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보이지 않고 먹구름만 가득 낀 그런 아침이었다. 호현은 새벽부터 쓸데없는 꿈으로 잠을 설쳤다. 그래서인지 현재 자신이 있는곳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일어나 앉고 나서야 여기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속도 현실도 몽롱함 그 자체였기 때문에 어디있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비는 시원하게 내리지 않고 무언가 막힌 것마냥 기분 나쁘게 떨어지고 있었다. 호현은 그 모습이 왠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니, 사실 이런 비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아침을, 바로 이 창문으로 지켜봤던 그런 기억이 난다. 언제였더라......호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호현이 다시 일어난 것은 3시간 후였다. 엄마는 이미 출근했고 밥상위에는 여느때처럼 밥과 미역국이 차려져 있었다. 흰쌀밥을 보니 매일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밥 빌어먹기가 힘들다. 너도 어서 좋은 직장을 찾아 밥 안 굶고 살아야지......”

밥 빌어먹기, 아마 그것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옛날에는 흰쌀밥이 그렇게 귀하다던데, 그 귀한 쌀밥이 내 눈앞에 밥공기 가득 담겨있다. 호현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귀한 밥을 감히 자신 따위가 먹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이가 먹도록 자기 밥벌이를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밥 한공기를 먹는 것은 자격 미달이다. 호현은 밥 앞에서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그리고는 다시 숟가락을 잡았다. 미역국과 반찬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쌀밥을 크게 한입 퍼서 입으로 가져가 씹어 삼키는 것이다. 맨밥은 반찬이 없어도 짠맛이 났다. 호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밥주걱을 가져와 밭솥의 밥을 자신의 그릇안으로 퍼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처럼 똑같이 꾸역꾸역 밥알을 위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렇게 밥솥의 밥이 바닥이 날때까지 호현은 밥을 씹어 삼켰다.

멍청하고 무식하게 밥을 쳐먹은 결과는 뻔했다. 호현은 소화불량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어쩔수 없이 방구석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으면 소화제라도 있을 것 같았다. 유효기간이 걱정되지만 지금 당장은 몇 년전의 소화제라도 상관없다. 평소에는 잘 찾아보지 않던 서랍 깊은 구석까지 손을 넣어보고 나서야 그는 소화제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중 깊은 구석 안쪽에 작은 상자가 보였다. 호현은 그것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작고 하얀 상자였다. 그리고 불현 듯, 상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무려 15년전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주는 선물상자였다. 상자안에는 담배 한 개비와 편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호현은 자신이 체한것도 잊은채 편지를 뜯어읽기 시작했다. 15년전의 박호현이 15년후 미래의 박호현에게 주는 편지였다. 삐뚤빼뚤하게 쓰여진 편지에는 위로의 말들이 있었다.

미래의 나야, 너도 언젠가 힘든 날이 오겠지.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힘들다면 내가 넣어둔 선물을 사용해. 삼촌이 그러던데 힘들 때 가장 위로가 되어주는 도구래.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 오래오래 사는거야  힘내!.’

호현은 피식 웃었다. 15년전의 자신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리고 그때가 그리워졌다. 부모의 보호아래 걱정없이 살던 어린시절, 그리고 삼촌의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삼촌은 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삼촌이 자살하기 몇 달전에 호현의 집에 왔었다. 호현은 오늘 아침의 풍경이 15년전의 아침과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삼촌이 오던 15년전의 아침도 비가 무언가에 막힌 것 마냥 기분 나쁘게 떨어지고 있었고 햇빛따위 보이지 않을정도로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호현은 삼촌이 오는 아침 음식을 바삐 준비하던 엄마 주위를 뱅뱅 돌면서 손님이 오는 것을 기뻐했다. 이윽고 삼촌이 도착하고, 선물로 과자선물세트를 가져온 것을 두손으로 받으면서 활짝 웃어주던 삼촌을 향해 감사인사를 했다. 어린 호현이 과자를 우물거리며 먹을 동안 삼촌과 아빠는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호현은 엿듣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엄마의 상차리기를 도왔다. 한참후에 삼촌은 두 눈이 벌게진채로 밥상에 앉았고 아빠는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삼촌은 흰쌀밥을 대충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호현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 밥만 삼키는 삼촌을 쳐다보던게 생각났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빗소리와 침묵,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남았다. 호현은 침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삼촌이 지금 많이 힘들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다. 밥상이 치워지고 삼촌은 베란다로 나갔다. 호현은 삼촌뒤를 몰래 따라 베란다로 나왔다. 비가 추적하게 내리는 배경뒤로 삼촌의 쓸쓸한 모습이 보였다. 쓸쓸하고 외로운 머리카락, 쓸쓸하고 외로운 어깨, 쓸쓸하고 외롭고 행복해보이지 않는 눈동자, 그리고 쓸쓸하게 피워올라 먹구름과 같은 색을 지니는 연기구름......

삼촌, 그게 뭐야?”

삼촌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말을 조금 더듬다 다시 차분하게 말을 했다.

, 호현아. 살면서 힘든 고난을 겪을때가 있는데, 이건 그 고난을 힘내서 이겨내라는 그런 위로의 도구야. 하지만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는데, 삼촌이 지금 너무 힘들어서 위로라도 받으려고 그래. 호현이는 이런 도구 없이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 해.”

 

삼촌은 연기를 얼마 뿜어내지 못하고 베란다를 나왔다. 어린 조카가 담배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미처 담배곽을 챙기고 나오지는 못했다. 그래서 호현은 삼촌이 떠나간 베란다에서 담배곽을 주울수 있었다. 비록 한 개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서 호현은 담배한개비를 바지 주머니속에 고이 넣어두고 방안으로 몰래 들어와 작고 하얀 상자안으로 옮겨 담은것이었다. 삼촌은 호현에게 도구를 의지하지 않고 계속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겠지만 호현은 왠지 자신의 미래가 마냥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똑같이 슬플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열심히 살라고 말해주던 삼촌이 자신은 열심히 사는 것을 포기한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삼촌이 먹구름을 타고 하늘로 높이높이 사라졌던 날, 호현은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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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