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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장애 환자들을 위한 재활 치료을 마친 얀순이.


오랫동안 머물었던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사회로 복귀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오감 중 하나만 없어도 생활하기 어려운데 두 가지를 잃게 되었으니 걷는 것 조차도 무서워해야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러다보니 얀순이의 부모님는 그녀의 대학 생활을 만류하게 되었고 그녀의 거동을 도와줄 도우미견도 분양받으려 했으나,


그럼에도 얀순이는 대학 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며 도우미견 분양도 거부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각과 청각이 없는데 도우미견의 조력이 없이 생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자,


그녀는 손으로 근처를 더듬더니 옆에 있던 얀붕이를 발견하며 그의 팔을 붙잡고 철썩 달라붙는 모습을 보였다.


"야은부이가 이쓰니, 피료 업써요오......"


말그대로 항상 얀붕이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얀순이의 부모님은 더 이상 설득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얀붕이에게 딸을 잘부탁한다고 말하며 자그만한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 열쇠의 정체는 바로 얀순이네 집 열쇠, 즉 동거를 하든 무엇을 하든 허락해주겠다는 증표인 셈이다.


자신이 얀순이의 부모님에게 인정받은 게 낯간지러웠던 얀붕이였지만 그래도 열쇠를 받아들이며 얀순이를 곁에서 도와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렇게 동거 생활이 시작되며 둘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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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의외로 잠이 많던 얀순이를 깨우기 위해 얀붕이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줬다.


혹여나 그녀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지 않게끔 얀붕이가 나름대로 고안한 방법이었다.


효과는 발군, 잠에서 깨어난 얀순이는 곧장 깨어주고 있는 얀붕이에게 안겨들며 어리광 피웠다.


"야은부아~♡"


[슬슬 일어나서 밥먹고 학교 갈 준비해야지?]


그러면서도 얀붕이도 얀순이의 어리광을 모조리 받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주었다.


이것이 둘에게 있어 일과의 시작이었다.


얀붕이의 팔에 기대서 의지하며 행동해야만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얀순이는 오히려 행복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따스한 얀붕이의 팔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빛과 같았으니, 영원히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했다.


얀붕이도 얀순이가 또 다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의하면서 그녀를 배려해주었기에 얀순이는 순탄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편안하게 지내는 건 아니였다.


얀붕이가 화장실같은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우며 얀순이는 극도로 불안해했고 이를 목격한 다른 학생들이 호의로 그녀에게 다가와 도와주려하면 자리에 바로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 정도로 무서워했다.


얀순이는 부모님과 얀붕이를 제외한 사람이 만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교 안에서는 항상 얀붕이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야은부아~! 야은부아!!"


엄마를 찾는 아기처럼 얀붕이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면서 그를 찾고 있었고, 그때마다 얀붕이는 황급히 그녀에게로 돌아가 붙어있어줘야 했다.


이 정도는 얀붕이가 다소 바삐 움직이면 끝나는 해프닝이지만 진정으로 얀붕이를 힘들게 하는 요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주변 사람들의 오해와 뒷담였다.


"있잖아, 혹시 얀붕이가 얀순이를 괴롭히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 얀순이를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괴롭히는 걸지도?"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뒤에서 딴 여자랑 놀아나고있는 거지!"


여자들의 말같지도 않은 뒷담을 시작해서


"분에 겨운 놈... 얀순이같은 여신님이 좋아해주는데 저렇게 애타게 하다니!"


"그래서 저번에 내가 얀순이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나를 극도로 무서워하더라? 솔직히 상처 받았어......."


"그거 뻔하지 않냐? 얀붕이 놈이 얀순이에게 다른 남자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지시한 거겠지, 치사한 새끼."


남자들의 구질구질한 질투까지.


선동과 날조가 도배된 시선으로 둘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얀붕이는 구토까지 나올만큼 그들이 역겨웠다.


오죽하면 얀순이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로.


아무튼 초등학교 때처럼 그들을 무시하고 지내려고 했으나 그들은 반응이 재미없으면 괴롭힘도 멈추던 초등학생이 아닌 다 큰 대학생.


얀붕이를 헐뜯는 소문은 멈추지 않은 채 그 부피를 부풀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얀붕이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얀순이를 이것저것 챙겨줘느라 지치는데 주변 사람들은 뭣도 모르면서 그의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얀순아]


[응? 왜에?]


[나 휴학하려고 해]


끝내 견디지 못한 얀붕이는 학기 도중에 휴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게......]


사실대로 말하자면 얀순이가 자신의 책임이라며 마음 아파할 것이 분명하기에 얀붕이는 사실대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혹시 나 때문이야? 항상 민폐를 끼치는 나를 챙겨주느라 힘들어서 그런 거지?]


얀순이도 평소 자신이 얀붕이를 힘들게 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얀순아, 결코 너 때문에 휴학하려는 게 아니야]


휴학하고자 하던 원인은 기분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주변 사람들이지 얀순이의 잘못이 아니였다.


[그러면 어째서?]


[그게...... 나는 군대에 가야하니까]


좋은 사유가 떠오르지 않았던 얀붕이는 어차피 가야만 하는 병역의 의무를 핑계아닌 핑계로 댔고,


얀순이는 이 핑계를 듣자마자 매우 안타까워하며 침울해 했다.


[안가면 안돼?]


[군대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 얀순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도우미견을 분양 받......]


[그럼 나도 휴학할래]


"?!"


얀순이의 휴학 선언에 당황하게된 얀붕이.


 그가 생각한 시나리오는 얀순이가 자신의 선택을 이해해주고 도움없이 스스로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거지, 그녀마저도 같이 휴학하는 게 아니였다.


[그러지마 얀순아! 내가 군대 간다고 너까지 휴학할 필요없잖아?]


[싫어! 나도 휴학할 거야!]


얀순이에게 있어서 얀붕이는 초등학교 그 사건 이후로 부터 이미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문제가 많았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 시각을 잃은 부상을 당한 지금도 계속 곁에 남아서 보듬아주는 사람,


그러다보니 얀순이에게 얀붕이는 인생의 전부였고,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에게는 장애를 가진 입장을 이용해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 건의해 계속 얀붕이와 같은 반에 배정 받은 사례가 있었다.


그만큼 얀붕이를 사랑하고 곁에 있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돋보였지만, 얀붕이는 이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얀순이와 같은 반에 배정받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 그리고 그녀가 같은 명문대까지 입학한 건 단순히 그녀의 학구열이 높아서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얀순이는 누구보다도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했으니 그걸 지켜봐온 얀붕이는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시간을 허비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게 둘은 소리없는 언쟁을 이어갔고, 처음으로 싸움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얀붕아,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를 떼어내려고 하는 거야?]


[그런 의도가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앞으로의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길 원치 않았을 뿐이야]


[내 시간을 어떻게 쓰는 건 내 마음이잖아? 게다가 나는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한 걸?]


[얀순아, 당장은 행복할지도 몰라 그러나 미래에는 이번 일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아니, 지금도 미래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러니 나도 휴학하며 너의 곁에 있을 거야!]


[얀순아, 제발!]


얀순이가 원하는 건 단순히 얀붕이와 함께 있는 시간 뿐, 하지만 얀붕이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얀붕이도 얀순이가 자신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기를 원했지만 그녀 또한 이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게된 그 끝은 결국 엇갈림만이 남기 마련.


머리가 과열되었다고 판단한 얀붕이쪽에서 먼저 신중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자며 집을 떠나 이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덩그러이 혼자 남겨진 얀순이는 이불에 얼굴을 묻어 흐느끼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둘은 한번도 만나지 않은 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학 절차를 끝낸 얀붕이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입대 시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얀순이도 자체적으로 대학교에 가지않고 집에 틀어박혀 점자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아무렇지 않게 개인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달랐다.


얀붕이는 언제나 얀순이 걱정을 하느라 제대로된 일과를 보낼 수 없었고, 얀순이도 매일 눈물를 흘리면서 얀붕이를 그리워했다.


특히 얀순이는 우울 증세까지 보이며 그렇게 아름다웠던 외모마저 피폐해져 갔다.


[미안해, 잘못 했어, 내가 잘못 했어 얀붕아, 그러니까 돌아와 줘! 네가 없으면 하루라도 살 수 없어! 네가 너무 보고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제발......!]


자신의 마음이 담겨진 편지를 남기는 건 어떻게든 했으나 정작 이를 그에게 전달할 수 없었던 상황.


시각과 청각이 없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얀붕이를 찾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얀순이는 전해주지 못하는 편지를 부여잡으며 눈물을 짜내는 나날들을 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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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울다가 지쳐 잠들어버렸던 얀순이가 잠에서 깨자마자 하는 한마디.


"보여! 아피 보여어.......!"


신은 아직 얀순이를 버리지 않았다는 듯이 시야가 돌아오는 기적 하나가 그녀에게 내려진 것이다.


영원히 어둠만 바라보고 살 줄 알았던 얀순이는 흐릿해도 확실하게 천장이라고 인지시켜준 빛을 보며 전율하고 있었다.


"얀부으아!"


이 기쁨을 얀붕이에게도 공유하고 싶었던 얀순이, 그러나 얀붕이는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난 상태였다.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얀순이는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적어둔 편지를 챙겨 곧바로 밖으로 튀쳐 나왔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나왔을 만큼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얀붕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얀붕이의 집, 시각을 잃은 후에 한번도 찾아온 적 없었을 만큼 오랜만이니 집 주위를 서성일 정도로 얀순이는 긴장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얀붕이를 매우 보고싶었던 그녀는 기어코 초인종을 눌러버렸고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안에 있었던 사람이 나왔다.


"누구세요?"


현관문 안전 고리를 건 상태로 얼굴을 빼꼼내미는 여성, 얀붕이의 어머니였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던 사람은 아니였지만 아쉬워하는 눈치를 내비치지 않은 채 얀순이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머! 얀순이 아니니?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는 독순술 덕분에 얀순이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야은붕이 이써요오?"


차마 수첩까지는 챙기지 못해 필담은 무리였던 얀순이는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이 어눌한 소리를 내었다.


다행히 얀붕이의 어머니는 그녀의 어눌한 발음을 이해하며 알아들었다.


"어머 어쩌지? 얀붕이는 지금 알바하러 갔는데? 안에서 기다릴래? 아니면 알바하는 곳, 위치라도 알려줄까?"


"아, 아려주쎄요오!"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였던 얀순이는 후자를 선택하였고 위치를 듣자마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얀붕이가 일하고 있는 곳은 그리 멀지않은 어느 편의점.


편의점 유리 너머, 카운터에 서있는 얀붕이의 모습을 확인한 얀순이는 문을 열고 그의 품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아......"


그럴 수가 없었다.


애교 많고 활발한 성격이라는 얀순이과 상반되는 귀여운 타입의 여자 아이.


그런 여성이 얀붕이가 옆에서 같이 웃으면서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이고만 얀순이는 편의점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야부으아......"


자신에게 싫증난 그가 다른 여성에게 빠진 것이라 생각한 얀순이, 둘의 모습을 지켜보니 천생연분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얀붕이가 그녀에게 은색 반지를 하나 건네주고 있었으니, 그 광경까지 보게되며 견디지 못한 얀순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녀는 기적처럼 잃어버렸던 빛을 되찾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언제나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다른 빛을 잃게 되었다.


믿기지 않는 현장, 믿을 수 없는 현실, 어떻게 이토록 운명은 자신을 잔인하게 짓밟는 것인지 그녀는 괴로워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이런 끔찍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이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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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알바를 끝내고 귀가한 얀붕이.


"다녀왔습니다, 아으~ 피곤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돌아왔니?"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맞이함과 동시에 탐문하기 시작했다.


"어디 있다니요? 알바하다 왔죠."


"그래? 이상하네? 혹시 알바하던 곳을 바꿨니?"


"아뇨,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게 아까 전에 얀순이가 너를 보기 위해 찾아왔길래 네가 일하는 곳을 알려주었는데......."


"예?! 얀순이가 여기까지 찾아왔다구요?"


그녀의 시각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얀붕이는 적잖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응, 그래서 네가 일하는 편의점까지 뛰어가더니, 너를 못만났다는 듯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이걸 건네주더라."


"이건......"


얀순이가 그에게 전해주려했던 편지, 하지만 어째선지 포장이 뜯겨있었다.


"안에 내용 봤어요?"


"그럴 리가 있니? 원래부터 그랬단다."


어째서 얀순이와 마주치지 못한 것인지, 그리고 편지 봉투가 왜 개봉되어있는지, 궁금했던 얀붕이였지만 일단 의문을 뒤로 한채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잔뜩 적혀있는 편지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알아볼 수 있게끔 써준 얀순이의 노력이 돋보였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얀순이가 얼마나 얀붕이를 그리워하고 있는지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을 만큼 그녀의 표현력은 상당히 대단했다.


오랫동안 보지못해 쓸쓸했던 건 얀붕이도 마찬가지, 그러다보니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조금씩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편지의 막바지를 읽어갈 때즘, 얀붕이는 무언가를 보고 경악하며 곧장 들어왔던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머?! 얀붕아! 왜 그러니!"


어머니의 걱정어린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얀붕이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나갔다.


"대체 뭐때문에, 저러는 거지?"


얀붕이가 떨구고 가버리는 편지를 주워드는 그의 어머니.


원래는 보지 않는게 예의이지만 너무나 궁금했던 그녀는 내용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어머나?!"


차분히 편지를 읽어나가던 그녀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두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던 편지의 마지막 줄.


마지막 줄의 글씨는 잉크가 아닌 피로 적혀있었으며 아직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피 글씨에는 섬뜩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네가 보고 싶어.]


한 여성의 사랑이 담겨있었던 애절한 편지, 그러나 마지막 문단에 의해 편지는 자살하기 전에 쓰는 유언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이 유언장을 읽게 된 얀붕이는 동거했던 그녀의 집을 향해 쉬지않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제발 늦지 않기를...!"


한번의 휴식없이 달리다보니 얀붕이의 심장은 고통을 느끼며 요동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뒤늦게 마주하게될 광경에 더한 가슴 통증을 느끼게될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얀붕이는 필사적으로 경직되려던 다리를 두들겨 가며 달렸다.


그리하여 3 킬로미터의 거리를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도착하며 얀순이의 집 앞에 서게된 얀붕이.


아무런 잠금도 안된 채 열려있는 현관문에 불안감을 느끼며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재회한 집임에도 느긋히 감상할 여유따윈 없었던 그는 모든 방을 빠르게 열어제끼며 안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얀순이는 없었다.


결국 그녀의 방만을 남겨둔 그는 지체없이 문을 활짝 열었고, 


"아...안돼!!"


천장에 묶여진 밧줄과 거기에 매달려있는 한 여성이 그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던 고통에 괴로워하던 얀순이, 바램대로 얀붕이의 모습을 보게된 그녀는 만족하며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돼! 얀순아!"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 얀붕이는 미리 부엌에서 챙겨두었던 식칼로 천장에 묶여져있는 밧줄을 끊어내었고,


떨어지려던 얀순이의 몸을 받아내며 그 자리에서 입을 통한 인공 호흡을 실시했다.


조금만 늦어지면 얀순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 속에서 얀붕이는 차분하게 그녀의 안에 숨을 불어넣어 갔다.


"콜록...! 콜록...!"


다행히 강제로 공기를 공급받은 얀순이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고,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얀붕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얀붕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얀순이를 일갈하기 시작했다.


"이 멍청아! 어째서 그런 거야!"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얀붕이는 목청 높여 외쳤다.


"어째서 이런 자살까지 하려했던 거냐고! 왜!!"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될 거라고 확신했던 그는 계속해서 얀순이를 보며 울부짖고 있었으며,


역시나 그의 말은 제대로 얀순이에게 전달되었다.


"미아해! 미아해에!! 그치마안! 나느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는 걸 깨달은 얀붕이는 그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그녀의 등에 손가락을 대며 글을 남겼다.


[말해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얀순이도 그를 껴안으며 그의 등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 봐버렸어, 얀붕이 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된 장면을......]


[...... 자세히 말해줘.]


그렇게 얀순이의 모든 사정을 알게된 얀붕이는 크게 한숨 쉬며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매섭지만 애정이 담긴 딱밤에 얀순이는 아파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바보야, 내가 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그치마안......"


"네가 본 여자애는 나랑 아무런 특별한 사이도 아닌 알바 선배야."


"그치마안, 반지이......."


"반지? 아! 이거?"


얀붕이가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내보이자 얀순이는 크게 눈을 떴다.


이전 얀붕이가 여성에게 건네주었던 그 은반지가 확실했기 때문에 놀랐던 것이다.


"자랑좀 하려고 보여줬을 뿐이야, 그리고 이건 너에게 사과하면서 건네주려고 했던 거니까."


얀순이의 오해에 허탈하게 웃던 얀붕이는 그녀의 왼손 약지에 은반지를 끼워주었다.


그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던 얀순이는 재차 놀라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게 되었다.


화려한 장식이 없어 약소해 보이는 은반지였지만 단순히 평범한 은반지가 아니였다.


반지 표면에 조그만한 볼록한 점들이 튀어나와 있었으니 반지에 점자 글을 남긴 것이었다.


[⠇⠐⠣⠶⠚⠃⠉⠕⠊⠐⠀⠈⠳⠚⠷⠚⠗⠨⠍⠠⠝⠬⠲ ]


오른손으로 반지의 표면을 만져보며 반지에 쓰여져있는 그 뜻을 알게된 얀순이,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면서 떨어져 간다.


"마음에 들어?"


얀순이는 아무 말없이 최고의 미소로 대답하며 반지에 박혀있는 점자와 같은 글을 그의 품에 남겼다.


[사랑합니다, 결혼해주세요]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 둘, 찐한 키스을 나누며 몸을 겹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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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얀붕이의 1인칭 시점-


"설마 이렇게 빨리 복학하게될 줄이야......."


휴학한 지 1년도 지나지않음에도 나는 또 다시 그립지 않은 대학교 정문에 서게 되었다.


"그러엄~ 조금 더 쉴래?"


그리고 내 옆에는 당연히 같이 복학한 얀순이가 붙어있었다.


"아니, 책임져야할 것들이 늘어났으니까, 이 이상 쉴 순 없지."


팔짱끼고 있는 얀순이를 유심히 바라본다. 


여전히 가련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그녀.


그러나 황금비를 자랑하던 몸매는 없어진지 오래였으니 그 원인은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복부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프로포즈했던 날, 우리는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에 휩싸인 탓에 피임도구 없이 첫경험을 해버리고 말았고 기념적인 첫발만에 기념적인 아이를 얻게 되었다.


다시 회상해보니 뜨겁게 하던 도중에 얀순이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신음 소리를 냈던 걸 보면 그녀 본인은 위험일이었다는 걸 알면서 그랬을지도.......


"히힛♡"


행복하다는 듯이 내 팔에 몸을 비비며 어리광 피우는 얀순이의 모습은 역시 치사하다.


이토록 기뻐하고있는 모습을 보면 불만을 갖고 싶어도 갖을 수 없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행복해?"


"응! 이제부터 항상 함께니까♡"


확실히 그녀의 임신으로 인해 책임질 게 많아지긴 했어도 안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였다.


우선, 얀순이와의 결혼과 회임으로 인해 대학교 안에 퍼져나가던 질 나쁜 소문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신에 혼전임신이라는 부끄러운 소문이 나돌지도 모르겠지만.......


다음으로 청각 장애를 지닌 아내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부양해야하는 입장 덕분에 어찌어찌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그만큼 나의 책임도 막중해졌지만.......


"있잖아, 얀붕아!"


"응?"


"항상 사랑해♡"


해맑은 미소와 또렷한 발음으로 기습해오는 얀순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헤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아픔을 겪고 힘든 생활을 보내왔던 나의 아내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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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말했듯이 바빠서 연중하려고 했는데 역시 쓰던 거 마무리 짓고 가는게 나을 듯해서 짬내서 쓰고 떠납니다.

때문에 다소 용두사미가 되지않았나 싶어서 미안함!

바빠질 현생좀 살다가 다시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