히 화난 표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보안실로 돌아갔다. 이중으로 설치된 철창을 잠그고 두꺼운 철문을 닫았다. 보안실의 딱딱한 침대에 드러누우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었기에, 죽음의 공포 앞에서 초연할 수는 없었다.



 ‘너무 멋대로 말했나.’



 그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잃고, 자유를 잃고, 인격도 잃은 채, 무의미하게 국가에 충성하는 삶. 허나 나는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죽여야만 했던 그 아픔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를 이해하는 척하며 오지랖을 부릴 뿐인 인간에 불과했다.



 ‘잠이나 자자.’

 “흑, 흐윽…….”



 잠에 들기 위해 돌아누우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얀순이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이미 내 발걸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얀순아…….”

 “흐윽, 으흑, 으아앙…….”



 철문과 철창을 열어젖히며 얀순이를 향해 달려갔다. 감정이 복받쳐 우는 그녀를 나는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녀는 천천히 내 품에 몸을 맡겼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상투적인 위로의 말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에 반응하듯 더욱더 격하게 울기 시작했다. 참고 참았던 감정을 모두 토해내며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흐느낌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잠든 때는, 내가 죽기로 예정된 이레째 새벽이었다.




3




 아침을 알리는 시끄러운 전자음이 울렸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얀순이를 재우느라 늦게 잔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억지로 일어나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인생 마지막 세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침 식사를 운반하는 덤웨이터가 움직였다. 늘 칼같이 정확한 시간이었다. 나는 내 식사는 제쳐 두고 얀순이를 위한 쇠고기가 담긴 접시를 집어 들었다. 모니터 너머로 본 그녀는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철문을 열고 그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제 잠그지 않은 철창을 몸으로 밀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용히 숨을 쉬며 잠에 빠진 그 모습은 조금 사랑스러워 보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어젯밤 그녀의 아픔을 알았기 때문일까, 더 이상 그녀가 공포의 대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런 아이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순아, 일어나.”



 나는 얀순이의 몸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더 자고 싶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쇠고기가 담긴 접시를 그녀의 옆에 내려놓았다. 굳이 억지로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얀붕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얀순이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게 다가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잠에서 깬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자, 잘 잤어?”

 “어? 응.”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어쩐지 그녀의 볼이 살짝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다짐했었다고는 해도, 원초적인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통스럽지 않게 잡아먹힐 수 있는 것인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생각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녀가 가엾은 존재라는 걸 인식한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배고프겠다. 어서 아침 먹어.”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얀순이에게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을 먹어야 하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설마, 나는 얀순이를…….’

 “얀붕아.”



 갑자기 얀순이가 말을 걸어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그녀의 표정은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진지해 보였다. 고기 따위는 필요 없으니 어서 몸을 내놓으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고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그때 얀순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외출하자.”



***



 그녀를 데리고 외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보안실에 구비된 연락책을 통해 얀순이의 의사를 전달하자, 곧이어 덤웨이터를 통해 목걸이 하나가 도착했다. 나는 동봉된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외출 시에는 반드시 이 초커를 실험체에 착용시킬 것.’



 나는 그들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표면 상 위치 추적을 위함이었지만, 통제를 위한 고문 도구일 거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초커를 매어 주는 것도 나의 일이었기에, 나는 외출 준비를 마친 뒤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얌전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마치 산책하러 나가기 전 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 같았다.



 “얀붕아. 관리자가 모두 일주일 만에 죽은 건 아니야.”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얀순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대신할 다른 희생양을 찾기만 하면 돼.”



 엘리베이터의 소음 가운데에서도, ‘희생양’이라는 말은 또렷이 들렸다.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찾으러 가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기로써 이용된 것은 1년도 훨씬 넘었지만, 역대 관리자의 수는 53명에 한참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내 대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알았어.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얀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미소로 응답했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같이 시간 좀 보내주라.”



***



 “저기,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얀순이가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핏자국과 거무튀튀한 때가 모두 사라진 뽀얀 얼굴. 단정하게 정리된 찰랑거리는 머릿결. 타이밍 좋게 열린 시장에서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한 옷과 리본 장식까지. 그녀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지만,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네 부탁이라는 게, 이런 거였어?”

 “응.”

 “바보 아냐? 나한테 잘해줘서 무슨 득이 있다고…….”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얀순이도 아예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역시 갈고 닦으니 그녀의 외모는 더더욱 빛났다. 가슴이 살짝 울리듯 뛰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이름 모를 감정 때문인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냥, 해 주고 싶었어.”



 나는 멋쩍게 웃었다. 얀순이는 고개를 돌린 채 내가 사준 옷과 리본을 매만졌다. 이제 그녀가 생체 병기라는 사실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목에 달린 초커만 아니었더라면.



 “이제 마지막이야.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잠깐, 우리 원래 목적은……!”

 “알았으니까 잠자코 따라와.”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나는 군에 있던 시절 내가 자주 가던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얀순이가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멸망 직전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물론 이계종의 침입으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상층민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감정은, 낯익은 얼굴을 보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뭐야. 오랜만이다?”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군에 있던 시절 나의 상관이었다. 여전히 대하기 싫은 인상이었다. 곧이어 뒤따라온 얀순이가 우물쭈물하며 나와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냐? 다리는 어떻고?”

 “괜찮습니다.”

 “옆에는 누구지? 여동생? 아, 죽었댔지? 실례.”



 나도, 얀순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투였다. 무시당하는 것은 익숙한 듯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관리자로 배정됐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는 얀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는 쪽은 내가 아닌데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적당히 그에게 한마디 하려던 그때, 얀순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2급 기밀 이계종 특수 처리부대 소속 실험체 X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철저하게 훈육된 것처럼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런 얀순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상관은 그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설마 네가 이런 악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은.”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얀순이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얀순이는 저항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분노로 주먹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 흉측한 턱주가리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실험체를 데리고 데이트라니. 여자에 관심 없는 척이랑 척은 다 하더니만,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잖아?”



 킬킬대는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내가 아직 군에 소속된 입장이라고 한들, 어차피 오늘 죽기로 맹세한 목숨이었다. 나를 변태 취급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지 그녀를 계속해서 실험체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주먹을 치켜들려던 순간, 얀순이가 내 손을 조금 강하게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현재 임무 중에 있음으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아……그래. 임무. 중요하지. 반 이계종과의 섹스, 정말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임무가 되겠어.”

 “……그럼 이만.”

 “자, 잠깐……!”



 이제 한계였다. 참다못해 상관을 한 대 때려 주려고 했지만, 얀순이는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나를 억지로 이끌었다. 거친 숨을 내쉬던 나는 얀순이의 표정을 보고 화를 삭였다. 나는 경솔한 행동을 할 뻔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누가 가장 많이 화가 났을 지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



 조금은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얀순이는 처음 보는 음식에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아무리 쇠고기가 귀한 재료라고 한들, 맛을 위해 조리된 음식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맛이라며 좋아해 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인적이 없는 언덕으로 향했다. 도시의 황량한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오늘은 고마웠어.”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얀순이가 말했다. 황혼으로 물든 그녀의 미소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오늘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날이었다.



 “자, 이제 희생양을 찾으러 가는 거지?”



 얀순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작고 예쁜 손이었다. 그 손을 잡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앞으로 몇 시간 내에 인간을 먹지 않으면, 그녀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관리자의 처형 사유이기도 하다. 정해진 미래는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 역시……안 될 것 같아.”



 얀순이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칼이 차가운 바람에 흩날렸다.



 “이미 난 가족 대신 충분히 긴 인생을 살아왔어. 더는 나 대신 누군가가 죽는 게 싫어.”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의 인생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살고 싶지도 않았다. 더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딱 한 가지 작은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나를 먹어 줘. 그거면 됐어.”



 나는 눈을 감았다. 기왕 최후를 맞이할 거라면, 적어도 이 경치를 바라보며 죽고 싶었다. 처음 얀순이를 만났을 때처럼, 굉음과 함께 촉수가 내 몸을 삼키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숨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응?”



 내 귀를 울린 것은 이계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루비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네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아도 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얀순이는 내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갈게. 다음에 또 봐.”

 “……어?”



 그녀의 움직임을 미처 눈으로 좇기도 전에, 얀순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서,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



 그 뒤로, 얀순이도 찾을 수 없던 나는 연구실로 돌아가 조용히 처분을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내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얀순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하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책을 통해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아도, 그들은 내게 대기하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내가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나를 처음으로 안내했던 연구원이 엘리베이터를 통해 나를 만나러 왔을 때였다.



 “첫 주를 무사히 보낸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죠.”



 무사히, 라는 말에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충격적일 정도로 쉽게 풀렸다.



 “그나저나 대단하시군요. 꽤 높은 직책의 군인이었는데, 어떻게 죽인 거요? 그것도 꽤나 잔인하게 죽였더군.”



 가슴이 철렁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생각보다 할 땐 하는군요.”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내가 화난 것으로 오해하기라도 한 듯 말을 덧붙였다.



 “아, 오해하진 마십쇼. 뭐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잔혹함은 이 구역질 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가져야 할 덕목이니까요.”

 “야……실험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험체는 어제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며칠 간은 마음 놓고 쉬세요.”



 그가 또다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무래도 나를 살인자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시길. 그럼.”



 오히려 당부의 말을 건넨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시끄럽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내 가슴도 빠르게 뛰었다. 설마,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현실을 부정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상관의 장례식이 열렸다.




4




 “B구역 클리어. 총 224체 섬멸 완료. C구역 이동.”



 상황을 보고하며 나는 빠르게 다음 구역으로 이동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을 포식한 뒤여서 그런지, 몸에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C구역 도착. 다수의 이계종 확인. 명령 대기 중.”

 “사살을 허가한다.”

 “알겠습니다.”



 등에서 수십 개의 ‘팔’을 뽑아낸 뒤, 어지럽게 휘두르며 역겨운 존재들의 신체를 갈랐다. 보라색 피가 몸에, 특히 머리카락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빠르게 움직였다.



 “캬아아아아악!”

 “윽!”



 등 뒤에서 돌진해 오는 이계종의 공격을 흘려보낸 뒤, 나는 가장 먼저 내 머리카락을 확인했다. 그가 선물해 준 장신구는 무사했다. 옷은 어쩔 수 없이 전투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이 ‘리본’이라는 이름의 장신구만큼은 떼어낼 수 없었다. 아니,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엑!”



 하나씩 하나씩 적을 쓰러트리며 나는 잡생각에 빠졌다. 마음대로 그 남자를 죽여 버려서 화났을까. 나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이계종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얀붕아…….”



 나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빨리 임무를 마치고 그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질릴 정도로 많은 이계종들을 부지런히 썰고, 자르고, 또 베어 넘겼다.



***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크게 슬퍼하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죽음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감정 역시 무뎌졌다. 죽은 자를 애도해 줄 여유를 가진 자는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상관의 죽음은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죽음에 내가 어느 정도 관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었으니.



 “얀붕 씨 맞으시죠?”



 대충 조문을 마치고 식장을 나서려던 나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들은 적 없는 목소리에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무채색의 후드티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복장을 한 그녀는 매우 수상쩍어 보였다. 어딜 봐도 조문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신데 제 이름을?”

 “얀순이의 관리자 되시죠?”

 “네, 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얀순이를 실험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눈앞의 이 여자가 최초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얀순이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 누구죠?”

 “실례합니다. 소개가 늦었네요. 얀순이의 선생님……이었던 사람입니다.”

 “선생……?”

 “자세한 얘기는 어디 조용한 곳이라도 들어가서 할까요?”



 그녀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내했다. 나는 미심쩍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부서지기 직전의 낡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자, 편하게 앉으세요.”



 내부는 좁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별로 식욕을 돋우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주인 이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내게 자리를 안내한 뒤 탄산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고가의 기호품이 되어 버린 탄산음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저를 보자고 한 목적이 뭐죠?”

 “어머, 성질도 급하셔라. 안 그래도 지금 말씀드릴 참이었어요.”



 복장은 캐주얼했지만 말투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본모습을 일부러 숨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인이 갖다준 음료를 조금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저를 소개하죠. 저는 과거 얀순이를 연구했던 연구원 중 한 명입니다.”

 “연구원, 이요?”

 “네. 저는 얀순이의 교육 및 사회화를 담당했죠.”



 확실히 얀순이는 세상 물정을 조금 모르긴 해도,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시설과 전쟁터만을 왔다 갔다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가 얀순이를 가르쳤다고 한다면, 깔끔하게 설명되는 일이었다.



 “뭐, 나중에 얀순이를 만나서 물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이래 봬도 얀순이는 저를 꽤 믿고 따랐답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웃으며 다시 음료를 입에 머금었다. 확실히 그녀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연구했던……이라면, 지금은?”

 “잘렸죠. 개인적으로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미묘한 죄책감을 읽었다. 나를 처음으로 안내했던 연구원의 얼굴에서도 본 적 있던 감정이었다.



 “그래도, 아직 연구 시설에 친분은 남아 있어서요. 얀붕 씨의 소식은 익히 들었답니다.”

 “소식이요?”

 “네. 시설 내의 연구원들은 이미 얀붕 씨에 대한 대부분의 사실을 알고 있어요. 당신과 얀순이의 모습은 모두 녹화되고 있거든요. 그녀와 정서적 교감을 이룬 사례가 많지는 않아서요.”



 소름이 끼쳤다. 내가 얀순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듯, 그들 역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예상은 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불쾌함은 배가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희의 목적은 얀순이를 해방하는 것입니다.”

 “해방, 이요……?”



 눈이 번뜩 뜨였다. 실로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네. 그리고 이것은, ‘사냥개’라는 조직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냥개’는 또 뭐죠?”

 “……반란군을 일컫는 암호입니다.”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발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농담 따먹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란, 이라고요?”

 “네. 저희는 이 독재 정부를 무너뜨릴 계획입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 작전의 핵심이 바로 얀순이입니다.”



 그녀는 남은 음료를 벌컥벌컥 마신 뒤,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는 당신 같은 사람이 관리자가 되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

 “얀순이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그녀의 해방을 원하는 사람. 당신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제가 군인인 당신에게 이렇게 반란 얘기를 꺼낼 수 있는 겁니다. 당신도 얀순이가 더 이상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죠?”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 이상,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저희와 함께라면 얀순이를 자유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이 지긋지긋한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힘만이 정의인 세상은 이제 끝입니다. 이계종이 ‘문’을 열고 활발하게 침입해 오던 건 이제 과거 얘기잖아요?”



 사고가 그녀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세상은 이미 무력감에 지배되어 있었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갑자기 반란을? 그것도 얀순이를 이용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도 너무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 적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그런 건 불가능해요.”

 “가능해요. 당신은 얀순이가 가진 막대한 살상력의 빙산의 일각도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책상을 탕 내려치며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단 한 명만 있어도, 국가 하나 따위 전복시키는 건 일도 아니에요. 제 말을 들어 봐요.”



 그녀는 계획의 세부 내용과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점차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



 “얀붕아!”

 “응?”



 며칠 뒤, 나는 얀순이와 함께 그녀의 선생님을 만났던 식당에 돌아왔다. 아직 그 선생이라는 자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얀순이와 그녀를 대면시키는 일이 먼저였다. 얀순이의 반응을 보고, 그녀의 작전에 동참할지 말지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얀순이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최근 ‘사냥개’라는 조직의 실태와 그 선생이라는 자에 대한 정보를 독자적으로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선생을 만났다는 사실과 이와 관계된 모든 내용은 얀순이에게 비밀이었다.



 “아냐……아무것도.”

 “뭐야, 김빠지게.”



 얀순이가 볼을 부풀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상관을 죽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왠지 모르게 그녀를 대하는 것이 불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서 얀순이는 나와 계속 붙어 있고 싶어 했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조금 이상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자마자 내게 달려와서 안겼을 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누구야?”

 “곧 알게 될 거야.”

 “혹시 여자야?”

 “응. 어떻게 알았……아악!”



 갑자기 손에 격통이 일었다. 얀순이가 엄청난 악력으로 내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크게 경련하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웅얼거리는 모습이 꽤 섬뜩했다.



 “역시 그랬구나…….”

 “잠깐, 얀순아!?”

 “어쩐지 암컷 냄새가 나더라. 누구야? 혹시 여자친구?”

 “후후, 아니란다.”



 선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예상 밖의 존재를 마주한 얀순이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에 힘이 풀렸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



 “서, 선생님……?”

 “오랜만이야, 얀순아.”

 “살아 있었어……?”

 “미안해. 지금까지 숨겨서. 여기요, 늘 마시던 거로 주세요.”



 나는 얀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녀는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기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쩐지 감동의 재회라기에는 조금 찜찜했다.



 “이게 몇 년 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아, 응…….”

 “많이 컸네. 옷도 예쁘고. 혹시 얀붕 씨가 사준 거예요?”

 “네.”

 “좋은 관리자를 만나서 다행이다, 얀순아.”

 “…….”



 얀순이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있어서 수줍음을 타는 건가? 나는 식당 주인이 가져온 음료를 들이켜며 둘의 대화를 들었다.



 “시설은 아직도 힘들지?”

 “응…….”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널 자유롭게 해줄 테니까.”

 “자유……?”

 “응. 나랑 얀붕 씨가 널 풀어 주려고 작전을 세웠어. 들어 볼래?”



 얀순이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음료를 홀짝였다. 내가 예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하려던 순간, 나는 온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

 “그런 작전은 없어요.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먼저 쓰러진 것은 얀순이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의식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실수였다. 이런 곳에 얀순이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얀순, 아…….”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얀순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



 “크흐, 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슬프게도 한때나마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이런 세상에서까지 남을 믿다니.”



 선생님은 혼잣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완전히 잠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 실험체만 팔아넘기면, 내 인생은 이제……!”

 “선생님.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거야?”



 그 추악한 목소리가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난 선생님을 믿고 따랐었는데…….”



 나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는 내가 예전에 알던 선생님이 아니었다.



 “어, 어떻게? 이계종도 한 번에 기절시키는 강력한 약인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래가 보였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처음 봤던 순간, 머릿속에 그려진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나와 얀붕이가 기절한 뒤 얀붕이는 죽고, 나는 알 수 없는 조직에 팔려 가게 되는 장면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식으로, 예지몽을 꾸듯 부정적인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미래가 보였다고……? 설마…….”



 선생님은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각성’에 한 단계 가까워졌구나!”



 그녀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분명히 기뻐하는 표정이었지만 광기에 가득 찬 것처럼 징그러웠다.



 “대단해, 얀순아! 역시 너한테 기생한 이계종은, 고위 이계종이었……!”

 “닥쳐.”



 일격에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더는 그 역겨운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야, 얀순……아?”



 선생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아마 내가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상황을 지켜보던 식당 주인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내 소중한 사람을 건드린 건,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어떻, 게…….”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내 목에 걸린 초커를 가리켰다. 이계종의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게 제작된 초커. 이것이 존재하는 한, 나는 함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이 목걸이? 내가 망가뜨렸어. 얼마 전에. 누굴 죽여야 할 일이 있어서.”

 “그, 런…….”

 “고작 이런 걸로 날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는.”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성을 잡아먹는 것은 언제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야, 얀순, 아…….”

 “…….”

 “예, 옛정을, 봐서라도, 부디, 살려 줘……난, 네, 선생님, 이었, 잖, 아…….”



 그녀가 내 다리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가 나를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얀붕이처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기를 원했다.



 “나한테 감정을 버리라고 했던 건, 선생님이었어.”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녀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안 돼……!”

 “죽어.”



 이번에는 정확하게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종이 인형처럼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포식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으윽…….”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에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내가 쓰러졌던 식당은 아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얀순아!”

 “일어났어?”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얀순이는 내 옆에 있었다. 그것도 내 머리를 무릎으로 받쳐 주고 있었다.



 “여긴…….”

 “시설이야. 선생님은 내가 처리했어. 걱정 마.”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지하실이었다. 퀴퀴한 냄새도 습한 공기도 전부 익숙했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떠올렸다. 그 선생님이라는 자에게 보기 좋게 속은 것이 분명했다. 얀순이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허울 좋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나뿐만 아니라 그녀까지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뭐가 미안한데?”

 “나 때문에 네가 위험에 빠졌으니까…….”

 “바보야.”



 얀순이가 가볍게 내 뺨을 때렸다. 나는 얼얼한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강해. 내 한 몸 정도야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 방금 같은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어.”

 “…….”

 “근데……그런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진 것 같아서, 그게 화가 나. 혹시라도 네가 죽기라도 하면…….”

 “…….”

 “널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평생 괴로울 거란 말이야…….”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루비색 눈동자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위험한 짓 하지 마…….”

 “얀순아…….”

 “자유고 뭐고……네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목숨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내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진정 그녀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미안해, 얀순아.”



 나는 얀순이를 예전보다 더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 파묻혀 훌쩍였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킬 수 있을지 모를,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을 내걸었다.



 “절대로 너보다 먼저 죽지 않을게. 약속.”




5




 “……순아.”



 응? 이 목소리는…….



 “얀순아.”



 얀붕아? 얀붕이니?



 “다행이다.”



 다행이라니 뭐가? 너 얼굴이 왜 그래? 어쩌다가 그렇게 다쳤어?



 “너랑 만나서…….”



 잠깐만 얀붕아. 너, 온몸이 피투성이야…….



 “마지막으로…….”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



 “나를…….”



 왜 그래? 어디 가는 거 아니지? 죽는 거 아니지? 나보다 먼저 죽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랬잖아…….



 “……해.”



 잠깐만, 얀붕아, 얀붕아!



 “얀붕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볼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똑같은 악몽이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꿈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에도 한동안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얀붕이가 있는 방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그를 처음 만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는 나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턴가 철창과 철문을 잠그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얀붕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잠시 뒤척거리더니 단단한 팔로 나를 껴안아 주었다.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면서도 가슴이 조금 뭉클거렸다. 악몽을 처음 꾸게 된 이후로 이렇게 함께 잠들게 되는 일이 잦았다.



 “또 악몽 꿨어……?”

 “……으응, 아니야. 그냥 같이 자고 싶어서.”



 얀붕이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날 걱정해 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평온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꿈에서 봤던 상처투성이인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잘 자.”

 “응, 잘 자.”



 나는 얀붕이의 고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악몽으로 인한 온갖 괴로웠던 감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기분 좋은 잠이 밀려왔다. 그의 팔을 조금 더 세게 붙잡으며 나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부디 이대로만, 이 정도의 행복만이라도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



 얀순이의 관리자가 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와 그녀의 관계는 이래저래 발전했다. 심지어는 침대에서 같이 잠도 잘 정도였다. 역시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 사건 때문이었다. 나의 부주의가 원인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압도적인 힘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냥개’는 반동 의지를 가진 자를 색출해 내기 위한 가짜 조직에 불과했다. 그 선생이라는 자는 겉으로는 국가에 대항하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뒤에서는 그들의 신상을 팔아넘기는 식으로 공적을 쌓았다. 그러다 내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얀순이를 다른 국가에 팔아넘기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일주일을 간격으로 전장에 나섰고, 돌아온 뒤에는 나와 짧은 휴가를 즐겼다. 짧은 휴가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녀가 전장에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다시 이계종의 침입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직은 침입 초기처럼 민간인 거주 구역에까지 ‘문’이 열리진 않았지만, 언제든지 다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나는 베개를 꼭 껴안고 잠든 얀순이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요즘 들어서 그녀는 매일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본인은 어째선지 그 사실을 숨겼지만, 24시간 돌아가는 감시 카메라가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요즘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얀진이가 살아 있었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젠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여동생의 이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여동생과 좋은 추억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잘 따르고 좋아했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귀찮다고만 여기고 늘 차갑게만 대했다. 가족을 잃은 후에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얀순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결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나와 얀순이의 목숨,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주저 없이…….



 “얀순아, 아침 먹자. 일어나.”

 “으응……조금만 더 잘래…….”



 아니, 그런 불길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나는 어리광을 피우는 얀순이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우리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자주 외출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던 담당관도, 별문제가 일어나지 않자 외출을 신청할 때마다 간단하게 외출을 허가해 주었다. 사실 정말로 얀순이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느낌이 더 강하긴 했지만.



 “얀붕아, 오늘은 어디 갈 거야?”

 “글쎄……우선 점심이라도 먹을까?”



 분명히 날이 밝았을 때 시설을 나섰건만,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설과 시가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동 수단이 없는 우리는 한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얀순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그렇게 했다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뿐더러 초커가 작동할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우리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걸었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럼 저번에 먹었던 그거 먹으러 가자! 파스……뭐더라?”

 “파스타? 알았어. 가자……?”



 얀순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던 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낯익은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무심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더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망설이지 않고 있던 그때, 그녀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런 곳에서 뵙다니 우연이네요.”



 갑작스럽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것은 얀순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 같으면서도 무언가 확실하지 않았다. 창백하고 얄상한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눈매, 얀순이와 대조되는 푸른색의 깊은 눈동자. 비극 속의 미망인 같은 신비한 외모의 그녀는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은 아니었다. 기억을 되짚던 나는 갑작스러운 번뜩임에 손바닥을 쳤다.



 “서, 설마…….”

 “예전에 장례식장에 오셨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얀붕 씨 맞으시죠?”



 그녀가 싱긋 웃는 모습을 보고, 나는 뒤늦게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죽은 상관의 아내였다. 예전에 사석에서 한 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에도 서로 인사만 했을 뿐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눈 적 없었다.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남편분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나는 억지로 입을 열어 애도의 말을 전했다. 손가락으로 나를 쿡쿡 찔러대던 얀순이도 그녀의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챈 듯 얌전해졌다. 지금껏 방치해뒀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옆에 숙녀분은 누구신가요? 동생이신가요?”

 “네, 친동생은 아닙니다만……아는 동생입니다.”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얀붕 씨 상관이었던 분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얀순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정중한 인사는 그녀에게도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비조로 일관하던 상관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왜 그런 남자와 결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리를 다치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 일상생활에는 지장 없습니다. 지금은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죠.”



 그녀가 쓸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슴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날아와 꽂힌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분위기를 가라앉게 했네요.”

 “아, 아닙니다.”

 “저는 이 근처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쪽 골목으로 들어오시면 되니까, 시간 나실 때 한 번 들러 주세요. 그럼.”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그 무례했던 인간의 아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 가슴은 요동쳤다. 저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겠지. 방금 인사했던 얀순이가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얀붕아? 또 왜 그래?”

 “으, 응? 아무것도 아냐.”

 “어서 가자, 나 배고파!”



 얀순이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살인 따위는 일상이 되어 있을 그녀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 것은, 내 욕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은 그러한 감정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이끌고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



 “어머, 안녕하세요.”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그녀는 안경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로 맞받아쳤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까 그 숙녀분은?”

 “아, 먼저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어쩐지 그녀를 데려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그녀를 시설로 보냈다. 그녀는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내 말에 거역하지는 않았다. 내가 사 올 선물을 기대한다는 말만 조용히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랬군요.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아, 물이면 괜찮습니다.”

 “기껏 오셨는데 커피 한잔하세요. 공짜니까 걱정은 마시고요.”

 “아, 아니에요! 그런 귀한 걸…….”

 “사양 마세요.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어서 괜찮아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특유의 씁쓸한 향이 기분 좋게 코를 간질였다. 상류층 거주 구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상류층 중에서도 소수만 즐길 수 있는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혹시나 해서 메뉴를 살펴봤지만, 커피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개인적인 취미 생활인 것 같았다.



 “그동안 자유롭게 둘러보세요. 허름하지만 나름 꾸몄답니다.”



 그녀의 말에 따라 나는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빈티지한 느낌의 벽지는, 멸망 직전의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분위기가 애수 어린 그녀의 눈빛과 어우러져, 공간 전체가 외로움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세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준 잔을 받아 난생처음으로 커피를 입에 대었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썼다. 과거에는 누구나 즐겨 마시던 음료라고 하던데, 나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조금 쓰죠? 설탕을 넣어서 마셔 보세요.”



 그녀가 설탕이 담긴 작은 병을 내게 내밀었다. 병 하나까지도 그녀가 직접 고른 듯한 세심함이 묻어나 있었다. 어쩌면 남편을 잃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남편에 대한 얘기인가요?”



 나는 말문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저희는 구면이긴 하지만 거의 초면이잖아요. 공통된 화제라곤 그것밖에 없죠.”

 “아, 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나요?”



 생긴 것처럼 감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잔잔하게 흔들리는 커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해야 할 말은 이미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당신의 남편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실을 고해야 할 명확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이, 평생 그 이유도 정확하게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죗값을 치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지만, 그저 그녀가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무력하게 가족을 잃었던 내 모습과 겹쳐 보였을 수도 있다. 그저 내 안에 있는 불편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진실을 말한다. 혹은 말하지 않는다. 내겐 아무 권리도 없었고 아무 당위성도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한들 후회만 남을 것 같았다. 내가 모순적인 고민에 빠져 있던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와 그이는 같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계종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에도, 저와 그이를 포함한 몇몇은 살아남았습니다. 대부분 연세가 있으셨던 터라, 이계종들이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거든요.”



 이계종이 젊은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나는 설탕을 넣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썼다.



 “젊은 사람이라고는 저와 그이밖에 남지 않았죠. 어르신들은 저희에게 자식을 낳으라고 했습니다. 마을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저희 둘밖에 없었으니까요.”



 커피잔을 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나는 유심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이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사랑을 강요받긴 했지만, 결국 아이를 가지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설마.”

 “이계종이 또 마을을 휩쓰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그만……아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그 이후로 저는 그이에게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저는 죄책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하지만 그건 당신의 잘못이…….”

 “그땐 그걸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 같았고,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묘사했다.



 “그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솔직히 조금 안심했습니다. 더는 그이의 원망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요.”

 “…….”

 “저도 참, 못된 사람이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은 달게 느껴졌다.



***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와 주셔서 감사해요. 또 오세요.”



 나는 커피를 모두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려는 순간,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다음에는 얀붕 씨의 이야기도, 꼭 들려주세요.”



 이번에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안심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결국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알게 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고 죄였다. 얀순이가 짊어질 수 없는 무게라면, 내가 짊어져야만 했다.



 ‘……아, 맞다. 지갑.’



 거리를 걷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갑을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을 내려고 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절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다시 주머니에 넣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카페로 향했다. 조금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지갑을…….”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밀려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아니,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과, 한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얀붕아……?”



 조금 전까지 내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던 여성이, 창백함을 넘어 순백에 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익숙한 여자아이가 피투성이인 채로 서 있었다.



 “어, 어……?”



 힘이 풀린 동공이 나를 원망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시체 옆의 얀순이는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미안.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



 얀순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등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촉수가, 사체에서 뼈를 마구잡이로 발라내고 있었다. 뼛조각이 바닥에 부딪혀 구르는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어쩔 수 없었어, 얀붕아. 네가 먼저 남이 준 음료를 멋대로 마시고, 내가 죽인 사람의 주변인과 가까워졌잖아.”



 촉수가 시체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이 말도 안 되는 크기로 벌어졌다. 뼈가 없어진 시체는 녹아내린 것처럼 흐물흐물했다. 그녀는 그대로 시체를 한입에 삼켰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형체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살점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녀가 시체를 씹을 때마다 피가 튀었다.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그러나 그녀가 식인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순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토감이 일었다.



 “우욱, 커헉……!”



 목이 뜨거웠다. 눈물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얀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모두 집어삼켰다. 그녀의 배가 잠시 부풀어 오르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분명히 그녀는 인간을 통째로 삼켰다. 그 증거는 분명히 뼈와 피라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상이 통째로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얀붕아, 정신 차려.”



 피가 흥건한 모습으로 얀순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귀엽기만 하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제 광채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여자는 남일 뿐이야.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예전에도 많았어. 나한테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한테는 복수할 수 없으니까, 애꿎은 다음 관리자한테 화풀이하던 사람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관리자들도 많았어. 이 여자도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부정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널 지키기 위한 거였어……이해해 줄 거지?”



 얀순이가 아직도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아니야, 넌 이해하지 않아도 돼. 넌 순수한 그대로 남아 있어.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내 역할이야.”



 그녀가 나를 몽환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주저앉아 덜덜 떠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니까.”



 소중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사랑 고백도,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6




 “왜 그랬어……?”



 서서히 돌아온 내 이성이 멋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뭐?”

 “죽일……필요는 없었잖아.”



 시야가 흔들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말은, 주워담을 수도 도중에 멈출 수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얀붕아. 내가 아니었으면 이 여자가 아니라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이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얀붕아. 얀붕아. 넌 순수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엔 너처럼 선량한 사람보다, 남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

 “그래도,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


 

 당사자인 내가 더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얀순이가 믿을 수 없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겨우……?”



 그녀가 천천히 두 손을 내 어깨로 옮겼다. 죽은 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피가 목을 타고 흘렀다. 충격으로 물든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난 널 위해서 이런 건데, 겨우 그런 이유라고?”



 얀순이의 동공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그 분노는 점차 수그러들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미안해.”

 “어……?”

 “너와 관계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너를 위협에 빠트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가 미리 처리했어야 했는데.”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내뱉은 말은, 소름 끼칠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처리하려고 했던 건데……네가 다시 올 줄은 몰랐어. 미안.”

 “……그게 아니잖아.”

 “응?”

 “네가 날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난 전혀 기쁘지 않아! 나는…….”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얀순이가 내 말을 막았다. 아까부터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인걸까.



 “그래. 맞아. 난 괴물이야. 게걸스럽게 사람을 먹어 치우는, 이계종이라고.”

 “얀순아, 내 말은 그런 뜻이……!”

 “동작 그만.”



 문을 발로 차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빛이 나와 얀순이의 눈을 비추었다.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덩치가 있는 남자가 나를 제압했다. 뒤이어 무장한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나와 얀순이에게 총구를 들이밀며,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윽!”

 “뭐, 뭐야!”

 “실험체 X, 돌발 행동을 하면 이 자를 죽이겠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얀순이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현장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널부러진 뼈와 낭자한 선혈. 비록 시체는 없었지만,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잠자코 따라와.”

 “얀붕아! 얀붕아!”



 군인 둘이 내게 다가와 강제로 나를 일으켰다. 나는 애타게 부르짖는 얀순이를 뒤로 하고 피냄새가 가득한 카페를 빠져 나왔다. 그녀의 비명소리도, 갑작스러운 연행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나는 차량에 탑승한 뒤 수수께끼의 장소로 이동했다.



***



 “들어가.”

 “야……실험체는 어딨어!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닥치고 있어.”



 괴력의 거한에 의해 나는 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중간부터 눈을 가리고 움직인 탓에 이곳이 당최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얀순이가 갇혀 있던 시설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것 뿐이었다.



 “이봐! 뭐라도 알려 달라고! 난 관리자야! 실험체의 신변에 대해 알 의무가 있어!”

 “이제 관리자 업무는 끝이다.”

 “뭐라고?”

 “목적은 이미 달성했거든.”



 목적?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줄로만 알았다. 한 달 동안 얀순이에게 시체를 직접 공급하지 않았고, 관리마저 실패한 탓에 그녀가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당분간 넌 여기에 있으면 된다.”



 거한은 그렇게 말한 뒤 문을 잠그고 떠나고 말았다. 나는 졸지에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인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독방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얀순아.”



 그녀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녀가 눈 밖에 나거나, 최악의 경우 처분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니까.’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던 마음이기도 했다.



 “하아…….”



 사실은, 그녀를 탓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얀순이가 살아온 인생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참히 민간인을 살해하는 모습이, 허무하게 죽어가던 가족의 모습과 겹쳐 보여서, 나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얀순이는, 나를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 그 행동의 도덕성이나 당위성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얼마나 큰 결심일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된 그녀의 사랑의 크기도,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과연 나 따위가 그녀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을 수 있을까. 시시각각 죽음의 공포에 놓인 그녀를, 진정으로 내가 구원할 수 있을까.



 ‘우선, 만나면 사과하자.’



 나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일어난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그녀를 이해한 척, 위로하려는 척했던 내게 잘못이 있었다. 그녀가 한 달 동안 나 대신 민간인을 찾아 죽였을 거라는 사실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황을 알면서도 나만 고결하고 순수한 척하며, 그녀를 깎아내리고 말았다. 그 죄에 대해, 나는 다음에 만나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



 지옥같은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방에 갇힌 채, 주는 음식만을 받아먹으며 쓰레기처럼 허송세월을 보냈다. 누군가 내게 음식을 갖다줄 때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질문을 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맨몸 운동을 시작했고,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얀순이를 생각했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걸까. 살아는 있을까. 나는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걸까. 해결될 수 있는 의문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영겁같은 시간에도 끝은 있었다. 어느 때처럼 운동을 하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한 손에는 빵을, 다른 한 손에는 물을 들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과거에 나를 처음 안내했던 연구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셨나요?”

 “얀순이, 얀순이는 어디야!”



 나는 이성을 잃은 채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 충격에 빵과 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얀순이를 실험체라고 돌려 말할 여유도 없었다. 이미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자칫하면 그녀를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독방의 문을 닫았다.



 “실험체는, 폐기 처분 예정입니다.”



 지나치게 큰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내 가슴을 찔렀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민간인을 죽였거든요. 뭐, 그렇다곤 해도……결정적인 도움은 당신이 줬지만 말이죠.”



 도움? 내가? 마치 꿈 속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과의 유대감 때문이요. 사실 초커 같은 걸로는, 실험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이용했습죠.”

 “나를, 이용해……?”

 “저항하면, 당신을 죽이겠다는 식으로. 그 실험체, 꽤 당신에 대한 신뢰가 깊더군. 그 난폭한 괴물이 고분고분히 말을 따르는 풍경은, 정말 진풍경이었습니다.”



 미간이 꿈틀거렸다. 눈앞의 모든 것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실험체는, 이계종의 침입이 가장 활발한 구역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치뤘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인간은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죠.”

 “…….”

 “인간을 먹지 못하면, 이계종의 능력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실험체 역시 인간의 몸을 갖고 있으니, 다른 이계종들에게 잡아 먹히겠죠. 골칫덩어리였던 실험체를, 이제야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입죠.”

 “왜 그런 복잡한 방법을?”

 “이계종과 동화된 인간은, 어째선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미래를 본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얀순이의 선생님에 의해 위기에 빠졌을 때, 얀순이가 비슷한 말을 내게 해줬던 기억이 났다.



 “섣불리 그녀를 죽이려다간, 도리어 저희가 피해를 입을 뿐이죠. 그 원리를 자세히 밝혀내지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만……저희는 이계의 ‘문’ 너머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

 “이야기가 딴 길로 샜네요. 어쨌든, 실험체가 이계종 소탕에 유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앞으로 주변 국가와의 관계나, 최근 들어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

 “닥쳐!”



 나는 그를 그대로 벽으로 밀었다. 아무리 다리를 다쳤다고 해도, 연구만 하던 말라깽이를 제압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나자빠진 그를 일으켜 세워, 그 재수 없는 면상에 주먹을 한 대 갈기려던 순간이었다.



 “진정하십쇼. 저는 당신을 도우려는 쪽입니다.”

 “도와……?”

 “다만, 당신에게 그럴 각오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담배로 흐리멍텅해졌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또렷하게 나를 쳐다보며 묻고 있었다.



 “당신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나요?”



***

 


 “헉, 헉……!”



 달렸다. 의사가 다시는 달릴 수 없다고 선언한 다리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리를 이루는 섬유가 하나씩 뜯겨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제가 알려준 길로 빠져나가면, 무기와 차량이 있습니다. 마음껏 사용하시되, 이계종 출몰 구역부터는 차를 버리고 조심스럽게 이동하십시오.’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저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저도……연구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방관해야만 했죠.’



 그의 말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그가 진실을 고했는지, 아니면 나를 보기 좋게 함정에 빠트린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위치 추적기입니다. 부디……그녀를 구해 주세요.’



 나는 지금, 그녀를 구하러 가고 있다.



 다리가 점점 움직이지 않았다. 추적기가 점점 가까워졌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헤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소규모의 이계종 무리와 마주칠 때마다, 총으로 그것들의 대가리를 꿰뚫었다.



 탄약이 모두 소진되었다. 마지막 남은 이계종이 내게 달려왔다. 나는 칼을 휘둘렀다.



 훈련받은 군인의 신체로도, 이계종을 죽일 수는 없었다. 고작 이계종의 급소를 노려 움직이지 못하 게 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마저도, 이계종의 촉수에 배가 꿰뚫리고 말았다.



 흘러나오는 피를 왼손으로 틀어막았다. 이 잔해만 넘으면,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그녀가 보일 터였다. 만약 이 신호가 가짜라면, 그땐 뭐, 이 빌어먹을 세상에 저주라도 퍼부을 예정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운명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얀붕아……?”

 “얀순아!”

 “여긴, 어떻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피투성이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다 찢어지긴 했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살아 있었다. 얀순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어떡해, 너 상처가……!”

 “다행이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아픔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더럽게, 아프네……씨발…….’



 상처가 벌어졌다. 몸에 힘이 점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얀순이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너 미쳤어? 이런 위험한 곳에는 왜 왔어!”

 “네가……위험하니까 왔지.”



 나는 고통을 억누르며 애써 웃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너한테 사과하려고.”

 “얀붕아…….”

 “미안. 네가 괴물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널 이해해주지 못해서.”

 “나, 나도……내 멋대로만 행동해서 미안해…….”

 “리본, 아직도 하고 있네. 예쁘다.”

 “고, 고마워…….”



 갑작스러운 칭찬에, 얀순이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 미소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너랑 만나서……좋았어.”

 “뭐……?”



 간신히 내뱉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차가운 유언처럼 느껴졌다.



 “네가 없었으면 난 즐거운 추억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죽고 말았을 거야.”

 “가, 갑자기 왜 그래……얀붕아…….”



 얀순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헀다.



 그 표정이 너무 안타까워서, 나는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미안해. 널 보듬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 일단 치료부터 하자! 나 아직 싸울 수 있어!”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하기 위해, 무리해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왔다. 와야만 했다.



 “나를 먹어 줘.”



 얀순이가 힘을 되찾는 방법. 인간을 먹는다. 그러나 이 주변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그러니까, 답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날 먹고, 여기서 도망쳐. 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나한테 업혀. 지금 당장 병원으로……!”



 말끝이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할 때마다 고통이 커졌다. 나는 그녀의 옆에 힘없이 쓰러졌다.



 “얀붕아! 얀붕아! 안 돼, 싫어, 싫어!”

 “슬프게 해서……미안해. 그리고…….”



 오열하는 얀순이의 머리를, 되도록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나는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그녀를 웃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냐, 그런 생각은 이제 와서 아무런 소용 없겠지.



 ‘얀순아.’



 줄곧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었다.



 가족을 잃은 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나의 소망과는 달리, 그저 국가에 충성할 뿐인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나의 뜻대로, 눈앞에 있는 이 소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것만큼은, 분명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까지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여기서 끝나더라도, 미련 따윈 없다. 왜냐하면,



 “사랑해.”



 그녀를, 얀순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



 일주일 동안을 쉬지 않고 싸웠다. 여기 있는 이계종을 모두 죽이면,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이곳은 지금까지의 전장과는 달랐다. ‘문’은 끝없이 열렸다. 죽인 이계종보다 새롭게 나타난 이계종이 더 많았다. 개중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덩치가 큰 개체도 여럿 있었다. 아무 상관 없었다. 늘 그랬듯이 모두 죽였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몸에 힘이 점점 들어가지 않았다. 평범하게 막을 수 있던 공격에 평범하게 상처를 입었다.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순간, 초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서 죽어라. 그러면 관리자는 살려주겠다.



 나는 싸움을 멈추고 적당히 건물의 잔해에 몸을 숨겼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나를 붙잡아 둘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 더 이상, 내가 쓸모가 없어진 것이리라.



 실험체로, 무기로 사용되는 인생에 후회는 없었다. 그가 있었으니까. 그가 즐거움을 알게 해줬으니까. 그가 감정을 일깨워줬으니까. 그가,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해줬으니까.



 다만,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를 만나 사과하는 것. 멋대로 사람을 죽인 걸 사과하고, 오해를 푸는 것.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다. 그런데, 하늘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기적같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얀붕아……?”



 아니야.



 “얀붕아?”



 거짓말이야.



 “얀붕아, 얀붕아!”



 이럴 리가 없어.



 “장난, 장난 치는 거지?”



 차갑게 식은 뺨을 가볍게 때렸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안 죽겠다고 했잖아…….”



 약속했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날 안아줬으면서.



 “왜, 거짓말 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힘없이 그의 시체 위에 떨어졌다.



 “왜, 나 같은 걸 위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죽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냄새를 맡은 몸은, 간절하게 신선한 시체를 원하고 있었다.



 그를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손으로 날카로운 촉수를 억지로 붙잡았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계종의 비늘에 피부가 갈려나갔다. 격통에 비명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 몸에 기생한 이계종을 막았다. 그러나 겨우 인간의 몸으로 이계종의 자아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 돼에에에에!!!”



 눈앞에서, 그가 분해되고 있었다. 체액과 골격이 빠져나가며 급격하게 그의 몸은 형체를 잃었다. 등에서 나온 촉수가 억지로 내 입을 벌렸다. 눈물을 흘리며 저항했다. 먹고 싶지 않아.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얀붕이랑 같이 죽고 싶어. 내 간절한 외침은 얀붕이의 시체에 가로막혀 나올 수 없었다.



 “싫……어…….”



 처음으로 사람을 먹었을 때보다 더 구역질이 치솟았다. 그간 눌러왔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늘 그랬듯 소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힘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더 싫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목과 심장에 촉수를 겨누었다.



 “아아아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아픔은 잠시 뿐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피부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강하게 뛰며 다시 혈액을 공급했다. 두 손을 펼쳐 바라보았다. 피부가 새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축하해.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넓게 펼처진 폐허에, 수많은 이계종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인간을 먹어 치움으로써, 우리들의 여왕님이 되어 줬구나.



 “전부, 전부 너희들 때문이야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이계종들의 신체를 갈랐다.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강한 파괴력이었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시체가 생긴 자리는 뒤에 있는 다른 이계종들이 자리를 채웠다. 일방적인 학살이 한동안 이어져도, 그들은 묵묵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우두머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왕님, 여왕님의 소원은 뭐야?



 진정되지 않았다. 얀붕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얀붕이를 죽인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여왕님의 소원을, 우리에게 알려줘.



 나는, 나는, 나는…….







1. 복수한다.

2. 용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