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아버지 밑에서

나는 악마에 대해 들으며 자랐다.


악마는,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지내고 있다고.

악마는, 인간을 타락시키길 좋아한다고.

악마는, 인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악마는, 완전히 타락시킨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고.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악마는 존재한다고.

악마의 유혹은 혼자서 이겨내기 힘드니,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믿음과 결심, 두 가지를 언제나 가슴에 품으라고.

내 아들, 너라면 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이었다.

악마는 존재했다.


틀린 말이었다.

나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한 부모님의 눈을 피해


나는 돈을 슬쩍했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나는 오토바이를 훔쳤다. 밤거리를 달렸다.

나는 술담배를 샀다. 민증이 뚫리는 곳을 찾아서.

나는 난교파티를 벌였다.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 중 몇몇은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라면서

자기 뿔과 꼬리를 보여주었다.


남자들은 자기 근육을 과시했다.

여자들은 내게 눈웃음을 쳤다.




서서히 후회되어가는 나날이었다.


언제나 엄한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쾌감도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나 고리타분하고 옳은 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나는 타락해갔다.

진짜 악마들의 강한 힘에, 나는 서서히 공포감을 느꼈다.




"죄송한데, 민증 제시해주세요."


타락의 종말은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언제나 술담배를 뚫던 곳에

깐깐한 새로운 알바가 들어왔다.


"너 씨발,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다급함에 소리를 쳤다.

뒤에서 친구들이 낄낄대고 있었다.


"모르니까 민증을 달라고 하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알바는 내뱉었다.


슬슬 내 친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위협을 하려 했고

알바생은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뻣뻣이 서서 위압을 견뎌내었다.


"씨발, 됐다. 야, 너 밤길 조심해라. 이름 봐 뒀다."


흥이 깨진 것 처럼 위장하며

여기서 죄 없는 사람이 얻어맞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난 친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알바생의 명찰엔 '김얀붕' 이라 적혀 있었다.




얀붕이와의 다음 만남은 아버지의 교회에서였다.


"어, 저기, 당신..."


작은 몸집으로 커다란 걸레 바구니를 옮기던 그 애는

숙취 때문에 의자에 뻗어버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동갑이니까, 말 놓는다?"


스스럼없이

우리 아버지랑 약간의 대화를 거치고 나서


얀붕이는 나한테 말을 깠다.


"니네 아버지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아버지는 저렇게 곧게 사는데..."


"하, 멍청한 새끼야. 니가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래."


"너, 니네 아버지 봐서라도, 내가 언제 한번 제대로 거기서 끌고 나온다. 딱 기다려라."



얀붕이는 그렇게 당차게 얘기하더니

이번엔 과자 그릇을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고등학생도

유치원생처럼 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별 거 아니라 생각했다.


그 날 저녁, 나는 친구들과 바이크에 올라탔고


"얀돌아, 가자!"


날 부르는 얀붕이의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저쪽에 저 친구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쪽에 그 친구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이쪽에 이 친구는 온 몸에 흉터가 가득했다.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능력의 악마들과

악마에 버금가는 정신상태의 인간들과

그 사이에서

얀붕이는 내 팔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니네 아빠가 너 데려오란다! 가자!"



모두가 벙 쪄서 어이없어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마법같은 일이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 뒤부터, 다신 그 모임에 가지 않았다.


끝도 모르고 타락해가려던 내 영혼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구원을 받았다.




봉사활동은 은근히 즐거운 일이었다.


"와, 저 누나 봤냐? 개이쁘네."


"... 넌 여기서도 여자 외모를 보니?"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사회 봉사활동 자리를 찾아

대학생들 사이에 껴서 일을 하다 보면

땀 냄새 나는 형들과 어린 티를 갓 벗어던진 누나들이

얀붕이와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학교 성적은 애초부터 포기하셨었다. 아버지 본인도 별로 똑똑하지 않았다고.

건강하게만, 착하게만 자라라고 하셨었다. 건강하게만 자랐었다.


그리고, 이젠 정신을 차리고 남들을 도우며 살고 싶게 되었다.

얀붕이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감사한 나날이었다.



곧, 나는 여자친구가 생겼다.

독실한 여자였다. 선하고, 남들을 돕길 좋아했다.


나와 같은 나이에,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그녀는

외면도 예뻤지만, 내면은 더욱 아름다웠다.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었다.





"오랜만이네?"


여자친구에게 사 줄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

고등학교 때의, 그 무리의 일원 중 하나였던 얀순이와 마주쳤다.


내 행복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깨져버렸다.




"어릴 때 친구를 보는 시선치곤 너무 적대적인데?"


얀순이는 웃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아, 그거 알아? 커피는 원래 악마의 음료라고 하다가, 맛 때문에 교황청에서 세례를 내렸다지?"


"... 원하는 게 뭐야?"


잊을 수 없었다.


여자의 육체를 가르쳐준 그 악마를.

악마의 존재를 가르쳐준 그 여자를.


내 과거의 죄악을 낱낱이 알고 있는 그 여자는, 그 악마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누가 잡아먹니? 긴장 풀어. 옛 친구가 우연히 만나서 오랜만에 인사 좀 하는데, 그렇게 대하면 나도 상처받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얀순이는 그렇게 내뱉었다.


"아니 뭐, 또 인사할 일 생길 거라서, 미리 와 봤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얀순이는 떠나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얀순이가 내게 인사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얀붕이 여자친구에요."


나와 내 여자친구 얀진이가 앉아있던 자리에

얀붕이와 얀붕이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했던 그 날


식어버린 커피와 굳어버린 내 앞에서

얀붕이는 해맑게 웃었다.


"나도 여자친구 생겨서, 너한테 소개시켜주고 싶었거든..."


자신보다 훨씬 큰 키의 얀순이에게 껴안겨 가로막혀서

얀붕이는 내 표정을 보지 못 했다.


내 여자친구 얀진이만이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보았다.





"...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냥, 어디서 봤다 싶어서..."


말 할 수 없었다.


얀진이는 착한 애였다.

얀진이는 내 과거를 몰랐다.

얀진이는, 얀진이만은 악마의 마수 바깥에 두어야 했다.


"키도 늘씬늘씬하고 예쁘더라. 얀붕이 걘 재주도 좋아, 착한 거 원툴인 애가 어떻게 저렇게 예쁜..."


얀진이가 감탄하는 소리는

내 고민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얀붕이는 서서히 봉사활동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졌다.


가끔, 얀붕이와 얀순이가 같이 교회에 올 때면

나는 그 둘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렸다.



"자기, 왜 그래?"


불안한 듯 묻는 얀진이의 의문을 뒤로 한 채

나는 언제나 얀붕이와 얀순이 커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얀붕이의 눈을 보았다.

아직 맑았다.

얀붕이의 표정을 보았다.

아직 밝았다.


얀순이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자기, 왜 그래? 점점 이상해..."


얀진이는 나를 계속해서 걱정했다.


진짜 걱정해줘야 할 것은 얀붕이인데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 하고


"아냐, 괜찮아, 괜찮아..."


건성건성 얀진이에게 대답하며

얀붕이와 얀순이 커플을 곁눈질했다.





"너, 뭐야. 대체 뭘 원하는 거야."


핸드폰 주소록을 뒤져서

얀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글쎄? 한번 만나자. 그러면 알게 될 지도?"


얀순이는 해맑게 웃었다.




무서웠다.

악마의 유혹은, 인간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고 배웠다.

실제로도, 나 혼자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만나야 했다.

적어도 무엇이 날 기다리는지는 알아야 했다.




"음, 긴장하고 온 너에겐 미안한데, 사실, 너에겐 별 관심 없어."


얀순이는 해맑게 웃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어머, 여기 커피 맛 괜찮네. 다음에 얀붕이랑 또 와야지."


"똑똑히 말해. 뭘 원하는 거야? 말 하지 않으면 네가 악마라는 사실을 다 말 할 거야. 얀붕이에게도, 내 아버지에게도!"


느긋한 그녀와는 달랐다.

나는 저 여자를 이길 수 없다.


적어도 목적이라도 알아야 했다.


"말해. 다 말하라고. 내가 악마라는 것도 다 까발려."


"뭐?"


"나도, 네 고등학교 시절을 다 말하고 다니면 되니까."


웃으며 그녀가 사진을 건넸다.


바이크 잠금장치를, 절단기로 자르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얀순이와, 또 다른 여자와 나신으로 얽혀있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말해. 원한다면."


"..."


말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처럼, 지금의 나도 겁쟁이라서.


"걱정 마. 너한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진짜니까."


그녀는 다시 웃고 떠나갔다.




얀붕이는 다신 교회로 오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얀진이와 내가 걷고 있으면

얀순이 혼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얀진이와 맞잡은 손을 풀고

손에 고인 식은 땀을 바지에 닦아내곤 했다.




요즘 얀붕이가 잘 안 보인다고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나는 얀붕이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얀순이에게서 간단한 문자가 왔다.


'O월 XX일, O시까지 xx건물 3층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가득 찬 강당에서

얀순이가 내게 인사했다.


"와, 얀돌아! 왔구나!"


해맑게 웃으며 얀순이는 크게 인사했고

다른 고등학교 때 친구들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이었다.

날 유혹하고, 타락시키려 했던.



곧, 나는 얀순이에게 잡아끌려

강당 무대 뒷편에 사무실로 들어갔다.



"제 때 왔네?"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건네주며, 그녀가 말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입에 커피를 가져다 대고,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내려놓았다.


"너무 긴장한다~ 귀여운 건 고등학교 때 그대로네?"


"..."


"걱정 마, 긴장 풀어. 너에겐 아무 짓도 안 해. 너에겐."


얀순이는 노트북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얀붕이는 온 몸이 묶여있었다.

몸에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울면서 빌고 있었다.


서서히

다음 사진으로 넘어갈수록

얀붕이의 표정이 녹아가고 있었다.


"얀붕이, 진짜 사랑스럽지 않아?"


꿈꾸는 듯 한 표정으로

얀순이는 속삭였다.


"그 위협적인 무리들 사이에서 널 구출해 내서 데려가는 거... 진짜,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 때 막았어야 했나.


내 과거가 까발려질까 두려워

얀붕이를 방치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얀순이의 뺨을 때렸다.


얀순이는 신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얀순이가 내 팔을 억눌렀다.


이길 수 없었다.

얀붕이보다는 컸지만 나보다는 작은 덩치의 얀순이인데도

인간과 악마의 차이라서일까


이길 수 없었다.



"너 따위에겐 관심 없었어. 톡 하면 바로 무너지는 영혼 따위 관심 없었다고. 그런데, 그런 내 앞에 얀붕이가 나타난 거야. 그 작은 몸으로, 고결하고, 깨끗한 영혼의, 아아... 사랑스러운 얀붕이가 나타났단 말이야..."



한 손으로 내 양 손목을 휘어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뒷목을 내리누르며

얀순이가 계속 속삭였다.



"가지고 싶었어. 진짜, 정말로 가지고 싶었어. 더럽히고, 망가트리고, 신에게 바쳐질 영혼을 완전히 내 색으로 칠하고 싶었어..."


"..."


"그리고 겸사겸사, 너도 좀 치우고 싶었거든."


순간 차갑고 낮게 확 깔린 목소리로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한 내게 말하며


얀순이는 다른 사진 묶음을 보여주었다.


얀진이와 같이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내 시선은 얀순이를 향해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어딘가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으로.


얀진이를 옆에 두고, 얀순이 앞에서 쩔쩔매는 내가 보였다.

얀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시선은, 점점 의심하는 시선으로 바뀌고 있었다.


얀진이를 옆에 두고

나는 계속 얀붕이와, 그 옆의 얀순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정도 있으니까, 선택할 기회를 줄게. 날 막을래,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둘래? 어딜 택하건 난 상관없어. 보복은 하겠지만."


얀순이는 신나게 웃고 있었다.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너 씨발 어디야! 너 뭐하는거야!'


얀진이의 문자였다.

첨부된 사진에는, 내가 도저히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얀순이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너 xx건물 3층이지?! 다 들었어! 거기 딱 기다려, 너 진짜 죽여버릴 거야!'



"네가 날 내버려준다면, 이거 다 수습해 줄 수 있는데. 어떡할래? 나도 바빠. 바로 윗 층에서 얀붕이가 날 기다려주고 있다구."


늦게서야 사실을 전해주는 얀순이에게 분노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강당 문이 열렸다.


분노에 가득 찬 얀진이는

강당 문을 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당 위 플래카드에는 '얀진아,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내 고백을 받아줘! -얀돌' 이라고 적혀있었고

내 손에는 반지가 둘 들려있었고

다른 식탁에는 케이크와 와인이 가득했고

다른 이들은 환호성을 외치고 있었고

얀순이는 '어머, 피앙세 등장이네요! 자, 고백을 받아주시겠어요?' 라고 마이크를 잡고 가증스럽게 묻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어떻게 된..."


말을 잃은 얀진이에게

얀순이는 마이크로 얘기하고 있었다.


"얀돌 씨가, 멋진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저랑 여러번 상담했거든요. 그래서! 가짜 사진을 보내서 얀진 씨를 여기로 불렀답니다~"


"..."


"참, 얀돌씨도 수줍음이 많아서, 여자친구 모르게 준비하느라 진땀 꽤 뺀 모양이에요, 자, 피앙세 얀진 씨. 고백을 받아주시겠어요?"


"받아줘! 받아줘!"


얀순이는 능숙하게 진행해나갔고

악마 관중들은 소리치고 있었다.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졌던 얀진이는 곧 부끄러움으로 다시 새빨개졌고


"좋... 좋아요..."


라고 대답했다.




고백을 받아 황홀해진 얀진이를 내 가슴에 껴안아 묻고

새하얘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얀순이가 말했다.


"자! 커플 성립 성공! 이건 내 돈으로 산 외국 여행 비행기 표니까, 얼른 다녀와요!"


얀진이는 감격에 겨워 울면서 내게 감사하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얀진이를 먼저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하기 전 얀순이와 인사를 나눴다.


"신이... 널 용서치 않을 거야..."


"아하하하하, 알았어. 이제 꺼져. 우리 두번 다시 보지 말자."


내 저주에도

얀순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겼다.



커플 여행이 끝나고

얀순이와 얀붕이를 찾았다.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 떴다.

둘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p.s. 소재 제공 및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yandere/8328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