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 안그래도 일찍 뜨는 해가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게으름을 부릴 여유 따위는 없다. 해가 길다는 것은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자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어머니와 누나는 별이 지기 전에 깨어났을 것이다. 그녀들은 냇가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부터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개울가에 나왔을 때 머리에 거미줄을 두르지 않은 여자는 게으른 여자로 불려왔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꼼수를 부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실 어제 저녁, 시간 개념없는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을 발견하고 좋아서 봄날 토끼마냥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누나를 봤으니 말이다. (분명 그녀는 그것을 몰래 걷어다가 침대 난간에 붙여놓았을 것이다)

 

물론 여자들만 부지런을 떠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나 역시 일어나자마자 할 일이 잔뜩 쌓여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재산 목록 1호인 노새의 여물부터 챙기시고, 나는 세 자루나 되는 낫을 빈틈없이 갈아놓아야 한다. 오늘은 춘경지의 곡식을 거두는 날이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대충대충할 수 없는 일이다.

낫을 모두 갈아두고 쇠스랑과 갈퀴까지 녹 하나도 없는지를 확인할 때쯤이면 이미 해가 모두 뜬 뒤이다.

 

해가 모두 떴다는 건 이미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푸석푸석한 빵 한 개를 입에 물고 아버지가 모는 수레에 올라타는 것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해야할 참이다. 물론 잔소리는 피할 길이 없지만...

 

춘경지에 도착하니 다행이 아주 늦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1등으로 오지 못한 것이 내탓이라는 무언의 시선을 보내왔다. (우리집사람들은 왜 그렇게 1등이 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정성껏 갈아둔 낫 덕분에 우리집에 맡은 밭의 수확이 제일 빨랐다. 날붙이를 다루는 기술만큼은 우리 집이 마을 제일이고 나는 그 집의 장남이다.

덕분에 건성으로 때운 아침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여자들이 새벽 개울가에서 거미줄로 경쟁을 한다면 남자들은 밭에서 승부를 본다. 먼저 맡은 몫을 모두 끝낸 집은 남들이 일하는 걸 구경하면서 점심을 먹기 때문이다.

 

오전에 춘경지에서 일을 했다고 해서 하루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후에는 추경지의 밭을 갈아둬야 한다.

그게 끝나면 내가 당번인 목초지에서 영주님의 말을 끌어야 한다.

우리 영주님은 모두 네필이나 되는 말과 1마리의 망아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웃 장원에서 말을 사와야 한다고 한다. 기사라고는 영주님뿐인데 혼자서 그 말들을 다 타지도 못할 것이라고 푸념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언젠가 그것을 두고 물레방아집 둘째와 티격태격했는데 그 녀석 말로는 말이 늘 좋지 않기 때문에 예비말을 넉넉히 준비해야 전쟁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물론 우리 영주님의 말은 언제나 건강하다. 장원의 모두가 한결같이 애지중지하는데 탈이 날 까닭이 없다. 오히려 기운이 뻗쳐 해가 지기전에 마굿간까지 끌고 가야 하는 게 곤욕일 정도로 말이다.

 

간신히 성까지 말들을 몰고 간 뒤에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해가 얼마남지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져 내 키의 한 배 반쯤 될 무렵에 휴경지 둔덕에서 초장이집 주근깨를 만났다. 등에 진 광주리에 제 키보다 높게 꽃들을 모아짊어지고 있는데 하루 종일 염색할 꽃을 딴 모양이었다. 제딴에는 좋은 꽃을 많이 땄는지 신난 발걸음이다. 내가 몰래 뒤를 밟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놀래키니 발을 헛디뎌 광주리에 꽃대공이 모두 쏟아졌다. 주근깨는 있는 욕 없는 욕을 쏟아내며 나를 저주했다. 뭐 누가 넘어지라고 했는가?

그래도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떨어진 꽃을 모두 주워주느라 집에는 한참 늦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온 가족에 식탁에 둘러앉아 초까지 켜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누나는 입이 엄청 나와있었는데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식구중에 누구라도 식탁에 앉지 않으면 식사를 시작하는 분이 아니시다. 온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 것이 집안의 전통이기 때문이라는데, 내세울 게 없는 집구석에 그런 것도 없으니 섭섭하다 싶어 나도 수긍하는 바이다.

기도를 올린 후 저녁 식사를 하며 아버지께서는 은근히 미장이집 둘째에 대해서 누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올가을 추경지 수확까지 끝내면 결혼세에 필요한 돈이 모일 것이라는 말을 하시는데 누나의 볼이 금새 빨개지며 흔들렸다. 분명 초 때문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우리 가족은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역시 초가 아까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