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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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박선정이 강문희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벽을 보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희야. 괜찮아?”

 

몸을 살짝 말고서 이불을 뒤집어쓴 그 모습에 박선정은 조심스레 다가가며 물었다.

 

이어서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위로하듯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

선생님을 탈락시켰어도 사람만 바뀌지 결과는 같았을 거야.”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박선정 본인조차도 가슴에 응어리가 사라지질 않았으니까.

 

다만 자신에게는 화낼 자격이 없다며 어떻게든 스스로를 속일 뿐이었다.

 

정말로 울분을 토해내도 되는 사람은 백이란의 연인인 강문희밖에 없으리라.

 

머릿속으로 그렇게 여기기에 박선정은 자신이 받고 싶었던 만큼의 위로를 더욱 그녀에게 건네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어떻게든…….”

 

하지만 그것도 그저 그렇게 다짐만을 할 뿐이다.

 

다시금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서 박선정은 방을 나갔다.

 

“…미안해요, 언니.”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 강문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불 속에 파묻힌 몸이 움찔거렸다.

 

“흐윽…….”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신음이 새어나왔다.

 

만약 자신이 이 상황에 자위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그녀는 경멸할까.

 

당연히 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아내고 싶었다.

 

연인의 외도를 상상하며 흥분해버린다.

그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백이란에 대한 배신이었고, 또 그녀를 돕는 박선정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이 열기를 버틸 수가 없었다.

당장 식히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연신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강문희는 또 절정에 이르고야마는 것이었다.

 

 

1.

 

혀가 페니스를 휘감아오자 근질거리는 쾌감이 몰려든다.

 

개인실의 침대에 묶여 백이란은 여느 때처럼 범해지고 있었다.

 

“이건 제 거예요. 당장 비켜요…….”

“싫엇… 이란이는 내가 깨끗하게…….”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를 범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는 점.

 

박루미는 성란과 경쟁하듯 페니스에 달라붙어 얼굴로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마와 뺨을 맞댄 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겠다는 듯이 격렬히 물고빤다.

 

“흐윽… 은하야, 제발 말려줘…….”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언니들한테 이야기해야지.”

 

백은하는 싸움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인지 오빠를 묶어두기만 하고

옆의 의자에 앉아 키득대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녀도 절대 두 사람이 멈추란다고 멈출 양반들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우읍…!”

“앗…….”

 

그러다가 결국 힘싸움에서 이긴 성란의 입이 쩍 벌어져선 귀두를 삼켰다.

여태까지 방해받은 만큼을 보상받겠다는 의지인지 뺨을 오므리며 격하게 빨아들인다.

 

박루미는 잠시 실의에 빠진 눈빛을 하다가도

그 이상 삼키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장대를 옆에서부터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

 

한계까지 자지를 삼키고 그 맛을 만끽하려던 성란은 사이에 끼어든 박루미의 얼굴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짓곤 페니스를 문 채로 고개를 홱 젖혔다가 입을 떼었다.

 

“으?!”

 

그녀의 인도에 따라 잠시 젖혀진 페니스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탄력에 박루미는 코를 얻어맞고 고개가 넘어갔다.

 

셋이 올라타기에는 명백히 좁은 침대였기에 가장자리에 반쯤 매달리듯 엎드려있던 그녀가 아래로 우당탕 떨어졌다.

 

방해꾼의 일시적 퇴장을 확인하고서 성란은 만족스러운 듯이 다시 백이란의 페니스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박루미는 금세 벌떡 일어서서는 다시금 달려들었다.

 

그녀는 입 안 가득히 백이란을 맛보고 있던 성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고는 마구 밀친다.

 

그 모습에 성란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한 방 더 먹여줘야 되겠다 싶어서 고개를 기울이며 페니스를 주욱 당기자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어깨를 흠칫 떠는 박루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윽고 눈을 살포시 감더니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턱을 살짝 내밀었다.

 

“…….”

 

당당한 모습에 조금 당황하여 성란이 가만히 굳어있자 박루미는 슬쩍 실눈을 뜬다.

뺨은 앞으로 찾아올 일에 대한 기대로 불그스름했고 그 눈동자에는 황홀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성란은 가슴속의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흐앗?!”

“서, 성란아?!”

 

박루미의 머리채를 붙잡은 것은 그야말로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이번 행동에는 백이란도 깜짝 놀라 성란을 불렀다.

 

오늘 하루 종일 백이란을 두고 경쟁을 하면서도 밀치는 것 이상의 폭력은 쓰지 않던 두 사람이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눈앞에서 치고받고 싸우지 못할 것은 없었으나

그런 일을 벌였다간 백이란의 물건이 죽어버릴 게 뻔했기에 맺어진 암묵적 합의였다.

 

안 그래도 그녀들은 백이란을 강제로 흥분시켜 발기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조금이라도 그의 흥분이 가실 일은 가능한 자제하려고 했다.

 

…짜증난답시고 백은하가 창을 던진 단 하나의 예외만 제외하면 아무튼 그러했다.

 

“좋아요? 이런 게 좋냐고요.”

“하으으… 이란이 냄새…….”

 

하지만 뒤이어 성란이 취한 행동이 백이란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물고 있던 백이란의 페니스를 뱉어내더니 박루미의 얼굴을 억지로 거기에 문질러댄 것이었다.

 

“하, 역시 성란이 언니 새디스트끼가 좀 있다니까요. 오빠 괴롭히는 것도 무지 좋아하고.”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오직 백은하만이 유유히 턱을 괴고 감상할 뿐이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면서도 정작 지금 상황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백이란이 그쪽을 바라볼 새도 없이 쾌감이 몰려들었다.

 

성란은 한쪽 손으로 페니스를 잡아 고정하더니 박루미의 벌어진 입으로 쑤셔넣었다.

 

목젖에 닿았는지 가볍게 헛구역질을 하지만 성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뒤통수를 눌러댄다.

 

뒤이어 그 상태로 붙잡은 머리를 마구 앞뒤로 흔들었다.

박루미의 입가로 새어나온 침이 페니스를 타고 백이란의 허벅지에 뚝뚝 떨어진다.

 

성란은 날카롭게 쏘아보며 자비 없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차가운 눈매와 다르게 그 눈동자에는 뜨거운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저기요. 어때요? 어떠냐고요.”

“우읍, 욱…….”

 

박루미도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지만 정작 표정은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 했다.

 

안 그래도 계속 자극을 받아온 상태였는데 장본인의 몸을 신경 쓰지 않는 격한 애무에

백이란은 결국 금세 왈칵 정액을 토해내고 만다.

 

“후하…….”

 

백이란이 허리를 움찔대기를 멈춘 걸 확인하고서 성란은 박루미의 머리를 끌어내었다.

아직 조금 남아있던 정액이 흘러나와 페니스를 따라 주르르 한 방울 내려온다.

 

입 안 가득히 정액을 채우고서 겨우 제대로 된 호흡을 허락받은 박루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놔요 그거.”

“읍.”

 

성란은 여전히 박루미의 머리를 붙잡은 상태로 자기 얼굴 앞까지 당겨온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넘겨주지 않겠다는 양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당장 안 벌려요?”

 

탁.

박루미의 턱이 성란의 반대쪽 손에 붙잡힌다.

 

“우우, 으……!”

 

그 상태로 양쪽 볼을 꾹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고는 거기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성란이었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는 듯이 혀로 입 안을 마구 더듬는다.

 

이윽고 입을 떼어내자 두 입술 사이에 희끗한 실이 주욱 늘어지다가

마침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시트에 툭 떨어진다.

 

“흥, 건방지게 감히 반항을 해요?”

“내 거, 내 거였는데…….”

“불만 있으면 힘을 기르시든가… 아, 잠깐! 뭐하는 거예요!”

 

박루미는 반쯤 울상이 되어 있다가 기회다 싶었는지 갑자기 우다다 기어서 백이란 위에 올라탄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성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윽?!”

“하으으, 들어왔다아…….”

 

전혀 기다림이라곤 없이 곧장 허리를 아래로 내리는 박루미였다.

이미 질척질척하게 젖은 질이 페니스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허리를 쭉 편 채로 그 여운을 느끼며 움찔대는 그녀였다.

뒤늦게 성란이 붙잡으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후힛, 이란아. 이란아…….”


박루미는 이내 백이란을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질퍽이는 물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름이 훑어오는 쾌감에 백이란의 신음성이 새어나온다.

 

황홀한 광기에 물든 표정으로 박루미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적대었다.

 

“사랑해. 이란아, 사랑… 흐야앗?!”

 

그러다가도 갑자기 백이란을 안은 팔에 꽉 힘이 들어가며 몸을 부들부들 떤다.

 

뻣뻣하게 고개를 삐그덕 돌리면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갖다댄 성란의 모습이 보였다.

 

“흐윽, 거기, 더럽…….”

“닥치세요. 저보다 먼저 달려든 버릇을 고쳐드릴 테니까.”

 

단순히 볼기짝에 손을 얹는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항문을 살살 간질이고 있었다.

 

입구를 주물주물 문지르던 성란은 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와 핥으며 가볍게 적셨다.

하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린다.

 

“아 그렇지. 이게 있었죠?”

 

그러다가 침대 옆에 놓인 바구니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져왔다.

 

“듣기로는 이거 당신이 구매했던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 잠깐마안… 안 그래도 이란이 거 기분 좋아서 위험한데…….”

“제가 알 바에요?”

 

분홍색 플라스틱 통에 담긴 러브젤.

박루미가 탈락하기 전에 오나홀과 함께 구매했던 물건이었다.

 

“자, 힘 빼세요.”

“흐윽, 흐아아앙…!”

 

이내 오직 윤활만을 위해 만들어진 액체로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이 항문을 파고들었다.

 

쾌감과 불쾌감, 이질감이 뒤섞인 그 감각에 박루미는 허리를 활처럼 구부렸다.

그 여파로 질내가 더욱 조여와 백이란 역시 가냘프게 신음을 흘린다.

 

“히익, 이거 기분 이상해앳…….”

“그러라고 하는 건데요. 설마 행복하라고 해주는 거겠어요? 아님 혹시 이런 걸로 느끼시나?”

“몰라앗, 흐윽, 안쪽이 쿵쿵…….”

“얼른 끝내고 그 자리 저에게 넘기란 말이에요.”

 

절로 입이 벌어지고 고개를 치들었다.

입가에서 주르르 침이 흘러나오고 시야가 자꾸만 흔들렸다.

 

“이 정도로 풀렸으면 두 개도 들어가겠는데요?”

 

이미 언어중추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떡 벌어진 입에서 그저 이상한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우와, 이거 혹시 이란 씨 자지에요? 방금 벽 너머로 닿은 거 같은데!”

 

구불구불 장내를 더듬는 손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쾌락을 탐하며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들기만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흐으으윽…!”

 

그리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이 스쳐지나간 순간 전신이 움츠러드는 열락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그것과 함께 잔쯕 조여든 질내의 자극에 백이란도 다시금 정액을 토해내고 만다.

 

“…어머, 조금 과했으려나요.”

 

박루미는 허리를 파들파들 떠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눈을 까뒤집고 뒤로 풀썩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백이란이었으나 성란이 박루미의 어깨를 붙잡아선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어디 부딪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다행이라며 백이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양 어깨가 짓눌린다.

누워있는 백이란의 몸 위에 손을 얹으며 성란이 무게중심을 실은 탓이다.

 

“뭘 다 끝난 것처럼 한숨을 쉬는 건가요?”

 

싸늘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성란의 날카로운 시선이 찾아와 전신에 오한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라고요?”

 

요염한 악마의 모습으로 그녀는 입으로만 활짝 웃었다.

 

 

2.

 

방문이 열리자 이시연은 그쪽을 흘끗 보더니 물었다.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커피랑 녹차 중에 뭐가 좋니?”

“어, 글쎄요. 그나마 커피?”

 

불청객이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날아든 질문에 백은하는 조금 당황하며 답했다.

 

“다행이구나. 커피는 있단다.”

 

그리 말하며 생수통을 따 커피포트에 따르기 시작하는 이시연의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백은하였다.

 

“제가 올 거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런데 왜 커피가?”

“…너도 사회에 나가보면 아마 커피를 입에 달고 살 거란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잔혹한 어른 사회의 편린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백은하는 피식 웃고야 만다.

 

“표정 보니까 짧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맞니?”

“네, 아마도?”

“그럼 일단 와서 앉으렴.”

 

이내 이시연은 침대에 풀썩 앉아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굳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백은하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슬슬 방문 잠길 시간인데 무슨 일이니?

혹시 제정하고 싶은 규칙이 있다면 잘못 왔단다. 탈락자 투표 당일은 규칙 제정이 없으니까.”

 

시간도 늦은 데다 개인실이라서 그런지 이시연은 평소와 다르게 비녀를 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백은하에게 날아와 꽂힌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애초에 만약 오늘 규칙 제정을 할 수 있었더라도 제안자는 백이란의 차례였다.

 

“그러면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다른 진영의 두 사람이 모이면 뭐겠어요?”

“배신하려고? 아님 나더러 배신하라는 거니?”

 

빙빙 돌리지도 않고 바로 직구를 꽂아버리는 이시연이었다.

 

그 말에 백은하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만다.

 

“아뇨,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는 건가요? 거래에요, 거래.”

“어머나, 나는 완전히 음습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지 뭐니.”

“뭐어… 관점에 따라서는 배신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말이죠.”

 

아니, 분명 다른 탈락자 두 명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배신이라고 길길이 날뛰겠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해 백은하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거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운을 띄우는지 모르겠구나.”

“선생님이 가장 원하시는 걸 드릴 생각이에요.”

“그러니? 그럼 다음 탈락자 투표 개시나 도와주렴. 난 그랬으면 좋겠거든.”

 

너무 당당하게 가장 원하는 걸 주겠다고 하기에 이시연은 살짝 심술을 섞어 말했다.

 

원래 무언가 거래를 할 때는 상품을 더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게 기본이래도

저런 말은 허세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네, 좋아요.”

“……뭐?”

 

그러나 이윽고 돌아온 대답이 너무나도 의외의 것이었기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내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는 했니? 다른 탈락자들을 붙잡아달라는 소리인데?”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리 답한 거고요.”

 

백은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였다.

 

“대신 그렇게 하는 건 사흘 뒤에요.”

“…거기까지 해준다니 대체 나에게 뭘 부탁할지 감이 안 잡히는구나.”

 

이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던 탓이다.

 

사실 그녀는 엄밀히 말하자면 타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 특기라기보단

룰이 정해진 게임에서 상대의 플레이 스타일을 분석하고 수를 읽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요컨대 합리적인 관점에서 상대가 어떤 수를 최선이라고 생각할까를 알아내는 것이 그녀의 장기였다.

 

“다음 투표가 열리면 아마 선정이가 탈락할 거란다.”

“그것도 알아요.”

“그 아이가 탈락하면 너희들을 방해할 테고, 그러면 또 그 다음 투표는 거의 확정이겠지.”

“네, 그렇게 되려나요.”

“…그러면 게임이 끝나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상대가 합리에서 과하게 벗어난 행동을 취하는 경우엔 얼어버리고 마는 것이 그녀였다.

 

“후우, 일단 들어나보자. 그 대가로 바라는 게 뭐니?”

“선생님의 능력으로 만든 약을 잔뜩 주셨으면 해요.”

 

타액이든 혈액이든, 아니면 다른 체액이든… 백은하는 그렇게 덧붙였다.

 

“…정말로 그거면 되니?”

 

그 제안을 듣자 더욱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시연의 능력은 꽤 강한 편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는 진한 미약은 당연히 여러 플레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약물섹스를 위해서 게임을 끝내는 선택을 한다?

 

이 게임이 끝나면 백이란은 완전히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당연히 그 누군가가 탈락자 중에는 있을 리 없다.

 

백은하도 탈락자의 일원인 이상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는 여길 수 없었다.

 

“의심되시나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그녀에게 백은하는 비릿한 웃음으로 말을 잇는다.

 

“그럼 목적도 말씀드릴게요. 저는 선정이 언니를 부숴버릴 작정이에요.”

 

또박또박 말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망가진 언니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당연히 투표함을 막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최후의 투표도 비교적 편하게 막아낼 수 있겠죠?”

 

즉, 그녀는 선언한 셈이다.

 

─앞으로 사흘 내에 박선정의 신념을 망가뜨리겠다고.

 

“상대편에게 해줄 말은 아니지만, 너무 무모하지 않니?”

“글쎄요. 하고 싶은 일은 일단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합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은하의 지금 행동은 완전히 사적인 감정으로 범벅된 것이었으니까.


분명 박선정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백은하의 눈빛에서는 그녀를 향한 적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실패한다면 게임은 끝나버릴 테고, 그녀들의 향락도 함께 끝이 난다.

 

“…약속, 지키렴.”

 

이시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백은하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꺾으려는 박선정의 신념은 강문희와 백이란을 지켜내려는 마음이었다.

 

분명 박선정이 그를 범하도록 만들리라.

그걸 위해서라도 백은하는 그녀를 탈락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감돌다가 문에서 비프음이 들려왔다.

밤 시간이 되어 문이 잠겼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으, 조금만 더 말을 빨리 할 걸 그랬나요.”

“오늘은 자고 가렴.”

“고마워요 선생님.”

 

아마도 이 게임 최고로 최악일 동맹이 선사되는 순간이었다.

 

적과의 동침을 받아들이며 이시연은 피로감에 살포시 하품을 내쉬었다.


달칵. 물을 다 끓인 커피포트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