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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얼마나 시간이 흐른걸까.


알렌 버밍엄의 추궁 이후 조디악나이츠 블루시프트의 기사단장 에스테로사 드 슈발리에는 구원기사단의 철창에 속박된 채로 방치되었다.


최소한의 식사마저도 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뛰어난 카운터였기에 자신의 남은 CRF를 조금씩 소모하며 체력을 보전했다.


바깥은 어떤 상태일까, 알렌의 말대로 조디악나이츠는 괴멸한 것일까, 단원들은 무사할까. 등의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뚜벅뚜벅


그 때 감옥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조용한 지하에 울렸다. 발소리가 약간 엇박자로 나는 것을 보아 감옥에 용무가 있는 사람은 두 명인듯 했다.


'구원기사단의 성녀.'


에스테로사는 고개를 들어 이윽고 자신의 감금 된 철창 앞에 선 그들을 보았다. 한 명은 낡고 헤진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같이 선 화려한 의복의 여성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역시 광대기사단의 대장광대 답네요. 아직까지도 정신을 유지하고 계시다니."


불쾌한 비꼼을 섞은 독설을 내뱉는 그녀는 구원기사단의 일원인 성녀 '루크레시아'였다. 처음 투옥되었을때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처음으로 들어 온 인원으로 에스테로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조디악나이츠의 기사단장이다. 내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따르지 않겠지."


스산한 감옥에서도 그 눈은 광채를 잃지 않고 조디악나이츠의 긍지를 품고 있었다. 과거 자신의 한 때가 떠올라 루크레시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진정한 구원자와 함께 싸웠던 그 날의 기억은 가슴 한켠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에스테로사에게 순간 과거의 자신을 겹쳐보며 연민을 느꼈으나, 자신의 구원자를 돕겠다는 맹세를 떠올리곤 표정을 바꿨다.


"대단한 근성이시네요. 그래요, 사실을 말하자면 저희도 상황이 안좋아졌기에 더이상 당신을 정공법으로 설득하기는 힘들어졌어요."


"그대들을 막아 낼 자들이 나타난 것이군. 이 세상에는 용기와 선의를 가진 자들이 많다. 당연한 결과로군."


"과연 그럴런지……."


루크레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창살에서 서서히 물러났다. 그녀와 교대하듯 그녀의 옆을 지키던 헤진 망토와 후드를 걸친 자가 감옥문을 열고 에스테로사의 앞에 섰다.


끝인가, 에스테로사는 그 자가 자신의 처형자라 생각했다. 회유가 되지 않자 구원기사단에서 처단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에스테로사와 눈높이를 맞추듯 자세를 조금 낮추고는 깊게 눌러 쓴 후드를 들어 얼굴을 보였다.


"어……어떻게……."


"오랜만이야, 에스테로사."


인간이 너무 큰 충격을 경험하면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다. 그와 같이 에스테로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과 눈을 맞추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라버니."




-




"도대체……어째서……, 아니……왜……."


에스테로사는 적잖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의미없는 단어 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최악의 장소에서 자신과 마주한 오빠에게 그간 전하고 싶었던 말들은 머릿속에서 먼지가 되어 산산히 흩어졌다.


"놀랐나 보네. 이해해."


그에 비해 그녀의 오빠. 에밀 드 슈발리에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때와 같이 상냥하게 웃으며 에스테로사를 마주했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것일까, 그가 왜 구원기사단에 있는 것일까, 등의 생각이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간 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너에게 말도 없이 떠났던 것은 미안하다. 그 때의 나는 구원기사단을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생각했었거든."


"오라버니, 어째서……."


그것은 아마도 구원기사단의 노림수. 에스테로사의 약한 부분을 노린 것이었다.


에스테로사는 제대로 된 질문을 입에 담으려 했지만 단어의 나열 뿐인 말은 연기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이 이 세상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란다. 그들을 위협이라 생각하며 혼자서 맞섰던 내가 하는 말이야. 오빠를 믿지 못하겠니?"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어. 그렇지만, 우리 조디악나이츠의 창립자인 별의 인도자 조차도 그들의 세상을 지켰었다. 우리와 그들의 뿌리는 같은 것이야."


에스테로사의 눈은 점점 슬픔에 잠겨갔다.


"안타깝게도 네 동료들은 무의미한 저항을 하다가 스러져 갔지. 구원기사단의 본질을 보지 못한 참담한 결과야. 그러니……."


에스테로사는 결국 눈을 감았다. 너무도 슬픈 감정을 안고 마음으로 오열했다. 에밀의 입은 쉬지 않고 그녀를 회유하려 했지만 에스테로사는 더이상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에스테로사."


"오라버니.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에밀의 말이 멈췄다. 에스테로사의 어조는 전에 없이 맑고 또렷했다.


"왜 저를 보지 않으시는 거죠?"


"……."


에밀의 눈은 언뜻 자신을 향한듯 보였으나 실상은 한없이 혼탁하여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스테로사가 다시금 젖어든 목소리로 묻는다.


"그 상냥한 눈에 담겨 있던 오라버니의 영혼은 어디에 있나요?"


에밀은 답하지 않는다. 그저 에스테로사를 그 눈에 담는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희를 위해 싸워 주셔서……."


에스테로사의 눈가가 젖어간다. 에밀을 위한 따스한 눈물이 한줄기 흘러 턱을 적신다.


이 말을 한다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과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에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지켜야 했다. 자신이 동경했던, 존경했던 오빠를 위해서.


"조디악나이츠의 처녀자리의 기사. 나 에스테로사 드 슈발리에는 절대로 구원기사단을 돕지 않습니다. 루크레시아."


에스테로사의 시선이 창살 너머로 향한다. 루크레시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리도 따스한 질책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가 거절한 이상 자신도 냉정해야만 한다.


"그런가요? 아쉬운 결정을 하셨군요. 최소한의 자비로 최후는 자신의 혈육에게 맞게 해드리죠. 처단하시죠. 전(前) 기사단장님."


그 말에 응답하듯 에밀이 허리춤의 칼을 뽑는다. 빛 바랜 롱소드가 감옥 창살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에밀은 감정 없이 에스테로사의 어깨를 잡았다. 확실히 그녀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이제 끝이구나.'


에스테로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장으로부터 격렬한 전투음이 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냉병기가 서로 부딪히고 신체가 벽에 처박히고, 거대한 검기가 땅을 가르는 소리. 이윽고 땅이 크게 진동했다.


"잠재능력방출."


그 직후.


그녀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 온 구원자의 검이 밝게 빛났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공중에서 크게 회전한 그의 검이 에밀의 검을 쳐냈다. 에밀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크게 휘청이며 루크레시아의 곁으로 물러났다.


"……한솔 경? 한솔 경인가……?"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자신이 알던 견습기사가 맞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 등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웠다. 그런가, 수련의 성과가 있었던 것이구나. 등의 생각을 할 때, 그는 등에서 검을 하나 뽑아서 바닥에 꽂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단장님."


꽂힌 것은 조디악나이츠 기사단장의 상징.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별의 무구, 버고 소드였다. 이윽고 그가 손에 쥔 검은 장검을 휘두르자 에스테로사의 구속이 풀렸다. 오랜 감금 탓인지 에스테로사는 자세를 잡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한솔의 부축 덕에 일어설 수 있었다.


"단원들은? 모두 무사한가?"


"블루시프트는 전원 무사합니다. 다만, 레드시프트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괴멸하였습니다."


블루시프트의 소식에 안도했던 에스테로사의 눈에 당혹감이 비쳤다. 내로라 하는 인원들로 가득한 레드시프트가 괴멸했다니.


한솔은 클리포트 게임에 조디악나이츠가 개입하게 된 계기를 에스테로사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싶었지만 루크레시아와 에밀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솔은 에밀을 보았다. 자신의 수련을 시작하게 된 계기. 자신의 구원자의 절망적인 모습을 마주했다.


'별의 길이 보이지 않아.'


그의 인도자의 능력으로 에밀을 안식에 들게 할 수 있을까 확인했으나 그의 길은 이미 루크레시아에 의해 심하게 뒤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한솔 경은 역장을 찾아 부수도록."


에스테로사가 버고 소드에 손을 얹는다. 그에 화답하듯 버고 소드가 찬란한 빛을 내며 공명했다.


그에 한솔이 걱정하는듯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강인한 미소를 보였다. 아스트라이아의 가호 아래 강력한 힘을 찾은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과 공정함으로 이미 정의의 여신 그 자체였다.


그녀가 버고 소드를 뽑아내자, 이전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에너지가 솟구쳤다. 그 방대한 에너지는 그녀의 헤일로로 화해 선명한 처녀자리를 만들어 냈다.


"아스트라이아……."


"가도록, 한솔 경. 이 곳은 내가 맡도록 하지. 그들은 내 검을 넘을 수 없을 테니까."


한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역장의 위치로 추정되는 장소로 향했다. 이제 힘을 되찾은 여신은 그녀의 적에 맞섰다.


"풀려나긴 했지만, 지나친 자만심은 목숨을 해칠 수 있습니다."


루크레시아가 그녀의 오만함에 코웃음 쳤으나, 이윽고 말이 멎었다.


"버고소드 전개."


─강대한 빛이 그녀를 구원한 하늘 너머로 솟았다.



"글로리아 바르고."


강렬한 빛의 화마가 루크레시아와 에밀을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