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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 얀붕아"

 

"안녕, 얀진아. 일찍 나왔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지"

 

"맞아, 언니. 오빠는 나랑 같이 가면 되는데"

 

화창한 날 아침, 풋풋한 세 남녀는 대화를 나누며 등교하고 있었다. 

순둥순둥하게 생긴 얀붕이와 그 여동생인 순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얀진이.


얀붕이는 자신의 양 옆 붙어서 즐거운 듯 깔깔대며 웃고 있는 그녀들을 보며 자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보통 연년생인 남매끼리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다고들 하지만 그런 통념과는 달리 자신에게 많이 의지하고 말도 잘 듣고 귀여운 장난도 자주 치는 여동생 순애.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순해 빠졌던 얀붕이를 옆에서 보살펴주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응징해주었던 소꿉친구 얀진이.

비교적 평범한 축인 얀붕이에 비해 그녀들은 그 성격만큼이나 외모 역시 사랑스러워서 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난 참 복 받은 인생이기도 하지'

 

얀붕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얀진이와 순애를 바라보았다.

얀붕이는 어렸을 때부터 남매로서, 친구로서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녀들처럼 좋은 여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번 여행 때 그 과자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더라. 우리 얀붕이 생각나서 사왔으니까 이따가 집 들러서 먹어봐"

 

"언니, 나는?"

 

"순애, 너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고 얀붕이가 걱정하던데 학교 끝나면 집 가서 공부나 하렴"

 

"...오빠, 언니 집 가지 말고 이따 학교 끝나면 집에서 나 공부 좀 가르쳐 줘"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 하는 그녀들을 중재하며 얀붕이는 학교에 도착했다.

항상 그렇듯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순애를 그녀의 반으로 보내고 얀붕이 역시 얀진이와 함께 반에 들어섰다.

 

남학생들의 질투 어린 눈총을 받으며 얀붕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얀진이 역시 그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얀붕이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얀붕이 역시 헤실헤실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다가 친구들이 기만자 쉑이라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별다를 것 없는 익숙하고 평범한 하루였다. 그날 아침조회에 있었던 단 한 가지 사건만 빼면.

 

"자, 아침 조회 시작하기 전에 전학생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들어와라 태양아"

 

의욕 없어 보이는 중년의 담임선생이 누군가를 부르자 키가 훤칠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돌 같은 미남이 교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전학 오게 된 금태양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훈훈한 외모와 씩씩한 목소리에 자신감에 차있는 미소.

 

'누가 봐도 씹인싸 그 자체네. 부럽다'

 

얀붕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무관심한 표정으로 설렁설렁 박수를 치고 있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애들은 완전히 들떠서 저희들끼리 귓속말을 하거나 금태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얀붕이가 자신도 모르게 얀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히 앞을 바라보고 있던 얀진이는 시선을 느꼈는지 얀붕이 쪽을 돌아보더니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얀붕이 역시 마주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녀의 반응에 안도감을 느꼈다.

 

'나같은 놈이 얀진이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얀붕이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얀진이 역시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후로는 그들의 관계는 고백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연애를 코앞에 두고 있는 단계였다.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 반 아이들은 삼삼오오 금태양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축구 좀 하냐, 게임 뭐 하냐, 이런 질문들을 던져댔고 여자들은 그에게 호감을 마구 어필하고 있었다.


반면 얀진이는 얀붕이의 자리에서 그와 수다나 떨고 있었고.

그렇게 얀붕이가 그녀와 수다떨고 있을 때, 위에서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너희는 이름이 뭐야?"

 

올려다보니 금태양이 얀붕이와 얀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얀붕이가 당황해 어버버 거리고 있자, 얀진이가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나는 이얀진이라고 해. 여기 이 애는 김얀붕이고"

 

"그렇구나.. 얀붕아, 반가워. 1년동안 잘 지내보자"

 

금태양이 얀붕이에게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얀붕이는 얼떨떨하게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를 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얀붕이는 자신의 자리로 가는 금태양의 뒷모습을 보며 

 

'붙임성 좋네.. 찾아와서 인사까지 해주고. 친해지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 금태양은 가히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운동을 했다하면 종목이 뭐든 간에 에이스 급 활약에 게임도 잘하고 성격도 누구에게나 친절해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유명인사이자 인기스타가 되어있었다.

 

 

 

 

 

 

 


 

"얀붕아, 같이 가자! 아, 순애랑 얀진이도 있었네. 순애 오랜만인거 같다?"

 

금태양이 얀붕이에게 달려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금태양이 전학 온 지 두어달 정도 됐을까, 

얀붕이와 금태양의 관계는 꽤나 절친해졌고 얀붕이에게 껌처럼 달라붙어 다니던 얀진이와 순애 역시 자연스레 그와 가까워졌다.

 

"뭔 소리에요 오빠, 이틀 전에도 같이 집 갔었잖아요"

 

"태양이 쟤도 가끔씩 이상할 때가 있다니까 그치 얀붕아?"

 

"좀 이상하면 어때, 내가 태양이 친구긴 한데 난 진짜 저렇게 하루만 살아보고 싶다"

 

"아닠ㅋ 넌 또 무슨 개소리냐 얀붕아"

 

금태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삼총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붙어 다니던 셋이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사총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넷이 붙어 다니며 관계가 달라지고 있었다.

물론 얀붕이는 이것이 싫지 않았다. 

 

금태양이 얀진이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는 것 까지는 알 수 없으나 얀붕이는 얀진이의 행동과 말에서 얀붕이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한 순애 역시 자신의 오빠밖에 모르는 아이에서 좋은 오빠가 한명 더 생겼다는 느낌으로 금태양과 친하게 지내면서 좀 달라지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양이만큼 괜찮은 애는 본 적 없으니까'

 

얀붕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사건의 발단은 어느날 얀붕이의 사물함에 들어있던 수상한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얀붕아. 할 말이 있어. 이따 점심시간 끝나기 10분 전에 옥상으로 와줘.

중요한 얘기니까 꼭 와줘야 해’

 

마치 필적을 숨기기 위해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쓴 것과 같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편지.

누가 봐도 수상한 편지였지만 그래봤자 고등학교에서 수상한 편지가 와봤자 뭐 그리 큰일이겠냐고 생각한 얀붕이는 저 말을 듣기로 했다.

얀붕이는 평소대로 얀진, 순애, 태양과 점심을 먹은 뒤, 조금 걷자는 금태양의 제안을 거절하고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자 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옥상에 들어선 순간 바로 정면에 굉장히 이질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검정색 바람막이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마스크를 쓰고 옥상 난간 앞에 서있는 사람.

그리고 그 발밑에는 커다란 화분이 있었다.

 

“저기...”

 

뭔가 위험하다고 느낀 얀붕이가 입을 열자 정체모를 인물은 화분을 집어 들더니 난간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하자마자 얀붕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지만 그 수상한 사람은 그대로 손을 놔버렸고 화분이 산산조각 나며 깨지는 소리가 옥상까지 울려 퍼졌다.

 

챙그랑ㅡ!

 

그와 동시에 울리는 익숙한 비명소리.

 

“꺄아악!!”

 

‘얀진이 목소리..!’

 

얀진이의 비명에 패닉에 빠진 얀붕이는 자신의 옆을 지나쳐 재빠르게 도망가는 사람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난간 쪽으로 달려가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얀붕이는 잊지 못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바로 발밑에서 깨진 화분 앞에 주저앉은 채 새파래진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금태양의 얼굴.

 

옆에서 금태양을 부축하며 마찬가지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선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얀진이와 순애.

 

그리고 그 소란에 쏠린 학생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눈빛.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서야 얀붕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

 

 

 

“전.. 정말로 하지 않았어요..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 쓴 수상한 사람이...”

 

“그래, 얀붕아. 근데 그 시간에 그런 사람을 목격한 학생이 아무도 없다고 하잖니. 게다가 그 화분이 깨질 때는 옥상에 있던 건 너 뿐이었고”

 

“그건 맞지만.. 저도 편지를 받고 간 거예요. 제발 믿어주세요.. 선생님”

 

“후... 일단은 알았다. 선생님들끼리 회의해본 결과 범인이 자백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기로 했으니까... 태양이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고. 어쨌든 나가봐”

 

말이 알겠다는 거지 실상 얀붕이가 범인이지만 자백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투였다.

자신의 뒤통수에 꽂히는 선생님들의 의심서린 눈초리를 받아내며 얀붕이는 교무실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교무실에서 나오자 태양이와 얀진이, 순애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이후, 바로 교무실에 끌려간 얀붕이는 그들과 대화할 새도 없었는데 막상 그들을 마주하니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들아... 난 진짜로 하지 않았..”

 

고개를 숙인 채 목 메인 소리로 입을 여는 순간 금태양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알아, 새꺄. 너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냐”

 

“얀붕아, 너는 괜찮아? 안 다쳤지?”

 

“오빠, 걱정하지마. 누군진 몰라도 그 새끼 내가 반드시 잡아줄게”

 

금태양의 말과 함께 얀진이와 순애 역시 질세라 그를 위로해 주자 얀붕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나 얀붕이를 믿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셋 뿐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본 지라, 학생들에게나 선생들에게나 이미 얀붕이가 범인인 것으로 여겨졌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잘해주던 얀진이가 금태양을 좋아하게 되니 질투해서 그런 짓을 한 거다,

시스콘이라서 자기 여동생이 금태양을 더 따르니까 화가 나서 그런 짓을 한 거다는 둥의 출처를 알 수 없는 헛소문까지 떠돌았다.

 

얀진이와 금태양이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이 얀붕이를 보호해주었지만 그들 외에는 친한 친구가 많이 없던 얀붕이는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런 조롱과 멸시를 감내해야 했다.

 

얀진이와 금태양에게 의지하며 지내던 어느 날.

학생들 몇몇 무리가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자~ 다들 집합했냐?”

 

추리닝을 입고 대충 관리한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가진 체육교사가 아이들을 집합시켰다.

 

“선생님. 아직 금태양 안 나왔어요”

 

“뭐? 지금 시간이 몇신데 아직도 안 나와?”

 

그때 금태양이 교복을 입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태양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체육교사 앞에 서자 체육교사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는 물어봤다.

 

“임마, 너 체육복은 어쩌고 이러고 왔어?”

 

“아니... 그게 분명 아침에 챙겨왔는데 없어서요.. 죄송해요”

 

체육선생은 그의 귀를 한번 잡아당기더니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너는 한 번 봐주고 싶긴 한데... 체육복 안 입고 온 놈들은 청소하기로 정해져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태양이는 가서 체육관 창고 정리하고 나머지는 자유시간 가지도록. 이상”

 

체육선생이 벤치로 향하자 남자애들이 금태양에게 모여 볼멘 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우리 오늘 4반이랑 내기 축구하기로 했는데 니가 빠지면 어떡하냐”

 

“이 새끼, 이거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야. 너 없이 어떻게 이겨”

 

금태양도 미안한지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만약 지면 내가 돈 조금 더 보탤테니까 좀 봐주라. 나 청소하러간다. 힘내고”

 

그리고는 얀붕이의 등을 툭툭 치고는 씨익 웃은 뒤 반 친구들의 불만을 뒤로 한 채 창고로 향했다. 

애초에 얀붕이의 반은 금태양 빼면 시체라는 평가를 받는 반이었기 때문에 내기 경기는 얀붕이 반의 참패였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금태양에게 투덜거리는 반 친구들과 함께 얀붕이는 반으로 향했고 어느샌가 금태양이 그의 자리로 와 말했다.

 

“얀붕아, 음료수나 먹으러 가자”

 

“어, 그래 나 잠깐 지갑 좀 꺼내고”

 

얀붕이가 가방을 여는 순간 얀붕이가 지금 입고 있는 남청색 색깔의 익숙한 옷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얀붕이가 당황해서 그것을 꺼내자 교실에 금태양의 놀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그거 내 체육복...!”

 

순간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진 교실.

반 친구들의 시선을 느끼며 얀붕이는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왜 여기... 아니, 아니야 태양아, 그런게 아니라.. 아니 왜 이게 여, 여깄지?”

 

그러자 반 아이들 중 누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긴 왜야. 니가 숨겼으니까 거기 있겠지. 개새끼야”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비난의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시발, 김얀붕, 너 지금 장난하냐? 니 때문에 태양이 없어서 개 발렸잖아”

 

“그걸 떠나서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 너 도벽 있냐?”

 

“존나 음습하네. 시발, 그나마 태양이가 친하게 지내주는데 저딴 짓을 하네. 인성 미쳤곸ㅋㅋ 태양아 머리 조심해라. 또 언제 화분 날아올지 모르니까”

 

쏟아지는 악의 섞인 조롱. 

광장에서 인민재판 당하는 듯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얀붕이는 머리가 새하얘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비난이 이어지다 금태양이 간신히 반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종이 울리자 상황이 정리되었다. 

얀붕이는 애절한 눈빛으로 금태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태양아.. 이거 진짜 나 아니-”

 

“얀붕아, 이따가 얘기 하자”

 

금태양은 그런 말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갔고 얀붕이는 불안해하며 두리번거리다 얀진이와 눈을 마주쳤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얀진이는 얀붕이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깔고 고개를 돌렸다.

 

종례시간이 끝나자 얀붕이는 금태양과 얀진이에게 집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미안, 얀붕아. 우리 잠깐 얘기할게 있어서 다음에”

 

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했다. 얀붕이는 커져가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순애의 반에 찾아갔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순애요? 아까 어떤 언니 오빠랑 같이 하교 했어요”

 

왠지 모르게 불쾌한 눈빛을 한 순애 친구의 대답 뿐이었다.

그날 이후, 넷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금태양과 얀진이는 얀붕이를 평소대로 대하려고 하긴 했으나 무언가 불편하다는 티를 내기 시작했고

순애 역시 학교 내에서 거리를 두려고 했고 집에서는 예전의 애교 있고 다정한 모습보다는 마지못해 얀붕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드는 것은 금태양에 대한 정체 모를 괴롭힘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금태양의 교과서가 찢어져 있다거나 수행평가물이 사라진다거나 의자가 청소도구함에 처박혀 있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물론 체육복 사건과는 다르게 얀붕이가 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말은 안 해도 누가 범인인지는 다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얀붕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얀붕이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날 오래 봐 왔으니 알지 않느냐 하며 얀진이와 순애를 설득했고 그녀들 역시 그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반신반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나한테 명함 주면서 자기 이런 사람이라고 연락 달라고 하더라”

 

“올~ 좋겠네. 금태양. 연예계 진출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거 답답해서 안 할 거야, 걍 너랑 순애랑 노는 게 좋다 나는”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얀진이의 자리 앞에 금태양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얀붕이는 유기된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며 그 모습을 흘끗흘끗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도 예전처럼 저기서 함께 떠들고 싶었지만 그가 끼어들 때마다 무언가 어색한 기류가 흘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태양은 한창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다 얀진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우자 얀붕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얀붕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얀붕이는 오랜만에 받는 관심에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갔고 금태양을 따라 반 층 올라가 계단 옆 창가에서 그와 마주 보았다.

 

“얀붕아... 내가 너한테 뭘 잘못한 거 있니? 있으면 고칠테니까 이제 그만해주지 않을래?”

 

“어, 뭐.. 뭐라고?”

 

“나 정말로 스트레스 받아서 그래. 내가 뭘 잘못한진 모르겠는데 그만해주라”

 

금태양의 그 말에 얀붕이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아, 아니야! 진짜 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짓들을 해, 너도 전에 내가 그럴 리 없다고 그랬잖아... 제발 믿어줘 태양아”

 

하지만 금태양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 진짜... 하아, 됐다. 너 마음대로 해라. 대신에 앞으로 나랑 얀진이한테 친한 척 하지마라. 진짜 불편하니까”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얀붕이는 이대로 보내면 정말 안 된다는 생각에 금태양을 붙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태양아! 잠깐만...”

 

그 순간 금태양이 시야에서 슥 사라지더니 그대로 계단에서 넘어진 뒤 바닥을 뒹굴었다.

 

“아아아악ㅡ!!”

 

고통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모이는 인파.

오른팔을 붙잡고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금태양.

그리고 팔을 뻗은 채 굳어버린 얀붕이를 학생들 사이에서 혐오감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얀진이.

그 광경을 끝으로 얀붕이의 머리는 새햐얗게 변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응급차가 도착하고 금태양이 실려 가자 학교 내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얀붕이는 다시 한번 교무실에 불려가게 됐다.

 

얀붕이는 담임선생님과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는 부모님께 연락을 드릴 거라는 담임의 말을 마지막으로 상담이 끝났다는 것.

 

이윽고 멍해진 정신으로 교무실 밖에 나오자 얀진이와 순애가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얀붕이가 그녀들을 보고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가시 돋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어떻게 그런 짓을..”

 

“얀진 언니한테 다 들었어. 오빠 제정신이야?”

 

얀진이와 순애의 비난에 얀붕이는 필사적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얘들아, 제발 믿어줘.. 손도 닿지 않았단 말야. 난 그냥 태양이를 잡으려고 했던 건데..”

 

“야, 지랄하지 마. 니가 태양이 미는 거 봤다는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어디서 개소리야. 그리고 니가 태양이 민 다음 나랑 눈 마주친 거 기억 안 나냐?”

 

“사과는 못할망정 거짓말이나 하고... 씨발, 이딴 인간을 오빠라고 따른 내가 병신이지. 앞으로 학교에서, 아니, 집에서도 아는 체 하지 마. 진짜 역겨우니까”

 

10년 넘게 함께 하면서 처음으로 증오에 가득 찬 그녀들의 말을 듣자 얀붕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얀진이와 순애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지 악어의 눈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울어? 지랄을 하네, 아주. 순애야, 태양이 수술 끝났대. 얼른 가보자”

 

“응, 알았어 언니. 아, 그리고 오늘 일 부모님한테 토씨 하나 안 빼고 말씀 드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부모님한테 처맞든 혼나든 니 알아서 해”

 

그렇게 쏘아붙인 얀진이와 순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갔고 얀붕이 홀로 남은 복도에는 슬픈 흐느낌만이 울려 퍼졌다.

 

 

그날 저녁, 어두운 방 안에서 얀붕이는 충혈 된 눈으로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척비척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부모님과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며 자신을 쏘아보는 순애가 보였다.

 

얀붕이가 자리에 앉아 부모님의 설교가 시작됐다.

 

“선생님한테 이야기 다 들었다. 너 도대체 학교에서 뭐하고 다니는 거냐. 그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몰라도 계단에서 사람을 미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니에요, 아버지. 저 진짜 밀친 게 아니라...”

 

“시끄럽다! 선생님이랑도 얘기하고 얀진이한테도 얘기 다 들었다. 계단에서 민 것 뿐 만이 아니라 너 그 전부터 알게 모르게 그 친구 괴롭혔다며? 

순애랑 같은 학교에 다니면 오빠이자 선배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안 그래도 니 엄마아빠도 곧 해외로 출장 가야해서 한동안 너가 이 집의 가장 역할 해야 하는데 이런 부끄러운 일로 학교나 왔다 갔다 하게하고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거기까지 듣자 얀붕이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완전히 문제아처럼 규정지은 듯한 아버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계신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보며 벌레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순애.

 

여기서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

그렇게 생각한 얀붕이는 조용히 일어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까지만 참자... 내일 태양이가 학교에 오면 다 말해주겠지. 오해라고, 내가 밀친 게 아니라고’

 

얀붕이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난 멘탈을 간신히 수습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등교했을 때 얀붕이는 그것이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이미 학년, 반 가릴 것 없이 얀붕이가 금태양을 계단에서 밀쳐 팔을 나가게 했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고 그 소문의 출처는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등교 한 금태양이었다.

 

얀붕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가서 대체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랬다간 상황이 악화 될 것은 뻔하기 때문에 학교가 끝날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리고 요새 우리 반에 이래저래 사건이 많은데, 제발 문제 좀 일으키지 말고”

 

담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얀붕이를 바라보고는 그 말과 함께 아침 조회를 끝냈다.

 

그 날 하루는 얀붕이에게 거의 지옥과도 같았다. 

얀붕이는 그동안 금태양이 당했던 괴롭힘들을 그날 하루만에 모조리,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당했다.

얀붕이가 슬펐던 것은 반 친구들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보다 기억도 안날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그리고 서로 좋아했었던 얀진이가 그런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금태양과 하하호호 떠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악물고 그날 하루를 버텨낸 얀붕이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금태양에게 다가갔다.

오른팔에 깁스를 한 그의 가방을 들어주던 얀진이가 다가오는 얀붕이를 보자마자 앞을 가로막았다.

 

“야, 안 꺼져?”

 

서슬 퍼런 얀진이의 얼굴과 말에 얀붕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금태양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얀진아, 괜찮아. 왜, 뭐 할 말 있어?”

 

금태양이 얀붕이를 보며 말을 걸자 얀붕이는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잠깐 조용한 곳에서 둘이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꺼냈다.

 

이윽고 둘은 학교 내의 조용한 곳을 찾은 뒤 서로 마주 보았고, 얀진이의 연락을 받고 왔는지 어느샌가 순애가 그녀와 함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발치에서 얀붕이를 감시하듯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양아.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민 게 아니라는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난 너한테 밀려서 넘어진 게 맞는데?”

 

“거, 거짓말 하지마! 나는 분명 네 몸에 손도 닿지 않았는데..!”

 

감정이 격해진 얀붕이가 울먹이듯 언성을 높이자 금태양의 굳어있던 입꼬리가 씰룩씰룩 거리기 시작했다.

 

“풉..풐ㅋ크큭..”

 

“태양아..?”

 

금태양은 얀붕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나 혼자 연기한 거. 계단에서 자빠진 거랑 체육복, 교과서,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그거 다 내가 스스로 한 거야”

 

“뭐...?”

 

“푸훕... 아니 진짜 애들 존나게 단순하더라? 상식적으로 그런 짓들 하고서 아무한테도 안 걸릴 수 있는 건 자기 본인 밖에 없는데 한 번 프레임 씌어주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무지성으로 한명 잡아서 돌 던져대고... 이야, 진짜 존나 웃기더라, 크흐흡..”

 

얀붕이는 새하얘진 머리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간신히 한마디를 꺼냈다.

 

“왜...”

 

“왜냐고? 저기 저 년들이 니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까. 씨발, 이딴 찐따 새끼가 뭐가 좋다고. 

그래서 좀 귀찮지만 그냥 누명 좀 씌어 주고 나는 피해자 행세 하면서 꼬시면 되겠거니 했거든? 

근데 진짜 되더라. 얼굴은 예쁜데 씨발, 머리에는 든 게 없나봐 저년들은. 

그래도 애초에 쟤들이 똑똑하든 말든 나랑 상관 없는 거니까.

오히려 골 빈 게 나아. 먹기 편하니까. 나중에 니 여동생이랑 소꿉친구 소감이나 들려줄테니까 그걸로 딸이라도-”

 

“이 개새끼가”

 

욕설과 함께 날아온 얀붕이의 주먹이 금태양의 얼굴에 꽂히며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살아생전 주먹 한번 써본 적 없는 얀붕이지만 그래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 얼굴에 정통으로 꽂혀서 그런지 금태양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얀붕이가 그 위에 올라타 흠씬 두들겨 패려는 순간.

 

짝ㅡ!

 

귀에서 들리는 이명과 함께 밀려오는 뺨의 통증.

그리고 뒤이어 날라 오는 발길질.

 

얀진이에게 뺨을 맞고 발길질을 당한 얀붕이는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숨을 헐떡이며 가슴팍을 쥐어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이 씨발 새끼가. 야, 너 진짜 미쳤냐?”

 

“어머, 어떡해. 태양 오빠 괜찮아요? 얼굴 들어봐요”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 얀진이와 금태양을 부축하고 있는 순애.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얀붕이는 무언가 말을 해보려 했으나 목구멍이 콱 막힌 듯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은 이미 자신의 능력 밖의 상황이라는 것을.

 

금태양을 품에 안고 독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순애.

그리고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얀진이.

 

얀붕이는 그 장면을 마주하자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가듯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던 얀붕이가 정신을 차려보니 한때 가장 좋아했고 자주 왔었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얀진이, 순애와 함께 셋이서 매일 같이 왔었던 놀이터가 딸린 공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부터는 자주 오진 않았지만 행복했던 기억과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얀붕이는 멍하니 벤치에 앉아 어렸을 적 이곳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얀진이와 순애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며 순간 마음이 편해지나 싶었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몇 배나 되는 비참함이 밀려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았던 사이가 단 몇 주 만에 어떻게 이 정도로 무너질 수 있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자신을 향한 그녀들의 독설을 되새김질 하다 보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흐윽.. 흑... 으윽”

 

 

 

 

 

 

 

 

 

 

 

“왜 울고 있어?”

 

얀붕이가 서럽게 흐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얀붕이는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얀붕이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였고 명찰색을 보니 자신과 같은 학년이었다.

 

“누구..?”

 

“어머, 나 기억 안나?”

 

“아... 혹시 얀순이?”

 

“응, 맞아! 이렇게 얘기하는 건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 같네?”

 

얀순이와는 중학교 때 같은 반이 됐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반장이었던 그녀는 이래저래 얀붕이에게 신경을 잘 써주었지만 그때도 얀붕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얀진이와 같은 반이었기에 그녀에게 크게 관심을 두진 않았었다.

 

그때는 딱 그 나이대의 귀여운 중학생이라는 느낌이었지만 그새 키도 훌쩍 크고 몸매도 좋아져 언뜻 보면 대학 신입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숙하면서도 풋풋한 미인이 되어있었다.

 

얀순이가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얀붕이의 옆에 앉자 그의 코끝에 달콤하고 향긋한 샴푸냄새가 느껴졌다.

 

“그냥... 사소한 일이 있었어. 신경 안 써줘도 돼”

 

“너 얼굴 보니까 사소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진짜 괜찮으니까... 크흥, 그리고 나랑 얘기하는 거 우리 학교 애가 보면 너한테도 안 좋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가”

 

얀순이는 눈물까지 삼켜가며 자신을 보고 애써 웃어 보이는 얀붕이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얀붕아, 난 괜찮으니까.. 혹시라도 너가 억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가 듣고 판단이나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얀붕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자신이 정말 억울한 건 맞았지만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발생한 일련의 과정을 봤을 때 충분히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자신을 누군가 믿어준다면...

서로 좋아하던 소꿉친구도, 사랑하는 동생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하다못해 힘들었겠다며 위로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설령 중학교 때의 대화 몇 번이 전부인,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일지라도.

 

결국 얀붕이는 얀순이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뻔 했지만 간신히 이야기를 끝마치고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용히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안 믿기지? 하긴, 나 같아도 그럴거야, 그 금태양이..”

 

“아냐, 믿어”

 

“어..?”

 

“비록 중학교 때 1년 뿐이지만 그 금태양인가 하는 놈보다 너를 더 오래봤고 나는 걔보다는 너를 더 잘 아는데 내가 왜 너 말고 걔를 믿겠어?”

 

“하..하하..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마워, 얀순아”

 

얀붕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얀순이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들어올린 뒤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말 뿐이 아니야, 얀붕아. 나 있잖아, 중학교 때 너가 정말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배려심 깊고 귀엽고, 또..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가 하지 않은 일로 괴로워하지 말고, 너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 하지도 마”

 

그리고는 얀붕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기 이렇게 너를 믿어주는 사람도 있잖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가.

한동안 자신을 피해 다니는 사람들,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지내다가, 

결국엔 좋아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가족한테 온갖 욕과 폭력을 당하고는 도망쳐 온 얀붕이에게 있어 얀순이의 상냥한 말과 손길은 가뭄 난 땅에 단비처럼 마음 속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아..아아아.. 흐윽, 고마워.. 고마워 얀순아, 흐윽..!”

 

“옳지.. 힘들었지? 응, 괜찮아, 괜찮아..”

 

얀붕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얀순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여주며 마치 성모처럼 그의 모든 슬픔을 품어주었다.

 

따뜻한 손길, 목소리와 상반되는 집착어린 음습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

 

 

 

“푸훗... 편하게 있어도 돼. 얀붕아”

 

고급 진 소파에 앉은 채 안절부절 못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얀붕이에게 커피를 들고 오던 얀순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공원에서 한바탕 울고 진정된 얀붕이에게 얀순이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와 부모님에게 경고를 들은 지 하루 만에 문제를 일으켰으며 앞으로 학교에 가면 견디기 힘든 집단 괴롭힘, 집에 가면 경멸어린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금태양과 티격태격하다 떨어진 가방을 챙기지도 않고 도망 온지라, 핸드폰도 지갑도 없는 상태였다.

 

얀붕이는 별 일 없으면 학교는 반드시 가야하고 늦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범생 타입이었지만 순한 성격의 18살 고등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다보니 도저히 학교나 집에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얀순이는 자신의 집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얀붕이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 호리호리하고 고운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얀순이는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는 자신의 집으로 끌고 왔다.

 

얀순이의 집에 도착 했을 때, 얀붕이는 그녀가 이 동네 유명한 부촌에서 산다는 사실에 놀랐고 말로만 듣던 부촌의 집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좋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자신의 집 만한 거실에 대리석 바닥, 수 많은 방들.

얀붕이는 왜 얀순이가 자신스럽게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 구경 처음 온 시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를 보며 얀순이가 킥킥 웃자 얀붕이는 얼굴을 붉히고는 입을 열었다.

 

“그... 부모님은? 이따 집에 오시면 서로 불편할 거 같은데...”

 

“아, 부모님은 괜찮아. 해외 이곳저곳에서 개인 사업하셔 가지고 그쪽에서 살고 계시거든”

 

“그럼.. 지금까지 너 혼자서 지낸거야?”

 

“중학교 때까지는 여기서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고 원래는 고등학생 되면 부모님이랑 같이 그쪽에서 생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중학교 때, 음...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겨서 부모님께 고집 좀 부렸지. 후훗”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얀순이의 눈빛에 얀붕이는 왠지 모를 오한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그게 뭔지는 안 물어보는 게 좋겠지. 사적인 일일 수도 있으니까’

 

“...대단하네, 벌써부터 그런 목표도 가지고”

 

그 후 얀붕이와 얀순이는 중학교 시절의 일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의 일들을 풀어놓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어느새 밖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밤이 찾아오자 얀순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슬슬 자야겠다, 얀붕아. 먼저 씻어. 너 잘 때 입을 옷은 내가 욕실 앞에 꺼내놓을게”

 

“응... 고마워”

 

깔끔하게 샤워하고 나온 얀붕이는 욕실 앞에 놓여있는 잠옷을 입고 새빨개진 얼굴로 얀순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 얀순아, 얻어 입는 주제에 미안하긴 한데... 이거 말고 다른 옷은 없니?”

 

얀붕이가 입은 잠옷은 마치 강아지를 연상하게 하는, 발치부터 머리까지 일체화 되어있는 동물 파자마였다.

사이즈는 또 어떻게 이렇게 잘 맞는지 민망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잠옷으로 입기에는 정말 편하게 느껴졌다.

다만 얀붕이는 오늘에서야 친해진 얀순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 굉장히 부끄럽다고 생각해 조금 불편하더라도 다른 옷을 입고 싶었다.

 

“와, 미친... 존나 귀여워...”

 

“저기.. 얀순아? 듣고 있어?”

 

“어..? 어, 응! 미안한데 옷이 그런거 밖에 없어서... 아! 토끼 옷도 있고 햄스터 옷도 있는데 한번 입어볼래?”

 

“...아니야, 그냥 이거 입고 잘게”

 

“아.. 그래”

 

왠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얀순이는 그가 잘 방을 알려주고 자신도 욕실에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리킨 방에 들어온 얀붕이는 안을 둘러 보고는 생각했다.

 

‘방 잘못 알려준 거 아냐?’

 

혼자 쓰기에는 넓은 방. 침대 역시 두 명은 기본이고 젊은 장정 셋이서 자도 될 정도로 크고 푹신 거렸다.

얀붕이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순 없겠지’

 

물론 집에 돌아가기는 싫었지만 이곳 역시 집과는 다른 불편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얀순이의 호의는 결국 동정심에 비롯된 것이었고 그것은 지속적인 힘을 가진 감정은 아니었다.

설령 동정심 그 이상의 감정일지라도 어쨌든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얀순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와 등에 달라붙은 살짝 젖은 머리칼에 화장기가 없음에도 뽀얀 피부와 예쁜 이목구비를 자랑하며 얇은 원피스 잠옷 한 겹을 입고는 몸을 일으킨 채 눈을 깜빡거리는 얀붕이에게 다가갔다.

 

“어.. 저기 얀순아?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이제 자야지”

 

얀붕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황급히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 역시 내가 방을 잘못 왔네. 미안, 난 다른 방으로-”

 

“앉아”

 

얀순이는 억센 힘으로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얀붕이가 얀순이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저.. 얀순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얀붕아. 나 외로워”

 

“어?”

 

“아까도 말했듯 중학생 때 이후로 이 큰 집에서 나 혼자 지냈단 말야. 몇 년 동안 누구랑 같이 잔 적도 없고 밤까지 같이 있어 본 적도 없어, 그러니까... 응?”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얀순이의 눈빛에 얀붕이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차선책을 내놓았다.

 

“알았어, 그럼 같이 잘 테니까... 대신 나는 바닥에서 잘게”

 

“얀붕아”

 

처음으로 들어보는 얀순이의 차가운 목소리.

얀붕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못 믿어서 그러는 거야?”

 

“...”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다 너를 손가락질 할 때 나만은 널 믿어줬는데... 너는 나를 못 믿겠다는 거구나, 그렇지?”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게 아니야? 근데 왜 그래?”

 

무서운 눈빛을 하고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채 자신을 몰아세우는 얀순이를 보자 결국 얀붕이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니 말이 맞아. 같이 자자, 침대도 넓은데 굳이 따로 잘 필요 없지. 응”

 

“히힛, 그치? 잘 생각했어, 얀붕아. 얼른 누워”

 

언제 차가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봄철에 눈 녹듯이 사르르 표정을 풀고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얀순이를 보며 얀붕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최대한 얀순이를 피해 침대 구석으로 도망가던 얀붕이었지만 집요하게 달라붙어 오는 그녀를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인간 죽부인 신세가 된 채 다사다난한 하루를 마쳤다.

 

다음날 아침, 얀순이가 눈을 떴을 때 곁에 얀붕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잠이 확 깬 그녀는 벌떡 일어난 뒤 거실로 뛰쳐나갔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다다닥 하며 발소리가 들리자 주방에 있던 얀붕이는 고개를 내밀고 얀순이에게 아침 인사를 건냈다.

 

“잘 잤어?”

 

“뭐야... 어디 간 줄 알고 놀랐잖아. 아침 하는 거야?”

 

얀붕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얀순이에게 웃어 보이고는 토스트가 올려진 접시를 식탁에 두며 말했다.

 

“응. 냉장고에 재료가 있길래, 신세지는데 이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서”

 

“역시 얀붕이, 착해”

 

얀붕이는 자신을 쓰다듬는 얀순이의 손길에 부끄러운지 손을 피한 뒤 그녀와 마주보고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던 도중 얀순이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꺼냈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무슨 신혼부부 같지 않아?”

 

얀붕이가 재미없는 농담이라 생각하며 그냥 피식 웃어 넘기고는 열심히 토스트를 씹어 넘기고 있는 와중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자 그녀가 대답을 갈구하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그치, 그렇네 하하..”

 

“그치?”

 

이유 모를 오한을 느끼며 얀붕이가 맞장구를 치자 얀순이는 다시 활짝 웃고는 다시 오물오물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고 얀붕이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등교준비를 한 뒤 얀순이는 현관에 서있는 얀붕이에게 손을 흔들고는 대문으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얀붕이도 이 시간에 등교를 하고 있었겠지만 아직까진 학교를 갈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은 마음을 조금 추스르기로 했기 때문에 등교하는 얀순이를 배웅해주었다.

 

얀붕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공원에서의 느낀, 자신을 향한 얀순이의 감정은 동정심과 순수한 호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깝지 않은 사이였어도 그렇게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 수 있었던 것이었고.

 

하지만 얀순이의 집에 들어오고 난 뒤에 얀붕이에게 향하는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나 동정심이라기보다는 뭔가 조금 더 무겁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얀붕이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유일하게 나를 믿어준 아이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얀붕이는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른 채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얀붕이가 그녀의 집에 들어온 지 나흘 째 되는 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그날 저녁 얀순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얀순아. 나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 볼까 하는데...”

 

“...왜?” 

 

“왜냐니, 이쯤 쉬었으면 이제 학교도 가봐야 하고...”

 

“안 돼”

 

“...걱정 돼서 그래? 나 지금은 진짜 괜찮아”

 

“너는 괜찮겠지만 네 주변이 괜찮지 않아서 문제야”

 

그 말에 얀붕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얀순이를 바라보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쏘아 붙였다.

 

“지금 학교에서 너가 얼마나 욕 먹는지 아니? 금태양이라는 놈이랑 너랑 붙어 다녔던 그 얀진인가 뭔가 하는 년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떠들고 다니는데다가 이제는 가출했다는 소문까지 퍼져서 지금 가면 못 볼 꼴만 당하게 될 걸?”

 

얀순이의 말을 듣자 간신히 가라앉혔던 괴로운 기억들이 다시 수면 위로 튀어 올라와 가슴을 콕콕 찔렀다.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얀붕이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학교는 쉬더라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갈게..”

 

“왜?”

 

“그냥, 여기 있기가 불편해서 그래. 너한테 폐 끼치는 거 같고...”

 

“너가 밥이랑 빨래랑 청소까지 다 해주잖아. 폐 끼치기는 뭐가 폐를 끼쳐. 난 괜찮아”

 

“내가 그렇게 느껴서 그래. 그냥 여기 있기 불편하고 부족한 거 같아서”

 

평소답지 않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얀붕이를 보며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던 얀순이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씨익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집에서 너가 나한테 부정할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는 거겠네?”

 

일어서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얀순이를 보며 불길함을 느낀 얀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얀순이는 말없이 미소를 띤 채 계속해서 뒷걸음 치는 그에게 다가갔고 마침내 얀붕이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곳으로 몰림으로써 짧은 추격전은 끝이 났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얀붕이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해줘”

 

“...뭐?”

 

“키스해달라고. 너가 이 집에 있기엔 부족하다고 느낀다며? 하지만 괜찮아.

너가 내 말만 들어준다면 이 집에 있을 이유는 충분히 차고도 넘쳐”

 

어찌 보면 굉장히 무례한 말일 수도 있었다.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기쁨조처럼 자신을 만족시키라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얀붕이는 이미 대화주제에서 한참을 벗어난 말을 듣고 당황한지라 그렇게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고 점차 아파오는 머리에 눈을 질끈 감고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꼬인 거지... 그냥, 단호하게 말하자’

 

“얀순아. 나 집에서 나온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어. 이쯤되면 벌써 실종신고도 들어갔을 거고 분명 걱정하고 있을 거야. 부모님도, 얀진이도, 순애도...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코흘리개 시절부터 붙어 다니던 소꿉친구랑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야.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오랫동안 가출한 상태면...

 

걱정할 거야.. 분명히.. 걱정할 거라고”

 

얀붕이는 자신도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하는 확신없는 어조로 마지막 말을 맺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그녀들에게 당한 폭언과 폭행은 지워지지 않을 가슴 속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남았으니까.

 

얀순이는 그런 얀붕이를 굳은 얼굴로 한참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딴 인간을 오빠라고 따른 내가 병신이지”

 

“...얀순아?”

 

“앞으로 학교에서, 아니, 집에서도 아는 체 하지 마. 진짜 역겨우니까”

 

자신을 난도질 했었던 순애의 폭언이 얀순이의 입을 통해서 다시 날카롭게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듯이.

 

“하.. 하지마, 왜 그래, 얀순아..”

 

“쓰레기 같은 새끼... 어떻게 그런 짓을..”

 

분명 얀순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이었지만 얀붕이의 머릿속에서는 혐오감에 가득 찬 얀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만... 하, 하지마아-!!”

 

얀붕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애처롭게 울먹이며 외쳤고 얀순이는 눈물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강제로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다 그년들이 너한테 했었던 말이잖아. 그때 내 품안에서 울면서 너가 나한테 다 털어놨었잖아.

그딴 말을 했던 년들이, 뭐? 너를 걱정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걔네들이 지금 학교에서 너에 대해 뭐라 떠들고 다니는 지 말해줄까?

그 얀진이라는 년은 금태양이랑 붙어 다니면서 좋아라 하더라. 방해물이 사라졌다고.

그리고 순애인가 하는 년은 아예 오빠의 존재를 부정하던데?”

 

“거.. 거짓말.. 거짓말이야... 흐윽”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얀순이는 아직 얀진이나 순애랑은 학교 내에서 말 한마디 해보지 않았으니.

하지만 무너진 얀붕이의 정신 상태로는 그런 단순한 진실 여부를 판단할 능력조차 없었다.

 

얀붕이의 눈물을 닦아주던 얀순이는 그와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보고서는 여신처럼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너한테 그딴 말 절대로 하지 않아. 

남이 너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나는 너를 우선적으로 믿어.

누군가 너를 괴롭히면 열배 이상으로 되돌려 줄 거야.

누군가 너를 욕하면 혀를 뽑아버릴거고

누군가 너를 때리면 손목을 날려버릴거야.

나는 그런 년들과는 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끝까지 네 곁에 있을 거야. 오직 나만이”

 

그녀는 얀붕이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과 마음이 편해지는 향기, 얼굴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

얀붕이는 잠시동안 괴로웠던 기억이 모두 잊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얀붕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얀순이는 눈을 감고 수줍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키스해줘, 얀붕아”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이 말을 들으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들고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일 때 불현 듯 머릿속에 얀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했던 첫사랑.

 

얀붕이는 자신이 첫 키스를 한다면 그 상대는 당연히 얀진이 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와 얀진이가 함께 서로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그런 상상...

 

하지만 그 상상에서 자신의 얼굴은 어느샌가 금태양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칼로 난도질 하듯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렸다.

 

지금... 내 앞의 이 여자에게 키스를 한다면 이 아픔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얀붕이는 얀순이와 입술을 맞댔다.

순간 작은 신음소리가 나더니 얀순이의 부드러운 입술이 얀붕이의 입술을 덮었고 어느샌가 그녀의 혀가 마중 나와 문을 열라는 듯 그의 이빨을 톡톡 건드렸다.

 

얀붕이가 입을 열자 그녀의 혀가 뱀처럼 매끄럽게 얀붕이의 입으로 들어왔고 혀 아래를 훑고 지나간 뒤 위로 올라와 그의 혀를 감쌌다.

 

얀붕이도 서투른 대로 얀순이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자 서로의 혀와 입술이 얽히고설키며 쪽쪽 거리는 소리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꽤나 긴 시간이 지난 뒤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들의 입술 사이에서 누구 것인지 모를 잔뜩 섞인 타액이 투명한 선을 그리며 늘어났다.

 

얀붕이는 처음 겪어본 감각에 적잖이 충격 받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키스하는 순간 얀진이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아니 얀진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머릿속이 오직 얀순이로 가득 찬, 너무나 달콤하고 편안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게 느껴지는 모순적인 느낌.

 

“얀붕아”

 

얀순이가 그를 부르며 씨익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예쁜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어번 톡톡 두드렸다.

 

“어...?”

 

“앞으로 내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톡톡 치면 언제든, 어디서든 나한테 키스해주는 거야. 알겠지?”

 

“...”

 

“대답”

 

“응.. 알았어”

 

얀순이는 배시시 웃고는 그를 꽉 껴안았고 그들은 동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 날 이후, 그들의 관계는 더욱 노골적이고 깊어져만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얀붕이를 향한 얀순이의 집착과 애정이 노골적이고 깊어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얀순이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얀붕이에게 키스를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브래지어를 채우기 힘들다며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신의 등을 밀어달라며 욕실로 끌고 들어간다거나, 귀를 청소해주겠다고 해놓고는 귓바퀴를 핥아대며 그를 희롱한다거나...

 

얀붕이 기준에서는 명백히 선 넘은 행동들이었지만 그가 얀순이를 뿌리칠 때마다 그녀는 무섭게 돌변한 뒤 철저히 을의 입장에 서 있는 얀붕이를 정신적으로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유도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얀순이가 작은 상자를 건네기에 뭔가 하고 열어보니 핸드폰이었다.

잠금을 푸는 지문인식이 얀순이의 지문으로 되어있었고 잠금을 풀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긴급전화와 그녀에게 발신하는 전화 뿐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저기.. 얀순아, 이거 잠금이...”

 

“왜? 너한테 나 말고 다른 연락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

 

“네 곁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잖아, 아니야?”

 

“맞아...”

 

얀붕이가 무력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얀순이는 칭찬하듯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선물한 핸드폰은 그를 통제할 족쇄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얀붕이가 밖에 나가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얀순이에게 전화가 와서 왜 말도 없이 밖에 나가냐며 서슬 퍼런 불호령이 떨어졌고 얀순이가 집으로 도착하기 전에 귀가해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나날이 반복되자 얀붕이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얀순이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애정공세가 두렵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 스스로가 그런 그녀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얀붕이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게 됐고

그녀의 허락이 없으면 밖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게 됐으며

그녀가 들어오면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품에 안겨 그녀의 향기와 손길, 목소리를 갈구했다.

 

그렇게 그녀만을 바라보던 얀붕이는 문득 얀순이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리적인 목줄이 아닌,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거역하기 힘든 정신적인 목줄.

 

‘이게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에게 있어서 얀순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욕하고 불신할 때 혼자서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내준 사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더 이상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얀순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흐릿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순애와 얀진이의 얼굴조차도.

 

이래선 안 된다.

이렇게 지내다간 자신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얀순이 단 한명 뿐이 될 것이다.

그는 얀순이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다.

 

틀어져버린 순애와 얀진이와의 관계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고

그 빌어먹을 금태양이 그녀들에게 무슨 짓을 할까 걱정도 됐으며

얀순이와도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오랫동안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얀붕이는 그날 오후, 얀순이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부우웅-!

 

나온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떠있는 얀순이의 번호를 보며 받지 말까 생각했지만 진동이 울릴 때마다 손에 든 핸드폰이 마치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무감정하고 차가운 목소리. 

복도에서 전화하는 것인지 그녀의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살짝 울리는 것 같았다.

 

“집 가는 중이야”

 

- ...우리 집?

 

“아니, ‘내’ 집”

 

- ...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얀붕이의 손에 땀이 차 끈적끈적해 졌을 무렵 얀순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돌아가. 지금이라면 아무 말 하지 않을게.

 

“시.. 싫어!”

 

- ...뭐?

 

“얀순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무,물론 너가 나를 유일하게 믿어주고 힘들 때 나를 지탱해준건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

공원에서 너와 나누었던 얘기는 정말 평생이 가도 못 잊을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의 관계는 정상적인 게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 다 널 위한 거야. 얀붕아. 나를 떠나서는 너는...

 

“나는 너를 떠나려는 게 아니야. 앞으로도 오랫동안 너와 함께 지냈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만큼 얀진이랑 순애도 나한텐 소중한 인연이야.

물론 아직도 나를 오해하고 원망하고 있겠지만... 한 달 동안 연락도 없이 실종상태면 분명히 걱정하고 있을 거야”

 

- 마지막 경고야. 돌아가.

 

“...미안해, 얀순아”

 

얀붕이는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전원을 꺼버렸다.

걸음을 재촉해 집 앞에 다다르자 얀붕이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연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얀붕이는 텅 빈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시계를 쳐다보았다.

부모님은 해외로 출장을 가셔서 없는 듯 했고, 순애는 이 시간쯤이면 아마 하교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어락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을 들어서던 발소리는 신발장에서 잠깐 멈칫하더니 탁탁 거리며 단화를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와 오빠라는 말에 얀붕이는 살짝 울컥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멋쩍게 웃으며 거실에 들어선 동생에게 인사를 건냈다.

 

“나 왔어”

 

“그동안 연락도 안하고 어디 있었던 거야?”

 

짧은 찰나였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살짝 안도하는 듯한 빛이 스쳐가는 것을 본 얀붕이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친구 집에”

 

순애는 의아한 눈초리로 얀붕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얀진이를 제외하고선 집에 신세를 질만큼 친한 친구는 따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실종신고 해놨던 거 취소해야겠네..”

 

순애가 작게 중얼거리며 얀붕이의 맞은편에 앉자 거실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짝 찌푸린 얼굴로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고 얀붕이는 얀붕이대로 자신의 얘기를 꺼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윽고 순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뭐 할 얘기 없어? 없으면 나 그냥 들어가고”

 

얀붕이는 한번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그녀를 마주보고 얀순이에게 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순애에게 전해주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 쯤, 그녀의 얼굴은 찌푸린 정도가 아니라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얀붕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순애를 바라보았다. 

 

저 일그러진 표정이 금태양에 대한 분노일까, 아니면-

 

“하, 씨발 한 달 만에 들어와서 쳐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만약 얀붕이의 정신상태가 유리창으로 형태화 되어있었다면 방금 그 말에 크게 쩌저적 하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갔을 것이다.

 

“순, 순애야”

 

“야, 닥치고 들어. 니가 그때 태양 오빠한테 주먹질하고 가출한 다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지 알긴 아냐?

씨발, 선생님들은 나 교무실에 불러다가 오빠 집에 오면 꼭 학교에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질 않나, 

친구들은 니 오빠 가출팸 같은 거냐고 묻질 않나, 뭐 정신병 있냐고 물어보질 않나,

2학년 건물 가면은 선배들이 나 보면서 소곤소곤 거리질 않나,

니 때문에 학교에서 본의 아니게 인기스타 됐다고, 씨발!”

 

어느새 호칭도 바뀐 채, 그를 향해 기관총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힐난.

얀붕이는 점차 무너져가는 멘탈과 함께 멍하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고 사람들이 니 얘기하면서 별 되도 않는 개소리 할 때마다 아니라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실드 치고 그랬는데, 

와서 한다는 얘기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한마디 못 할망정,

뭐? 억울해? 태양 오빠가 다 조작한 짓이야?

내가 무슨 병신 머저리처럼 보여? 니가 했다는 거 본 증인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아직도 그딴 소리나 하고 앉았어?”

 

한바탕 쏟아낸 순애는 숨을 씩씩 몰아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말했다.

 

“후... 됐다. 내가 너 같은 인간한테 뭘 바라냐. 아.. 시발, 한동안 집에서 둘이 지낼텐데 서로 아는 체 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지내자. 어?

아니면 뭐 또 가출이라도 하던가. 이제 실종신고 따위 절대 안 할테니까

맞아, 그냥 그렇게 해주면 안 돼? 걍 꺼지라고”

 

그렇게 쏘아붙인 그녀는 문을 쾅 닫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말을 듣고 얀순이처럼 전적으로 믿어주고 위로해주길 바랬던 건 아니다.

이만큼 오해가 쌓인 이상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적어도 ‘믿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지켜보고 판단하겠다’ 는 정도의 반응만이라도 좋았다.

그런 최소한의 믿음정도는 자신에게 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낙천적인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일어서고는 휘적휘적 현관문으로 향하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얀진이... 얀진이라면 다를 거야. 그래, 그럴거야..”

 

몇 걸음 안 떨어진 얀진이의 집에 가서 벨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 네~

 

“아주머니, 저 얀붕인데요.. 혹시 얀진이 집에 있나요?”

 

인터폰에서 잠깐 조용한 침묵이 이어지더니 얀붕이가 놀러 갈 때마다 항상 들었던 그 상냥한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이 쌀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아직 안 돌아 왔단다.

 

 

그러고는 더 이야기 할 것도 없다는 듯 인터폰이 끊겼다.

얀붕이는 집 앞 담벼락 옆에 서서 얀진이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금태양과 함께.

 

둘의 모습을 보고 굳어버린 얀붕이를 보며 그들 역시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짧은 정적 후에 금태양이 비꼬듯이 말을 꺼냈다.

 

“오, 뭐야... 가출했다더니 갱생했나보네? 순애가 많이 걱정하더라. 오빠가 돼서 여동생 집에 혼자 두고 가출이나 하고, 쯧”

 

그의 말을 듣자 얀붕이의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는 듯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와는 할 얘기 따윈 없었다.

그는 금태양을 무시하고는 얀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얀진아.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니..?”

 

얀진이가 얀붕이를 흘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금태양이 옆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옆에 있어줄까?”

 

“아니, 괜찮아. 태양아. 내일 보자”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얀붕이는 누군가 속을 바늘로 박박 긁는 것처럼 마음이 쓰려왔으나 애써 참아내고는 얀진이를 바라보았다.

 

“생전 사소한 일탈 행위 한번 안하던 애가 웬일이야? 가출 같은 걸 다하고... 놀랐잖아”

 

“그냥.. 조금..”

 

“그래, 뭐.. 그건 내가 너한테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지. 그래서, 할 얘기라는 게 뭐야?”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지 그녀의 눈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 증오 섞인 눈빛은 보이지 않았고 일말의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살짝 비춰지는 듯 했다.

 

얀붕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그녀에게 자신의 겪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었던 순애와는 달리 얀진이의 표정은 처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아...”

 

긴장된 표정으로 얀붕이가 얀진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꺼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너는 달라진 게 없구나?”

 

“어..?”

 

“나 있잖아, 너가 그냥 솔직하게 사과했으면 예전처럼 돌아가려고 했어.

물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는 건 무리였겠지만, 

적어도 너가 왜 그랬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옆에서 케어도 해주고 다른 애들과의 관계도 어떻게든 중재 해보려고 했을 거야.

근데... 너는 끝까지 이렇게 나오는 구나”

 

얀진이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등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잠, 잠깐만 얀진아..!”

 

그녀는 우뚝 서서 고개만 돌린 후, 불쌍해 죽겠다는 눈으로 얀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 네 모습, 진짜 내가 알던 그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꼴 보기 싫어.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애랑 10년 넘게 부대끼면서 지냈는지 모르겠다”

 

얀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서있는 얀붕이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얀붕이는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난 그저 오해를 풀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걸까

 

아니, 있었다. 나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

그리고 그녀가 해주었던 말.

 

‘그딴 말을 했던 년들이, 뭐? 너를 걱정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그녀 말이 맞다. 

상황이 어쩌고 저쩌고를 떠나서 저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를 믿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었는데.

그랬는데도 그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관계였을 뿐.

결국엔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노, 원망, 괴로움, 허탈함 등의 감정들이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 한가지의 감정만이 남았다.

 

두려움

 

얀붕이의 삶에서 그를 유일하게 믿어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준 사람.

그녀에게 버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평생 살면서 얀순이 외의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해도 상관없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나 얼굴 따위 전부 잊어버리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얀순이에게 버려지는 순간 그는 정말로 아무도 봐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집 앞에 도착해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는 걸로 보아 아직 학교인 모양이었다.

 

그는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단정한 교복차림을 하고 걸어오는 얀순이의 모습이 보였다.

 

 

얀붕이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고 문 앞까지 온 얀순이는 그를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얀붕이 역시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따라 들어 왔고 그녀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얀순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들어오래?”

 

“...얀순아, 미안-”

 

“조용히 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얀붕이의 말을 차가운 표정과 냉정한 목소리로 탁 잘라버린 뒤 얀순이는 현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서”

 

얀붕이가 고분고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녀가 가리킨 곳에 서자 곧바로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무릎 꿇어”

 

그는 일말의 주저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얀순이의 지시에 복종했고 그녀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기다려”

 

강아지를 훈육하듯 몇 마디 짧은 명령만을 남기고 그녀는 현관문을 닫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정말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얀붕이었지만 그는 원망은커녕 절박한 심정으로 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밤이 찾아오자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엄청난 기세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얀붕이는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따뜻한 날씨도 아닌데 심지어 밤에 굵은 빗방울을 맞고 있으려니 그의 몸은 쉴 새 없이 부들부들 떨렸고 입에서는 입김이 새어나왔다.

 

몇 발자국만 앞으로 나가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얀순이가 명령한 장소는 그가 무릎 꿇고 있는 이곳이기 때문에.

 

쌀쌀한 밤에 이 이상으로 비를 맞고 있으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그녀의 명령을 거스르면 이제 그녀를 못 볼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얀붕이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얀순이에게 버림받을 바에는 차라리...’

 

점차 떨어지는 체온에 온 몸을 떨던 얀붕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얀순이가 우산을 쓰고 그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머리 위에 우산이 씌워지자 단지 그것만으로도 한결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얀붕이는 부들부들 떨며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애처롭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야, 얀순아아..”

 

마치 비를 잔뜩 맞고 덜덜 떠는 처량한 유기견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얀순이는 그를 일으키고 집으로 들여보낸 뒤 커다란 마른 타월을 건내며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물기 좀 털어내고 바로 욕실 들어가. 그리고 욕조에 따뜻한 물 덥혀놨으니까 충분히 몸 담근 다음, 구석구석 깔끔히 씻고 침실로 와”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얀붕이는 그 말에 따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은 뒤 그녀가 준비해준 옷을 입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가자 얀순이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도 씻은 지 얼마 안됐는지 방 안에는 그녀의 체취가 섞인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 가득 차 있었다.

 

평소대로였으면 얀붕이는 얀순이의 옆에 앉았겠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도 있고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분위기에 주춤주춤 그녀의 발 밑에 무릎을 꿇었다.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는 얀순이와 고개를 숙이고 살짝 떨고 있는 얀붕이는 서로 아무 말 않고 잠시동안 그렇게 있었고 조용한 방 안에는 욕실 옆에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 올 뿐이었다.

 

이윽고, 얀순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 왔어?”

 

“...순애랑 얀진이 보러..”

 

“하”

 

어차피 거짓말 해봤자 통할 리가 없기에 얀붕이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얀순이는 작게 코웃음을 친 뒤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어땠어?”

 

“미안해.. 잘못했어, 얀순-”

 

“아니,

어땠냐고,

묻고 있잖아.”

 

한마디 씩 툭툭 끊어져 나오는 얼음장 같은 말들.

그녀의 말에 얀붕이가 순애, 얀진이와 있었던 일들을 우물우물 거리며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그 악몽 같던 일들을 제대로 얘기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사정 따윈 알 바 없다는 듯 얀순이는 그를 더욱 몰아치기 시작했다.

 

“잘 안 들려. 걔네들이 너한테 했던 말들, 토씨 하나 빼먹지 말고 또박또박 니 입으로 직접 말해”

 

“수, 순애한테 찾아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 말했는데..”

 

“그런데?”

 

“한 달 만에 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고... 자, 자기가 무슨 병신 머저리처럼 보이냐고,

내가 했다는 거 본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라고...”

 

“그리고 또?”

 

“또.. 서로 아는 체 하지 말고 알아서 지내자고 그, 그랬어..

차라리 집 나가달라고, 꺼.. 꺼져 달라고..”

 

“풉..”

 

얀붕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고 그런 그의 감정을 더더욱 자극하듯 얀순이는 비웃음을 크게 흘렸다.

 

“그래, 얀진이 그년은 뭐라고 하디?”

 

“그런 일을 겪고도 너는 달라진 게 없다고, 흐윽, 끝까지 이렇게 나올거냐고오..”

 

이제는 불쌍할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 얀붕이었지만 얀순이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응, 그리고?”

 

“내, 내 모습이 꼴 보기 싫다고, 훌쩍.. 어떻게 10년 넘게 나같은 애랑 같이 지냈는지 모르겠다고, 흑”

 

“푸훗..”

 

얀붕이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 품에 안겨 위로 받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었다.

그날처럼, 아무도 몰라주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을 알아주고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다.

 

“흐으윽, 얀순아.. 내가 잘못했어. 네 말이 맞았어, 그 여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똑같았어. 나를 봐주고 걱정해주는 건 아무도 없었어..

너 밖에.. 나한텐 이제 너 밖에 없어, 얀순아.. 용서해줘, 제발”

 

“싫은데?”

 

“어..?”

 

“다른 사람들이 다 너를 손가락질 할 때, 나만큼은 너를 믿어주고 안아주었어.

근데 되돌아오는 게 이런 거야?

나를 떠나서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던 년들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거?”

 

버려진다. 또-

 

얀순이의 차가운 말에 그런 생각이 든 얀붕이는 미친 듯이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아아, 아니야-! 미안해, 얀순아, 나 버리지 마, 응? 다시는, 히끅, 다시는 안 그럴게

이, 이제 말도 잘 듣고, 흐윽, 시키는 거 뭐든지 다 할게, 짖으라면 짖고 구르라면 구를게,

원한다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쳐다도 안볼게..! 그러니까 제발, 나 버리지마아..”

 

그 모습을 보던 얀순이는 웃음이 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사실 그녀의 화는 이미 진작에 풀려 있었다.

 

아까만 해도 비에 쫄딱 젖은 채 덜덜 떨며 애처로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당장 그를 욕실로 끌고 들어가 따뜻한 물로 직접 씻겨주고 안아주면서 위로해주고 싶었고 다시는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얀순이는 확실하게 그를 길들일 생각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얀붕이를 절대 떠나보낼 생각이 없듯이

그 역시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도록.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온 지금 얀순이는 등골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분 좋은 오싹함과 황홀감을 느끼며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벗어”

 

“어..?”

 

“벗으라고. 10초 셀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얀붕이는 숫자를 세는 그녀의 목소리에 따라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얀붕이는 알몸으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얀순이는 자신의 발 밑에서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살짝 떨고 있는 그의 몸을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얀붕이가 풀석풀석 거리는 소리에 눈을 들어보니 어느샌가 얀순이도 자신처럼 옷을 전부 벗고 나체가 되어 있었다.

 

놀란 얀붕이는 얼굴이 새빨진 채 황급히 다시 숙였지만 얀순이가 그의 얼굴을 들어올린 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얀붕아. 용서 받길 바라?”

 

그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얀순이는 씨익 웃은 뒤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가 너를 용서할 마음이 들게 해보렴. 자”

 

그리고는 다리를 벌렸고 얀붕이의 눈 앞에 음모가 거의 없는, 분홍빛의 작고 예쁘게 생긴 그녀의 성기가 드러났다.

 

예전의 얀붕이었다면 이러한 행동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기어가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이미 얀순이의 음부는 축축히 젖어있었고 얀붕이는 부드러운 혀놀림으로 허벅지 안쪽부터 시작해 음부 근처까지 핥아냈다.

 

그리고는 혀를 소음순 안으로 집어넣자 위쪽에서 작은 돌기 같은 것이 느껴졌고 그것에 그의 혀가 닿는 순간 얀순이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살짝 몸을 떨었다.

 

“하읏..”

 

한 번도 이런 것을 해본 적 없는 얀붕이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을 혀로 톡톡 건드리고 애무하며 그녀를 쾌락으로 이끌었다.

 

츄릅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얀순이의 신음소리 역시 커져만 갔고 그녀는 어느샌가 양 손으로 얀붕이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그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얀붕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애정, 경외 뿐만 아니라 지배욕과 정복욕, 소유욕 같은 것들 역시 깃들어 있는 듯 했다.

 

“아아, 하아앙-”

 

이윽고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얀순이의 성기에서 꽤 많은 양의 조수가 뿜어져 나와 그대로 얀붕이의 얼굴을 가득 적셨다.

 

찝찝할 법도 하건만, 자신의 얼굴이 애액 범벅이 된 것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얀붕이는 청소하는 것처럼 그녀의 허벅지와 음부를 잔뜩 적시고 있는 물들을 천천히 핥아냈다.

 

얀순이는 만족스러운 눈길로 그 모습을 보며 얀붕이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얀붕아.. 올라와”

 

그가 침대로 올라오자 얀순이는 침대에 누운 채 두 팔을 활짝 벌렸고 얀붕이는 그대로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얀붕이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서부터 애무를 시작해 점차 어깨 쇄골을 걸쳐 가슴으로 향했다.

탄력 있고 처지지 않은 둥그런 모양의 가슴과 앙증맞은 핑크빛 유두가 눈앞에 보이자 그는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그녀의 가슴을 쪽쪽 빨아댔다.

 

“하으..”

 

얀순이는 마치 온천에 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하고 기분 좋은 한숨을 연신 내쉬며 얀붕이를 껴안은 채로 그의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고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유두가 침으로 범벅이 되자 얀순이는 그를 살짝 밀어내고 요염하게 올려다보며 장난스러운 표정과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변태..”

 

“미안... 몸이, 너무 예뻐서..”

 

부끄러운 듯 작게 중얼거리는 얀붕이의 대답을 들은 얀순이는 킥킥 웃고는 얼굴을 붉힌 채 다리를 살짝 벌리고 말했다.

 

“이제... 들어와 줘, 얀붕아”

 

얀순이의 그 말에 얀붕이는 진작 한계까지 부풀어 있었던 물건을 조심스레 그녀의 성기에 삽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지가 그녀의 작은 음부에 빡빡하게 들어가기 시작했고 끝까지 삽입 됐을 때, 아파하는 듯한 신음소리와 함께 얀붕이와 얀순이의 겹쳐진 몸의 접합부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야, 얀순아? 괜찮아?”

 

얀붕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걱정했지만 얀순이는 황홀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응, 괜찮아, 아.. 드디어 얀붕이가 날, 내 처음을 가져가줬어, 하앙..

얀붕아, 이제 박아줘... 대충 하거나 만족 못 시켜주면 쫒아내 버릴 거야?”

 

얀순이는 달콤한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했지만 얀붕이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성기가 들어가기는 조금 뻑뻑했던 얀순이의 내부도 시간이 갈수록 적응하는 것인지 점차 매끄럽게 얀붕이의 자지가 왕복운동을 하기 시작 했고

그가 안으로 깊게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질 안쪽은 꿈틀거리면서 얀붕이의 자지를 기분 좋게 조여 왔다.

 

“아, 하아.. 으응..”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만큼 질척하게 섞인 남녀의 달뜬 신음과 찌꺽거리며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 침대보가 피부에 밀려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얀붕이가 열락에 가득 차 헐떡이며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얀순아..! 나, 갈 거 같아, 쌀 거 같아.. 흐읏”

 

“응, 안에, 안에 싸줘..! 내 안에 가득 싸줘..!”

 

이윽고 얀붕이는 높은 신음소리와 함께 사정했고 그의 정액은 울컥울컥 거리며 쏟아져 나와 얀순이의 안을 가득 채웠다.

 

그들은 서로 말없이 헐떡이며 첫 경험의 여운을 맛보았다.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쾌락과 함께 드디어 얀붕이에게 처음을 주고 그를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황홀함에 빠져있던 얀순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빼내려고 하는 순간, 얀붕이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안돼, 빼지마, 미안해, 더 잘할게, 더 할 수 있으니까, 응?

나 쫒아 내지마, 흐윽, 버리면 싫어.. 얀순아, 제발...”

 

그는 얀순이가 만족하지 못해 빼려 한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가 별 생각 없이 장난스레 던진 말에 불안감에 휩싸여 울먹거리고 허리를 흔들어대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눈동자에 하트가 박힌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사랑스러운 눈빛을 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얀순이는 그를 품에 껴안고 등을 쓸어주며 자애롭게 속삭였다.

 

“내가 널 버리긴 왜 버려.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울지마. 뚝..!

옳지, 착하네.. 우리 얀붕이가 착한 아이로 있어주면 평생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어.

너랑 나 둘이, 영원히 함께...

그렇게 해줄 거지?”

 

얀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화답하자 그들은 격한 입맞춤을 나누었고 밤이 깊을 때까지 한 쌍의 짐승처럼 서로를 탐했다.

 

 

 

*****

 

 

 

둘이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학교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 소란의 원인은 정문에 떡 하니 커다랗게 붙은 익명의 대자보.

 

그 대자보에 금태양이 그동안 해왔던 만행이 확실한 증거와 함께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전학 오기 전의 학교에서 저질렀던 각종 학교폭력과 성폭행 전과에서부터 그간 얀붕이에게 해왔던 짓들까지.

대자보에 첨부된, 금태양의 카톡 기록들에는 어떻게 얀붕이를 함정에 빠뜨렸는지에 대한 내용과 얀진이, 순애에 대한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성적 발언들이 가득했다.

 

얀진이와 순애는 바로 금태양에게 달려가 해명을 요구했다.

조작이라고, 자기는 저런 짓 따윈 하지 않았다고 부정해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금태양은 창백해진 그녀들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하, 씨발. 들켰네?”

 

그렇게 말하고는 학교를 나갔고 다음날 전학 갔다는 소식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날 이후, 얀진이와 순애는 미친 듯이 얀붕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해, 얀붕아, 어딨는 거야, 제발...”

 

“미안해 오빠, 제발, 다시 집에 돌아와줘, 오빠..”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들은 얀붕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얀붕이에게 향하던 헛소문들은 칼자루를 돌려 그녀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얀붕이의 일을 제외하고 금태양과의 관계만 따지면 얀진이와 순애 역시 피해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앞에서는 그녀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그녀들을 금태양과 관련짓는 질 나쁜 소문과 조롱이 퍼져나갔다.

금태양과 같이 셋이 잤다더라, 남자 때문에 자기 오빠와 친구를 버렸다더라 하는 얘기들.

 

당연히 그 소문이 그녀들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고 이러한 것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얀붕이에게 했던 모든 말들과 행동들로 인한 죄책감과 후회로 고통 받고 있는 그녀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얀붕아.. 잘못했어, 나 너무 힘들어, 제발... 돌아와 줘”

 

“미안해, 오빠, 미안해, 보고싶어.. 오빠아..”

 

오랜 시간동안 같이 지내면서 화 한번 안내고 싫은 소리 한번 안하면서 항상 자신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던 소꿉친구이자 내가 좋아하던 남자.

 

한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동생을 돌봐주고 자기보다 동생을 더 우선하던 듬직하고 자상한 내 오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관계를 깨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들이었다.

얀진이와 순애는 매일같이 얀붕이의 방에서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 중얼거리며 그를 기다렸지만 당연하게도 그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그녀들의 정신은 점차 피폐해져만 갔다.

 

 

 

 

대자보 사건으로부터 며칠정도 지났을까.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아침, 얀붕이의 반에는 살짝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몇 주가 넘도록 학교에 오지 않던 얀붕이가 등교했기 때문이다. 얀순이의 손을 잡은 채로.

 

얀순이는 다른 사람들 보란 듯이 얀붕이의 손을 잡고 그의 반 앞까지 데려다 준 뒤 학교 끝나고 보자며 볼에 키스하고는 자신의 반으로 향했다.

 

반 친구들은 그런 얀붕이를 보고 슬금슬금 모여들어 그에게 말을 건냈다.

잘 지냈냐, 괜찮은 거냐, 얀순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 그때 오해해서 미안하다, 등등..

 

하지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하지도 않고 무감정하게 기계처럼 고개만 끄덕이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얀붕이를 보고서는 다들 머쓱해져서 서서히 흩어졌다.

 

그렇게 얀붕이가 홀로 앉아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여자가 가방을 멘 채 숨을 몰아쉬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얀붕아..? 정말로 얀붕이 맞는거지..?”

 

“오빠.. 오빠야..?”

 

얀진이와 순애는 울먹거리며 얀붕이를 껴안았지만 그는 조용히 둘을 밀어냈다.

그제야 그녀들도 주변의 눈과 반 안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그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저기 얀붕아... 나랑 순애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학교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니..?”

 

얀붕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들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얀진이는 자신의 자리로, 순애는 자신의 반으로 갔다.

 

얀진이는 얀붕이를 바라보며 깊은 죄책감과 후회를 느꼈다.

그가 그녀와 순애에게 따귀를 날리며 다시는 말 걸지 말라고 해도 할 말 없을 텐데 자신들의 요구를 차분하게 들어주는 얀붕이를 보니 저런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한 짓을 했는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 이번에는 반드시 놓치지 말자... 얀붕이에게 했던 짓을 용서 받기는 힘들겠지만, 그럴 자격도 없지만... 

평생에 걸쳐 용서를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놓치지 않을 거야.

언젠가 반드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거야’

 

하지만 이 생각이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얀진이가 깨닫기 전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종례가 끝난 후 얀붕이는 얀진이, 순애와 함께 빈 교실로 향했다.

빈 교실 안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 거리는 얀붕이 앞에 얀진이와 순애는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얀붕아, 미안해.. 믿어주지 못해서, 너에게 심한 말을 하고 때려서 미안해..!

너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너무 실망스러워서... 내가 잠깐 미쳤었나봐,

나 진짜, 그 새끼가 그런 새끼일 줄은 정말로 몰랐어,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너, 너가 날 다시 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까 제발.. 곁에만 있게 해줘, 얀붕아”

 

“잘못했어요, 오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얀진이는 눈물을 흘리며 얀붕이를 보면서 잘못을 빌었고

순애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지 아예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이마를 찍으며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작 그 대상자인 얀붕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 얘기 다 끝났으면 나 이제 가도 돼?”

 

얀붕이의 그 말에 얀진이가 황급히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여,역시 화 났구나 얀붕아? 그, 그렇지? 응, 당연히 그렇겠지, 

화가 풀릴 만큼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으니까 그러지마, 응?

아, 아니면 혹시 그 소문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아니야, 

나 그 새끼랑 사귄 적도 없고 그냥 같이 다닌 게 전부야. 그러니까-”

 

“나 진짜 화 안 났어”

 

“...뭐?”

 

얀붕이의 말에 횡설수설 쏟아내던 얀진이의 입이 멈췄고 순애도 부어오른 이마를 들어 올리며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너가 누구랑 뭘 하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애초에 너희가 나한테 왜 잘못을 비는지도 모르겠어.

나 화 안 났으니까 이제 그만해”

 

얀붕이는 정말로 화가 안 났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느낀 얀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 그럼... 오랜만에 같이 집에 갈래? 너랑 나랑 순애랑..”

 

“...? 왜?”

 

말 그대로 이해를 못하겠다는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대답하는 얀붕이.

그제야 얀진이와 순애는 깨달았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을.

 

그의 눈엔 분노도, 원망도, 혐오도, 동정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한 시선.

얀붕이에게 있어 방금 전의 상황은 돌멩이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며 같이 집에 가자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던 것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사람이 충격을 받았어도 한두 달 사이에 이렇게 될 수가 있나?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

 

멍해진 머리로 얀진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미인이 들어와 얀붕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얀붕아~ 늦게 끝나서 미안. 종례가 좀 길어져서- 어머, 얘기 중이었구나?”

 

“얀순아!”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감정하던 얀붕이가 활짝 웃고는 그녀를 반겨오며 품에 안겼고 

얀순이는 그를 안아준 뒤 비웃음을 띤 얼굴로 얀진이와 순애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얀진이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적대감에 벌떡 일어나 얀순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야, 너 뭐야, 얘기 하고 있는 거 안 보-”

 

“어, 얀진이네? 중학교 때도 그러더니 너 아직도 얀붕이 뒤나 졸졸 쫓아다니니?”

 

“뭐? 너 누군데 아는 척-”

 

얀진이는 공격적으로 말을 내뱉다가 그녀의 명찰을 보고서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너구나. 근데 너가 뭔데 얀붕이한테 친한 척이야?”

 

얀진이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다. 

중학교 때 자기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얀붕이에게 관심을 보였던 주제도 모르던 년.

얀붕이가 관심을 주지 않자 침울해져서는 멀리서 바라만 보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던지.

 

그랬던 년이 어느샌가 저렇게 변해서는 얀붕이랑 저러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뭐긴 뭐야. 얀붕이 여자친구지”

 

“...뭐?”

 

“...진짜야, 오빠?”

 

얀순이의 충격적인 말에 순애와 얀진이는 얀붕이가 부정해주길 바라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얀붕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얀순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 웃기지마... 얀붕이가 왜 너같이 음침한 년이랑..”

 

“있잖아, 나 얀붕이가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온 날에 공원에서 얀붕이랑 오랜만에 얘기했거든?

근데 많이 힘든 일이 있었는지 펑펑 울더라고... 왜 그랬을까?”

 

그 말에 얀진이와 순애가 동시에 움찔 하고 몸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본 얀순이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들어보니까 누명을 써서 심하게 괴롭힘을 받았다나 봐. 

근데 이렇게 착하고 예쁜 얀붕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아, 미안. 그리 오래 보지 못한 나보다는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소꿉친구랑 여동생이 더 잘 아는 사실이려나?”

 

“...”

 

가슴에 비수를 팍팍 꽃아 넣는 얀순이의 비꼬는 말에 그녀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뭐, 암튼 그래서 위로해주고, 갈 곳이 없다기에 집에서 재워주고, 같이 밥도 먹고, 한 침대에서 자고, 

그렇게 알콩달콩 지내다 보니 얀붕이가 나를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나도 예전부터 얀붕이를 좋아했으니 이렇게 사귀게 된 거지”

 

얀순이의 말이 끝나자 순애는 털썩 주저앉아 거짓말이라고 중얼거렸고 얀진이는 분노에 가득 차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지랄하지마! 도대체 애를 어떻게 대했으면 저렇게 되는 건데?

애를 완전히.. 완전히 기계처럼 만들어 놓고서는...!”

 

얀순이는 얼굴에 걸려 있었던 비웃음을 거두고 정색한 뒤 차갑게 말했다.

 

“만들어? 웃기고 있네. 이건 니년들한테 배신당하고 죽을 만큼 괴로워하던 얀붕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이런 모습 보기 싫었으면 믿어주고 지켜줬어야지, 이 미친년아”

 

그 말을 듣자 얀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발자국이 찍혀 나동그라진 채 얀진이가 위를 올려다보자 얀붕이가 분노에 차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얀순이한테 손 대지마”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보여주는 감정.

얀진이는 얀붕이가 자신에게 화를 내든, 욕을 하든, 때리든, 뭐든 간에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왜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느냐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소리라도 질러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얀진이에게 완전히 무관심하던 그가 그녀에게 분노를 표한 이유가 

나를 믿어주지 않아서, 혹은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않아서가 아닌, 

얀순이를 향해 위협했기 때문이라니.

 

이 사실이 얀붕이에게 맞았다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괴로웠다.

얀진이는 의지를 잃고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리며 얀붕이에게 애원했다.

 

“얀붕아, 제발... 나를 봐 줘, 얀붕아..”

 

하지만 얀붕이는 그런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얀순이가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얀붕아”

 

얀붕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얀순이는 그를 부르더니 씨익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두어번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얀붕이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키스했고 얀순이는 우월감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얀진이와 순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얀붕이의 입을 마구 탐했다.

 

키스가 끝난 뒤, 얀순이는 만족한 듯 웃고서는 집에 가자며 얀붕이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얀진이와 순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모습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

 

 

 

“씨발... 역시 그때 그렇게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얀붕이의 방 안에서 얀진이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얀진이와 순애는 얀붕이와 얀순이가 떠난 뒤 충격으로 한참 동안 빈 교실에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정신 차리고는 결심했다.

 

다시 그를 되찾자고.

 

물론 얀붕이가 완전히 그녀에게 빠져버렸지만 강제로라도 그를 되찾고자 했다.

힘을 쓰던, 얀붕이의 부모님께 말씀드려 경찰에 신고를 하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하지만 그들을 비웃듯이 그날 이후 얀순이는 얀붕이와 함께 학교에 오지 않았고 그녀의 집을 알아내 찾아가 봤지만 이미 집이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얀진이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때 순애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힘없이 인사했다.

 

“언니, 일찍 왔네”

 

“응, 순애야, 경찰에서는 연락 없고?”

 

“...따로 없었어”

 

“...그 씨발년, 죽여버릴거야...”

 

얀진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순애는 힘없이 앉아있었다.

그때 얀진이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액정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그것도 화상통화로.

 

누가 봐도 굉장히 수상한 전화.

잠깐 동안 서로 마주보던 그녀들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부정하고 싶은, 그동안 애써 부정해 왔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 하앙, 어.. 통화 연결 됐네? 여보세요? 아읏..! 얀붕아, 조금만 살살..

 

핸드폰 안에서 얀붕이와 얀순이가 서로 격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얀순이와 순애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오빠!!”

 

“씨발년아! 얀붕이한테서 안 떨어져?”

 

- 어머, 보자마자 욕이라니 너무하네.. 아읏, 그리고 순애야, 너무 걱정하지마. 

네 오빠, 아앙..! 여기서 나랑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 이 미친년이..! 너 지금 어디야..!”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얀진이와 달리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얀순이는 카메라 각도를 조정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허리를 흔들고 있는 얀붕이가 더욱 잘 보이도록.

 

- 어디긴, 나랑 얀붕이의 미래의 신혼여행지♥ 어차피 알려줘도 니들은 여기 못 올걸?

 

“이, 이 씨발년이!! 얀붕아, 당장 빼! 그거 당장 빼라고!”

 

“오빠! 이쪽 좀 봐봐, 오빠아!!”

 

- 얀붕아, 니 동생이랑 소꿉친구가 인사 좀 하고 싶다는데? 

 

- 괜찮아, 얀순아, 그것보다 키스.. 나 키스 해줘어...

 

얀순이는 깔깔 웃은 뒤 그와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는 우월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어머, 어쩌지? 아무래도, 하앙, 얀붕이는 너희랑 더 이상 할 말이 없나 봐.

그때 너무 갑작스럽게 헤어진 거 같아서, 읏..! 연결 해준 건데...

아무튼 얀붕이는 너희 몫까지 내가 평생 예뻐해주고 사랑해줄 테니까, 아앙, 너희들도 다른 좋은 남자 찾아보렴. 그럼 안녕, 쪽♡”

 

얀순이가 카메라에 대고 장난스레 뽀뽀하며 화면 너머의 얀진이와 순애에게 키스를 날렸고 그와 동시에 연결이 끊겼다.

 

“씨발..! 아아아아악-!”

 

“안돼.. 오빠.. 오빠아..”

 

얀진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벽에 핸드폰을 내던졌고 던져진 폰은 퍼석 소리를 내며 액정이 깨진 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조용한 방안에는 오빠를 찾는 순애의 공허한 중얼거림만이 울려 퍼졌다.

 

 

 

 

 

 

 

창문 밖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파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저택.

크고 푹신한 침대 위에 얀붕이가 색색 대며 자고 있고 얀순이는 그 옆에 누워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 자고 있는 얀붕이의 볼을 당기자 하얗고 말랑말랑한 그의 볼살이 쭈욱 하고 늘어났다.

 

“우웅...”

 

불편한 듯 얀붕이가 잠결에 신음하자 얀순이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푸훗, 귀여워...”

 

그때 그녀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고 액정에 뜬 번호와 이름을 보자마자 얀순이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녀는 얀붕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에서 나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 어, 나야. 금태양.

 

“그니까 왜 전화 했냐고”

 

- 왜긴 왜야. 일 다 끝났으면 계산 하셔야지.

 

얀순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계좌 불러. 내일까지 쏴 줄테니까”

 

- 아니. 그 전에,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계약 조건을 좀 바꿔야겠는데?

 

“뭐?”

 

- 그렇잖아, 애초에 팔 부러진 것도 그렇고 그 대자보도 그렇고 그것들은 계약 내용에 없는 거였잖아. 당연히 그만큼 더 받아야 되지 않겠어?

 

얀순이는 화를 참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말할 때 계좌 부르고 끊어라”

 

- 하, 씨발. 너야말로 좋은 말할 때 말 듣지?

 

“...뭐라고?”

 

- 너 어차피 나한테 돈까지 주면서 이 지랄한 거 전부 그 찐따 새끼랑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지랄한 거잖아. 아니야?

돈이고 뭐고 좆까고 내가 다 그 새끼한테 털어놔 볼까?

니가 그 새끼 불러내서 화분 던졌던 거, 뒤에서 헛소문 퍼트렸던 거, 나한테 돈 주고 연기 시킨 거, 어디 한번 전부 다 까줘 봐?

 

“...”

 

- 걱정 하지마. 돈만 좀 더 얹어서 보내면 나도 입 닥칠테니까.

금수저년이 쪼잔해 가지고는 쯧... 돈이 그렇게 아까우면 몸으로 때울래?

내가 그 새끼보단 잘 해줄 자신 있는데.

 

순간 핸드폰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잠시 침묵하던 얀순이는 얼굴에 조용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꺼냈다.

 

“... 생각이 바뀌었어”

 

-고럼 고럼. 그래야지. 그래서 어느 쪽? 돈이야 몸이야?

 

“아니, 그냥 묫자리나 알아보고 있어”

 

- 뭐?

 

“너 아직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잘 모르나본데... 며칠 뒤에 너 앞에 외국인 ‘프로’ 한명이 찾아갈 거야.

특별히 고통스럽게 처리해달라고 말해 둘게”

 

- 뭐야... 농담하는 거야?

 

“농담 아니야. 그리고 경찰이니 뭐니 허튼 짓 안하는 게 좋을 걸? 보통 프로들은 작업이 힘들면 힘들어질수록 표적에 대한 적의가 강해지니까”

 

- 아니, 잠깐... 나는 그냥 장난한 거였어. 하, 하하..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고 그러냐..

 

“그래. 며칠 뒤에도 그렇게 말해 봐”

 

- 알았어, 미안! 미안해! 돈.. 돈 안 받아도 되니까, 응?

 

“미안? 뭐가 미안한데”

 

- 그러니까, 그.. 너한테 막말하고 협박한 거 잘못했으니까, 응? 나 진짜 입 닥치고 있을게. 너랑 나 사이의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테니까...

 

“아니, 그거 말고. 니가 뭔데 그 더러운 입으로 얀붕이한테 찐따 새끼니 뭐니 운운해, 이 씨발 새끼야.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니가 얀붕이한테 개지랄 하는 거 볼 때마다 찢어 죽이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는데, 뭐?”

 

- 아니, 알았어!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래, 반성하는 태도 보기 좋네.

다시 생각해보니까 조금 심한 것 같으니 선처할게.

그럼, 음... 일단 얀붕이한테 개소리 못하게 혀 좀 뽑아주고...

또, 우리 얀붕이한테 개짓거리 못하게 손목 좀 날려주는 것 정도면 되겠네. 

교훈도 되겠고, 그치? 좋아. 그렇게 할게”

 

- 잠깐, 얀순아, 아니 얀순님, 잠시만..!

 

“끊어, 병신아”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창밖으로 던져 버린 뒤 후련한 듯 기지개를 한 번 피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얀붕이 옆에 누워 이전보다 더욱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으음, 얀순아.. 얀순아...”

 

얀순이는 꿈에서도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인지 잠결에 자신의 이름을 중얼 거리는 얀붕이를 보고는 그의 앞머리를 살짝 넘긴 뒤 이마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사랑해, 얀붕아♥

이제 영원히 함께야.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