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리시안셔스와 검은 장미의 꽃말




낭만적인 황혼도 다 지나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일을 기약하는 밤.


하늘에 박힌 채 알알이 빛을 내는 별들과 여신의 축복을 받은 달에서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창을 통해 밤의 풍경을 바라보던 남자, 리만은 지난 과거를 반추해 보았다.


 * * *


리만이 소년이던 어린 시절.


흑발과 녹안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공작가의 꽃. 

리시안을 만났다.


 - "시종. 나한테 다가오지마."


당시의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로, 시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 "난 저주받은 년이야. 뭐가좋다고 달라붙는거야..."


리만은 그녀의 구원이 되어주기로 했다.


 - "죽지 않아..? 떠나지 않아..?"


그녀의 희망이 되어주었고,


 - "업어줘. 안아줘. 같이있어줘."


 - "아아, 리만. 나의 리만..."


그녀의 세상이 되어주었다.


 - "떨어질 생각 하지마. 함께해줘. 나만 바라봐줘..."


 - "뭐야? 지금 다른 암캐년한테 눈 돌린거야? "


 - "응, 저번에 그년? 그만뒀어... 글쎄?"


리만이 그녀의 사랑이 되어버렸을 때,


 - "안되겠어. 오늘부터 내옆에 붙어있어. 이건 수갑이 아니라, 신뢰의 증거야."


 - "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스읍.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리만...하아..."


결국 무거운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 * *


"어휴..."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한 도시, 메리지의 한 바(bar).


"있잖아요오..."


한 남성이 알코올에 완전히 절여진 상태로,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대체 사랑이 뭘까요..?"


돌아다니는 곳마다 여자를 홀려놓고는, 정작 교제 요청을 수락하지 않아서


'예쁜 쓰레기'

'개같은 불여우'

'대형 어장남'


...등으로 불리는 남자.


부스스한 백발과 슬픈 감상으로 글썽이는 금안이 꽤나 인상적인, 리만이었다.



"...그러니까,"


리만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동거하던 연인에게서 도망친 주제에, 다른 여자들이나 꼬시고 다녔다고?"


묘하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목소리.


지난 1년간의 리만의 행적을 요약한 여인은 후드를 쓰고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었으나, 

밤하늘을 녹여서 짜낸듯한 남흑색의 머리칼과, 

이따금씩 후드 아래로 서늘하게 빛나는 녹안이 그녀가 미인임을 방증했다.



"연인이라... 글쎄요."


과연 리시안과 자신은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였었나. 곰곰히 생각해봤다.


'애착인형도 아니고... 하루종일 엉겨 붙어서 지내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빈민가에서 고아의 삶을 살았던 리만에게, 사랑이란 것은 굉장히 난해한 문제였다. 상대가 유수한 공작가의 따님인 것도 한몫 했다.


"저희가 연인 관계까지는... 아니죠. 에초에 이어질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었구요..."


리만의 얘기를 듣던 여인의 분위기가 한층 깊이 가라앉았으나, 취한 상태의 리만이 이를 눈치챌 리가 없었다.



"잘들어. 리만."


여인의 고운 입술이 움직였다.


"네가 공작가의 시종이 되었을 때부터, 

너는 공작가의 소유가 된거야."


선고하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네가... -를 구원해주고, 세상이 되--때부터, 

나도 너- 소유가 된- ... 알았어?"


"...느에에?"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약-- 들었네. 잠시 - 올 테니까, --리고 있어줘."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어디... 가셔요?"


리만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았다.


"여우 사냥."


 * * *


여인이 '여우 사냥'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리만은 오늘 하루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가끔 인사를 나누던 꽃집 여자에게서 갑작스런 고백을 받기도 했고, 정신나간 여도적에게 납치를 당할 뻔도 했지.'


후드를 쓴 여인을 보더니, 곧 사라졌지만.


게다가 방금전까지 있던 그녀에게 묘한 푸근함을 느껴서,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신세한탄을-




'-잠깐만.'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내가... 공작가에 대한 얘기들을... 했었나?'


무언가, 이상했다.


리만은 와인 몇 잔에 취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


전신에 번개처럼 짜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곳에서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텐더. 계산할게요."


"네. 8실버 입니다만... 일행분은?"


리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상태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으나,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들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급한 일이 떠올라서요. 

잔돈은 그녀의 추가분으로 해주세요."


10실버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그때, 리만을 부르는 목소리.


"많이 취하신 것 같으셔서요. 물 한잔 드시고 가시죠."


냉수를 한 잔을 웃으며 건네는 바텐더. 리만은 잔을 받아 들었다.


액체를 대충 입안에 털어넣은 후,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부웩-"


급하게 골목길로 들어가서, 입안에 머금고 있던 액체를 뱉었다.


리만은, 누가봐도 수상하게 건네는 것을 좋다고 받아 마시는 골빈 머저리가 아니었다.


"퉷."


입을 비우고, 빠른 발걸음으로 새벽의 메리지를 걸었다. 


온통 수상한 것 투성이였다. 일단 여관에 도착하고 봐야했다.



쿵, 쿵, 쿵, 쿵- 


귓가에서 심장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터질것 처럼 울려대는 소리.


술에 쩔어서인지, 전신을 짓누르는 공포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얼마나 걸었을까. 빌어먹을 알코올이, 시간감각까지 흐리게 만들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여관까지 가는 길이 몽롱하게 보였다. 이 길이 맞는걸까.


쿵, 쿵-


유난히 조용한 메리지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를 내리쬐는 달빛은, 끈덕진 감시의 시선 같았다.


어둡고 음산한 거리에서, 당장이라도 그녀를 만날-




"-어머."


쿵.


"급한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는 후드. 그 안에서 리만을 뱀처럼 주시하는 녹안.


그녀였다.


"하하... 내일 오전에 선약이 있어서요. 날도 늦었으니 가보려고 했죠."


"..그래?"


달이라는 광원 하나에만 의존해서, 시선이 닿는 곳이 온통 어슴푸레한 거리.


이상하게도 그녀의 외투 곳곳의 검붉은 자국들만큼은 눈에 띄었다.


'여우사냥'이라더니...


그것은, 동물의 피라기엔 지나치게 검고, 불길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알코올내가 나는건지 철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정녕 자신이 미쳐가는 것인가.


'마시던 와인을 쏟았겠지..?'



...분명 그녀는 백포도주를 마셨는데.


쿵- 쿵-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잘 됐네. 나도 검은 장미 여관에서 묵거든."


"으,응. 그래요?"


"응. 13호실. 같이가면 되겠다."


"네... 같이가요..."


쿵- 쿵- 쿵-


소리가 거세졌다. 사고가 정지했다. 당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쿵- 쿵- 쿵- 쿵- 


시야가 좁아졌다. 여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빠른 걸음을 해도, 뒤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향기가 그녀의 존재를 증명했다.



저 멀리있는 검은 장미 여관이 보였다.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박동, 흐릿한 시야, 비린내.



쿵- 쿵- 쿵- 쿵- 쿵- 쿵-


심장의 비명, 감겨가는 눈, 피비린내...




여관에 도착했다.


다행히 별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정말 급했나보네. 거의 달려가더라?"


"하하, 예에..."


생글생글 웃는그녀를 뒤로하고, 방 앞으로 갔다.


철컥-


열쇠를 끼워넣고, 잠긴 문을 열었다.


끼익-


설마설마 했는데, 다행이 기억속의 방과 배치가 달라지진 않았다.


이제, 본인의 방에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만 하면--






-쿵.


"...어?"


쿵- 쿵- 


리만이 놓친 것이 있다면,


쿵- 쿵- 쿵-


"어어어..?"


첫 번째는,


그가 머무르는 방이





13호실이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끼이익-





"잡았다. 나의 리만."



그 충격으로,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의 구원, 나의 희망, 나의 세상, 나의... 사랑."



잔인하고도 아름답게 웃는 꽃, 리시안이.


1년간의 도망을 끝낸, 남편을 찾아낸 순간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



이후 납치감금착정순애임신교미 했다고 하네유


피드백 부탁드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