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우울….”

 

최서윤은 그대로 잠들었다.

긴장이 풀어진 걸까, 상의를 주워 옷을 대신 입혀줬다.

아찔한 광경이다.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다시금 자신이 누구에게 유혹 받았는지 인식됐다.

다른 성향의 남자라면 환호했을법한 상황이었으나 아닌 건 아닌거다.

 

“후우.”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소지품이 안보였다.

덕분에 자신의 꼴을 재확인했다.

팔은 풀렸으나 다리는 여전히 묶였고 알몸이었다.

그 위에 최서윤이 아슬아슬한 수위로 누워있다.

방 안에 두 명만 있는게 다행이라 느껴졌다.

 

“깰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그때였다.

복도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아름답지만 어두운 얼굴의 정수아.

여동생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수아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아차.

수아가 남녀가 얽히고설킨 이 꼴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수아가 손을 조용히 치켜들었다.

시퍼런 빛의 식칼.

시선은 최서윤의 노출된 등에 고정됐다.

 

“…오빠, 늦어서 미안해. 지금 구해줄게.”

 

“수아야! 안…”

 

말릴 새도 없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식칼을 내리 찍었다.

푸우우우우우욱.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방안을 뜨거운 현장으로 바꿨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과 얼굴에 피가 흠뻑 튀었다.

 

“오빠…?”

 

간발의 차였다.

만약 최서윤이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맞아주지 못했을 거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빠…!?”

 

칼은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찔렀다.

동맥을 건드렸는지 피가 멈추지 않고 하염없이 나왔다.

 

“승현아, 이게 무슨…. 수아 네가…!”

 

최서윤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칼이 스치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아니야…. 오빠, 내,내가 이,이럴 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수아는 칼을 떨어뜨리고 손을 떨었다.

손만 떠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공포와 절망에 의해서 주체하지 못한 듯 떨렸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손을 뻗었다.

왼손으로.

 

“수아야. 어떠한 경우에서도 살인은 안 돼. 내 동생이 살인자가 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

 

“…빠,빨리 병원을….”

 

정수아는 휴대폰을 꺼냈지만 손을 너무 떨어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다시 줍고 떨어뜨리고, 다시 줍고 떨어뜨렸다.

얼굴은 사색이 됐다.

 

“오빠는 괜찮아. 구하러 온 거지? 고마워. 수아야.”

 

“오빠… 오빠… 어,어떡해? 내,내가, 내가 오빠를…

 

그 안쓰러운 모습에 더 두고 볼 수 없어 피가 묻지 않은 곳에 수아를 끌어안았다.

최서윤은 언제 일어났는지 냉정한 판단으로 이미 병원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지금 긴급 환자가, 빨리 와주세요. 빨리요. 부탁이에…….“

 

수아는 내 품에서 벗어나 커튼을 찢어 어깨를 압박해 지혈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의식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졌다.

그러나 이 말만은 정신을 잃더라도 반드시 해야한다.

그래야지 후에 벌어질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수아야, 서윤아. 싸우면 안 돼……. 만약 이후로도 서로 싸운다면 난……“

 

너희들을 절대 보지 않을 거야.

 

잃어가는 의식 속에서 난 마지막 말을 겨우 내뱉었다.

 

 

 

 

********

 

 

 

 

의식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3일 뒤였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병원의 넓은 VIP 병실이었다.

옆에는 전담 간호사란 사치까지 누리고 있었기에 밖으로 내보내고 탁자 위에 올려진 휴대폰을 집었다.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승현아? 이제 깼구나. 후우.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서윤아, 지금 어디야?“

 

-…알 것 없어.

 

”당장 말해. 화내기 전에.“

 

분노가 끊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 나의 반응 때문인지 개미만한 목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지금 ***구치소야.

 

역시나.

지금 상황은 자백은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친구를 감옥에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겠는가?

 

”기다려. 지금 갈 거니깐.“

 

-뭐?! 아니 그러지……

 

뚝.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키려하자 다친 부위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일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탁자를 집어 간신히 일어날 때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깜짝 놀랐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서은 그룹이랑 척지고 싶지 않으면 방해하지 마세요.“

 

최서윤이 대한민국 재계 1,2위를 다투는 서은 그룹의 맏딸이란 건 비밀이 아니다.

이 병원도 서은 그룹의 소유다.

의사는 그 말에 움찔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어 속삭였다.

 

”…딱 3시간만입니다. 위에서 완치가 할 때까지 엄중히 치료하란 말이 내려왔습니다.“

 

제기랄.

상황이 이 지경인데 어떻게 태평하게 병원에 지낸단 말인가?

그래도 3시간이면 일을 해결하기엔 넉넉한 시간이다.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탓인지, 아니면 의식을 잃었던 탓인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수술의 영향 때문인지.

움직일수록 커지는 고통을 아늑히 참아내며 택시를 불러 먼저 구치소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고 안으로 내 신분을 밝히자 피해자란 신분 때문이었는지 선뜻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안에는 바닥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최서윤과 그 바깥엔 어쩔 줄 몰라하는 형사들이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묻자 형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미성년자를 약물사용,납치,감금,성폭행했다고 자백하는데 안 갇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서은 그룹의 딸을 계속 가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가 피해자입니다.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갇을 이유도 없고요.“

 

”그럼 왜 저런 일을 벌인 겁니까? 학생.“

 

형사들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제 여자친구예요. 너무 심하게 싸워서 홧김에 저랬나 봐요. 죄송합니다.”

 

“허허. 참. 그럼 그렇지. 장래가 촉망된 여고생이 같은 남고생을 상대로 그러그러했다니, 내 그럴 줄 알았지. 허허.”

 

일이 잘 풀렸는지 잠시 후 구치소 문이 열렸다.

최서윤은 자지도, 씻지도 못했는지 안색이 핼쑥해졌다.

구치소로 나오는 내내 최서윤은 얼굴을 들지 못했고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궁금한 걸 물었다.

 

“휴대폰은 어떻게 사용한 거야? 원래 사용이 돼?”

 

“…내 집안이 그렇잖아. 허용해주더라고.”

 

아, 그렇구나.

공권력에도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재계는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네.

 

“미안해. 어떠한 말로도 사과를 다 담을 수 없는 거 알아. 네가 날 용서해준 것과 별개로 난 벌을 받았어야 했어.”

 

그 단호함은 서은 그룹 회장의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은 걸까?

 

“친구로써 내가 납득 할 것 같아? 다신 그런 행동 하지 마.”

 

최서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예상대론가. 어쩌면 난 이런 상황을 예측했는지도 몰라.”

 

“뭐?”

 

“아니야. 찾아와줘서 고마워. 여동생보다 날 먼저 찾아와준 건 기쁘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염치가 있으니깐. 안 바래다줘도 돼. 어서 여동생에게 가. 아마 지금 나보다 널 더 필요로 하는 게 수아일 테니깐.”

 

“…알았어. 그럼 조심히 가.”

 

“응.”

 

정승현은 대기하던 택시에 올라탔다.

최서윤은 멀어져가는 차를 쓸쓸히 쳐다봤다.

 

“속죄인가, 죄를 사함 받으려면 나는 얼마나 많은 봉사를 그에게 해야 할까….”

 

그 말은 쓸쓸하면서도 어딘가 기쁨이 샘솟고 있었다.

 

 

 

 

 

***********

 

 

 

 

저녁에 집에 돌아오자 마주한 건 부모님이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옷을 입고 나가려는 부모님과 마주쳤다.

과묵한 아버지는 놀라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스,승현아. 안 그래도 병원 가려던 참이었는데 깨어났구나. 몸은 괜찮은거니?”

 

“네. 수아는요? 집에 있나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봤다.

 

“3일간 밥도 안 먹고 학교도 안 가고 방에 틀어박혀있단다. 혹시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가니깐 제가 설득해볼게요.”

 

“그,그래. 방해 하지 않으마. 부탁한다. 승현아.”

 

2층으로 올라가 수아의 방에 섰다.

똑.똑.똑.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재차 문을 두드리려할 때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내,내가 찔렀어……. 오빠를… 내,내가 이 두 손으로…….

 

‘이런.’

 

안 그래도 멘탈이 약한 동생이다.

의도치 않았다고 하나 자신의 오빠를 찔렀다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게 당연했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수아를 불렀다.

똑.똑.똑.

 

“수아야, 오빠야. 문 좀 열어줄래?”

 

힉.

안에서 쇗소리가 나더니 말을 더듬었다.

 

“오,오빠야…? 어,어떻게… 왜,왜 날…….”

 

“오빠 화 안났어. 빨리 문 열어봐. 서있기 힘들다.”

 

내 그런 재촉에 이겨낼 수 없었는지 수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역시나 최서윤처럼 핼쑥하다.

방안이 온통 꺼져있던 탓인지 더 핼쑥해보였다.

얼굴엔 눈물이 마른 자국이 짙었다.

나는 문을 잠그고 침대에 겨우 앉았다.

 

“수아야, 옆에 앉아.”

 

정수아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지 바닥을 연신 바라봤다.

 

“내 얼굴 봐. 수아야.”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저녁을 수놓은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비췄다.

 

“내가 화난 것 같아?”

 

도리도리.

귀엽게 고개 젓는 모습에 여느 때 같으면 머리를 쓰다듬었겠지만 지금은 좀 더 단호함이 필요하다.

 

“말로 대답해. 내가 지금 화나 보여?”

 

“아,아니요….”

 

수아의 입에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너무 정색했나.

얼굴을 풀고 싱긋 웃었다.

 

“그건 우발적인 사고였을 뿐이야. 더 이상 자책하지 마. 나랑 약속해. 수아야.”

 

“네,네……. 오빠….”

 

풀죽은 수아의 머릿결을 쓰다듬어주자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수아의 얼굴도 조금은 풀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엄하게 말했다.

일명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그리고 다시는 절대 남을 해하려고 하지마. 알았어?”

 

단호한 말에 수아가 다시 풀죽었다.

 

“죄송해요……. 오빠….”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날 구해주려고 한 거지? 고맙다. 수아야.”

 

따뜻한 말에 마음이 녹아내린건지 수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품에 안겼다.

 

“끅. 죄송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오빠…. 오빠…. 오빠…! 끅. 흑흑흑.”

 

“하나만 해. 고맙다는 말이면 충분해. 수아야.”

 

수아가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 끅. 오빠…! 흑흑흑.”

 

여동생의 무거운 사랑을 받아내며 진정될 때까지 위로해주고 옆에 있어줬다.

하지만 시간이 돼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수아를 안아주고 방을 나왔다.

계단 아래에는 부모님이 서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이제 밥도 먹고 학교도 다닐 거예요.”

 

안도가 됐는지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이제 병원으로 돌아가니? 엄마가 매일 병문안 가줄게.”

 

“안 오셔도 돼요. 안 오셔도 아마…… 음.”

 

예상컨대 그 두 명은 매일 오지 않을까 싶다.

집을 나오고 택시가 오기 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수아는 어떻게 됐어?

 

“많이 좋아졌어. 이제 다시 움직일 거야.”

 

-다행이네. 역시 오빠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고맙다. 서윤아.”

 

-뭐가?

 

“수아가 경황을 없는 동안. 흉기, 너가 숨겨준 거지? 경찰과 구급차가 오는 동안.”

 

-…당연한 행동을 한 것뿐이야. 그야 너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했잖아?

 

마지막?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기억 나지 않아도 괜찮아. 수아랑 난, 네가 한 말을 무조건 지킬 거니깐.

 

“그,그래?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호호. 말 못 해. 그런 무서운 말을 어떻게 내 입으로 해? 수아한테도 한 번 물어봐. 호호.

 

서윤이는 기운을 조금 찾았는지 웃음 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지러웠던 상황이 겨우 수습된 모양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원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하지만 이때까진 몰랐다.

지금보다 더한 파국이 그 후에 일어나게 될 줄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