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이제 다 왔네만….”

 

노회한 택시기사는 힐끗 룸미러를 쳐다봤다.

주변에 건물과 인도도 없다.

풀과 나무만 무성한 이곳을 택시의 전조등으로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꺼림칙한 건 뒷좌석에 앉은 여학생이다.

앞머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학생은 몇 시간 내내 조금의 미동도 없이 줄곧 휴대폰만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수상한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택시기사는 덜덜 떨었다.

 

“저기 학생…”

 

그때 여학생이 휴대폰을 닫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얼마죠?”

 

“…아,네 12만 원입니다.”

 

택시기사는 그 음산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요.”

 

택시기사가 받은 건 지폐 여섯 장이었다.

 

“30만 원? 12만이라고…….”

 

“그냥 받아요. 앞으로 귀찮아질 테니깐.”

 

“아 넵.”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은 분명했다.

등골이 오싹하다.

이 밤중에 오갈 데 없는 이곳을 찾은 것은 설마 자살하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냥 가자. 일당은 오늘 충분히 벌었으니깐.’

 

정수아가 내리자 택시는 도망가듯 부리나케 속도를 밟았다.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곳.

정승현의 GPS가 끊긴 수풀에 가려 흐릿한 빛이 보이는 저 건물을 제외하면 말이다.

정수아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음험한 빛을 띄는 잘 벼려진 식칼은 달빛에 반사되어 정수아의 차가운 얼굴을 비췄다.

 

“…오빠, 기다려 줘.”

 

한적한 주위는 오로지 정수아의 목소리만 들렸다.

 

“곧 구해줄게…. 그 년을 죽여서라도.”

 

살의가 가득한 눈빛을 내뿜으며 정수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

 

 

 

 

나는 이 시선과 광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여동생이 나를 옭아 매려할 때 느꼈었다.

하지만 이번 일 역시 처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6년 전.

수아가 수련회를 가고 처음 서윤이를 내 방에 들였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침대에서 눕혀지다시피 당했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여동생이 가끔 나에게 그런 장난을 치곤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런 장난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여동생을 혼냈었고 그날도 나는 그런 장난을 친 최서윤을 밀어내고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을.

여동생이 옛날부터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장난을 친 거였다면.

서윤이도 그런 사랑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 것이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최서윤을 밀어내고 멋대로 방치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

 

감정은 고이면 썩는다.

내가 만약 수아의 마음을 일찍 눈치채고 보듬어줬더라면 나에 대한 의존성을 낮출 수 있었을지 모른다.

최서윤 역시 마찬가지다.

그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눈치챘더라면…

그 마음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줬더라면

감정은 고이지 않고 썩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됐다면 그녀 역시 고통받지 않았을까?

그런 애잔함과 안타까움이 어쩌지 못할 만큼 내 마음에 강하게 일었다.

불현듯 일어난 몸의 뜨거운 열기도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그녀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모든 건 오빠와 친구로써 그 고통을 눈치채지 못한 내 부덕의 소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마냥 흘렀다.

 

최서윤의 말문이 턱 막힌 것은 그때부터였다.

 

“…왜 울고 있는 거야?”

 

최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승현의 사그라든 반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왜, 왜 안 서는 건데… 내,내가 매력이 없는 거야? 그런 거야? 6년 동안 그렇게 아름다워지고 더 이뻐졌는데 왜 너만…! 내게 마음을 안 여는 건데……!”

 

정승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서윤을 바라봤다.

 

“…미안하다. 서윤아.”

 

“!”

 

마음 속을 관통한 그 아련한 말에 최서윤은 절망하고 좌절했다.

그리고 점점 이성을 잃었다.

 

“웃기지 마! 미안하다고? 널 납치하고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 감금해서 널 강간하려 한 나한테 미안하다고…? 이런 나한테 대체 얼마나 상냥하려는 건데…!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승현아.”

 

최서윤은 정승현의 손을 풀어 자신의 부푼 가슴을 매만지게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에 대한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가슴이 미어진 정승현이 반응할 리 만무했다.

그럴수록 최서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왜,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 씨앗을 받고 임신하면 아무리 화가 난 너라도 네 아이를 밴 날 용서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벌써 날 용서하면 네 아이를 배지 못한 난 뭐가 되는데?!”

 

우득우득.

초조함과 불안감. 머릿속에 엄습해오는 절망감까지 최서윤의 내면은 점점 부서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를 배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받더라도 자신은 곧 버려질 것이다.

친구로써 얼굴도 마주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학교를 자퇴하고 외국으로 도망친다 한들 정승현 없는 세상은 자살하니만도 못한 고통밖에 없는 삶이 분명한데 무슨 소용이랴.

 

‘정수아…!’

 

학생회실을 빠져나오기 전 여동생의 사랑을 이용하겠다는 정수아의 웃음이 분노를 치솟게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포지션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혈육의 정은 떼어낼래야 떼어낼래도 떼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에 반해 자신은 완벽한 타인.

고개 돌면 금새 사라지는 관계일 뿐이다.

최서윤은 더욱 이를 갈았다.

 

‘역시 안 되겠어. 발정제를 과다 투약해서라도 아이를 반드시 배야겠……’

 

그때였다.

정승현이 풀려진 손으로 초조하게 손톱을 깨무는 최서윤을 품에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평화롭고 따뜻한 심장소리가 최서윤의 귓가에 명백히 들렸다.

정승현이 최서윤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 어디 안 도망가. 서윤아.”

 

“!”

 

“미안하다. 네 마음을 빨리 눈치채줬어야 했는데…. 그런 마음도 모르고 여동생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달라니,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울컥.

최서윤은 갑자기 샘솟은 눈물에 당황했다.

자신의 어지럽고 어두운 마음도 정승현의 한 마디에 구름 걷힌 듯 밝아졌다.

 

‘그때도 그랬어…. 그리고 지금도….

 

정승현의 곁에 있으면 늘 이랬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차분해지고 차분해지면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다시 차분해진다.

 

아마 그런 것이다.

그가 가진 상냥함이란 꽃에 헤어나오지 못한 벌레 두 마리가 이성을 잃어 서로 으르렁거리는 꼴이다.

꿀은 벌레 한 마리가 독차지할 수 없다.

그럴 권리도 없고 말고. 응.

최서윤은 그의 따뜻한 품, 따듯한 말 한 마디에 완벽히 이성을 되찾았다.

분노와 음습함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쪽팔려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감정은 일체 들지 않았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용서해주는 따뜻한 그 품에 말없이 눈물을 적실 뿐이었다.

정승현은 이해한다는 듯 계속해서 최서윤의 풀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 적막함이 계속해서 방 안을 울렸다.

 

 

 

 

************

 

 

 

 

이예나는 한가로이 1층 로비를 지켰다.

윗 층에선 자신의 주인이 씻고 나와 방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다.

거사를 치룬다면 어떤 소음이라도 들려야 하건만 조용했다.

아무렴 좋다.

자신은 어렸을 때 주인에게 입은 은혜를 목숨을 잃는 날까지 곁을 지키면 되는 거니깐.

그런 생각을 하며 이예나는 정승현의 소지품을 만지작거렸다.

 

’조사할 건 없네. 얼마 없는 낡은 지갑에다가 잠긴 구형 폰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유행이라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학생이구나. 음? 이건…‘

 

이예나의 예리한 시선에 이상한 무언가를 감지했다.

휴대폰 케이스 안쪽은 검은색으로 칠해있었지만 이건 가림막이다.

억지로 만든 빈틈에 손톱을 끼워놓자 신호를 잡는 센서가 안쪽에 드러났다.

경호원으로서 이 장치를 모를 수가 없다.

GPS다.

이게 정승현의 휴대폰 케이스에 달려있었다.

 

“이게 왜…? 설마?”

 

그때였다.

쾅!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정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정수아는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검지를 까닥 내렸다.

 

“그거 내려놔요. 제 꺼니깐요.”

 

심상치 않은 적의를 느낀 이예나는 품속에서 권총과 삼단봉 중 뭘 꺼낼지 고민했다.

아무리 상대가 예상치 불청객이라고 하나 상대는 미성년자.

약관의 소녀가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의 망설임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어 돌아왔다.

정수아는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는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몸을 부딪쳐 한 팔을 순간 봉쇄한 후 나머지 팔로 품속에 숨겨놓은 식칼을 꺼내 이예나의 목을 베려는 찰나 순간 멈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예나의 등골이 식은땀이 났다.

곧이어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이지 마. 여기서 언니가 죽으면 최서윤도 죽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 말에 이예나는 다른 한 손으로 전기 충격기를 꺼내려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분노.적의.진노.

이예나의 눈에 비친 정수아의 눈은 오로지 살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예나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은 걸 깨달았다.

자신이 죽든 말든 정수아는 최서윤을 죽일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몇 없는 정보들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이예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아야. 중학교때 이후로 오랜만이네? 그런 것치곤 너무 과격하지 않니?”

 

“장난해? 사람을 납치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

 

정수아가 격분해 말했다.

순간의 빈틈을 보이면 몸을 바로 움직일 것이다.

이예나는 정수아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납치라니, 무슨 애기일까? 수아야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정승현은 아가씨와 연인이 되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굳이 먼 이곳을 찾은 거야. 만약 네가 그런 오해로 나와 아가씨를 죽인다면 과연 너희 오빠가 널 좋아할까?”

 

아가씨를 따르면서 정수아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다.

정승현의 소지품에는 도청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단순한 오해다. 단순히 생각하면 논리적인 그 말에 정수아의 확고한 생각이 흔들림이 보인다면 순간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때 식칼이 든 팔을 제압하고 정수아를 사로잡는 건 바로 그때가 될 것이다.

 

“훗. 후후후후후후후….”

 

“!”

 

정수아는 우습다는 듯 조용히 웃었다.

오히려 그 비웃음에 정신이 흔들린 건 이예나였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팔 위로 올려.”

 

이예나가 어쩔 수 없이 팔을 올리자 정수아는 준비한 줄을 꺼내 한 손으로 능숙하게 팔을 묶고 이어 다리를 묶었다.

그 다음 이예나의 입에 줄을 단단히 묶으면서 속삭였다.

 

“정말, 우습다니깐.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빠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안아준 사람이야. 최서윤과 연인이 되는 그런 행동 따위 할 리가 없잖아?”

 

”읍!읍!“

 

”방해되는 건 모조리 죽이고 싶지만, 언니 말대로 오빠한테 미움받을 테니깐 살려는 줄게. 단 최서윤은 예외야. 그 년만큼은 미움받더라도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그 단단한 결의를 들은 이예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주인에게 소리쳤다.

 

”읍읍읍!!!읍읍!!읍읍읍읍읍읍읍!!!“

 

그런 이예나를 정수아는 비웃었다.

 

”헛수고야 언니. 이만 가볼게. 납치감금범죄자년.“

 

퍽!

정수아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이예나를 머리를 뻥 차버렸다.

이예나는 그 충격에 기절했다.

정수아는 위를 쳐다봤다.

 

’저쪽인가.‘

 

이예나가 소리쳤다는 건 소리가 들리는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시선의 방향은 오른쪽이었다.

정수아는 식칼을 붕붕 흔들며 이층을 향해 발걸음을 서서히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