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이다.

 

앞으로 나의 활동한계는 8시간이다.

 

 

 

 

 

 

 

반 년도 전의 일이다.

 

2월 17일, 우리는 사회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12년간의 길고도 혹독한 준비기간을 마치고, 우리들의 피와 땀, 노력과 눈물들을 자축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중이었다. 영겁과도 같이 느껴졌던 교장선생님의 개회사가 끝나갈 무렵, 교정에, 정확히는 졸업식을 진행 중이던 강당에 강렬한 충격과 진동이 덮쳐 왔다.

 

 

 

비명, 아우성, 수근거림, 욕지거리, 울음, 흐느끼는 소리, 고성 그리고 더 큰 고성,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대답없는 물음들, 다급하고 불안한 발걸음 소리들, 전등이 깨질 때 나는 소리, 빼곡히 쌓여 있던 철제의자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내는 금속음들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여 그 누구도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을 혼돈 그 자체를 훌륭히 조성하고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얽혀 잔뜩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꼴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손과 등을 짓밟고 걷어차며 스스로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마치 지진해일과 같은 인파에 떠밀려 넘어진 나는, 누군가의 발이 내 안면에 그대로 직격하였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의 일상 - 시간 - 은 그렇게 망가졌다.

 

 

 

내가 정신이 들은 곳은 어떤 군부대 안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군복을 입은 한 아저씨가 나에게 소총 한 자루와 수류탄 두개를 건네 주며, 무어라 무어라 떠들어 댔지만, 그 중 단 한 마디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은 그저 '뭐지? 뭐였던 거지..? 지금 이 상황은 뭐인거지..? 나는 지금 어디인거지..? 나는 뭐지..?' 따위의 생각들로 포화상태였었기 때문에, 다른 그 어떠한 정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그 아저씨는 나를 대상으로 열심히 침을 튀겨가며 설명 중이었겠지만, 실제로는 그 때의 나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벽에게 말을 건네는 것 만큼 쓸모없는 행위라는 것을 그 아저씨는 몰랐던 것 같다. 그 때의 나는 꼴에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졸업식이라고 학교 근처 양복대여점에서 빌려 입은 양복이 갑갑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그 상황도 몹시, 굉장히 몹시 갑갑하고 불편했다.

 

 

 

내가 군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떤 대기업 총수의 사병조직이었다. 아마도 사병조직의 지휘관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우리에게 총수가 안전하게 도피를 마칠 때까지, 이 전선을 유지하고 지키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으레 이어지는 사탕발림. ───흔해빠진 이야기다. 이 사태가 그럭저럭 갈무리 되고, 세상이 어느정도 안정화되면, 그 그룹 계열사에 우리들을 특별채용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그 그룹에서 장학재단을 맡고 있는 몇몇 명문대학에 특례입학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하였다. 우리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라며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탕발림을 거절할 만큼 우리들은 재력도 능력도 빼어나지 못했다.

 

 

 

 

 

나의 첫 번째 도주였다. 그것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나에게 생리적인 혐오감과 역겨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누드김밥처럼 안팎이 뒤집힌 채로, 시뻘건 근육과 장기들을 자랑하며 나에게 달려오는 그 고기덩어리를 12년 동안 고대 컴퓨터공학과만 노린 채로 펜대만 굴려오던 내가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봐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나에게 지급된 수류탄 두 개도 다 써버린지 오래다. 나에게 남은 것은 도망뿐이다. 오로지 도망뿐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쏘지도 못하는 소총.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해, 나는 그 쇳덩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내달렸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멀리 내달렸다.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어느 샌가 나는 어두컴컴한 숲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대한 나무에 기대 서 한참을 헉헉댔다. 미친 듯 쿵쾅거리던 심장이 잠잠해 진 후, 나는 그 조용한... 음산한.. 그리고 소름끼치는  숲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어쨌건 돌아가야 했다. 짐작컨데,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댔다.

 

 

 

"얘.. 너 혹시 먹을 것 좀 있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과 정신에 피로가 쌓여있을 대로 쌓여있던 터라 그대로 졸도하거나 심정지가 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나는 딱딱한 자세로 뒤를 돌아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한 소녀였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멍하니 자기를 쳐다보기만 하는 나에게 소녀가 재차 물었다.

 

 

 

"저기, 먹을 것 있냐니까?"

 

 

 

나는 내 재킷 안 주머니에서 아저씨에게 받았던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소녀에게 건냈다. 그저 건내기만 했다면 좋았을텐데.. 정말 나는 천치같이..

 

 

 

"여기 있다..요."

 

 

 

라는 전혀 존대 같지 않은 존댓말을 에너지바를 건낼 때 덧붙인 것이다.

 

그 소녀는 에너지바의 포장을 뜯고 에너지바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조금이라도 씹거나, 굴리거나, 녹이지 않고 곧바로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에너지바 하나를 해치우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넌 내 은인이니. 특별히 소원을 딱 세 개만 들어줄게."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이었을까? 전혀 이야기의. 대화에 맥락이 없었다. 뜬금 없이 나에게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는 나를 다그쳤다.

 

 

 

"우물쭈물하지말고!! 어서! 소원을 딱 세 개만 들어준다니까?  딱 30초 줄테니까!! 그 안에 말하지 않으면 그냥 간다?"

 

 

 

당혹스러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소원이라니? 난데없이? 어떤 수로? 무슨 수로? 어째서? 어떻게?

 

 

 

"하나.."

 

"둘..."

 

 

 

나는 금세 납득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이성을 실조해 버린 것인지, 진지하게 그 소녀에게 어떤 소원을 빌으면 좋을 지 고민하게 되었다.

 

 

 

"스물 셋..!"

 

 

 

뭐.. 스물 셋..? 둘 다음에 스물 셋이라고?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잠깐..!! 잠깐..!! 생각할 시간을.."

 

 

 

"스물 넷!!"

 

 

 

"아니!!! 뭐야!! 삼십초는 준다면서.. 요!!"

 

 

 

"스물 여섯!"

 

 

 

어떤 바람에서였을까?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원이었다.

 

 

 

"스물 아홉!"

 

 

 

"영웅이 되고 싶어.. 요!!"

 

 

 

그리고 뒤늦게 떠올린, 정말 정말 이루고 싶은 소원

 

 

 

"서.."

 

 

 

"죽고 싶지 않아요!!!"

 

 

 

"..른!"

 

 

 

소녀가 말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소년, 나머지 한 가지는 나중에 만날 때까지 곰곰히 생각해 보도록 해."

 

 

 

 

 

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는지. 전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 일방적인 학살극 속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달리 말하면, 내가 그 곳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시뻘건 혐오감 덩어리는 이 캠프 안까지 쳐들어 오지 않았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살아돌아온 나를 본 반 친구들은 감탄했고, 안도했고, 슬퍼했으며, 궁금해 했다. 어떻게 나 혼자서 살아돌아올수 있었는지 말이다. ──어차피 절대 들킬 일 없는 거짓말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높다랗게 쌓아 올려진 허구 위의 영웅이 되어 갔다.

 

 

 

두 번째 도주도, 첫 번째 도주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 - 나는 소총의 세이프티 록을 푸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 - 만 제외하면 거의 엇비슷했다. 내 몫으로 지급된, 수류탄을 두개를 대충 던져 버리고, 내 몫으로 할당된 30발 들이 탄창 세 개를 몽땅 비우고 나서는 달음박질 하는 것이다. 개중에 몇몇은 나처럼 다리가 여덟개 달려 있다거나, 머리만 열 세개가 달려 있는 불그죽죽한 혐오감 덩어리로부터 멀어지려 시도하였지만, 그 괴물들로부터 무사히 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나는 다시 그 검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소녀를 다시 만났다.

 

 

 

소녀가 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첫 만남때는 너무 당황했던지라 전혀 신경쓰지 못했지만,  ──예뻤다. 굉장히.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괜히 두근두근 거렸다. 소녀는 얼굴을 계속해서 들이밀었고, 나는 계속해서 뒷걸음치다 나무에 턱하고 부딪혔다. 나는 침을 삼켰다.

 

 

 

"너.. 눈동자가 까맣네?"

 

 

 

처음에도 그러더니, 소녀는 또 한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툭 뱉어 놓았다. 눈동자라니. 나는 순간 그 의도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녀는 에메랄드 같이 밝고 깨끗한 녹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너 눈동자가 까만 사람은 처음 보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아빠도, 동생도 나처럼 눈동자가 초록색이거든!"

 

 

 

나는 설마 싶어서 소녀에게 물었다.

 

 

 

"너.. 아빠나 동생 말고는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거야?"

 

 

 

소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아! 하지만... 눈을 볼 수는 없었어."

 

 

 

 

 

나는 전투에서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소녀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캠프 내에서는 점점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세 번째 전투에서는 스무 마리가 넘는 들개처럼 생긴 괴물들을 단신으로 다 격퇴하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었고, 네 번째 전투에서는 양서류와 사람을 반쯤 섞어 놓은 듯한 괴물들 쉰 마리를 몰살시키고 생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섯 번째 전투에서도, 여섯 번째 전투에서도 시시콜콜한 것만 다를 뿐이지, 전체적인 맥락은 "오늘 역시도 현세고교의 사자가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줬다." 식으로 동일했다. 나는 이런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럽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나의 이런 거짓말은 절대로. 절대로. 들통 날일 없을 것이고,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마치 고딕풍 호러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저 괴물들이 이 캠프까지 쳐 들어와 유린하지 않는 것은 사실 아니던가?

 

 

 

나의 일곱번째 도주이자, 일곱번째 방문..? 일곱번째 조우다. 일곱번째 만남이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소녀의 이름은 아인,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나와 같은 졸업생이었다. 출석일수가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유급도 하지 않고, 나와 같은 년도의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의문이었지만,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아인의 집은 이 근처라고 하였고, 어째서 매일같이 이 어두컴컴한 숲 속에 홀로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나는 해야 될 일이 있으니까.."

 

 

 

라는 건성의 대답 말고는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아인에게 물었다. 아인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야!!"

 

 

 

하.. 그런가.. 이것 역시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그 놈들로부터 도망치고 나서 잠깐 있을 곳이, 잠깐 쉬어갈 곳이 되어 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구원이고, 도움이었다. 전투에 나가자마자 바로 돌아오면 다들 의심할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하루 일과처럼 전투에 나가고, 대강 수류탄과 총알들을 흩뿌린 후에, 아인을 만나러 숲 속으로 와서 두어시간 정도 잡담을 나누다가 아인과 헤어지고 캠프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인의 집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는지 궁금했다. 아인은 모르는 것이 정말 많았다.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몰랐다.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나에게 매일같이 와서 이야기 할 것을 부탁했다. 명령에 가까운 부탁이었지만 말이다.

 

 

 

하루는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인은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하루는 사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인은 그렇게 큰 모래사장이 어디 있냐며 믿지 못했다.

 

하루는 북극과 남극에 대해서...

 

하루는 비행기와 배에 대해서...

 

하루는... 그리고 또 하루는...

 

 

 

 

 

서른 두번째 도주를 하려는 중이었다.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예은이었다. 울며불며 잔뜩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제발 데려가 달라며 발악하였다. 애걸복걸하였다. 나에게 키가 6m 는 넘어 보이는 근육질의 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놔달라고 수 차례 부탁하였지만, 이미 제정신을 잃은 예은이는 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급해졌다. 죽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방해되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예은이의 정수리에 7.62mm 탄환 한 발을 꽂아 넣었다. 그제서야 예은이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고, 나는 가까스로 그 6m 거인에게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씨발──년"

 

 

 

예은이가 그런 욕을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리고 그 예은이의 마지막 한 마디가 머릿속에 들어가 지금도 나오지 않는다. 계속 맴돈다. 밤에도, 낮에도, 식사 때도, 양치 때도, 멤돌며. 멤돌며. 머릿속을 울린다.

 

 

 

 

 

마흔번째 도주를 하려는 중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나는 문득 알아챘다. 도주를 성공한 것이 나뿐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내 뒤에 세호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들통난다. 들통나고 말 것이다. 거짓말쟁이란 것이 밝혀지고 말 것이다. 큰일이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내 명성이. 내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거야. 어떡한담. 어떡해야 되는 걸까. 몹시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다. 세호가 나에게 가서 친구들을 구해 달라고 하는 것 같이 들렸다. "하는 것 같이" 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머릿속이 잔뜩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합선을 일으키고 있었다. 배신자, 거짓말쟁이, 위선자, 탈주자, 도망자, 병신, 얼뜨기, 거짓말쟁이, 배신자,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그래, 세호만 없으면 나는 아직도 영웅일 수 있어.

 

세호만 없으면 나는 살인마가 아니야.

 

 

 

"현세고교의 사자" 는 건재했다. 내 머릿속의 입주민이 하나 더 늘은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고해하고 싶었다. 털어놓고 싶었다. 정말 죽을것만 같았다. 부담감이 내 목을 옥죄었고, 죄책감이 내 심장을 쥐어짰다. 47번째 전투 - 도주 - 때 검은 숲 속에서 나는 아인에게 털어놓았다. 아이같이 울면서... 따뜻했다. 포근했다. 그리고 더욱 서러워졌다. 나를 감싸안은 아인이 말했다.

 

 

 

"아빠는 내가 아플 때마다, 슬플 때마다 이렇게 꼬옥 껴안아 줬어. 너는 내 은인이니까. 그리고 너가 이렇게 아파하니까 꼬옥 안아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그리고 나는 아인의 품 속에서 잠들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져 잠에서 깨어났다. 엄청난 수의 괴물무리. 그리고 그 괴물들의 목을 부러뜨리고, 베고, 도려내고, 찢는 아인이 있었다. 거대한 머리통이 6m 위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히자 땅이 뒤흔들리며, 숲 속에 묵직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아인은 사뿐히 착지하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년, 일어났어?"

 

 

 

그리고 아인은 다시 괴물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인은 걷어 차이고, 집어 던져지고, 밟히고, 두들겨 맞았다, 잘근잘근 씹히기도 했고, 뜨거운 불길을 정통으로 맞기도 하였다. 아인은 내 바로 옆으로 촤아악 하고 미끄러져 왔다. 나는 그 광경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아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집에 갔다 오질 않으니.. 무리였나 보네. 소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이 검은 숲 끝에 우리 집이 있으니, 그 곳으로 도망가도록 해."

 

 

 

나는 거절했다.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나 혼자서 어떻게.. 내가 널 버려두고 어떻게.. 할 수 없어. 난 못 해.. 못 해.."

 

 

 

아인이 말했다.

 

 

 

"소년, 억지 부리지 말고.."

 

 

 

순간, 거대한 중식도가 아인의 왼쪽 다리에 내리 꽂혔다. 소름끼칠 정도로 깔끔히 잘려진 단면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한심했다. 무서웠다. 싫었다. 끔찍했다. 최악이었다. 버리고 가다니 최악이었다. 최악이어도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세호가 말했다.

 

 

 

"구했어야지.."

 

 

 

예은이가 말했다.

 

 

 

"씨발──년아"

 

 

 

나는 그 목소리들을 지워내기 위하여, 한껏 비명 지르며, 있는 힘껏 비명 지르며 그 곳을 벗어났다.

 

 

 

 

 

검은 숲의 끝에는 이 시대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굉장히 이질적인 대저택 하나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지도, 문고리를 두들기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럽게 차려 입은 노신사 하나가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아인의 아버지였다.

 

 

 

모든 것이 나의 탓이었다. 아인은 주기적으로 "관조자의 혈청" 이란 것을 맞아 주어야만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하였다. 아인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 복잡했고, 어려웠기 때문에 태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지구 전역에 나타나고 있는 거대한 공동 - 싱크홀 - 을 비탄의 구덩이라고 부르며, 그 비탄의 구덩이에서 들끓는 괴물들을 "슬픔" 이라고 부른다는 것, 그리고 그 "슬픔" 을 사냥하는 관조자의 권속이자 사냥개인 "슬픔을 먹어치우는 자" 라는 것이 존재한 다는 것과 아인이 "인조 슬픔을 먹어치우는 자"라는 것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관조자의 혈청이란 것을 아인에게 맞히면, 아인은 다시 싸울 수 있는 것 확실합니까?"

 

 

 

아인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관조자의 혈청을 맞아야지만 슬픔에 닿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는 슬픔을 먹어치우는 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슬픔에 닿을 수 있게 되니까 말이야."

 

 

 

아인의 아버지가 이어 말했다.

 

"다만... 슬픔을 먹어치우는 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그 혈청을 맞게 된다면, 정확히 16시간 후에 슬픔 그 자체가 되어버릴 거야. 우주적 존재가 아닌 자에게는 과분한 지식이니 말이야"

 

 

 

나는 말했다.

 

"아인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 혈청 빌리겠습니다."

 

 

 

아인의 아버지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뭐? 아인을 구해? 거기서 그렇게 무력화 되었단 것 자체가 아인은 그냥 실패작이란 말이다. 오히려 낭패지. 인조긴 하지만 엄연히 슬픔을 먹어치우는 자다. 슬픔이 관조자의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본국에 연락해서 구도자의 악독한 핵미사일로 이 일대를 다 날려버리는 수 밖에..."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부탁했다.

 

"부디 16시간만 기달려 주시겠습니까? 그러니 그 혈청 빌려주십시오."

 

 

 

아인의 아버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

 

"16시간..? 자네.. 뭔가 이 혈청에 대하여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이건 무슨 슈퍼솔져 혈청 같은 것이 아니야.. 뭔가 괴력이 생긴다거나, 초재생능력이 생긴다거나 하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야! 너 혹시 아인이 싸우는 모습을 봐서 그런 이상한 착각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는데, 아인의 신체능력은 혈청 때문이 아닌, 원래 아인이 가지고 있던 거라고.."

 

 

 

나는 단호히 말했다. 여기서도 도망가면 정말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더욱 단호히 말했다.

 

"아인은 제 은인입니다. 할 수 있느냐 따위는 제게 중요치 않아요. 전 아인을 구할 겁니다. 혈청을 빌려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 아인을 구할 겁니다."

 

 

 

아인의 아버지는 크게 한 숨을 내쉬며 나에게 혈청이 담긴 가방을 건넸다.

 

"도대체 뭘 어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 맘대로 하게.. 그 혈청들은 원래 아인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걸로 뭘 어쩌건 자네 자유지.."

 

 

 

 

 

 

 

잃을 까봐 두려운 것이다. 상실이 두려운 것이다.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도망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도망치면 살아 남을지도 모른다는 그 헛된 희망 때문에, 기대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때문에, 없앤다. 여지를. 기대를. 가능성을. 미래를

 

이 주사바늘을 꽂아 넣음으로써 겁쟁이였던 내 자신을 지운다.

 

그리고 거듭난다. 부끄럽지 않은 내자신으로────

 

 

 

 

 

 

 

 

 

 

 

───8시간이다.

 

앞으로 나의 활동한계는 8시간이다.

 

 

 

아직.. 소원 하나가 남았잖아.

 

나에게는 아인과 같은 괴력은 없었다. 하지만 극복한다. 이 ,50 BMG 로 극복해낸다.

 

 

 

내 완력으로는 녀석들의 가죽에 흠집 입히는 것은 무리다. 딱 한 곳 - 눈 - 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만났다. 아인의 왼쪽 다리를 도려 낸 망할 자식과 조우했다. 피한다. 

 

그냥 로그라이크 게임이라고 생각하자. 나 예전부터 게임은 자신 있었으니까..

 

 

 

위압적인 공기를 가르는 소리...

 

한 번은 좌로, 한 번은 우로, 또 한 번은 사선으로, 그리고 종으로, 그 커다란 중식도를 종으로 휘두르며 놈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을 때, 놈의 왼쪽 다리에 .50 BMG 세 발을 꽂아 넣는다. 균형이 무너진 놈은 내 정면으로 곧바로 고꾸라진다. 녀석의 얼굴이 텅 비었다. 나는 녀석의 얼굴에 달려들어 내 주먹을 꽂아 넣는다. 최대한 깊숙히 꽂아넣고 휘젓는다. 뽑아낸다. 녀석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후퇴. 후퇴. 후퇴. 후퇴만을 반복했다. 그러고선 영웅 취급을 받았지. 영웅이 아니어도 좋아. 나에게는 아직 소원 하나가 남았다. 그러니까 나는 전진. 전진. 전진. 전진만을 반복할 뿐이다.

 

 

 

7시간... .50 BMG 132 발이 남았다.

 

6시간... .50 BMG 98 발이 남았다.

 

5시간... .50 BMG 74 발이 남았다.

 

4시간... .50 BMG 59 발이 남았다.

 

3시간... .50 BMG 30 발이 남았다.

 

2시간... .50 BMG 20 발이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시간 ───그리고 마지막 열 발 들이 박스 탄창 하나...

 

 

 

내 눈 앞에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이상한 붉은 색 점액질에 깜싸인 채로 매달려 있는 아인.

 

내 눈 앞에는,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한, 그래도 굳이 묘사하자면,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과 닮아 있는 것 아닌가 싶은 부정형의 괴물...

 

 

 

발톱이 내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다. 촉수가 내 다리를 노리고 들어온다. 발굽이 내 가슴을 노리고 들어온다. 계속해서 악의가 들어온다. 살의가 들어온다.

 

 

 

한 발── 녀석의 균형이 무너진다. 하지만 놈의 몸에는 무른 곳이 없었다. 낭패다. 나는 놈의 꼬리에 가슴팍을 두드려 맞고 늑골이 모조리 부러진다. 한움큼 피를 토해낸다. 착각이었던 것 같다. "모조리" 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대부분" 은 부러진 것 같으니 거기서 거기려나..

 

 

 

또다시 이어지는 놈의 일방적인 공세, 아까전의 타격 때문에 전보다 피하기 훨씬 버거워졌다. 다시 한 번 놈이 나에게 저돌맹진한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녀석이 바닥에 엎어진다. 이번에도 글러먹은 거라면.. 그 이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 여유도 없다. 두 다리가 .50 BMG 에 날아가 바닥에 드러누워 버둥거리는 녀석의 양 어깨를 무릎으로 짓누른다.

 

 

 

나에게 남은 .50 BMG는 일곱 발... 그리고 놈의 미간에 꽂아 넣을 .50 BMG도 일곱 발.. 치즈오븐 스파게티처럼 변한 놈의 머리를 양 손으로 찢고, 헤치고, 분해하고, 내 두 손으로도 부족했기에 나는 그것을 입으로 물고, 뜯고, 삼켰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헤치고, 삼키고, 분해하고, 뜯고, 먹고, 찢고, 먹었다.

 

───나는 슬픔을 먹어 치웠다.

 

 

 

 

 

───1분 13초이다.

 

앞으로 나의 활동한계는 1분 13초이다.

 

나는 아인에게 혈청을 놓고, 아인이 정신이 들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기다렸다. 아인이 눈을 떴다. 에메랄드와 같이 정말 아름다운 녹안이었다. 아인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소년, 좋은아침.. 그래서 소원은..?"

 

 

 

나도 새하얗게 웃으며 아인에게 소원을 말한다.

 

"내 남은 시간동안 나와 사귀어 줄 수 있을까..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