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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사령관의 하루 (14)

 

 

 


 

 

인간이기 때문이 아냐.

 

사령관이라 그런 게 아니야.

 

주인이라서, 똑똑해서, 강해서. 그딴 건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진심을, 토해낸다.

 

블랙 리리스.

 

 


 

 

 

44.

 

언젠가, 처음 당신을 만났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주인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셨죠.

 

그 옆에는 콘스탄챠가 서 있었고, 그 때는 아직 시설을 개선하기 전이라

 

침실도 훨씬 좁고 지저분했어요. 책상 주위에 쌓인 종이의 산, 책 냄새.

 

마음이 편해지는 생활감 넘치는 방. 

 

그리고 이 사람이 나의 주인이 될 인간. 내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남자.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오르카 인류재건군의 사령관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스스로를 소개해주시길 바랍니다.”

 

무미건조한, 마치 녹음된 것 같은 목소리.

 

“제 이름은 블랙 리리스. 편하게 리리스라고 불러주세요.”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제게 충성을 바칠 수 있습니까?”


“네, 물론이죠. 저는 오늘 이 순간,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질문엔 다른 뜻이 숨어있었습니다.

 

그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대답할 수 있다면-

 

 

 

 

 

45.

 

“주인님!!”


정글을 뚫고 언덕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덕 주위의 나무들이 쓰러져있었고 바닥엔 탄피 몇 개가 굴러다녔습니다.

 

“어디……어디로 가신 거지?! 찾아야 돼. 어서 찾아야 돼!”


침착하자. 침착하게 생각하죠, 아직 ‘최악’은 오지 않았으니까.

 

시체는 안 보인다. 철충도 혈흔도 없다.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기습했지만 죽이는데 실패했고, 주인님은 도망쳤을 테죠. 그리고 철충이

 

그 뒤를 쫓아갔다……그렇다면 흔적이 남아있을 터.”

 

저는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언덕 반대 방향에 쓰러진 나무들이

 

보였습니다. 십중팔구 저쪽으로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총은……아니, 일단 주인님의 안전부터 확보하자. 총을 가지고 가면 너무 늦어.”


멍청이. 왜 총을 두고 다닌 거야? 자기 임무가 뭔지 까먹다니 경호 대장이란

 

칭호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이런 실책을, 아마추어도 안 할 실수를 저지르다니.

 

저는 흔적을 쫓아 정글을 헤맸습니다. 온 사방에 총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혈흔은 없어……그래, 주인님께서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실 리 없잖아.

 

분명 괜찮으실 거야. 어디에 잘 숨어서 내가 오길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탕! 또 저 멀리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정글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도망쳤는데, 저는 그걸 보고 그 새들이

 

온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마 저 근처에 철충이 있을 겁니다.

 

“저기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놈을 발견했습니다.

 

철충 중에서 제일 흔하게 보이는……나이트 칙이었습니다.

 

기잉, 기이잉……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인님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총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리 저라도 장비 없이 무작정 돌진했다간 순식간에 벌집이 될 겁니다.

 

저야 어지간한 공격으론 죽지 않지만, 치료도 지원도 받지 못하는 이런 곳에서

 

중상이라도 입었다간 그 후유증으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함부로 덤벼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 순간.

 

“읍!?”


“쉿.”


주, 주인님!? 어디 계셨던 거죠? 갑자기 나타난 주인님이 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블랙 리리스, 장비는 가지고 계십니까?”


“아, 아뇨……죄송해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합류했으니 다행입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제, 제가……제가 옆에 있었어야…….”
 
“침착하십시오.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하게 행동해야합니다.”

 

아아, 역시 주인님.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하시는군요.

 

“맨손으로 덤비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자, 여기 받으십시오.”


“이건……창? 언제 만드신 거예요?”


“도망치면서 주운 나뭇가지와 돌로 만들었습니다. 내구성은 약해서

 

한 번만 써도 부러지겠지만, 그래도 약점을 잘 노리면 치명상을

 

입힐 정도는 됩니다. 나이트 칙은 후면, 그 중에서도 회로가 모인 하부가

 

약합니다. 뒤를 잡을 수 있다면 일격에 파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죠? 몰래 다가가는 건 힘들 거예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는 건 아니지만, 철충의 오감은 꽤 민감한 편이라

 

근처에 다가가면 눈치 채고 공격할 게 뻔합니다.

 

“제가 오늘 낮에 만든 함정, 기억나십니까?”


“아……!”

 

아까 만들어서 이곳저곳에 설치해놓은 올가미! 그거라면 철충의 발을

 

묶을 수 있습니다. 덩굴로 만든 거라 잠깐 움직임을 멈추게 한계지만

 

뒤를 잡는 거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블랙 리리스, 당신은 올가미가 설치된

 

지점에 숨어계십시오. 제가 그쪽으로 유인할 테니 함정에 걸리면 재빠르게

 

창으로 뒤를 찔러 파괴하면 됩니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제, 제가 미끼 역할을-”


“안 됩니다. 제 완력으론 치명상을 입힐 수 없습니다. 걱정마시길, 저는

 

이래보여도 발이 빠릅니다. 합류 지점은 언덕에서 남쪽으로 가면 나오는

 

둥근 바위 밑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미끼 역할을 맡고 싶지만……주인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네. 주인님, 무사하셔야 돼요.”


“전 괜찮을 겁니다. 그럼 가십시오.”

 

저는 창을 들고 주인님이 말했던 그 둥근 바위 밑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올가미라면 나이트 칙의 발 정돈 묶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인님이 무사히 여기까지 오셔야 한다는 건데……여차하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철충을 쓰러트려야합니다.

 

곧, 요란한 총성이 울렸습니다. 총성이 계속 울리고 있으니

 

붙잡히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소리가 커졌습니다…….

 

“블랙 리리스! 준비하십시오!”

 

“네!”


주인님이 몸을 낮춘 채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놈이 나타나 총알을

 

사방에 갈겼습니다. 앞으로 열 걸음, 일곱, 다섯……!

 

“지금입니다!”

 

철컥! 올가미가 당겨지며 철충의 발을 묶었습니다.

 

놈이 거기에 걸린 사이에, 저는 전력을 다해 뛰어들었습니다.

 

“받아라!!”


쾅! 창이 놈의 뒤통수를 꿰뚫었고……스파크가 튀며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됐습니다. 솔직히 성공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주인님, 정말 위험했어요.”


“찰과상을 좀 입었지만 무사합니다. 차라리 불곰을 상대하는 게-”

 

그 순간, 세상이 기울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뒤.

 

커다란 총성. 쓰러지는 몸, 흩날리는 피.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주인님!

 

“주인님!!”


놈이 아직 살아있었다. 주인님이 날 감쌌어, 왜? 피. 머리에 피가, 주인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나는 놈의 위에 올라타, 흔적조차 안 남을 때까지 주먹을 휘둘러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손에서 피가 흘렀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나는 대체 뭘 한 거야.

 

왜 자꾸 이런 실수를, 나답지 않은 짓을 해버리는 거야?

 

나 때문이야. 내 잘못이야, 내가 무능한 탓에 주인님이…….

 

“저……저는 괜찮습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머, 머리에서 피가!”

 

“스친 겁니다. 흉터는 남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마의 살이 찢어졌을 뿐, 뼈가 뚫리진 않았습니다.

 

“다……다행……다행이에요, 다행이다……저는, 제가……제가 주인님을

 

지키지 못한 줄 알고……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는 가방에서 상처약과 붕대를 꺼내 상처를 치료해드렸습니다.

 

“이제 됐어요. 주인님, 일단 응급처치는 했지만 돌아가서 진찰받으셔야 돼요.”


“전 안 돌아갈 겁니다.”


“고집 부리실 때가 아니에요. 언제 또 철충이 와서 공격할지도 모르고, 여기서

 

계속 생활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주인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주인님, 제발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왜 저한테 아무 말씀도 안 해주시는 건가요?

 

어째서 저를……믿어주지 않으세요?”

 

“…….”

 

주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저는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러자 주인님이 말했습니다.

 

“블랙 리리스, 당신은 오르카 호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여기 남겠다고

 

전해주시길. 그리고 아무도 여기 오면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명령을 따를 순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돼요.”


주인님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빌게요. 주인님, 솔직하게……그냥 다 털어놓아주세요. 

 

리리스는 주인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뭐가 됐든 말씀을 해주세요. 네?”

 

“…….”
 
“주인님!”


그리고 마침내, 저희들은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과, 넘실넘실 춤추는 바다. 비의 냄새가 났습니다.

 

“으으……주인님은 늘 그런 식이죠. 제가 싫으세요? 왜 매번 제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싫으면 싫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저도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그냥 솔직해지시면 안 되는 건가요?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주인님, 리리스는……리리스는 주인님을 모르겠어요.”

 

어느새 저는 울먹거리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그리고 답답해서. 알고 싶어서, 듣고 싶어서.

 

알 수 없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당신은 늘 그런 식으로 도망쳐버리니까.

 

“……알 필요가 있습니까?”


“네?”


“결국, 당신의 애정은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주인님께서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충성심도, 신뢰도, 애정도, 호감도, 그 무엇 하나 진실 되지 않잖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심이라면 절 사랑할 리가 없겠죠.”


파도가 부서져,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 울부짖습니다.

 

“제 진심이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정말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그게

 

아닙니다. 당신은 듣고 싶은 대답을 듣고 싶은 것뿐. 하지만 결국 실망하겠죠.

 

블랙 리리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차갑고 무정한 비가.

 

“주인님…….”


“제발 그 빌어먹을 주인님이란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듣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더 이상 그 누구의 주인도,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고.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 주인님의 감정 실린 목소리.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그럼 말씀드리죠.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이딴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인류를 재건해?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인간 따윈 비루하고 역겨운 존재인데.

 

저는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습니다.

 

처음 인간에 대해 배웠을 때, 저는 절망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욕망과

 

폭력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 하나 없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결국

 

제멋대로 굴다가 멸망한 것뿐인데 제가 왜 그딴 족속들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까? 저는 인간이 멸종해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선 주인님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분노와 혐오감. 실망감, 증오. 그런 감정들이 뒤섞인 무시무시한 얼굴로.

 

인간을, 세상을 저주합니다.

 

“애초에 인류 재건 따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몇 번을 계산하고

 

또 계산해도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전멸, 멸망. 끝.

 

시작부터 가능성 없는 짓입니다. 저희 모두 헛되고 헛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신 건가요?”


“누가 하고 싶어서 한 줄 아십니까? 할 수밖에 없으니까 한 겁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죠. 아무도, 그 누구도 절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실패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 비참함을.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을.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할 수밖에 없는 이 무력감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포기해주십시오.”

 

그제야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주. 주인님이 타고 태어난 그 지능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던 겁니다.

 

끝내 저희들이 패배해 모두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 모든 게 헛된 노력이라는 진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현실을 견뎌야 한다는 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나 최고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실수하면 누군가 죽습니다. 죽는 걸로 끝나는 게 아냐, 어쩌면 더 나빠질지도 몰라. 

 

내 잘못으로, 내 실수로, 내 책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 

 

그걸 생각하면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단 한 순간조차 그걸 잊지

 

못했습니다. 꿈에서도 제가, 제 실수로 여러분이 죽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고 생각하십니까? 잠들 때마다 보입니다. 잠들 때마다, 눈을 감으면

 

비명과 피가. 저는……두려워서, 너무 무서워서 늘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도망치면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게 제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해? 솔직함? 웃기지 마십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딴 말 하지 마!!”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 울부짖는 주인님,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저.

 

“무서워! 힘들어! 도망치고 싶어! 그게 내 진심이야,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할 수밖에 없어.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게.

 

내가 한 번도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게. 결국 비참하게 실패하라는 걸

 

알면서도, 모두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 하나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모두의 지지대가 되어야 돼. 내가 웃으면, 내가

 

화내면, 내가 슬퍼하면, 내가 무서워하면, 내가 뭘 할 때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라.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돼. 모두가 나를 믿게 해야 돼, 모두가……모두가 나를

 

의지할 수 있도록. 진정한 ‘나’는 여기에 없어. 나는 ‘사령관’- 오직 그뿐이니까.”

 

“그럼 왜……왜 남아계셨던 건가요? 왜 도망치지 않으셨나요?”


주인님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처음 너희를 만났을 때, 너희가 얼마나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는지 기억해?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인데, 내가 도망치겠다고

 

말해버리면? 그럴 순 없었어. 도망칠 수 없었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어.

 

내 손을 붙잡는 그 절박함을 뿌리치지 못한 채 나는 그걸 붙잡아줘야 했어.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런 인간이야. 네가 생각하는 나는 여기에 없어.

 

나는 겁쟁이야. 나는 강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야. 나는 쓰레기야.

 

미안해……미안해, 정말 미안해……약해서, 이렇게 한심한 내가 싫어……미안해…….”

 

너무나도 상냥하고.

 

너무 똑똑하고.

 

너무 성실하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올곧은 분.

 

그래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겁니다.

 

상냥하니까, 절박한 저희를 버릴 정도로 냉정하지 못했으니까.

 

그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성실하니까……약한 모습을 보이며 모두가 흔들릴 테니까.

 

올곧기에.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여줘야 했으니까.

 

그 모든 게 연기. 그 모든 게 거짓말, 그 모든 것이 가면.

 

가면 너머의 당신은 이토록 가엾고 비참한 표정으로 울고 계셨던 거군요.

 

뭐라고 말씀드려야 위로가 될까요.

 

아니, 저 따위가 주인님을 위로할 자격이 될까요?

 

사랑한다고 말한 주제에 진짜 모습은 단 한 번도 알지 못한 제가.

 

믿는다고 말한 주제에 진심을 다해주지 못한 제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나를 버려줘. 나는 죽고 싶어, 매일 그 생각만 했어.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자고.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버리자고, 목을 매달자고. 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리자고, 바다에 뛰어내리자고. 아니면 죽여 달라고 부탁하자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나는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는 이런 걸 바란 적 없어, 사령관이니

 

인류의 구원자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고. 이건 게임이 아니야, 현실이야.

 

내가 실수하면 누군가가 죽어. 그딴 건 싫어, 이제 싫어. 견딜 수가 없어.”

 

…….

 

용기를 내.

 

발을 멈추지 마. 다가가, 다가가는 거야. 한 발자국씩. 나아가자.

 

이 폭풍을 뚫고. 거침없이 불어오는 비바람을 뚫고 가자.

 

이게 주인님의 진심이라면.

 

나도, 내 진심을 보여드려야 돼.

 

저는 주인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양손을 잡았습니다.

 

“저희가 주인님을 따르는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너희가 바이오로이드니까.”


“아뇨,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에요. 인간이라, 사령관이라, 주인이라, 그딴 건

 

이유가 되지 못해요. 똑똑해서, 강해서, 그런 이유로 따르는 사람은 없어요.

 

저희가 당신을 따르는 이유. 그건, 당신이 당신이니까. 주인님이 주인님이기에.

 

이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모두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내주니까.

 

이렇게 싫어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을 위해 싸우니까.

 

이토록, 이토록 약하면서도 모두를 위해서 강해지려고 노력하니까.

 

주인님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그 어떤 겁쟁이도 이렇게 용감하지 못해요.

 

약하다고 하셨지만 주인님은 그 긴 시간동안 싸우셨어요. 도망치고 싶어도

 

끝까지 남으셨죠. 한심하지 않아, 세상 모두가 당신을 욕해도 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주인님은 세계 최고로 똑똑하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분이라고.

 

누가 그걸 부정하면 리리스가 혼내줄게요. 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저희를 위해 용기내신 거군요.

 

모두를 이끌기 위해 자기 자신마저 죽여 억누르셨던 거로군요.

 

이제야, 이제야 당신을 만나게 됐어요.

 

지금 이 순간이 와서야 진짜 당신의 얼굴을 보게 됐어요.

 

“모두 실망할 거야.”

 

“절대 그렇지 않아요.”


“믿어주지 않을 거야, 난 실패했어.”


“아뇨. 오히려 모두 이전보다 더 믿어줄 거예요. 이제야 주인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게 됐으니까. 이토록 멋지고 강한 분이라는 걸…….”

 

“미안해. 완벽하지 못해서, 더 잘하지 못해서. 약해서 미안해……미안…….”

 

“이제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주인님은 저희한테 그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으셨어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제야 진심을 담아 말씀드릴게요. 좋아해요, 주인님.

 

리리스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주인님이라 너무나도 행복해요.

 

고마워요. 저희를 위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싸워주셨군요.”

 

떨리는 손이 제게 향했습니다.

 

너를 안아도 될까? 그렇게 묻는 듯 연약하고 다정한 몸짓으로.

 

저는 대답했습니다. 제 몸으로, 주인님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서.

 

“믿어주세요. 저희를, 주인님 자신을. 사랑해주세요, 우리들을. 스스로를.

 

주인님이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안아드릴게요. 언제든지, 몇 번이든지.”

 

“미안해.”


“저도 죄송해요. 지금껏 주인님의 진심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절, 용서해주세요.”

 

이토록 세찬 비도 언젠간 그치겠죠.

 

그래요, 저희 모두 죽을지도 몰라요. 끝끝내 패배하고 실패하는 게 운명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무섭지 않아요.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저는 당신의 곁에-

 

저희들은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을 테니까요.

 

 

 

 

 

 

 

46.

 

짜악!

 

저는 처음으로 주인님이 얻어맞는 걸 보았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콘스탄챠가 거침없이 주인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왜 때렸는지 아시죠?”
 
“……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제 손톱 보이시나요? 하도 깨무는 바람에

 

손톱이 닳아 없어졌어요. 리제 양은 주인님이 실종됐다고 듣자마자 나가서

 

찾아오겠다고 난리치다 기절했고, 다른 아이들도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했어요.

 

멋대로 어디 갔다 오시니까 속이 시원하신가요? 저희를 이렇게 걱정시켜야

 

그 속이 좀 풀리시나요? 제가,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이젠 눈물도 안 나와요.

 

매 순간마다 걱정했어요. 일하면서도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았다고요.

 

이제 다신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세요. 그러면 저 진짜 죽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와, 콘스탄챠가 이렇게 화를 내다니……저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했습니다.

 

“다행이에요. 정말로, 정말……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울먹거리며 주인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용서 안 해요. 용서 못해요, 저 진짜 화났다고요. 아시겠어요?”


“알고 있습니다. 죄송……미안해, 콘스탄챠.”


“쿠울…….”


어, 어라? 그녀가 주인님의 품에서 잠들어버렸습니다.

 

“언니께서 그간 일을 도맡아 하셨거든요. 며칠 내내 잠을 못 주무셨어요.

 

다른 지휘관들도 하도 일하는 바람에 지금 다 기절해버렸습니다.”


“그 정도로 일이 많진 않았을 텐데요.”
 
“아뇨, 그 정도로 일이 많았답니다. 일에 중독돼서 자기가 얼마나 일하는지도

 

모르시나요? 하여튼 언니를 울렸으니 이번 일은 두고두고 보복하겠습니다.”

 

바닐라가 잠든 그녀를 업고선 침실을 떠났습니다.

 

“저 때문에 민폐를 끼쳐버렸군요.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됐어요, 한 일주일 휴가 갔다 왔다고 치죠. 어차피 휴일도 없이 일하셨잖아요?”


“……그래도 안 됩니다. 저는 사령관이니까요.”

 

결국 돌아오셨군요. 저는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도 변하지 않으시겠죠.

 

“감사합니다.”


“뭐가요?”
 
“그 모든 것에 전부.”


귀염성 없으시긴. 저는 주인님을 두고 침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주인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젠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이게, 이것이 저의 임무니까요.”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뜻이 숨겨져 있을까요.

 

하여간 제 주인님은…… .

 

너무나도 진지하신 분이십니다.

 

 

 

 

 

 

 

 

 

왠지 완결 내는 분위기지만 사실 완결 내는 게 맞을지도 모름

결말 따윈 생각 안 하고 쓰는 일상물이기 때문에 어느 편이 완결일지 나도 모름

그리고 결국 사령관이 그 동안 마리한테 삽질하고 무인도로 도망치고 조직 어쩌고 한 것 모두

진짜 이유는 다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이거임

그러면서도 결국 돌아왔으니 영영 탈주는 못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